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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승휴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로 호를 동안거사(動安居士)라 했다. 1252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관직에 나섰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한동안 삼척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몽고와의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삼별초에 사로잡혔다가 도망하기도 하였으며, 서장관으로 원의 대도에 다녀오기도 했다.
충청도안렴사로 있을 때에 장리를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좌천되었으며, 이후 삼척의 구동에서 은거하였다. 이 시기에 『제왕운기』를 저술했다.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내전록』을 저술하기도 했다.
2.공민왕릉
공민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서기 1365년-1374년 사이의 고려시대 왕릉이다. 2기의 무덤을 동서로 나란히 세워 쌍릉형식으로 만든 이 무덤은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 현릉(서쪽의 것)과 왕비(노국 공주)의 무덤 정릉(동쪽의 것)으로 이루어졌다.
동, 서, 북 세 벽면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12지신상 벽화가 각각 4상씩 배치되어 있다. 12지신상이 벽화는 도굴로 하나가 훼손돼 지금은 11개만 남아 있다. 봉분의 높이는 6.5m이고 각 봉분에는 12각의 병풍석을 돌리고 12지신상과 연꽃무늬를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현실의 크기는 약3m의 사각형이고 높이는 2.29m이다. 연도는 길이 9.1m, 폭2.04m 높이 1.82m로 비교적 넓은 편이다. 공민왕은 1365년 왕비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애통하여 9년동안 자신이 직접 주관하여 방대한 조영사업을 하였다.
12지신상들은 양관을 쓰고, 바지·저고리를 입는다. 중단을 입는다. 직령 교임식의 대수상의를 입는다. 하상을 상의 위에 둘러서 입는다. 폐슬을 하상위에 두른다. 방심곡령을 한다. 후수를 혁대에 걸어 등 뒤에 느린다. 상아홀을 든다. 말과 리를 신었다.
3.해인사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800-809)때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순응(順應)과 이정이 가야산에서 정진하다 창건에 착수했으며 순응의 뒤를 이어 이정(利貞)이 완성했다고 한다. 고려 태조 때 희랑이 중창하여 고려의 국찰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8년 강화로부터 한양을 거쳐 팔만대장경을 이곳으로 이안하였고 세조 때 장경각을 확대 개수하였다.
인사의 해인은 화엄경 중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으로 화엄의 철학과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 도량이다. 통도사(불보사찰) 송광사(승보사찰)와 더불어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선원, 강원, 율원을 함께 갖춘 총림이며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학승으로 유명한 곳이다.
해인사 국가 문화재로는 국보 제32호이자 정교한 목판본으로 유명한 팔만대장경과 국보 제52호장경판전, 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보물 제222호 치인리 마애불입상, 보물 제264호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734호 고려각판, 보물 제999호 목조희랑대사상 ,보물 제128호 반야사 원경왕사비, 보물 제1242호 해인사 길상탑, 보물 제1300호 해인사 홍제암, 보물 제1301호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보물 제518호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공간이다.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던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는 사명대사 선수희언 각성 등이 있다, 또한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 희랑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부설기관으로 1993년에 설립한 장경연구소가 있어 불교경전의 디지털화 사업에 새로운 모범을 보이고 있다.
4.봉정사 극락전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 중 최고(最古)의 건물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극락전 해체 보수공사 때에 1625(인조3)에 작성한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이 상량문은 '천계 5년 3월'에 중수하면서 작성한 공사 기록인데, '前中創至正 二十三年 癸卯 三月日'이라는 구절이 있다. 중창은 중창(重創)을 의미하며 지정 23년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가 개창하였다 하였으므로 상량문의 신라 때에 창건은 이를 가리킨다. 공민왕 12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은 이보다 오래 전에 이미 건물이 조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갑석을 올리고 크기가 다른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이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다. 공포는 외 1출목 주삼포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가구는 9량가인데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고주 2본이 뒤쪽에 있다. 그러나 평주상의 대량과 퇴량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높이로 만들어진 특색을 보인다. 다른 법당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대량은 단면이 청자매병의 윤곽을 연상시킨다. 굵지않은 목재를 홍량으로 다듬어 걸었는데 이로 인하여 중첩하는 부재가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맛을 덜고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방전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 뒤 다포식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집을 마련하였다.
