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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이레’(9:20~27)
이제 우리는 다니엘이 예언한 칠십 이레에 관한 의미와 더불어 위에 기술한 연대기를 배경으로 하여 칠십 이레의 예언에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칠십 이레’는 대부분의 보수주의 성향의 주석가들은 이것을 490년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칠십 이레에 관한 역사적인 의미와 더불어 연대에 관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칠십 이레의 시작과 끝에 관한 언급과 함께 메시야 예언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단9:25)
여기서 일곱 이레는 49년을 의미하고, 육십이 이레는 434년에 해당하므로 총 483년의 기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분리한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칠십 이레의 시작이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날 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예언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중건 명령은 언제 내려졌는가? 그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들이 있었다.
첫째, 성전을 재건하라는 고레스의 칙령(대하36:22~23, 스4:1~4, 6:1~5)
둘째, 아닥사스다의 칙령(스7:11~26)
셋째, 예루살렘 성 재건의 권한을 부여하며 느헤미야에게 내린 아닥사스다의 칙령(느2:1~8)
첫 번째의 견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조이스 볼드윈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구분하지 않을 경우는 BC 538년 고레스가 내린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해석의 출발점이 된다. 구분할 경우는 느헤미야 시대가 출발점이 될 것이다(느2:5, BC 445년). 이 가운데 첫 번째 견해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스룹바벨과 함께 본토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건했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적 여건을 감안한다면 지배국의 왕이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는데 귀환자들이 그것을 어기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한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견해를 가진 대표적인 사람은 글리슨 아처로 그는 아닥사스다가 에스라를 귀환시킨 궁극적인 이유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BC 458년을 출발점으로 계산하여 첫 49년을 BC 409년으로 계산하며, 바로 이어 434년간의 기간을 AD 26년으로 계산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25절의 기간에 대한 정확한 계산일 것이다. 요단강의 세례에서 예루살렘에서의 죽으심과 부활까지의 그리스도의 공적인 사역은 약 3년에 걸친 기간이었음이 확실하다. 아닥사스다의 영이 선포된 시점에서 483년의 기간은 ‘통치자로서의 메시야가 오신’ 해인 주후 26년까지였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우리가 받아들이기엔 다소 찜찜한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BC 445년을 칠십 이레가 시작되는 시점인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있었던 해로 간주한다. 이는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려 유다 총독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중건에 관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느헤미야서 2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이 된 것이므로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메시야가 오시는 해가 AD 38년이 된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BC 4년경 탄생하여 AD 26년경 공사역을 시작하시고, AD 30년경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셨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예언의 연도가 딱 맞게 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편,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칠십 이레’의 출발 연대를 다니엘서에 기록된 페르시아 왕의 예루살렘 중건 명령과 동일한 것으로 확정지어 이해할 수 있을까? 혹시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또 다른 시기에 그와 유사한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주로 보수주의 학자들의 견해로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죽음과 부활의 연도를 맞추기 위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BC 445년의 중건 명령에 앞서 BC 487년경에 그 명령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한다. 물론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BC 536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1차 본토 귀환이 있은 지 거의 백 년이 지난 BC 445년에 예루살렘 중건을 처음으로 명령한다는 것은 그 공백이 너무 길다.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봉헌된 것이 BC 516년이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어떤 때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내려졌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페르시아 제국과 관련된 당시 국제적인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완성되고 봉헌할 시기의 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였다. 그는 호전적인 인물로 BC 492년 그리스를 공격하여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의 군대는 에게해 북쪽 바다를 건너 ‘트라키아’를 공격하지만 거센 폭풍으로 인해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 그는 BC 490년 또다시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지만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다리우스 1세는 동쪽으로 상당히 넓은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서쪽 세계를 향한 정복 야망을 가졌던 그는 몇 차례의 원정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두 차례의 그리스 원정을 실패한 후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의 동향과 독특한 민족성을 가진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유대인들의 민심 이반을 우려했을 수 있다. 나중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할 때도 많은 사람들은 그와 유사한 염려를 했다.
그리고 두 차례 승리를 맛본 그리스인들이 지중해를 건너 이스라엘 지역을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였을 수도 있다. 해상활동과 해상전투에 능했던 당시 그리스 군대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예루살렘이 그리스인들의 수중에 떨어지면 이집트에 대한 페르시아의 관할권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양한 이유와 함께 다리우스 1세는 BC 487년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유명무실하게 되고 말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결국 그 후에 페르시아 제국의 유다 지역의 총독 느헤미야를 통해 실제로 예루살렘 성벽이 보수되었다.
이런 견해를 염두에 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쉽게 연관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출생하실 때부터 왕으로 오셨다. 그는 나중에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왕이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찾아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냐?”(마2:2)라고 물은 것과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고 경배한 것은 처음부터 그의 왕위를 받아들인 것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왕으로 확인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육십구 이레(483년)가 지나면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일어나게 된다고 한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이 차면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메시야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약속이 제시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기한을 정해주셨다는 사실은 역사적 구체성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육십구 이레에 대한 정확한 기간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 가운데는 이미 구체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예루살렘 중건에 대한 명령이 있은 후 육십구 이레가 되면 이 땅에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신 메시야가 오시게 된다는 사실이다.
메시야를 대망하던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기다렸던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다니엘의 ‘칠십 이레’ 예언과 연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당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여가 있었겠지만, 성경을 통한 계시적인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방에 있던 박사들 곧 다니엘서를 연구하던 서기관들은 육십구 이레의 마지막이 되는 그때쯤에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니엘서에는 육십구 이레라 하지 않고 칠 이레와 육십이 이레를 분리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있은 후 칠 이레, 즉 49년 동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만일 칠십 이레가 BC 487년에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내려지고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면 그로부터 칠 이레, 곧 49년 후인 BC 438년까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때는 과연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기였을까? 그 시기는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제사를 드렸지만, 성벽이 허물어진 상태였으므로 거룩한 성전이 보호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중건되고 성벽이 보수됨으로써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이 회복되어 갔던 것이다.
