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들
-황정은 [연년세세]
송언수
지난주에 아버지 팔순 잔치에 다녀왔다. 봄에 일주일 정도 통영에 내려와 계셨던 아버지다. 아버지 연세가 벌써 팔십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6시에 집을 나와 7시 배로 사량도에 들어와 같이 성게미역국으로 아침을 먹고 나는 사무실로, 아버지는 젊은 사람도 힘들어하는 지리산 옥녀봉으로 올려보냈다. 내게 아버지는 여전히 태산이었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에도 불구하고 내게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였나보다.
올케가 전화해, 아버지 팔순 생신에 식구들이 모인다고 올 수 있겠냐 물었다. 선뜻 “가야지!” 소리를 하지 못했다. 통영에서 인천은 시외버스로만 5시간이다. 가야 하는 건 맞는데, 거기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도 앞섰다. 머뭇거리니 “안 오셔도 되지. 얼마 전에 아버지 내려갔다 오셨다며, 얘기 들으니 그때 효도 다 하셨더만”너스레를 떤다. 일단 알겠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에게 전화하니, “오지 마! 뭐하러 와!”하신다. 생신 때 뭐하시냐 물었더니 친구들이랑 장가계 여행을 가신단다. 노옵션 노쇼핑이라 가격대가 좀 있단다. “그럼, 그거 내가 내줄게” 하고 넉넉하게 돈을 보냈다. 안 갈 심산도 있었던 거다. (불효막심!!)
남편 일정을 타진해 보니, 그 전날까지 서울에 있다가 부산 와서 토요일 남해에서 열리는 회사 행사 참여하고 일요일 다시 서울 간단다. 서울에 계속 있으면 같이 가면 되는데, 하필 행사가 겹쳐서 가려면 혼자 가야 한다.
“갈 수 있겠어? 힘들지 않겠어?”
물어보는 모양새가 안 갔으면 하는 눈치다. 아버지 생신 잔치엔 가고 싶은데, 오고 가는 시간 때문에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시간이 며칠 지났다.
남편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 팔십 생일에 우리 애들이 바쁘고 힘들어서 못 온다고 하면 당신 기분이 어떨 것 같아?”
남편은 두말없이 “가시오! 비행기 표 끊어줄게” 한다. 그래,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가야 하는 거였다. 내가 딸의 입장으로 생각할 때는 고민이 되더니,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하니 명료해졌다.
아버지 형제는 다섯이다. 그 다섯 중 둘째는 연을 끊었고, 넷째는 아이가 없다. 아버지의 아들 식구 넷, 셋째의 첫딸 식구가 넷, 둘째 딸의 식구가 셋, 다섯째인 고모의 큰딸은 대구라서 오지 말라 했다 하고, 둘째네 식구가 셋이다. 스무 명의 식구가 모였다. 그냥 밥만 먹는 줄 알았는데, 식당엔 이미 떡과 케이크로 상을 차렸다. 뒤에 현수막과 풍선도 붙였다.
며느리가 준비한 감사패와 오만 원권을 붙인 부채가 등장했다. 저마다 봉투를 아버지에게 드린다. 몸이 불편했던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지킨 집안의 장남에 대한 예우다. 셋째는 아버지와 열 살 터울이고, 넷째는 나와 열 살 터울, 막내 고모는 나와 여섯 살 차이가 난다. 아버지 같은 형이었을 것이다. 형 덕에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치하도 한다. 평소 식구들 불러 밥 먹이기 좋아하는 고모는 자기 오빠를 부둥켜안고 고맙다고 울기까지 한다. 그들 모두 그 한 시절을 잘 살아냈다. 감사한 일이다.
아버지는 해방동이다. 어릴 적 전쟁을 피해 백령도에서 인천으로 피난 왔고, 어려운 살림에 줄줄이 동생들이 딸렸다. 할아버지는 다리 한쪽을 사고로 잃고 병을 얻어 안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생계를 책임진 할머니와 함께 일찌감치 돈을 벌어야 했다. 그 시절 사람들은 거의 그렇게 살았다. 주인공 순자처럼 숱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들을 품은 채로. 피할 수 없는 그들의 운명이자 삶이었기에 순자처럼 순응했던 아버지는 결혼해서도 그 집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 집에 오글오글 모여 살았다.
어린 나이에 시집살이하며 고생한 나의 엄마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 수는 없어’라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딸 한영진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던 순자처럼, 그래서 엄마는 그 시절 감옥에 아직도 갇혀 산다.
왜 울어? 저 아이를 언제 봤다고 저렇게 반겨? 그 시기에 한영진은 매순간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병실을 같이 쓰는 다른 산모나 그의 보호자, 간호사, 의사, 김원상, 시부, 시모, 눈치를 보듯 병실을 다녀간 친정 식구 모두에게 적의를 품었다. 이래 속옷도 없이 씻지도 못한 채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는 몸을 다만 씻고 싶을 뿐이었다. 새벽에 간호사가 혼곤히 잠든 한영진을 깨워 수유실로 들여보낸 뒤 가슴에 아기를 안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바뀐 것 아니냐고 다른 사람의 아기가 아니냐고 간호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아마 엄마는 한영진처럼 모성보다는 자신을 옥죄는 족쇄를 느꼈을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식구 많은 집에 애까지 더해져 일구덕이었을 것이다. 연년생인 동생과 내가 끔찍했을 수도 있다. 그 기억과 감정이 켜켜이 쌓이고 더 이상 감당을 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연을 끊었다. 그 기억을 준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하긴 하다. 자꾸 복기시키는 것 또한 고통일테니. 그나마 오랜 기간 연락을 이어오던 막내 숙모의 전화도 이제는 받지 않는다 한다.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 집에 모였다. 어쩌다 앨범이 나왔다. 엄마의 사진도 그대로 있는데, 그걸 보는 나나 동생네나 아버지까지 모두, 엄마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혼자 사는 아버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만나던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엄마와는 어떻게 할 건지, 지금이야 건강하지만, 더 나이들어서는 어떻게 할건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해야 할 말도 많은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들은 꺼내놓고 이야기하기보다, 흘리듯 이야기하고 주워들은 듯 답한다.
통영에 돌아와 올케에게 전화했다.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감사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니 옷 한 벌값도 보냈다. 아버지 곁에 이런 며느리가 있어 참 다행이다. 아버지 곁에 “오빠 뭐해? 밥 먹으러 와!” 불러주는 호들갑스러운 고모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