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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옥 이보의 삶과 농촌 일상의 전가시
이원걸(문학박사)
1. 머리말
경옥景玉 이보李簠(1629-1710)는 퇴계의 학문을 이어 안동의 임동에서 살아간 인물이다. 그는 벼슬하지 않고 살면서 지방 유학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와 함께 그는 농촌 정서를 한시에 담아낸 시인이었다. 이러한 농촌 정서를 표현한 시를 전가시田家詩라고 한다.
그는 시에서 농촌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을 그려내기도 하며, 한가한 농민의 모습이나 농토에서 땀을 흘리며 성실하게 일하는 농민의 삶을 시에 담아내었다. 그의 사상과 문예적 성과가 담긴 [경옥집 ]은 목판본 4권 2책이다. 여기에 그의 산문과 109수의 한시가 실려 있다. 그의 산문 가운데 유학 관련 논설문은 특히 주목된다. 「유소설儒疏說」은 상소문의 기능과 여론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지금까지 경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의 [퇴계학자료총서 ] 편찬 사업에 의해 [경옥집 ]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선행 연구로, [경옥집 ]의 「해제」가 있다. 이 해제에 그의 생애와 문집 체계, 시 경향이 처음으로 정리되었다. 이어 그의 시도 일부 소개되었다. 경옥은 퇴계의 학문 경향을 가학家學 으로 계승하여 유학자로서 기반을 다졌다.
이 글에서는 경옥의 농촌 의식을 토대로 형성된 시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정리한다. 이와 함께 그의 농촌과 농민에 대한 애정이 반영된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강직한 선비의 전형
경옥의 본관은 진보, 자는 신고信古또는 경옥景玉이다. 그는 현 행정 구역상 안동시 예안면 구룡동 양옥에 거주하다가 만년에 거처를 임동면 대곡으로 옮겼다. 아버지 이장爾樟은 진사시와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유학을 했으며, 글재주와 어진 행실로 칭송을 받았다. 어머니 인동 장씨는 충의위를 지낸 우정友程의 따님이다. 경옥은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었다. 어머니 장씨는 학문과 덕을 두루 갖춘 분이었다. 그녀는 자녀 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가져 자녀의 초학 교육에 힘썼다.
이렇게 유년기를 마친 경옥은 퇴계의 학문을 가학으로 계승한 재종 숙부 개곡開谷 이이송李爾松(1598-1665)으로부터 본격적인 학문을 익혔다. 이이송은 그의 문예가 특출함을 보고,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라며 칭송했다.
경옥은 1676년(47세)에 급제를 하게 되었는데, 과거 응시자들의 난동으로 인해 과장이 난장판이 되었고 급기야 과거가 취소되었다. 이후, 그는 과거를 단념한다. 이후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1691년(63세)에는 사옹원참봉에 제수되어 잠시 부임했다가 곧 귀향했다. 당시 재상들이 그의 품계品階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하여 그는 육품으로 벼슬이 올라갔지만 결국 귀향을 결심했다. 그러자 그를 아는 서울의 친구들은 이를 만류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귀향했다.
그 뒤, 찬성 권흠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경하기를 재촉했지만 그는 끝내 거부했다. 그는 만년에 대곡산에 초가를 짓고, 스스로 ‘경옥산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방걸金邦杰․ 김태기金泰基 ․ 이유장李惟樟 ․유정휘柳挺輝 등과 교유하였다. 이밖에 수십 명 인사들과 함께 노인회를 조직하여 산수를 유람하며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 때 남긴 시를 모은 것으로, [고운사계첩 ]과 [기산사계첩 ]이 있다고 하는데, 현재 문집에 이러한 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경옥의 처사적 생애를 엿볼 수 있다. 그는 경옥산인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어려운 신세를 탓하지 않고, 향리에서 이웃과 좋은 관계 속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했다. 그리고 그는 따뜻한 인간애와 강직한 선비 형상을 지녔으며, 세상의 영욕에 대해 초연했다. 만년을 이렇게 보낸 경옥은 1710년 82세의 일기로 처사의 생을 마감했다.
이어 그의 따뜻한 인간적인 모습을 정리한다. 그는 가족과 이웃에게 따뜻한 애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한 번은 장인이 빈궁하게 사는 그를 보고 집과 땅을 마련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제안을 마다하고 맏형과 한 집에 살기를 희망했다. 그는 형과 함께 20년 동안 함께 살면서 늘 화목하게 지냈다.
