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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녹색글 은 1997년 일기장을 컴퓨터로 옮길 때 기억을 더듬어 쓴 나(어른)의 설명 글입니다.
1978년 10월 1일 일요일
국군의 날이다.
일찍 일어나서 먼저 태극기를 게양하고, 마당을 쓸었다.
오늘은 안계장날이다.
먹과 붓발을 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안계장에 갔다.
내가 사러 가는 집은 물건을 앞에 진열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먹은 300원, 붓발은 하나에 250원 이었다.
붓발은 2개, 먹은 한 개 샀다.
이 상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많은 물건들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살 수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어린이라고 물건값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그 증거로 류 선생님도 나와 똑 같은 먹을 며칠 전에 샀는데 300원에 샀다고 하셨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 외에도 시장 구석구석을 두루 살펴보았다. 없는 것이 없었다.
옷, 그릇, 끈, 신, 닭, 돼지, 소, 염소, 음식……,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오늘은 기분이 좋다.
장날은 사람들 모습이 활기차서 좋다.
1978년 10월 2일 월요일
아침부터 고구마를 캤다.
고구마를 캘 때는 우리 식구들이 몽땅 참가한다. 일을 못하는 세호도 고구마 캐는 날만은 밭에 따라와서 같이 장난을 친다. 그리고 고구마 캘 때는 나 같은 아이들이 일하기 싫어서 딴전을 부리는 일은 절대 없다. 고구마 캐는 일은 재미있기도 하고, 고구마는 지금부터 겨울 내내 우리 아이들의 특별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한 포기에 큰 고구마가 5개는 열려 있었다. 호미로 한 포기를 캘 때마다 붉은 고구마가 여러 개 나오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도시락 반찬 한다며, 고구마 줄기를 하나씩 뜯어서 모으고 계셨다. 또 큰 줄기는 우리가 캐기 편하도록 낫으로 잘라 주셨다.
캘수록 더 재미났다. 이렇게 굵은 고구마가 많이 나오는 것은 다 부모님께서 열심히 가꾼 덕택이다.
"올해는 고구마가 많이 열렸네. 비가 자주 와서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인 것을 천행으로 돌리신다.
아버지께서는 중간중간에 아주 좋은 고구마를 약 50개정도 골랐다. 특히 너무 크거나 작지 않으면서도 그 중에서도 빨간 색이 강하게 도는 고구마는 다음해 씨를 하기 위해 골라 두셨다.
고구마를 다 캔 후에 가마니에 담으니 2가마니가 넘었다.
올해는 적게 심어서 그렇지 평균적으로 따지면 작년이나 남들 집보다 더 많다.
집에 와서는 오늘 캐다가 호미에 찍혀 다친 고구마를 삶아 먹었다.
맛 또한 일품이었다.
모두가 부모님 은혜로 돌리고 감사해야지.
1978년 10월 3일 화요일
개천절이다. 오늘도 태극기를 달았다.
그런데 오후에 태극기를 내릴 때가 되어서는 나는 밖으로 놀러갔다.
밖에서 실컷 놀다가 집에 돌아오니 좀 컴컴했다. 내가 들어온 것을 본 세란이는
"오빠 빨리 태극기 내려야지."
"아직 안 내렸나?"
"나는 키가 작아서 어찌 내리나."
"아직까지 국기를 안 내리다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얼른 대문 쪽을 보았다.
태극기가 없었다.
"벌써 큰오빠가 내렸네. 속았지롱."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그렇지만 달 때는 내가 달았는데, 내리지는 못 했으니 태극기에게 미안하였다.
내가 국기에 대한 정신 자세가 아직 덜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는 꼭 내가 달고 내가 내려야겠다.
1978년 10월 4일 수요일
선생님께서 여행에서 돌아오셨다.
아침 1교시가 시작되자 선생님께서는
"내가 약 1주일 동안 경남, 전라남도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남해안의 모든 것을 구경하면서 산지식을 얻었다. 경험한 이야기는 우리 교과서에서 관련될 때마다 이야기 해주겠다."
