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2월 남만주 일대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포괄해 결성된 유일당(唯一黨).
만주에서 활동하던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가 민족유일당운동과 3부(三府) 통합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각각 내부분열을 일으켜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분리된 후 국민부가 조직한 남만주의 유일당이다. 1929년 4월 남만주 일대의 군소독립단체들을 통합해 국민부가 조직되었다. 같은 해 9월 20일 국민부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혁명과 자치를 분리해 혁명사업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위임하고 국민부는 자치행정만 전담할 것과 군사부를 폐지하여 종래의 조선혁명군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속하게 할 것을 결정했다. 12월 20일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의 발전적 형태로서 조선혁명당이 결성되었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력한 정당으로서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사업을 완수하는 것을 당면임무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남만주 한인사회의 자치행정기관인 국민부와 무장조직으로 군사적 임무를 전담하는
조선혁명군과는 표리일체의 자매기관으로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당의 결성 당시 중앙위원으로는 현정경(玄正卿)·현익철(玄益哲)·이웅(李雄)·고할신(高轄信)·최동오(崔東旿)·장승언(張承彦)·김보안(金輔安)·장철(張徹)·고이허(高而虛)가 선출되었다. 중앙당부를 랴오닝 신빈[遼寧新賓]에 설치하고 지린 성[吉林省],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에 길흑(吉黑)특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위원으로 이탁(李鐸)·김돈(金墩)·김이대(金履大)·박형건(朴炯鍵)·김인기(金仁基)를 선출했다. 당이 결성될 때 만주에서는 1928년 장쭤린[張作霖] 폭사사건, 1931년 7월의 만보산(萬寶山) 사건, 9월의 만주사변 등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때 재만한인은 중국으로부터 일제의 앞잡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고 일본으로부터는 반일인물이라는 의심과 탄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혁명당은 중국과 빈번히 교섭하여 한중합작으로 일제침략에 대처하는 길을 역설하여 반일무장투쟁의 한·중 협동체제를 결성하는 데 기여했다. 1932년 1월초 싱징 현[興京縣]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중국이 만주에 대해 주권을 상실하는 데 따른 진용정비문제와 한중합작 등의 문제를 토의했다. 그러나 이 회의가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1월 5일 회의 현장에서 간부 이호원(李浩源)·이동산(李東山)·김보안·장세명(張世明)과 조선혁명군 장교 이규성(李奎星)·차용륙(車用陸)·전운학(田雲學) 등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3월초까지 계속된 일본경찰의 검거로 83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그후 일제의 검거를 피한 간부들은 조직을 재정비하고 고이허를 위원장 대리로, 양서봉(梁瑞鳳)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한편 조선혁명군은 1929년 7월의 류허 현[柳河縣] 쩌우자우푸[鄒家堡] 전투, 1932년 1월 6일의 양기하(梁基瑕) 부대의 항전 등 무장항쟁을 벌였다. 특히 1932년 3월에는 싱징 현 융링제[永陵街]에서 조선혁명군 1만여 명과 중국의용군 2만여 명이 합동으로 일·만 연합군과 7월까지 정규전을 벌였다. 1932년 3월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광범한 반일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관동군을 직접 만주에 투입했다. 이에 따라 1934년말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항전하는 한편 홍군(紅軍)의 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당·정·군의 조직을 일체화하여 조선혁명군정부를 결성하고 고이허를 최고책임자로 선출했다. 이후 활동은 주로 조선혁명군의 반일무장항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35년 9월에는 한중항일동맹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5년 일·만 군경의 주민분리 정책과 초토화작전으로 항일무장투쟁은 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또 홍군의 공동전선전술로 한인무장부대의 일부가 홍군에 가담하게 되어 조선혁명당의 무장항쟁도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