그리고 그는 경옥산으로 들어갈 즈음, 땅과 노비를 형제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이웃 사람이나 친척 중에 불우한 형편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귀천을 막론하고 사랑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는 집안사람들에게 매로 노비를 다스리는 것을 엄금하고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기를 당부했다.
아울러 그는 향리에서도 늘 모범적인 생활을 실천했다. 관청에서 세금 고지서가 나오면, 그는 누구보다 먼저 납부했다. 아울러 그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과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고 속된 풍습을 슬퍼하였다. 그는 선비들이 본분을 망각하고 이단에 현혹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는 유학의 진흥과 지방 서당 교육의 활성화를 통한 유교적 덕목을 갖춘 인간을 양성해 이 사회에 유교적 덕목을 구현해 줄 것을 역설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강직한 선비였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어 경옥의 전가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3. 소 등에 피리 부는 목동
경옥은 농촌 일상의 모습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했다. 이와 함께 농민의 전원적 생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이러한 경옥의 시 분석에 앞서 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기로 한다. 경옥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농촌에서 전개되는 여러 가지 모습을 자세하게 시에 옮겨 놓았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여 그 변화와 추이를 시에 그려내야 한다는 사실주의적인 입장과 통한다. 이러한 관점은 다음 시에서 확인된다.
푸른 저녁연기 피어오르는데
목동은 피리 불며 언덕 길 내려오네.
태평한 세상 이처럼 즐거우니
소 등 타고 가는 데로 맡겼다네.
弄去烟蕪綠
吹來草逕斜
太平無限樂
牛背一任多
저녁 무렵 연기가 피어오르는 농촌의 저녁이다. 집집마다 저녁밥을 짓는 풍경이다. 마을의 연기가 모여 산허리를 길게 두른다. 그 무렵, 소에게 풀을 먹이던 목동도 귀가를 서두른다. 애써 서두를 것도 없다. 풀을 배불리 먹은 소등을 타고 비탈길을 내려온다. 그는 피리를 불고 있다. 너무 흥겹고 평화롭다. 이즈음, 소와 목동은 평화로운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된다. 목동은 소가 가는 데로 몸을 내맡긴다. 굳이 채찍이나 회초리를 들 필요는 없다. 소는 이미 가야 할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동양적인 미학이 담겨 있다. 조용한 가운데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경지가 드러난다. 소가 집으로 가는 길을 이미 알기 때문에 목동은 소등에 올라타고 흥겹게 피리를 분다. 누렁 소도 목동의 피리 소리에 때문에 절로 흥겹다. 목동의 피리 소리와 누렁 소의 방울 소리는 저무는 조용히 저무는 시골 마을 언덕을 요란스럽게 한다.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정경이 절로 드러난다. 다음 시는 비가 그친 산촌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안개가 산을 두르고 비가 들판을 적시자
푸른 시내 고운 풀 냇물 따라 파릇파릇하여라.
해 기운 주막에 황혼이 깃들고
들 밥 나르는 아이는 돌다리 건너네.
淡霧籠山雨洗郊
緣溪芳草綠迢迢
日斜野店黃昏近
送飯隣兒渡石橋
비 온 뒤의 산촌의 모습이다. 산안개가 피어오를 즈음, 한 줄기 비가 산촌에 내렸다. 비가 내려 온 산천을 머리감긴 것처럼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그 무렵 하늘의 맑은 햇살이 깨끗한 산천을 더욱 빛나게 해 준다. 여인의 머릿결에 윤기가 나는 것처럼 아름답고 눈이 부시다. 시인은 황혼이 깃들 무렵, 그의 시선을 주막에서 냇가로 옮긴다.
그런데 시인은 문득 들 밥을 들고 조심스럽게 돌다리를 건너는 아이를 주목한다. 아직도 해가 완전히 기울기엔 다소 이른 시각이다. 비가 그친 오후의 들녘은 갑자기 일손이 바빠졌을 것이고, 해가 기우는 것도 농부들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가 해 질 무렵 들일에 열중하는 식구들에게 새참을 날라주는 것이다. 아이가 가는 저쪽에는 가족들이 땀을 흘리며 농사일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이 아이는 그런 가족들의 푸근한 정을 보여준다. 다음 시는 황소를 의인화하여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
아침엔 위 언덕 밭 갈았구요
저녁엔 아래 언덕 밭 갈았어요.
