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렝통 고개에서 내려오는 부부 트레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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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즐겨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에서 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무엇보다 크다고 본다. 그들 중에는 산이 인생의 전부인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바로 프란시스 시드니 스마이드(Francis Sydney Smythe·1900-1949)는 자신의 인생에서 산이 전부였던 인물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허약했던 어린 시절 요양을 위해 알프스를 찾은 이후 산의 세계에 매료되어 줄곧 알프스를 찾아 훗날 몽블랑 산군에서 새로운 루트들을 개척하기도 했으며, 1930년대에는 다섯 차례나 히말라야 원정을 했을 뿐 아니라 등산에 대한 책만도 27권을 저술한 인물이다. 하지만 히말라야 원정에서 얻은 질병으로 그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를 산이 인생의 전부였던 대표적인 산사나이라 칭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필자의 자그마한 책꽂이에는 유일한 복사본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스마이드의 <산과 인생>이다. 1968년에 발행된 이 책은 1980년대 초에 등산을 시작한 필자로서는 우연히 복사본을 처음 접했을 때에야 이 책이 한국어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행히 지인으로부터 복사본을 구해 이곳까지 가져와 읽게 되었다.
세로쓰기에 활자 또한 깨알만 하여 읽는 속도가 붙지 않고, 드문드문 있는 멋진 사진들도 흐릿하여 읽는 내내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 복사본만으로도 스마이드의 산 세계를 접할 수 있음은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한편 스마이드의 여러 저서들 중에 <The Spirit of Hills>가 번역된 <산과 인생>은 1990년에 다른 출판사와 다른 번역자에 의해 나온 <산의 영혼>이 몇몇 단원만 제외하고 같은 책임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가을에 접어든 9월이었다. 호젓하게 산행하며 이 책을 음미하기 위해 샤모니를 떠났다. 여름시즌이 끝나 바뀐 열차시간표를 확인치 않아 1시간이나 기다린 후에나 다음 열차를 타고 샤모니를 떠나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행선지는 세르보(Servoz)다. 샤모니 계곡 맨 아래 부분을 벗어나 해발 800m 고지에 남향의 너른 분지에 자리 잡은 세르보는 누가 보아도 살기 좋은 땅임을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세르보에서 오르는 초록빛 베르 호수
가을꽃들이 한창인 마을에 들어선다. 소박한 교회 옆을 지나니 오르막이 시작된다. 곳곳에 서 있는 나무들 모두가 유실수다. 특히 가로수처럼 흔하게 골목마다 서 있는 자두나무 가지에는 탐스런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가지가 부러질 것 같다. 그밖에 사과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등이 눈에 띈다. 이것만 보아도 이 땅의 풍족함을 알 만하다.
이마에 맺히는 땀을 훔치며 일명 초록 호수인 베르 호수(Lac Vert·1,200m)로 이어지는 산길을 오른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구름에 반쯤 가린 몽블랑 서면이 눈에 들어온다. 전망 좋은 언덕에 자리 잡은 멋진 통나무집들 옆으로 길이 이어진다. 마침 할아버지 할머니가 겨울준비를 위해 통나무를 쪼개고 있다. 할아버지가 도끼로 쪼갠 화목을 할머니가 손수레에 나르는 모습이 정겹다. 긴긴 겨울철에 바로 이 화목으로 지핀 따뜻한 난로를 사이에 두고 몽블랑을 바라보며 즐길 노년의 운치를 상상해 본다.
- ▲ <산과 인생> 복사본. / 피츠 암군을 배경으로 포르메나 호숫가를 트레커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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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길을 걷는다. 초등학생 대여섯이 인솔교사와 내려오고 있다. 락 베르에 다녀오는 모양이다. 세르보에서 1시간 후 이제 길은 울창한 숲속으로 이어진다. 침엽수인 전나무도 있지만 샤모니쪽과는 다르게 활엽수가 태반이다. 그만큼 고도가 낮기 때문이다. 오후 시간이라 몇몇 트레커들이 내려오고 있다. 좀 있으니 일단의 산악자전거 마니아들이 쏜살같이 내려간다. 어느새 비가 내린다. 그래도 급할 게 없다며 느긋하게 걷는다.
