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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탈출
모색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나는 나대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나로서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천우신조의 기회를 잃을 수는 없는 셈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단장은 혹시 있을지 모를 단원들의 이탈을 생각해서 만일에 이탈하면 한국의 집으로 찾아가서 손해 배상을 청구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았었기 때문에 그런 사태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술집에서 사진을 찍어 주고 돈을 받는 직원에게 단원들이 손님들과 술 먹는 장면을 찍어 달라고 해서 사진을 보관해 두었다. 만일에 내가 탈출한 다음에 우리 집을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면 이 사진을 언론에 공개해서 문제를 삼도록 할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하려면 우선 밖에서 도와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손님들을 주의 깊게 보다가 드디어 적당한 손님 하나를 찾게 되어 샴페인을 터트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은근하게 내가 이 곳을 떠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냐는 뜻을 나타내 보았다. 다행히도 호의적이어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난데 없이 금발의 외국 무용수 하나가 와서 자기가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양보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나로서는 그 단계까지 가기 위해서 정성을 많이 기울였기 때문에 조금 실망스럽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일단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를 따라왔던 나이가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청년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사실 그는 돈이 많이 드는 그런 종류의 술집에 드나들기엔 어울리지 않은 젊은이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호텔로 나를 찾아올 수 있겠느냐고 했다. 다음날 그는 내 이름을 새긴 가느다란 은목걸이를 가지고 호텔로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애들 장난감 같은 것을 가져 오다니'하는 생각이 들어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돌려주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끓어서 내가 대단히 난처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한번 놀아보려는 것 같은 그의 일행에 비해 진정성이 보여서 오히려 그를 믿을 수 있게 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그리스어도 모르는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청년의 도움을 받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그리스어를 모르고 청년은 영어를 전혀 몰라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손짓 발짓으로 어렵게 상대의 뜻을 이해해야만 했다. 그런 일이 답답할 것 같은데 청년은 철이 없어서 그랬던지 오히려 그런 방법을 더 재미 있어 했다. 어떻든 나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 호기심 많았던 청년은 오히려 나를 돕고 싶어 했다. 청년은 렙테리라는 자기 이름을 알려주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소는 자기 집이 아닌 이모네 집의 주소를 주었다. 물론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그리스에서의 관광 비자 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국경을 넘어 터키의 이스탄불로 가서 다시 그리스 입국 비자를 받아와야만 했다. 비자를 받은 다음에 아테네로 돌아올 경우 혹시 단장 일행에게 다시 붙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렙테리와 나는 이스탄불과 아테네의 중간에 있는 그리스 제2의 도시인 데살로니가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렙테리는 아테네에서 기차를 타고 데살로니가 역에서 다음 날 만난다는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며칠 후 드디어 단원들의 여권을 가지고 있었던 단장이 내 여권과 비행기 표를 주면서 더 나이가 든 대원들이 많은 이란의 테헤란으로 가라고 했다. 보통의 경우 단원이 이동할 경우 사람이 따라붙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다행히도 이 때는 돈도 더 들게 되고 따라갈 사람이 없어 내 여권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도 테헤란으로 가게 된 것을 좋아하는 척하며 단장을 안심시켰다. 아마도 베이루트에 있었을 때 사장이 호텔 방으로 불러도 가지 않았던 일이 나를 믿게 한 것 같다.