나는 선생님께서 지금 모든 것을 이야기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가지, 이번에는 나 혼자만 빼꼼이 갔다왔는데 가을 추수가 끝나면 5, 6학년 전원이 대구로, 경주로, 포항으로 수학여행을 갔다올 예정이다. 그 비용은 1인당 약 3000원씩을 내야할 거다. 차를 한 대 대절해서 당일로 갔다올 예정이다. 집에서 여행가라고 돈을 줄 것 같은 사람은 손들어 봐요."
그랬더니 몇 명만 안 들고, 나머지는 거의 다 손을 들었다.[1]
나도 손을 들었다.
기분이 좋다.
"빨리 우리도 그럴 때가 왔으면 좋겠다."
모든 아이들이 흥분되어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걱정이 된다. 과연 우리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까?
[1] 막상 나중에는 수학여행비를 내는 학생이 없어서 결국은 선생님의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1978년 10월 5일 목요일
오늘도 해가 질 때까지 자료실에서 붓글씨를 썼다.
이렇게 늦도록 연습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오면, 또 나에게 마당을 쓸어라, 소죽을 퍼주어라 하고 매일 일을 시킨다.
오늘도 늦게까지 연습을 하고 돌아오니 또 일을 시켰다. 책가방도 풀기 전에 형이
"세억이 너는 외양간에 소를 갖다 매고, 빨리 소죽 퍼주어라."
형이 미웠다.
"그런 일쯤은 형이 좀 하면 어때서. 이렇게 늦게 왔는데 꼭 일을 시켜야겠어?"
나는 반항을 했다. 그러자 형은
"너만 늦게 온 줄 알아? 나도 조금 전에 와서 오자마자 소죽까지 끓여 놓았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뉘우치게 되었다.
'그렇다. 형도 이제 학교에서 금방 돌아와서 소죽을 끓였는데, 난 그것보다 더 쉬운 일을 안 하다니….'
형도 나처럼 생각했는지 결국 먼저 소죽을 퍼대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얼른 소를 몰아 외양간 안에 매었다.
"진작 좀 하지."
하며 형은 씨익 웃는다.
나도 같이 웃었다.
앞으로는 형 말을 잘 듣고, 내 스스로 일을 해야겠다.
1978년 10월 6일 금요일
저녁에는 오늘 낮에 타작한 나락을 광에 갖다 넣었다.
먼저 마당에 가득 쌓여 있는 벼를 가마니에 가득 넣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가마니를 혼자서 버쩍버쩍 들고 광까지 왔다갔다 하셨다.[1]
나와 형은 가마니를 같이 들었다. 형은 힘이 세어 혼자서도 가마니를 들 수 있지만, 나는 형이 가마니를 들 때 같이 들었다. 나는 무겁지가 않았으나, 형은 그래도 무겁다고 했다.
이렇게 한 가마니씩 갖다 나르다보니 드디어 마당에는 한 알의 벼도 볼 수 없었다.
어머니께선
"이제 세익이, 세억이 다 컸다. 가마니를 하나씩 들고 다니는 것을 보니."
"뭘, 고등학생인데 그 정도는 들어야지."
하며 형은 힘 자랑을 하지 않았다.
"엄마, 나도 힘세지?"
나도 덩달아 힘이 난다. 오늘처럼 앞으로도 힘을 세게 쓸 수 있다면 어떤 적도 두렵지 않다.
내가 이렇게 힘이 세어지기까지는 부모님의 크나큰 정성이 담겨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를 뽐내려고 했다.
부모님께 고맙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1] 요즘 아버지께서 이 일기를 보시면 어떻게 생각 하실까? 아마도 인생이 참 덧없다고 생각하실 거다.
1978년 10월 7일 토요일
선생님께서는 출장 가시고, 우리 6학년은 오늘 하루 자습을 해야했다.
첫째, 둘째 시간에는 공부를 하였고, 셋째 시간부터는 우리끼리 편을 갈라서 축구를 했다.
가위 바위 보로 해서 나는 이긴 편에 속했다.
드디어 경기는 시작되었다.
셋째 시간을 전반, 넷째 시간을 후반으로 해서 하기로 했다.
전반에는 내가 고울키파를 했다. 그러나 내가 공을 만진 적은 몇 번 없었고, 저쪽 편에서만 공이 놀았다.