이렇게 수고했으니
백 짐은 넉넉히 거둘 터인데
싸늘한 콩깍지 여물만 주시니
이렇게 대접해도 되나요?
朝耕上原田
暮耕下原田
服勞良已多
收禾可百廛
草草其豆冷
酬功寧稱旃
황소 한 마리가 등장한다. 당시 황소는 우리 농촌에서 근로의 역군이었다. 황소가 오전에는 위 언덕 밭을 갈고, 오후에는 아래 언덕 밭을 갈았음에도 불구하며 저녁 식단이 서늘한 콩깍지 대접이라며 불평을 드러낸다. 주인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황소를 의인화하고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성공적으로 그려내었다. 산속 밭은 평지의 밭보다는 근로 여건이 좋지 않다. 산간 밭은 돌이 많기 때문에 밭가는 농부도 매우 힘겹다.
앞에서 힘을 들여 밭을 가는 황소에겐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힘든 산속의 밭을 갈다가 가끔 쟁기를 부러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황소의 고충은 생각해 주지 않는다. 힘겹게 앞서서 밭을 가는 황소에게 매질을 하거나 호통만을 치기 일쑤이다.
시인 경옥은 미물의 황소를 주목했다. 시인에게 힘들여 밭가는 황소의 모습이 애처롭게 비쳐졌을 것이다. 농부의 눈에는 이러한 황소의 아픔이 보여 지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객관 대상을 주체화하여 그들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시인이기 때문에 황소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다. 하루 종일 힘들여 일한 황소에게 제공되는 저녁 여물이 너무 소박하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 농부가 얄미운 것도 이 때문이다. 미물의 황소를 들어 그들의 불만을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이 시가 농부를 심하게 나무라자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은 아니다. 농부가 그런 황소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주문도 담겨 있지만 이 시의 무게 중심은 부지런히 일하는 농촌 일상 표현에 있다고 본다. 황소 못지않게 농부도 매우 힘든 노동을 했다. 이 시의 주제는 노동의 미학이다. 황소를 의인화하여 흥미롭게 표현한 것이다. 다음 시도 농촌의 한 때 풍경화를 그린 것이다.
문 앞에 길손이 오자
주인은 반갑게 맞이하네.
울 밑에서 으르렁거리는 멍멍이
사납게 짖는 성깔이 앙칼지구나.
길손이 손 휘저으며 가 버리자
주인은 발끈하여 얼굴 붉힌다.
도둑 지키는 게 네놈 직분이거늘
손님보고 짖는 건 무슨 심술이냐?
門前客下馬
倒屣主人迎
狺然當籬竇
逆吠性頗獰
客子揮手去
主人騂顔生
警盜乃爾職
吠客復何情
우리의 농가 모습이다.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을 대화체로 표현했다. 울타리 밑에서 졸던 멍멍이 놈이 찾아 온 외간 남자에게 성깔을 부려 주인 나리에게 혼이 난다. 주인은 찾아오는 길손이 반갑기 그지없어 황급히 맞이하려고 한다. 하지만 연유를 모르고 냅다 짖어 대는 멍멍이 놈 때문에 일을 망쳤다. 길손이 떠난 무대엔 주인과 멍멍이만 남았다. 주인의 화난 얼굴, 멍멍이의 민망해 하는 모습만 여운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멍멍이는 제 나름대로 역할에 충실했다. 낯선 사람이 오면 짖는 것이 제 본연의 임무이다. 그런데 주인은 그의 행동이 그릇되었다고 꾸중만 한다. 어쩌면 주인이 그릇되고 멍멍이가 바르게 행동한 셈이다. 시인은 이처럼 멍멍이의 입장을 들었다. 멍멍이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낸 것이다.
주인에게 그 손님이 익숙한 얼굴일지 몰라도 멍멍이에게는 낯선 사람으로 인식되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멍멍이의 행위는 도리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경옥 시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경옥은 미물을 인격화하여 그들의 심성을 시에 반영한 것이다. 다음 시는 근로하는 농민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른 아침 풀 베러 산을 오르니
새벽빛 흐릿하여 마을조차 분간 못하네.
저녁에 풀 베어 산을 내려오니
집집마다 사립문 닫았네.
풀 위의 이슬 적삼을 적시고
풀 사이 모기가 두 다리 쏘아 대네.