구사일생
김루미 단장이 이란의 단장에게 전해 주라고 맡긴 편지를 비행기 안에서 뜯어보고 기가 막혔다. 내용은 내가 애들하고 불화가 많았으니 잘 알아서 다루라는 것과 월급 $350 중에서 $150만 나에게 주고 $200을 자기 계좌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지독한 착취의 사슬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비행기 표는 이스탄불에서 테헤란 행으로 갈아타게 되어있지만, 타지 않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날이 이미 어두워서 택시를 타고 무조건 그리스 영사관이 가까운 곳에 있는 여관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택시 운전사는 자기가 잘 아는 곳이 있다며 허술한 여관으로 데려다 주었다. 여관방에 들어와서 어쩐지 불안해서 방 안에 있는 경대와 의자를 옮겨 방문이 열리지 않도록 막아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늦은 시각에 문구멍으로 열쇠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Who are you?"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낮은 목소리 "Taxi driver"라고 대답을 했다. 나는 욕도 할 줄 몰라서 "Go! Go! I am Korean, I am Korean."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또 다시 “I am Korean.”이라는 주문을 외운 것이다. 오늘 내가 외친 I’m Korean는 ‘너희 나라와 우리나라는 6.25전쟁으로 인한 동맹국이 아니냐? 나 한국 사람이니까 괴롭히지마. 한국 여자, 만만하지 않다’라고 하는 의미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내가 터키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차근차근 설득했을 텐데… 미친 여자처럼 악만 써야 하다니, 이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데, 아버지를 부르며 엉엉 울다가 또 " I am Korean."를 부르짖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을 일이지만 미국도 아닌 가난한 나라 한국이 자랑도 아니고 택시기사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기나 할지도 모를 터이지만 그랬다. 나로서는 다급하기는 한데 다른 말을 생각해 낼 겨를이 없어서 고작 생각난 것이었다. 택시기사는 문을 열려고 하면서 "Please! Let me in"만을 연발하더니 "I am Korean."의 주문이 효력을 발휘했던지 밖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나는 불안해서 한 잠도 자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웠다.
날이 밝아오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의 주인 얼굴을 보았지만 터키 말을 못하니 지난 밤의 일에 대하여 따질 수도 없었다. 그저 빨리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우선 엊저녁부터 굶었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주방장이 주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흙으로 된 화덕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글자 그대로 중세기의 주방이었다. 음흉스럽게 생긴 주방장은 나에게 먹을 것을 줄 생각은 안하고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아래 위를 샅샅이 훑어보더니 손가락으로 내 몸을 꾹꾹 눌러 보는 것이 아닌가? 주방장은 동양여자를 처음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또 다시 한국말로 욕을 하고 그 길로 여관을 나와 버렸다.
배고픔을 참고 주변의 다른 여관을 찾았더니 멀지 않은 곳에 여자가 주인인 여관을 찾을 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예쁘게 생긴 주인 여자는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또다시 손과 발을 동원하여 지난 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주인은 친절하게 연실 홍차를 따라주면서 터키 남자들이 질이 좋지 않다며 앞으로 더 당하지 않으려면 수줍어 보이는 태도를 버리고 강하고 당당하게 보여야 한다면서 장식용 칼을 주며 옆구리에 보이도록 차고 다니라고 했다. 그 이후부터는 당장 조심스럽게 걷던 걸음걸이부터 바꾸어 될 수 있는 대로 백인 여자들처럼 당당하게 자신만만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다음 날 아침 그리스 영사관이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열자마자 들어갔지만 담당자가 외출 중이라 2, 3시간 있다가 오라고 했다. 어차피 데살로니가행 기차를 타려면 많이 기다려야 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데 극장이 보였다. 로맨스 영화 같아 보이는 극장 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극장 안이 모두 남자뿐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보니 포르노영화였다. 갑자기 어제 밤부터 더러운 일들을 겪은 내 신세가 처량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극장을 나와 거리를 헤매며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고 드디어 기차를 타기는 탔는데 내 마음은 급한데 그야말로 자전거 속도로 움직였다.
기차 안에는 행색이 초라한 유랑민들이 가득했는데 알고 보니 내전을 피해서 우리 팀이 떠나왔던 레바논 사람들이었다. 이스탄불 역에서 도움을 구하는 초라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기차에 탔던 레바논인들은 그래도 그들보다는 형편이 나은 사람들 같았다. 기차는 영화에서 처럼 칸칸이 방으로 막혀 있고 내가 탄 칸에는 중년 부부와 아테네로 유학을 간다는 요르단 학생과 나, 이렇게 4명이 타고 있어서 비교적 안심할 만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고 어두워지자 요르단 학생과 부부가 아랍어로 수군수군하더니 부부가 아무 말 없이 나갔다. 그 때부터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생이 나에게 친절하게 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물어서 좋다고 하자 밖으로 나갔다가 차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학생이 옷을 가지러 일어서는 사이에 재빨리 찻잔을 바꾸어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에 차를 마신 학생이 나를 보고 "Are you OK? Are you OK? " 하더니 슬며시 잠이 들어 버렸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차에 강력한 수면제를 탄 것이었다. 만일 내가 주는 대로 마셨다면 그 꼴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나기는 했지만,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말도 못하고 하소연할 곳도 없는 처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강하게 먹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주정뱅이 건달같이 생긴 기차 승무원 녀석 둘이 얼굴을 디밀었다. 그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한국말로 욕을 퍼부었더니 기겁을 하고 사라졌다. 그들로서는 당연히 쓰러져 있어야 할 나는 쌩쌩하고 음모를 꾸민 녀석은 쓰러져 있으니 놀랄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불안한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어서 눈을 뜬 학생은 나를 보고서 계면쩍게 "You are so clever."라고 했다. 나는 또다시 한국말로 욕을 퍼붓고 그 방에서 나와 짐과 사람이 뒤섞여 있는 화물칸으로 가서 바닥에 앉아서 갔다.