다니엘서 예언 가운데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때’는 과연 언제일까? 이는 아마도 성이 중건되는 동안 반대파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될 형편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라는 말속에는 예루살렘 성내는 질서가 회복될 것이지만, 외부적으로는 공격이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성벽을 중심으로 안팎에 선명하게 구분됨을 의미한다. 이 말은 에스라의 율법 교육과 더불어 민족적 정체성 회복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기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칠십 이레의 예언이 메시야와 직접 연관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영원한 왕이 이 세상에 오게 되지만 죄에 빠진 악한 세상은 그를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그에게 상당한 고통이 따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다니엘서는 칠 이레와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야가 도래하지만, 그가 곧 끊어지게 될 것을 예언했다.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9:26)
이 본문에서 육십이 이레 후는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난 다음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칠십 이레의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초림과 직접 연관된다. 그런데 그때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오게 되지만 곧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오시게 되면 오랜 기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끊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우리는 본문 가운데 사용된 ‘끊어져 없어진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생명이 끊어지는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글 성경들 가운데는 그 문구를 ‘죽음’에 연관된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물론 주석이나 해석에 있어서는 대개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갑작스런 은닉’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영어 성경에서는 그가 끊어진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없어지게 된다는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아기 예수께서 이집트로 피신하신 후부터 삼십 년이 지나서 공 사역을 시작하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출생하셨을 때 헤롯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영아살해 정책을 폈다. 그는 아기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를 찾아 죽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부모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시키셨다. 그 사건을 두고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는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 연관된 사실도 언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후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죽음에 연관된 그의 끊어짐만 언급되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리고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게 된다는 말은 로마 제국의 황제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언급될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에 해당하는 삼 년 반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AD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Tites)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것과 직접 연관된다.
이어서 성경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한 악한 통치자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에게 속한 악한 자들이 상당한 세력을 펼치는 듯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이 예언된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는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며 황폐하게 될 것이 작정되어 있음이 예언되었다.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 왕국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은 인간 역사 가운데 늘 지속된다. 다니엘서에는 그 전쟁이 세상 끝까지 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그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로 장식하게 된다.
다니엘의 칠십 이레 예언 가운데는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온 이후에 일어나게 될 그의 사역에 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구체적인 메시야 사역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다. 이는 물론 위에 언급한 다니엘서 9장 26절에 있는 말씀에 대한 보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9:27)
본문에 언급된 ‘그’는 메시야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가 장차 많은 백성들에게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한다. 그런데 그는 그 이레, 즉 칠 년의 절반의 기간에 해당하는 삼 년 반 동안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게 된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앞의 9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끊어져 없어졌던 메시야가 공 사역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드러나는 것과 연관 된다. 즉 그는 배도에 빠진 헤롯 왕의 악행으로 인해 약 삼십 년 동안 은닉한 후 세례자 요한의 사역을 통해 공 사역(AD 27~30)을 시작하셨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 이레의 절반 곧 삼 년 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7절의 상반절에 기록된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라고 기록된 말은 예수님의 공 사역 기간에 발생하는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
삼 년 반 정도의 공 사역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성전 제사와 예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선포하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제사장이며 제물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전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을 잡아 번제와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예루살렘에 두고 그를 배척하여 성전에 동물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소행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삼 년 반이 지난 후에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로 바쳐져 구약 언약을 완성하시게 된다.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 칠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시간적으로 연결된 개념이라면 마지막 한 이레는 그렇지 않다. 그 이레는 나중에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7절 하반절에 나타나는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는 말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앞둔 약 3년 반 동안 있었던 유대 반란(AD 66~70)에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본문에 나타난 ‘가증한 것’이란 헬라 계통의 안티오코스 4세인 에피파네스가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한 일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 후에 나타난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마태복음 24장 1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과 연관 된다.
이 기간 동안 유대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들은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다니엘서 12장 7절에 기록된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는 예언과 연관 된다. 이 말은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메시야가 통치하는 새로운 왕국의 설립으로 인한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다니엘의 칠십 이레 가운데 육십이 이레가 마치는 시점을 인간의 몸을 입고 왕으로 오신 메시야의 탄생으로 본다. 그리고 그는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등장해 삼 년 반 정도의 공 사역을 하시게 된다. 그것이 다니엘서의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인 삼 년 반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그로 인해 사십 년간의 사도교회 시대가 진행되며 메시야 왕국인 보편 교회 시대의 기초를 놓게 된다. 즉 앞의 삼 년 반은 이후 따르게 되는 사십 년의 사도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십 년이 끝나갈 무렵 다시 한 이레 가운데 절반인 나중 삼 년 반의 구속사적 실행이 이루어진다. AD 70년을 앞둔 삼 년 반 동안 또다시 배도자들인 유대인들과 불신자들인 로마인들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겪은 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된다.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인 새로운 보편 교회가 설립되게 된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의 삼 년 반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장래 세워지게 될 하나님의 보편 교회의 기초가 됨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 기간을 연대기적으로 확정 짓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주장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선상 위에 하나님의 메시야 예언을 두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구체적인 연대를 알 수 없다고 해서 그 시기 자체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다. 대신 그에 대한 연대기적인 관심을 기울이되 하나님 앞에 더욱 낮아지고 겸손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