드디어 우리편 용구가 한 골을 넣어 1-0 이 되었다. 그 후 전반이 끝났다.
넷째 시간이 되어 후반이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이번에는 나도 공격을 하였다. 대신 만연이가 고울키파를 했다.
결정적인 찬스가 나에게 오자 드디어 나도 한 골을 넣었다. 2-0.
또 잠시 후에 내가 한 골을 넣었다. 3-0.
또 내가 한 골. 4-0.
나는 신들린 것처럼 골인을 넣었다. 재미가 난다.
경기가 끝나갈 무렵 병구가 마지막으로 한 골을 넣어 5-0 이 되었다.
오늘 축구를 하기 전에 편을 가를 때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공평하게 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편에는 잘 하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우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이겼다.
우리편은 물론 재미가 있었지만, 상대편은 두 시간 동안 지겨워 혼났을 것이다.
오늘 이 일을 보면 어떤 일에 있어서 실력뿐만 아니라 운수도 때로는 많이 작용하는 것 같다.
1978년 10월 8일 일요일
아침을 먹고는 큰집에 가보았다.
마침 큰집 할머니께서 아침 식사를 하시는 중이었다.
"여기 와서 밥 좀 먹어라."
"저는 이제 금방 먹었어요."
이렇게 할머니와 나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놈아, 간혹 우리 집에 와서 저기 달린 감이라도 좀 따 주지 않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
하며 인자하게 나에게 꾸중을 하셨다.
"그런 게 아니고요, 22일 날 대구에 붓글씨 대회를 나가야 해요. 그래서 매일 늦게까지 연습하느라 집에 오면 저녁 먹기 바빠요."
나는 여태껏 큰할머니께 무심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 알겠다. 오늘은 이왕 온 김에 저 감들을 좀 따주고 가거라. 노인네가 딸 수가 있어야지."
"예."
나는 잽싸게 감나무로 올라갔다. 매년 안방처럼 드나들던 감나무라 꼭대기에 올라가도 어느 가지가 튼튼하고, 어느 가지가 약한지 다 알고 있었다.
금방 한 광주리를 땄다. 할머니께서는 고맙다며 감 20개를 주셨다. 형, 동생들과 나눠 먹으라고 하셨다.
후회가 된다. 아무리 내가 바빠도 학교 갔다와서는 매일 큰집에 한 번씩 들러야 했는데……. 할머니께서는 혼자 사시기 때문에 무척 적적하실 거다.
1978년 10월 9일 월요일
한글날이다. 시월은 노는 날이 많아서 좋다.
한글은 조선시대 제4대 임금인 세종 대왕께서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을 더욱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자료들을 모으기로 했다.
먼저 국어 소사전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세종 대왕 - 조선 4대 임금. 업적은 한글을 창제했다' 처럼 누구라도 아는 사실만 나왔다.
'어디 좋은 자료가 없을까?'
아무래도 우리 집에는 국어 소사전 이상의 자료가 없는 것 같다.
지난 언젠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도시에 가면 큰 도서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온갖 자료가 매우 많다고 하셨다. 나는 도서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마음 같아서는 그런 곳에라도 가보고 싶었다.
'옳지! 학급 문고에 '세종 대왕'이라는 책이 있지. 바보같이 왜 진작에 그런 생각을 못했지? 그런데 여태껏 나는 그런 책도 안 읽고 뭐 했지? 읽어보았더라면 오늘 일은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 텐데. 에이 나는 바보, 게으름뱅이야. 내일은 학교 가자마자 꼭 읽어야지.'
오늘 일을 생각하면, 시골에도 도시처럼 도서관처럼 생긴 자료 창고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도시에는 그런 창고가 많아서 아이들이 시골 아이들보다 공부를 더 잘 하는 것 같다.
시골에도 그런 창고가 많다면 도시로 이사가는 집들이 줄어들 텐데…….
1978년 10월 10일 화요일
첫째 시간이 시작되자 선생님께서는,
"오는 12일 날 우리 학교에서는 가을 소풍을 가기로 했어요. 그리고 13, 14, 15일 날은 가정 실습으로 하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올해의 가정 실습과 모든 행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오늘 둘째 시간부터는 9월 말 학력고사를 실시할 테니 첫째 시간에는 시험 공부해라."