한동안 비를 맞으며 숲길을 걸어 락 베르에 이른다. 휴게소 처마에서 잠시 비를 피한다. 곧 비가 그쳐 호숫가로 다가간다. 날이 흐리고 어두워 초록색은 맑을 때만 못하다. 마그네슘 함량이 많아 이렇게 초록빛을 띈다는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본다.
숲과 잘 어울리는 호수를 돌아보며 스마이드를 생각한다. 스마이드는 <산과 인생>에서 산을 오르는 이유를 아름다움, 즉 미의 탐구가 동기이며 목적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 또한 이 초록호수의 아름다움에 끌렸을 터.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아 배낭을 짊어진다. 이 호숫가 숲속도 하룻밤 묵기 좋은 곳이지만, 해가 지기까지 아직 3시간이나 남아 있어 계속해서 오르기로 한다. 약 1시간 동안 숲길을 따라 오른다. 몇몇 여름철 별장을 지난다. 작은 굴뚝에서 연기가 퐁퐁 피어나는 오두막에선 늦은 휴가를 즐기는 일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 갈림길이다. 이왕이면 2,000m대의 알파인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묵고 싶어 포르메나 호수(Lac Pormenaz)로 향한다.
급류가 흐르는 계곡을 건너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가파른 바위사면 곳곳에는 쇠줄이 설치되어 있다. 1시간 이상 오르니 호수다. 주변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 몇 마리만 반겨준다. 적막한 호숫가 서편 언덕에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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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기산행 차림의 할아버지 트레커 앞 저멀리 몽블랑 산군 침봉들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 몽뷔에에 오르는 산악인 뒤로 베라르 계곡 상단이 보인다.
- 16개 주제에 대한 편린들 담아
이미 저녁 8시가 가까워져가는 황혼녘이다. 급히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어먹는다. 표고 1,200m를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 피곤해진 다리를 누이며 침낭에 든다.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서쪽 하늘이 붉은 색에서 보라색으로 바뀔 시간이다. <산과 인생>을 펼쳐든다. 각기 다른 16개 주제에 대한 스마이드의 단상들은 도중에 건너뛰며 읽는 재미가 있어 종종 마음에 드는 제목만 찾아 읽을 때가 많다.황혼 편을 펼친다. 이미 밑줄 쳐져 있는 다음과 같은 그의 글을 음미한다. ‘황혼 무렵 등산가는 회상 속에서 하루의 생탄과 청춘과 성숙을 힐끗 되돌아본다. 인생도 그와 같이 지나가는 것이다.’ 화강암 침봉에 저녁놀이 물들 무렵 산장의 베란다에 기대어 앉은 알피니스트가 하루의 산행을 회상하고 자신의 인생도 반추해보는 낭만이 과연 요즘의 산악인들에게도 남아 있으려나.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첨단산업사회의 그물망이 만년설산에도 처져 있지 않은가.
피곤해 몇 페이지 더 읽지 못하고 잠이 든다. 스르르 눈을 뜨니 새벽 2시다. 밖을 보니 초저녁에 잔뜩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개어 있다. 카메라로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담아보지만 잘 되지 않아 침낭 속으로 돌아온다. 곧 <산과 인생>을 집어든다. 9장 밤 편을 찾아 펼친다. ‘밤은 낮에 비하면 무한한 것에 사람을 보다 가까이 접촉시켜 준다. 우주의 여러 영광이 보이는 것은 실로 밤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랜턴을 끄고 가만히 누워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정적에 휩싸인다. 살짝 텐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은하수를 올려다본다.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것만도 영광이지 않겠냐며 별빛들을 가슴에 담고 잠자리에 든다.
일어나니 아침 7시다. 서쪽에 솟은 웅장한 장벽 피츠 암군(Rochers des Fiz)도 깨어나고 있었다. 차를 끓여 마시고 <산과 인생>을 펼쳐들 즈음 바위벽에 아침햇살이 드리워진다. 차츰 해가 바위벽 전체를 비추는 모습을 보며 침낭에 누워 책을 뒤적인다.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은 ‘새벽’, ‘청춘’, ‘음악’, ‘꽃’ 편을 읽는다. 이런 아침 시간의 느긋함이 좋다.