그런데 국경선에 기차가 서자 경찰이 나를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경찰은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물었지만 의심할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보내 주었다. 조사를 받는 동안 기차가 떠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기차는 출발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화물칸으로 돌아왔는데 웬 노인네가 내 앞으로 다가와 서툰 영어로 어떻게 풀려 나왔느냐고 물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승무원 녀석들이 내가 간첩 같다고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노인은 레바논 사람이었는데 보석만 챙겨서 나왔다며 가방에서 돌 같이 생긴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도 아테네로 약혼자를 찾아가는데 약혼자가 대사관에 근무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노인은 아테네에 가면 약혼자에게 비자를 얻도록 도와달라고 하면서 그때부터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내가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렙테리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렙테리는 나를 금방 만나게 될 줄 알고 돈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않고 와서 공원에 가서 물을 마시면서 배고픔을 견디다가 사흘째 되는 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부모에게 온다 간다 말도 하지 않고 왔었으니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나는 데살로니가에서 혼자서 아테네로 갈 수 밖에 없었지만, 또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무서웠다. 더구나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길에서 히치하이크를 하기로 했다. 현지에서 보기 드문 젊은 동양 여자가 차를 세웠기 때문인지 대부분 차들이 서기는 섰지만 함부로 탈 수가 없었다. 마치 검문소에서 검문을 하는 것처럼 내 앞에 선 차마다 차 내부와 운전사의 인상착의를 살피고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보내고 가장 점잖아 보이는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탔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고르고 고른 보람이 있었는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신사는 예상했던 대로 매우 점잖았다. 태워주어서 고맙다고 돈을 주겠다고 했더니 돈은 필요 없다면서 자기는 공무원인데 출장을 왔다가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이라며 자기가 운전을 하면서 졸지 않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노래라는 노래는 모두 부르고 다 부르면 부른 노래를 목이 쉬도록 다시 불러주었다. 공무원은 아는 노래가 있으면 같이 부르기도 해서 될 수 있으면 그가 알 수 있을 만한 노래를 부르려고 노력을 했다. 이때 나는 항상 명곡을 부르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야간 중고등학교에 다녔던 내가 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노래는 몇 곡이 되지 않았지만 어려서 아버지가 늘상 불러서 귀에 익은 노래가 많았던 것을 감사했다. 만일에 내가 한국의 대중가요를 불렀다면 그리스의 공무원이 무슨 노래인지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었지만 실제로 당시의 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국의 대중가요 보다는 명곡을 많이 알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음악감상실 디쉬네를 들락거리며 들었던 외국의 팝송들이 도움되기도 했다. 만만한 여자가 아니고 교양과 격식을 갖춘 여자라고 느끼게 해주려고 일부러 명곡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면서도 언제 어떻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몰라서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비록 공무원이 점잖아 보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믿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힘을 주어 박력 있게 노래를 불러서 만만하게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러나 무사히 아테네에 도착해서 렙테리를 만나야 하는데 혹시라도 공무원이 마음이 변해서 나를 내려놓지나 않을까 해서 적당하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사연을 물어도 약혼자가 정보기관에 있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없다고 허튼 소리로 은근히 수상쩍어 보이는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서 온갖 상상과 쇼를 연출 하면서 800 km의 멀고 먼 길을 불안과 초조, 안도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 속에서 달려서 아테네에 도착했다. 헤어질 때 공무원이 명함을 주었지만 무사히 도착했다는 생각에만 빠져서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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