험한 돌길에 진흙마저 미끄러운데
무거운 짐 진 지친 몸은 넘어지기 일쑤지.
묻건대 풀은 베어 어디 쓰려함이오?
가을엔 보리농사 봄엔 벼농사 위함일세.
나락 가리 산 같고 보리 더미 구름 같아
추수한 곡식이 창고에 넘쳐 나겠네.
朝折草上山阿
曉色曚曚迷宿
莽暮折草下山阿
里巷家家扃外戶
草頭濃露濕短衫
草間惡虫螫兩股
石逕嵯嵯泥又滑
負重身疲或顚仆
問汝折草何所爲
秋爲種麥春秔稌
秔稌如山麥如雲
收聚穰穰滿倉庾
풀 베는 농부의 건강한 삶이 돋보인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풀베기는 어둑해질 무렵에 마무리된다. 부지런한 농부는 이른 새벽부터 농사의 밑천인 풀베기 작업에 몰두한다. 새벽이기 때문에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 농부는 하루 종일 풀베기 작업을 마치고 밤이 되어 다시 마을을 찾는다. 집집마다 사립문을 닫았다는 표현에서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마저 옷깃을 적신다고 했다. 밤 시각이 꽤 경과된 시점이다. 그만큼 부지런한 농부는 풀을 베는 일에 열중했다는 의미이다.
이어지는 중반부에는 풀베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농부의 지친 모습의 절실한 표현이다. 이슬에 젖은 적삼, 달려드는 모기떼, 돌길과 진흙길은 지친 그의 짐을 더욱 무겁게 느끼게 한다. 등에는 한 짐 가득 풀 짐을 지고 있다. 그러나 농부는 전혀 힘겹게 여기지 않는다. 한여름에 땀 흘리는 수고는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위함이라며 기뻐한다. 퇴비는 가을보리와 벼농사의 밑거름으로 토양을 기름지게 할 뿐 아니라 풍년을 위한 농부의 알뜰한 살림 밑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옥의 농촌 목가적 정서와 근로하는 농민을 형상한 정서는 농민의 고단한 삶을 주목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4. 고단한 농민의 삶
경옥의 농민들에 대한 관심은 점차 대사회적인 것으로 확대되고 있다. 경옥은 여름철 가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농민의 아픔을 시에 담아내었다. 이는 농민층에 대한 경옥의 관심일 뿐만 아니라 향촌 사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가뭄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농민들을 주시한 작품이다.
가을부터 겨우내 눈비 오질 않아
길가엔 먼지만 자욱하다네.
마른 보리의 싹은 생기 없고
샘마저 바닥이 나서 마실 물 없구나.
고목에 모진 바람 몰아치고
주린 새는 마른 이끼를 쪼아 먹네.
세상만사 모두 삭막하니
그 언제 좋은 시절이 올까.
秋冬慳雨雪
行路漲塵埃
枯麥無生意
乾泉不滿杯
凄風號古木
飢鳥啄殘苔
景色還蕭索
陽和幾日來
시인은 모진 가뭄이 계속되는 동안 그 여파가 도처에 미쳤음을 알린다. 길가에는 뽀얀 먼지가 일어나고, 보리 싹은 말라 살아날 가망이 없다. 마른 샘, 모진 바람, 주린 새 모두는 암울한 상태를 나타내 주는 시적 소재이다. 가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대상은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다. 미물도 이러한 고통을 함께 당하고 있음을 그려낸 것이다. 주린 새는 말라비틀어진 고목의 이끼를 쪼아 먹는다.
하지만 그것이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주린 새를 들어 가뭄으로 인해 기근에 허덕이는 농민층의 어려움을 더욱 극명하게 표현했다. 시인은 이 어려운 현실을 헤쳐 갈 적절한 방도를 모색하지 못한다. 다만 하늘의 도움만 의지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구에서 좋은 시절이 오기만을 기약하였다.
여기에도 미물에 대한 경옥의 관심은 여전하다. 주린 새가 마른 이끼를 쪼는 광경을 포착했다. 그의 애민
정서가 인간과 미물에까지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시는 도토리가 굶주림을 구하는 식품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기뻐한 시이다. 이 시에도 경옥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상수리 숲의 가을 열매 서리 맞아 떨어지니
금 구슬 같은 도토리 알맹이 광주리에 담네.
땔나무 태워 문드러지게 삶고
소금 콩 함께 넣어 찧으니 맛이 간간하구나.