어느새 동쪽 언덕 위로 솟은 태양이 텐트에 닿을 즈음인 1시간 반 후에 일어난다.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아침을 먹는데, 두 명의 트레커가 안테른(Anterne) 산장쪽에서 오더니 호숫가에 자리를 잡는다. 낚싯대를 가져온 그들은 곧 잔잔한 호수에 낚싯줄을 던진다. 알파인 호수에서 잡히는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지만, 강태공처럼 드러누워 낚싯줄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들에게 낚일 물고기는 좀체 없을 듯하여 배낭을 꾸린다.
- ▲ 마그네슘 함량이 많아 초록색이 짙은 베르 호수. 맑은 날일 땐 더욱 짙다. / 해발 800m 고지의 아늑한 분지에 자리 잡은 세르보 마을, 그 중앙에 위치한 교회. / 살렝통 고갯마루에서 만난 산양과에 속하는 샤무아의 우아한 모습.
- 샤무아 우아하게 풀 뜯는 살렝통 고개
마침 트레커 한 명이 지나간다. 조금 후, 필자 또한 그가 간 방향으로 향한다. 도중에 이정표 주위에 모여 있는 일단의 양떼를 지나 안테른 산장에 이른다. 지난해에 안테른 호수에 갈 때 지나친 후 처음이다. 이어 갈림길에서 살렝통 고개(Col de Salenton·2,526m)로 길을 잡는다. 가벼운 차림을 한 젊은 트레커가 급한 발걸음으로 휙 지나간다.그를 따라 얼마 가지 않았을 때다. 길 한편의 작은 언덕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느긋하게 누워있다. 젊음과 늙음의 대조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그럼 이제 중년인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급할 게 없던 터라 그리고 점심때라 배낭을 내려놓는다. 약 30분간 쉬며 점심으로 빵을 먹는다. 이어 언덕에서 쉬고 있던 할아버지 트레커가 슬며시 일어나 필자와 같은 방향인 살렝통 고개로 움직인다. 필자 또한 배낭을 지고 함께 걷는다.
흰 수염을 휘날리며 목에는 지도를 건 할아버지 트레커는 배낭을 진 행색으로 보아 장기산행을 떠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특별한 목적, 즉 하고자 한 트레킹을 빨리 끝내고픈 생각이 없는지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으려는 필자보다도 더 느긋이 걷기에 더는 느긋함을 이기지 못한 필자는 횅하니 그를 앞서 걷는다. 길은 완만하게 계곡 위로 이어져 있어 걷기 편하다.- ▲ 안테른 산장쪽에서 본 세르보 계곡 상단부. 오른편 계곡 아래가 세르보 마을이다. / 부부 트레커들 너머로 디오자 계곡 상단부와 몽블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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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알파인 목장이다. 소도 없고 목장지기도 없어 조용하다. 산장처럼 깨끗하게 정돈된 오두막 앞에 앉아 신발을 벗어 우물가에서 발을 씻은 후 쉰다. 발바닥이 태양빛에 바짝 말라 기분이 좋다. 마침 살짝 열려 있는 오두막의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실내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누구든 필요하면 자고 가도 된다는 안내문까지 있다. 다시 밖으로 나와 한동안 해바라기를 하며 쉬는 동안에도 할아버지 트레커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냥 할아버지를 기다릴 수 없어 배낭을 짊어진다. 이제부터 살렝통 고개까지는 급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드넓은 알파인 지대에 아무도 없이 혼자 걷는 적막감이 싫지 않다. 30분 후 드디어 두 쌍의 부부 트레커가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살렝통 고개에 많은 꽃들이 피어 있다고 한다. 또 한 남자는 손가락 두 개를 머리에 들어 보이며 산양이 있다는 시늉까지 한다.