잘 나가다가 갑자기 시험 이야기를 하시는 바람에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걱정이 되었다. 여태껏 화랑문화제 붓글씨 때문에 9월 달에는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다.
둘째 시간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5학년 선생님께서 시험지를 들고 교실로 들어오셨다.
"너희들 공부 많이 했니?"
5학년 선생님의 이 말을 들으니, 나는 더 걱정이 되었다.
먼저, 국어 시험이다. 뒤에는 실과 문제 10개가 딸려 있었다. 문제가 어려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다음 시간에는 산수와 도덕, 다음에는 사회(국사)와 미술.
점심을 먹은 후 자연과 음악을 마지막으로 시험이 끝났다.
느낌이 이번에는 학력왕을 빼앗길 것 같다.
1978년 10월 11일 수요일
수업을 마친 후 선생님께서는
"어제 시험 친 결과를 보면, 6학년이 꼴찌다. 이것을 한 장씩 줄 테니 집에 가지고 가서 부모님 도장을 받아 오너라."
하시며 6학년 전체 아이들의 성적을 통계 낸 표를 주셨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유규가 1위다. 평균 86점.
나는 2등. 평균 82점.
그리고 지난번에 3등이었던 성진이가 이번에는 7등으로 많이 내려갔다. 아마 성진이도 붓글씨 때문일 것이다.
반성해 본다.
내 성적이 꼭 붓글씨 때문에 뒤진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가 꾸준히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붓글씨와 타작 등 다른 일들이 바빠서 공부에는 등한시했지만, 그것은 지금 와서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패자는 말이 없다고 형은 심심하면 이야기했는데, 그 말에 나도 동감이 간다.
1978년 10월 12일 목요일
즐거운 소풍날이다.
이번 소풍에서도 지난 봄 소풍 때와 같이 백일장을 하였다. 나는 역시 서예 부분을 선택했다.
목적지에 도달해서 30분 간 쉬고, 백일장을 시작했다.
서예에서는 이제 우리 학교에서는 나를 따라 올 사람이 없다. 그 동안 군대회 출전하고, 도대회 준비하느라 실력이 애송이는 지났다. 결과는 뻔했다.
4학년은 '가을 소풍', 5, 6학년은 '소풍은 즐거워'를 썼다.
나는 특선, 진달이가 가작, 입선은 성진이가 차지했다.
선생님들께서 등수를 결정할 때, 5학년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억이는 평가에서 제외하고, 다른 애들만 평가해서 상을 주어야겠다. 세억이는 프로라서 같이 평가하는 게 다른 애들한테 불공평해."
그러자 4학년 류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며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여태껏 저렇게 잘 쓰도록 지도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누가 마음대로 제외시키려고 해요. 세억이 저 녀석도 그 동안 고생했어요. 그 동안 노력해서 저렇게 잘 쓰는데, 당연히 특선받을 자격이 있지."
백일장이 끝난 후 준비한 도시락을 먹었다.
오후에는 기념 사진을 찍고, 재미나는 놀이도 많이 하였다.
이것이 국민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소풍이다.
1978년 10월 13일 금요일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는 또 타작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께서는 가정실습 기간을 맞추어 타작 날짜를 잡았다. 이번에는 3일 연속으로 타작을 한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소달구지로 들에서 계속 볏단을 실어다 날랐고, 할머니는 공상에 볏단을 올려놓는 일을 하였고, 세란이는 볏단을 푸는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발로 밟는 기계로 타작을 하셨다. 어머니께서 벼 알맹이를 떨어낸 후 생기는 볏짚을 묶는 일이 내가 맡은 일이었다. 어머니 혼자서 타작을 하니까 볏짚이 천천히 생겨 제때에 내가 묶을 수 있었다.
오전에는 그래도 재미가 나서 일하기가 좋았는데, 오후가 되자 힘이 들었다. 왜냐하면 오후부터는 아버지께서도 드디어 타작기계에 합류하여 어머니와 함께 벼를 떨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혼자서는 그렇게 빨리 생기는 볏짚을 다 묶을 수 없어 감당할 수 없었다.
"하필 이런 일만 나한테 시켜."