흉년들어도 나는 부자 같고
가난한 집마다 양식이 있어 기쁘다네.
귤이랑 명자 열매 맛있다 말 마소.
목숨 살리는 도토리 공은 맛난 음식과 같아요.
橡林秋實坼霜房
箇箇金丸拾滿筐
爇盡車薪烹欲爛
搗和鹽豆味堪嘗
不虞饑歲吾方富
且喜窮村各有糧
綠橘甘楂君莫道
活人功可比膏梁
시인은 도토리 열매를 삶고 찧어서 소금과 콩을 곁들여 굶주림을 면하는 식품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매우 기뻐하였다. 귤과 명자 열매가 비록 일시적으로 미각을 자극할 지라도 흉년을 넘기는 구황救荒 식품인 도토리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경옥은 농민의 삶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그만큼 농민층과 밀접한 의식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피부로 느낄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의 생각을 이처럼 절실하게 시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시는 물 긷고 나무하는 여자 아이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앞 냇가 꽁꽁 얼어붙었으니
물 긷는 아이 근심으로 숨이 끊어질 듯
언 손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데
북풍은 어찌 그리 매서운지요.
얼음판에 자빠져 질동이를 깨어버렸고
바람결에 베치마가 찢어졌구나.
솥바닥엔 먼지만 일어나고
찬 부엌에 연기도 피지 않네.
독엔 남은 건 싸라기 한 줌
멀건 죽은 숟가락에도 걸리지 않아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야 하니
내일도 다를 바 없다네.
세상살이 이처럼 괴로우니
일찍 못 죽은 게 한이라네.
어떻게 해야 용안 같은 화가를 데려와
이 사정을 그려 하나님께 올릴꼬?
前溪凍不流
汲兒愁欲絶
阿手不勝寒
北風何更烈
陶甌倒氷碎
布裙吹幅裂
釜乾塵欲生
廚冷烟未起
窄糠僅盈掬
稀粥難綰匙
忍飢又忍寒
明日復如是
人生此爲苦
惟怨不速死
安得龍眼手
圖上天門裏
시인은 물 긷는 여아女兒의 고달픈 삶을 주시했다. 이 시는 모두 3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첫째 단락에서는 냇가에 물을 길으러 가서 어려움을 당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꽁꽁 얼어붙은 강물, 북풍, 깨어진 질동이, 찢겨진 삼베 치마 등 여아 혼자서 견디기 어렵다. 둘째 단락에서는 더 궁핍한 광경이 벌어진다. 여자 아이는 멀건 죽으로 목숨을 이어가며 굶주림과 추위를 겪고 사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는 탄식을 하고 만다.
이 어려움은 셋째 단락에 가서 해결된다. 그 해결책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다. 경옥은 중국의 유명한 화가 용안龍眼을 불러 이 어려운 상황을 그대로 그려 하나님께 올려 호소하는 것이 좋겠다며 스스로 위로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에 대한 탄식만 할 뿐이다. 여인의 독백 이면에는 주림과 추위에 얼룩진 아픔이 스며있다. 다음은 나무하는 아이의 슬픈 고백을 표현한 시이다.
나무하는 아이 새벽 산을 오르는데
산길이 얼음과 눈으로 미끄럽구나.
가시에 찔려 짚신은 뚫어졌고
돌부리에 걸려 옷은 찢어졌네.
다리는 후들거려 넘어질까 두렵고
손은 뻣뻣해 나무 줍기도 어렵구나.
나무를 주었지만 짐을 채우지 못해
집에 오자마자 주인 나리 불호령일세.
어제는 바람이 몹시도 거세더니
오늘은 눈발마저 흩날리네.
날마다 이같이 매서운 날씨
어느 때에 추위가 풀리려나.
허리에 낫 차고 다시 산을 오르니
억지로 노래 불러도 흥겹지 않네.
노래 가락 흥겹지 않고 속만 타니
슬프고 서러운 내 신세.