웃으며 그들과 헤어져 계속되는 오르막을 오른다. 철지난 몇몇 야생화들이 여기저기에 피어있다. 이윽고 고갯마루가 멀지 않은 야생화밭을 끼고 도니 얼룩소 대여섯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평화로운 그들을 잠시 지켜보고서 고개로 이어진 마지막 오르막을 오른다. 땀을 훔치며 고개에 막 다다를 즈음, 1시간 전에 만난 트레커들의 말마따나 10여 마리의 산양 떼가 풀을 뜯으며 모여 있다. 자세히 보니 산양과에 속하는 샤모아다. 그들의 우아한 모습을 구경하며 살렌통 고갯마루서 이제껏 올라온 디오자 계곡(Vallee de la Diosaz)을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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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이미 오후 5시가 되었기에 잠자리를 어디서 잡는 게 좋을까 생각해본다. 마침 고갯마루에 누군가가 텐트를 친 자리가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물이 충분치 않다. 물론 응달진 사면에 남아 있는 잔설을 녹일 수도 있지만 베라르 계곡(Vallee de Berard)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한동안 급사면 돌밭을 내려가 100m 이상 되는 설사면을 이용해 미끄러져 내려간다. 30분 정도 돌길을 내려가니 한참 아래에 베라르 산장(Berard Refuge·1,924m)이 보인다. 마침 중년의 한 산악인이 한 짐 가득 짊어지고 오르고 있다. 곧 이어 만난 그는 몽뷔에(Mont Buet·3,096m)에 오를 예정이라며 내려오던 중에 야영할 적당한 장소가 있는지 묻는다. 경사진 바위지대뿐이라 답하며 행운을 빈 후, 계속해서 내려온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돌길을 걸어 내려오니 마침내 베라르 산장이다. 산장 앞 벤치에는 다음날 산행을 위해 올라와 있는 산악인들이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산장 주변에는 적당한 캠프지가 없어 계속해서 내려오는데, 필자 또래의 부부가 어린애 셋을 데리고 열심히 밀티유라는 콩알만한 새까만 열매를 따고 있다. 환한 웃음을 짓는 그들과 헤어져 계곡으로 내려오니 숲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가보니 텐트 옆에서 일가족 넷이 모닥불을 지피고 있었다.
- ▲ 베르라 산장에 올라온 산악인들이 저녁을 맞이하고 있다. / 살렝통 고개 아래의 야생화가 핀 풀밭에서 얼룩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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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허영심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침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적당한 캠프지가 있어 텐트를 친다. 모닥불을 피워본 지 오래되어 필자 또한 그래볼까 싶다가도 엄두가 나지 않아 저녁만 먹고 금방 눕는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밖은 어둡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다. 더는 잠이 오지 않아 <산과 인생>을 펼쳐든다. ‘폭풍설’ 편을 보니 다음과 같은 스마이드의 말이 들려온다. ‘등산가는 기계적인 개입이나 원조를 받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자신의 식별력과 판단력에 의존해 산을 올라야 하며, 천박한 정복욕이란 감정은 있을 수 없으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관중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등산이란 성취라는 말로 평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우주 사이의 행복스런 결합이며 생존과 존재의 완성이다.’
또한 ‘휴식’ 편에서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하며 잠이 든다. ‘군인이 다른 군인이 정복한 도시를 짓밟는 것처럼 (산의) 정상을 밟는 일은 없어야 하며,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방문해야 한다. 산은 요새가 아니며,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이었다. 계곡이 깊어 해가 닿으려면 정오나 되어야 할 것 같다. 최대한 게으름을 피우며 침낭에 들어 반 시간 정도 책을 뒤적이다 더는 누워 있지 못하고 일어난다. 못다 읽은 수십 페이지에 대한 미련이 남지만 산과 인생에 대해 조금이나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옆 텐트의 일가족들도 길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보고서 베라르 계곡을 내려온다. 약 1시간 반 후 르뷔에 마을이다.
얼마 후 도착한 몽블랑 익스프레스 산간열차를 타고 샤모니 계곡으로 내려온다. 덜컹거리는 열차 통로에 내려놓은 배낭 윗주머니에 든 책을 꺼내다말고 도로 집어넣는다. 이렇게 산과 함께 할 수 있는 생활 자체에 흡족한 웃음을 지어본다. 필자의 인생에서도 산이 전부가 되어도 나쁘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며 열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몽블랑 산군의 파노라마로 시선을 던진다.
월간 산 [457호] 2007.11/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www.goalp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