극락전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고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 있는 점,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점차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에는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여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 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다. 단지 불단에는 높이 100cm정돈인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불단의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 우 협시보살인 고나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高宗)37년인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는 가로 195cm, 세로176cm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5cm폭의 흰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그려 전체적으로는 아미타불의 관배를 감싸듯이 배치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 탱화의 표현 기법은 본존불의 경우에는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상체보다 두부(頭部)를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까지 들어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었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왼손은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는데 손가락 끝이 뾰족하지만 우아한 곡선미를 간직하고 있다. 광배는 원형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그렸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은 본존불을 향하여 약간 틀어 앉은 자세를 취하고 머리에는 화불(化佛)이 그려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왼손은 연꽃 줄기를 잡고 있다. 우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칭되는 자세를 취하고 보관(寶冠)에 보병(寶甁)을 표시하고 경책을 받쳐들고 있다. 본존불의 두광 좌 우에 합장한 아난과 가섭존자가 상반신만 표현되어 있고, 그 위로 화면의 여백없이 구름을 화려하게 그렸으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광선을 그려넣었다. 화면 하단 중앙에도 한덩이 구름을 그려서 아미타여래가 극락세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5.성리학자
안향과 이제현을 거쳐 고려로
성리학은 충렬왕 때 처음으로 고려에 도입되어 이제현 등의 제자를 길러내게 되면서 성리학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들은 성리학을 통해 무신집권기를 거치면서 침체된 유학을 되살리고 고려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문제점들을 개혁하는 이념적인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세력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온건한 개혁과 불교 비판
성리학자들은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왕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덕을 닦을 것을 강조하고 고려사회의 문제점들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것은 기존의 것을 잘 보완, 관리해서 지켜나가자는 온건한 것이었다. 이러한 온건한 측면은 그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그 폐해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에 정도전이나 권근이 철학적, 이론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비판했던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390&mode=title&query=%BC%BA%B8%AE%C7%D0%C0%DA&dircode=0
6.제왕운기
보물 제895호로 고려시대에 이승휴가 지은 역사책이다. 『제왕운기』는 7언시(七言詩)와 5언시로 지어졌다. 현재 상권의 제18장과 하권의 제6 ·7 ·8 ·16장이 소실된 것을 필사하여 보충하였다.
7.부석사 무량수전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8.대몽항쟁
1259년 고려의 태자 전(뒤의 원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몽고에 입조함으로써 거의 30년간 계속된 고려와 몽고의 전쟁은 실질적으로 종식되었다. 그러나 고려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무인들은 몽고가 요구하는 출륙환도를 거부하면서 여전히 경우에 따라서는 결전을 사양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하여 왕실은 무인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출륙환도을 단행함으로써 명실공히 왕정복구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9.무신정변
1270년의 정변으로 무인정권이 완전히 타도되자 원종은 출륙환도를 단행하였다. 삼별초가 반항하자 원종은 강압적으로 해산을 명령하고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 야별초 노영희를 지휘관으로 삼은 다음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1270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강화도에 남아있는 귀족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진도로 갔다. 진도로 이동한 삼별초는 전라도 일대를 제압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정부에서는 김방경을 전라도추토사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였으나 삼별초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11월 탐라를 공략하여 남방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1971년 5월 김방경, 혼도, 홍다구의 연합군이 진도에 총공격을 강행하여 승화후 온과 배중손이 사망하고 진도가 함락되었다. 삼별초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고 김통정을 수령으로 받들고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에 큰 피해를 주었다. 1973년 2월 김방경, 혼도, 홍다구가 지휘하는 연합군은 다시 탐라를 공격하여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삼별초가 고려, 몽고 연합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3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삼별초 그 자체가 매우 우수한 전투병력이었을 뿐 아니라, 정부와 몽고군에 대하여 투쟁하고자 하던 민중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6590&mode=title&query=%B4%EB%B8%F9%C7%D7%C0%EF&dircode=0
문신 김돈중과 무신 정중부
궁궐에서 일년에 한번 있는, 나례를 올리던 날이었다. 경호를 서던 무신들 중에는 정중부도 포함되 있었다. 순간, 갑작스런 바람이 불더니 연회 자리를 밝히던 촛불들이 일시에 꺼졌다.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온 것을 직감한 김돈중은 서둘러 손에 잡히는 아무 초에나 불을 붙여 정중부가 있었던 자리 근처로 냅다 들이밀었다. 정중부는 촛불에 데여 수염이 타 버렸고, 김돈중은 놀란 정중부의 주먹에 얼굴을 한 대 얻어맞았던 것이다. 허나 처벌을 받은 것은 무신이었던 정중부였다.