나는 짜증을 내었다.
"힘들지? 내가 이제부터는 묶을 테니 네가 엄마와 타작을 해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와 임무를 바꾸어 주셨다. 아버지는 많이 밀려 가득 쌓인 볏짚을 금방 다 묶으셨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일은 끝났다. 힘들었기는 했어도 보람은 있었다. 특히 오늘 내가 묶은 볏짚은 소중히 보관되어 겨울 내내 소먹이로 사용될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토요일이라 형이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서 타작하는 것이 오늘보다는 더 쉬울 것이다. 형이 없으니까 당장 나에게 힘든 일이 쏟아지는 것 같다. 형과 싸울 때는 밉지만, 이럴 때는 형이 소중함을 느낀다.
1978년 10월 14일 토요일
아침부터 타작을 했다.
어제는 짚단을 묶다가 애를 먹어서, 오늘은 아예 볏단을 풀어 공상 위에 올려놓는 일을 하였다. 짚단을 묶기보다는 볏단을 푸는 일이 더 쉬웠다.
오늘 타작하는 벼의 품종은 '노풍'이라는 것이다.
올해는 '노풍' 때문에 온 나라가 농사를 망쳤다고 시끄럽다. 요즘 TV와 라디오에는 '노풍' 때문에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었다고 자주 나온다. 우리 집에도 지금 타작하고 있는 이 '노풍'은 흉작이다. 어제 타작한 것은 수확이 많았는데, 오늘은 온전한 알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껍질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타작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노풍은 '박노풍'이라는 사람이 만든 신품종이고 올해 처음으로 나왔는데, 이 볍씨가 소출이 많다고 정부에서 농민들에게 권해서 전국에 안 퍼진 곳이 없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정부 말을 믿고 무조건 노풍으로 많이 심었는데,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 사람들이 올해는 볍씨를 잘못 선택해서 농사를 망쳤기 때문에 '박노풍'씨를 '박○풍'[1]이라고 부른 다더라."
"하하하."
아버지 말씀이 더 웃긴다.
"아버지, 그 사람은 자기가 발명했다고 자기 이름을 붙여서 망한 것 같아요. 품종이 '노풍'이니까 풍년이 아니지요. 볍씨 이름만 잘 생각했어도 그걸로 심지 않았을 텐데."
형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타작을 하니 시간이 잘 지나갔다.
우리 집에는 올해 노풍을 많이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1] 실제 일기장에는 ○ 안에 알만한 글자 하나가 기록되어 있으나 생략한다. 이 문장을 다시 읽어보니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1978년 10월 15일 일요일
아침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드니,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요즘은 왜 아이들이 일요일 아침에 조기청소를 안하지?"
난 말문이 막혔다.
"몰라요. 아이들이 요즘은 안 나와요."
우선 이렇게 변명을 했다.
"학생 아이들이 일요일에 한 번이나마 청소를 할 때는 동네가 깨끗하더니만, 요즘은 골목마다 엉망이더라. 특히 타작 철이라 볏짚 같은 게 너무 많더라. 어른들은 눈코 뜰새없이 바빠서 자기 앞길 청소도 못하는데 아이들이 좀 했으면 좋을 걸."
하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아까 아침에는 그냥 듣고 넘겨버렸지만, 지금 생각하니 내가 잘못한 게 많다. 요즘은 학교에서 조기청소를 챙기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1조 조장으로서 아이들을 설득해서라도 조기청소를 계속 진행했어야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챙기든 안 챙기든 간에 꾸준히 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챙기지 않으시면 안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의 나쁜 버릇이다.
1978년 10월 16일 월요일
이제는 운동회, 가을소풍, 가정실습이 끝나고, 6학년 동안의 큰 행사는 모두 끝이 났다. 오직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사실은 나에게는 운동회나 소풍보다 더 중요한 화랑문화제 도대회가 남았다. 사실은 지금부터가 더 바쁘다. 그래서 이번 달에도 공부를 할 시간이 없고, 내마음도 사실은 공부할 여유가 없다. 걱정이 된다.
'이번 달에도 또 학력왕을 못 차지하겠지?'
어떻게 되어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답답하다. 공부는 손에 안 잡히고.