樵兒曉入山
山路氷雪滑
草履鍼棘穿
石角鉤衣裂
脚澁畏顚仆
手凍艱採薪
採薪不滿擔
歸遭家長嗔
昨日風正惡
今日雪又飛
日日每如此
何日寒解圍
腰鎌復上山
强歌聲無懽
聲無懽意甚苦
嗚呼足悲酸
나무하는 아이의 탄식이다. 시에 등장하는 아이는 어린 종이다. 종의 삶은 고달프다. 종은 집안 잡일뿐만 아니라 땔감도 마련해야 한다. 어린 종은 엄동설한에 땔감을 구하러 새벽 산에 올라간다. 눈 내린 겨울 산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뚫어진 짚신, 찢겨진 옷은 나무하는 아이의 고난을 가중시킨다. 그나마 간신히 땔감을 주워 왔건만 주인 나리의 안목에 차지 않아 불호령을 당하고 다시 등산해야만 한다.
후반부는 어린 종의 서러움이 집약된 부분이다. 아이는 눈을 무릅쓴 채 허리에 낫을 차고 다시금 등산한다. 이 부분에서 주인의 학대에 시달리는 종아이의 서러움이 강하게 전해진다. 서러움에 복 받힌 나머지 노래나마 불러 속사정 털어 버리려고 해도 역시 흥겹지 못하고 도리어 속만 탄다. 여기서 주인와 종의 관계 속에서 주인의 일방적 횡포에 잔인하게 억눌리는 종의 서러움을 읽어 낼 수 있다.
특히, 경옥의 「급아탄汲兒歎」과 「초아탄樵兒歎」은 사회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나무하는 아이의 탄식」은 18세기 신광수申光洙(1712-1775)의 「채신행(採薪行)」에서 맨 발로 나무하던 여종이 차돌에 부딪혀서 다리에는 피가 흐르고 낫마저 부러뜨려 주인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고 서러움을 하소연하는 것과 동일한 시상의 전개이다. 이러한 경옥의 연민정서는 가뭄을 극복하고자 수맥을 찾느라고 고생하는 농민의 형상화로 집약되고 있는데, 5언 장편 52구의 「구한탄(久旱歎)」에서는 가뭄으로 인해 산촌 백성이 겪는 고통을 묘사했다.
경옥은 처음엔 조정에 나아가 세상을 경륜할 포부를 지니기도 하였지만 뜻밖의 과거장의 난동으로 벼슬길을 포기하고 향리로 돌아와 한평생 처사處士의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경옥은 평생 전원에 은거하며 전원의 정취에 흠뻑 젖어 전원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때로 낭만적으로 전원을 노래하기도 하고, 현실 문제를 사실적인 안목으로 시에 담아내었다.
경옥의 시를 관류하는 의식은 처사적 애향 의식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농촌에 대한 관심이 특별하였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으로 그가 당면하고 미적으로 체험한 것을 평이한 시어를 동원해 시에 담아내었다. 그래서 그는 국토산하의 아름다움을 시에 그려내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농민들의 이야기를 시로 표현했다.
5. 마무리
경옥은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여 처사의 삶을 살아 간 인물이다. 그는 처사의 삶을 살며 지방 유학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경옥은 농촌 자연 산천에서 전개되는 만물의 모습을 세심하게 시에 그려내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사물에 대한 정확한 면모를 주시하고 그 작은 움직임과 이동해 가는 모습을 관찰한 뒤에 참모습을 시에 담아야 한다는 사실주의적 입장과 통한다.
경옥은 이러한 관점에 따라 고운 정감의 시를 남겼다. 경옥은 목가적 농촌 정서에 깊이 젖어 전통적 우리의 농가 모습을 시에 담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 두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개와 닭이 울며 부산한 농촌의 면모와 땀 흘리며 근로하는 농민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그려내었다.
이러한 경옥의 농촌 정서는 급기야 농민들의 삶의 고단한 현장으로 시상이 확대되어 도토리가 구황 식품으로 애호되고 있음을 기뻐하기도 하며, 물 긷고 나무하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의식을 보여 주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장편시 「구한탄」이다. 산촌 백성들이 수맥을 찾느라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경옥은 이 시에서 위정자들의 선정 구현과 백성들을 위한 정치 실현을 선망한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결국 그의 시를 지배하는 것은 향촌과 자연에 대한 애정 의식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향촌에 대한 관심이 유별하였으며, 현실적으로 그가 당면하고 미적으로 체험한 것을 평이한 시어를 동원해 시를 창작하였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 향촌의 아름다움과 멋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농민의 정서와 아픔이 그려질 수 있었다. 이로써 그에게서 문예지향성이 강하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뛰어난 감수성과 사실적 안목으로 고운 한시를 창작한 시인이며, 향촌의 성리학 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