정중부와 이의방, 은밀한 대화
설상가상 무신들의 녹봉을 줄여 문신들에게 지급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오자 무신들의 한숨은 깊어져만 갔다. 오늘도 정중부와 이의방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한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의종의 꿈
잠에서 깬 의종은 꿈 속에서 보았던 엄청난 기세의 불길에 휩싸인 궁궐과 그 안에서 겨우 목숨만 붙은 채로 고함을 지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의종은 등에 오싹 한기가 돋는 것을 느꼈다. 놀랜 가슴을 진정시키며 경치를 즐길 곳을 정하는 의종
보현원으로의 행차, 그리고..
내리쬐는 햇빛을 견디며 임금과 문신들을 호위하며 왔건만, 무신들에게 쉴 곳이 마련되기는커녈, 임금과 문신들은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오병수박희를 한 판 벌여보라고 하였다.
무신들, 쌓여 있던 울분을 터뜨리다
오병수박희 도중 대장군 이소용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문산 한뢰가 술에 취해 이소용의 뺨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무신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다만 일을 도모하기에는 너무 밝은 대낮이었던지라. 무신들은 목적지인 보현원에 도착할 때까지 울분을 참고 또 참았다. 드디어 보현원에 다다르자. 청중부와 이의방의 신호에 따라 무신들은 문신이라면 보이는 대로 베기 시작했다. 크게 놀란 의종은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이의방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무신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권력 독점을 탐내년 이고, 처참하게 죽다
보현원에서의 거사를 기점으로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세 사람은 의종을 귀양 보내고 허수아비 임금으로 명종을 세워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따.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고는 자신의 세력을 은밀히 모아 난을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고 혼자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허나 계획을 미리 눈치 챈 이의방은 이고를 죽였으나, 그 역시 권력욕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의종의 복권은 허사로 돌아가고..
운 좋게도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 남은 문신들 중 무신들의 집권으로 지위가 낮아진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거제도로 추방당한 선왕을 다시 복위시키자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신들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은 금방 정중부의 귀에 들어갔고, 정중부는 신속하게 진압군을 구성하여 자신이 그 선봉에 섰다. 문신 김보당의 군대는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정중부가 이끄는 진압군의 기세에 몰려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또한 귀양가 있던 의종 역시 화근을 없애기 위해 이의방에 손에 참담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의방을 제거한 정종부, 자신 역시 제거되다
이의방이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인다는 소식에 정중부는 위기의식을 느껴 결국 이의방을 암살하고만다. 그러나 권세를 독점하던 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조정에 새로 나타난 젊은 무신인 경대승의 손에 의해 정중부 역시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사람과 마찬 가지로 비명 횡사했기 때문이었다. 1179년 정중부의 죽음으로 인해 최초로 무신의 난을 일으켰는 세 명은 모두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으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무신 정권은 그 뒤로도 경대승 뿐만 아니라 다른 무신들로 이어지면서 오랜 세월 동안 고려 시대를 피의 역사로 물들이게 된다.
10.수덕사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연혁을 살피는데 어려움이 많으나 사기(寺記)에는 백제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g;>을 강론하였고, 제31대 공민왕 때 고승인 나옹화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말에 경허선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에 경허의 제자 만공스님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했으며, 현재 수덕사는 충남 일대의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4대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견성암(見性庵)을 비롯하여, 금선대(金仙臺), 환희대(歡喜臺)등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국보제49호)을 중심으로 명부전, 백련당, 청련당, 조인정사, 일주문, 범종각 등이 있다.
성보문화재로는 국보 제49호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1263호 노사나불괘불탱, 보물 제1381호 수덕사 목조 삼세불좌상 일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3층석탑과 고려시대의 거문고가 있다. 인근 화암사에 걸려있는 무량수각, 시경루 등 추사 김정희가 쓴 친필 편액 등이 전시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삼층탑, 대웅전 내부의 고려벽화를 비롯하여 정혜사로 가는 중에 만공이 건립한 25척의 석불로서 머리에 이중의 갓을 쓰고 있는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과 만공을 추도하기 위해 세운 만공탑(萬空塔)등이 있고 그 위에 진영각이 있는 금선대와 선원인 정혜사가 자리하고 있다.
느낀점: 고려에 대해서 많이 알게되었다. 이 숙제는 그냥 복사하고 붙이기만 하면되지만 다른 사람과 중복이 되지 않게 해야하기 때문에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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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민군 어떻게 하지요? 6~7개가 정민군 보다 먼저 한 학생 것과 내용이 겹칩니다. 어떤 것이 겹치는지 검색해 본 후에 겹친 내용에 대한 수정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말한 대로 형식에 맞추어 과제를 수행한 점을 칭찬합니다. 다만, 소감이 글자 크기만 큰 느낌이 드는 것이 아쉽게 생각됩니다. 꼭 설문도 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