'아니야, 이번 달에도 학력왕을 빼앗길 수는 없어. 열심히 해야 돼. 틈나는 대로 공부해서 이번에는 꼭 학력왕을 되찾아야 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겠다.
그래서 꼭…….
1978년 10월 17일 화요일
화랑문화제 도대회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집안일 도울라네, 공부할라네 정말 바쁘다.
오늘부터는 6교시를 마치고 해질 때까지 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학교에서 남아서 붓글씨 연습을 했다. 4학년 류 선생님께서 그렇게 시켰다. 저녁에는 선생님의 지도없이 나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연습을 해야한다.
저녁에 자료실에서 혼자서 연습을 하다가 잠시 공상에 잠겼다.
'내가 만약 도대회에서도 특선 또는 가작, 아니 입선이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누가 나에게 소감을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야지. 「선생님의 훌륭한 지도가 있었고, 스스로도 자료실에서 귀신과 함께 연습했습니다. 매우 기쁩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미래에 대한 생각이다. 정말 그렇게 될 지 모르겠다. 너무 부담을 가지지 말아야겠다. 올림픽처럼 그냥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어야겠다. 촌놈이 대도시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출세한 거니까.
괜히 귀신을 생각하는 바람에 학교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서 혼났다.
1978년 10월 18일 수요일
새벽 6시쯤 되어 일찍 일어났는데, 아버지께서
"세억아, 나는 바빠서 들에 나가봐야겠는데, 네가 아침 소죽을 끓여라."
하시며 들에 나가셨다.
짜증스럽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시키는지 모르겠다.
할 수 없이 소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하기가 싫은데 억지로 다 끓였다.
그 때 할머니께서
"세억아, 소죽 다 끓였으면 마당 한 번 쓸어라."
"에이 참, 나한테만 시켜."
결국 또 마당을 쓸었다.
"세억아, 밥 먹어라."
어머니께서 부르신다.
밥이 굉장히 맛있었다.
이제야 좋은 면을 알 만하다. 바쁜 일손도 도울 수 있고, 아침도 맛있어 건강해지고.
앞으로도 아침 일찍 일어나야겠다.
1978년 10월 19일 ∼ 10월 26일
10월 19일에서 26일까지는 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나름대로는 일기까지 쓰지 않을 만큼 심각했었는가 보다.
촌놈이 난생 처음으로 대구라는 대도시를 구경하고 와서는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 놓았을까 나 스스로도 내심 궁금했는데 그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기억에 의하면, 대구 시내 거리가 너무나 복잡해서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아서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도대회에서는 입상은 하지 못했다.
1978년 10월 27일 금요일
1교시를 마치고는 낙정국민학교에서 매년 개최되는 백일장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우리 6학년에서도 각 분야 별로 합쳐 약 10명이 참가하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출발하기 직전에야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 4명만 가고 나머지는 가지 말라고 우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4학년에서 4명, 5학년에서 6명, 총 14명이 참가하였다.
학교 뒷산으로 약 1시간 정도 산길을 걸어서 생송까지 가서 거기서는 다시 버스를 타고 낙정국민학교에 갔다. 비가 와서 나는 아예 슬리퍼를 신고 갔으나, 산을 넘을 때 옷까지 다 젖었다. 다른 학교 아이들은 모두 버스를 타고 와서 옷이 젖은 아이들이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당연히 6학년 서예부분에 참가하였다.
백일장이 시작되자 화선지를 두 장씩 주셨다. 쓰라는 글씨가 많이 연습한 것이라서 별로 연습을 안해도 되었다. 주어진 시간이 90분이라서 시간이 충분치 않아 화선지에 직접 쓰기 시작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속암국민학교 교장 선생님과 감독 선생님들, 그 외 각 학교 인솔 선생님들께서는 한입 모아 나를 칭찬하셨다. 감독 선생님께서는,
"너는 어디 학교에서 왔니?"
"팔등요."
"아, 네가 도대회에 출전한 바로 그 아이구나."
두 장을 써서 그 중 좋은 것을 한 장만 제출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는 특이한 것이 있었다. 작품에는 학교와 이름을 쓰지 말고 학년만 쓰라고 했다. 대신 제출할 때는 작품 귀퉁이에 제출번호만 연필로 쓰고, 다른 어떤 용지에 그 번호와 학교 이름, 성명을 함께 기록했다. 아마 공평한 심사를 위해서인 것 같았다.
