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날이 저물자 그들은 도시 밖으로 나갔다. » 이 문장이 « 아침 »(그 다음 절에서 prôi) 바로 앞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나감은 그리스어 반과거 동사와 함께 이 날들을 끊어주는 일종의 후렴처럼 쓰인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도시에서 나감을 표시하면서, 이렇게 본문은 성전에서 예수의 현존의 강력함에서의 진전과 함께 예루살렘에 연속해서 세 번 들어감을 얘기할 수 있다. 이 성전에서 예수가 곧이어 가르침을 시작할 것이다.(11,27 참조) 처음 들어가서는 모든 것을 시선에 담는다. 두 번째 들어가서는 충족되지 않는 « 시장기 »와 함께, 이미 실현된 ‘법망을 벗어나기 위한 소굴’에 미래의 ‘갈망의 집’을 대립시키는 말이 동반하는 대 소란으로 이끈다.
성전에서 자행되는 상거래와 실용적 활동을 중단시키는 것은 구체적인 미래가 없는 사건 같다. 또 이어지는 날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접근했던 때처럼 하나의 ‘표징’을 제시했다. 그것은 기억해야 할 표징이다. 이 의미작용의 폭넓음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에서 전개되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문이 의미심장한 두 개의 큰 형상을 대립시킨다는 것을 지적할 시간을 갖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형상과 이 성전이 대표하는 모든 것이다. 이곳은 의미작용과 역사 안에서 놀라운 풍요의 상징이며, 이곳에서 하늘이 땅과 만나고, 하느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좌정해 계신 곳이다. 그러나 또한 유다왕국의 삶 속에서 정치·경제권을 대표하는 건물이며, 선택된 민족의 존속과 미래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굳건함의 장소다. 둘째 형상은 예루살렘에 접근하기 위해 « 어린 나귀 위에 앉은 » « 예수의 몸 »의 형상이다. 예수의 몸은 잎만 무성한 나무 앞에서 시장기를 느끼고, 성전에서 자행되는 수많은 « 것들 »로 인해 충격을 받는다. 예수의 몸은 이러한 타는 짐승 위에 앉는 이 의미심장한 도래 안에, 그리고 무화과나무와 성전에서의 과격한 행동이 결합된 이 사건 안에 자신의 미래를 건다. 권력자들에게 이 몸은 그의 사형판결을 의미한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외양을 초월하는 시장기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 결핍 사이의 대립으로 열린 하루는, 성전이 기능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 예수가 인용하는 성경에서 드러난 기대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가르침과 활동에 집중된다. 나무는 정상상태에 맞지도 정상상태에서 예측할 수도 없는 형상화된 예수의 « 시장기 »에 부합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상거래와 교환으로 복잡다단한 곳인 눈에 비친 성전은, 예수의 말에서 인용된 성경에서 들리는 보이지 않는 분의 갈망과 불협화음을 낸다. 이 격차는 성전의 현재기능이 제공하는 것과 한 지성소가 인간의 전존재의 심부에 뿌리내린 깊은 갈망에 일치하기 위해 변화되라고 불린 것 사이의 격차를 비유방식으로 가르쳐준다. 그리고 만일 이 지성소가 예수의 말하는 몸 안에서 보여 지는 것 안에 드러난다면!
독자는 무화과 철도 아닌데 거기서 비논리적인 갈망을 보이는 이 « 시장기 »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어리둥절하게 되게 두어야 한다. 이 시장기는 계절로 결정되지 않으며, 예상할 수 있는 때가 적절하지도 않다. 낯선 타자 쪽으로 주체를 당길 뿐이다. 이와 같이 성전에서 한 행동을 통해 예수는 어떤 의미로는 절대타자의 때로 열린 열망의 시간을 표시한다. 성경에 나오는 « 나 »의 미래는 강도들의 소굴에서 현재 이루어지는 것에 의해 부인된다. 하지만 인용문의 미래는 예수가 하는 발화행위의 ‘현재’ 안에서 연결된다. 이렇게 예수는 성경에 등장한 « 나 »의 갈망 속에 뿌리내린 그의 갈망을 현재형으로 말한다. 만일 예수가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이라면, 이렇게 예수는 그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하느님의 계획과 메시아의 기대를 보통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눈길을 끄는 도래를 예고하는 표징들을 찾는다. 예수가 성전에 두 번째 들어가는 이야기와 연결된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메시아 시대에 대한 예측 가능한 모든 층위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 일이 인류 역사 안에서의 혼란처럼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