붓글씨에서 자기의 이름을 쓰는 줄은 전체 구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공평한 심사를 위해서 그것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였다. 어차피 심사는 각 학교에서 오신 선생님들께서 하실 텐데, 그러면 선생님들께서는 양심적으로 평가를 안한다는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모든 선생님들이 만약 자기 학교 아이보다 남의 학교 아이가 더 잘 했으면 정직하게 남의 학교 아이들에게 점수를 더 많이 주실 것 같은데…….
백일장을 마치고 한참 기다리다니까 우리 학교 교감 선생님께서 결과를 알아오셨다. 등수에 든 것을 보면, 4학년 서예에서 최황백이가 1등, 5학년엔 없고, 6학년에서는 내가 1등, 성진이가 2등이라고 하셨다. 반면 그림과 글짓기에서는 어째 그렇게 잘했느냐고 농담하셨다.
오늘은 면내의 학생들이 모여 친선을 도모해서 뜻있는 하루였다.
그러나 붓글씨뿐만 아니라 그림, 글짓기에서도 작품을 제출할 때 학교명과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 한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1978년 10월 28일 토요일
오후에는 아이들과 길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데, 저쪽에서 진덕이네 어머니께서 수레를 끌고 올라오고 계셨다.
오르막이라서 좀 밀어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일부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와 몇몇 아이들만 진덕이네 집까지 밀어 주었다.
"얘들아, 고맙다. 가지 말고 거기 기다려라, 먹을 것을 좀 주지."
하시며 사과를 많이 내놓으셨다. 우리들은 한 개씩 먹고, 한 개씩은 각자 손에 들고 길에 다시 나왔다. 아까 놀던 아이들이 아직도 놀고 있었다.
"약 오르지롱, 사과 좀 줄까?"
우리들은 사과를 내보이면서 자랑을 하였다. 그제야 그 아이들도,
"우리도 밀어 줄 걸."
하며 후회를 했다.
내가 보기에는 밀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못 먹게 되어서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들은 반씩 쪼개서 그 아이들에게 주었다.
오늘은 착한 일도 하고, 사과도 먹었다.
도랑 치고 가재 잡았다.
앞으로도 힘들거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겠다.
1978년 10월 30일 월요일
아침 등교하는 길에 교문에 다다르자 교문 양쪽에 적힌 글씨가 변해 있었다.
지난 토요일까지만 해도 왼쪽 기둥에는 '국어사랑', 오른쪽에는 '나라사랑'으로 적혀 있었는데, 오늘은 '국어사랑'과 '자연보호'로 변해 있었다.
등교하는 아이들은 모두 한마디씩 하였다.
"어, 변신했네."
'왜 바꾸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 후 터득한 게 있었다.
국어 사랑을 하면 자연히 나라 사랑이 되고, 자연 보호도 해야 나라 사랑이 된다. 그래서 둘 다 강조하기 위해 아예 다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교문에 기둥이 하나 더 있다면 중간 기둥에는 '나라사랑'을 썼을 것이다.
내 생각이 확실한지 모르겠지만, 아마 맞을 거다.
선생님께 여쭈어 보아야겠다.
1978년 10월 31일 화요일
오늘로서 10월이 마지막이고, 내일부터는 11월이다.
이번 시월에는 무엇을 했던가! 죽 생각해 본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2일 날 대구에 갔다 온 것이고, 또 한 달 내내 그것을 준비한 일이다. 그리고 월말고사도 생각보다는 잘 치렀다.
내 개인적으로 보아서는 많은 경험을 했지만, 부모님께는 한 일이 극히 적다.
다음 달의 계획을 세워 본다.
첫째, 물론 공부다. 그 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거의 손을 못 대어 학력이 많이 떨어졌다.
둘째로는 몸 건강에 신경 써야겠다. 지금 나는 굉장히 약한 편이다.
셋째로,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
오늘 세운 이 계획을 다음 달에는 꼭 이행하겠다. 그래야만 국민학교 생활이 잘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