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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 15 (하연)
부산의 기장....
바다와 가까운 이곳....
자그맣게 솟아있는 오밀조밀한 회색 건물들이 나의 가슴한곳을 자극한다..
감상적으로 흐르지말자! 안됀다구 유하연.
다짐을 해봐도....
이미 두 손바닥은 추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땀으로 촉촉히 젖어있다...
어렵지 않게... 약속장소인 카페를 찾아냈고, 작은 유리문을 열었을때
울리는 청명한 벨소리에 아득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빨간 갓을 쓴 작은 조명이 검은 썬그라스를 쓴 여인의 얼굴을 신비스럽게 비춰주고
있고, 한쪽 다리를 올려 꼰 두 다리의 윤곽은 꿈에도 지울 수 없었던,
여전히 거만한 자태 그대로다....
초조한듯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옆 얼굴선은.....
나의 고개를 떨구게 만들어버렸다...
이한솔...
4년간이나 날 얼어붙게 만들었던 그 이름하나가...
이토록 아프게 또다시 날 찾아왔다...
끊긴거라고.... 이미 연은 끊어져버렸다고... 그러면서도 언젠간 다시 돌아올거라고..
자기연민과 저주에 허우적대고 있던 나를...
또다시 강렬하게 흔들고 있다...
그녀의 앞에 서자, 얼굴을 들어 썬그라스를 쓴 눈으로 날 바라본다....
검은색의 유리알너머로..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흔들리는것을... 느낀다..
"저,저기... 왔네..... 앉아..."
한솔은 당황스러운듯 허둥대다가 서둘러 나에게 앉기를 권했다...
".. 오래있진 않을꺼야."
"미안해... 널 부산까지 불러내서..."
".... 그래.... 민우는..... 잘 있니?"
"어?... 어...."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처럼 가슴속으로 꽂혀온다..
한마디 한마디에.... 움찔하며 깜짝깜짝 놀라고있다....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사람의 아내가 되어.. 내 앞에 앉아있는데....
이런상황에서... 어떻게 미소를 지을 수 있겠어....
"... 나........ 원망 많이했지?"
"그래.... 당연하잖아..."
".... 정말... 너한텐 미안하다......."
"... 사랑했었니?"
"응?"
"민우를... 사랑해서 함께 떠난거였냐구"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상처를 이번엔 내가 잔인하게 뭉게버리고있다...
그 아픔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져버린다..
"글쎄..... 사랑이.... 뭔지..... 자신이 없어졌었어...."
"그게뭐야! 그따위 이유로 잘 알지도 못한 민우와 떠난거였어?
특별히 사랑한것도 아니면서?"
한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담배를 입에문다...
"널.... 많이 사랑했어..... 알고있지?"
"그래! 나도 그렇게 믿었었어... 너가 날 사랑하고있다고 말이야...
그 믿음의 댓가가 이렇게 황당한 결과로 돌아올줄은 몰랐던거지만..."
"미안해..... 날 저주해도 좋아..."
"이미 수백도 널 저주했어... 하지만, 지나버린 일이잖아?
나에게 사과도 하지마! 그런걸 원하진 않아"
"하연아..... 믿을지 모르겠지만.... 널 너무 사랑해서 떠났던거야....
사랑이... 자꾸 집착으로 변해서..... 날 견딜수가 없어졌어..."
"웃기는소리 하지마! 너무 사랑해서 떠났다구? 날 끝까지 가지고놀고싶니?
사랑해서 떠난다.. 라는건 존재하지 않아....
정말 사랑하면, 절대 떠날 수 없어!"
"... 하지만 난 그랬어..."
"난 믿지 않아"
"...... 그래.... 믿으라는 강요는.. 하지 않을께... 그냥..
너에게... 그 말은 꼭 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불렀던 거야...
유하연..... 널 생각하지 않았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어...
정말.. 보고싶었는데... 차마 찾아갈 수 없었던... 날... 알아줬으면 해서..."
썬그라스 사이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한솔...
너가 이제와서 그런말을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니?
잡을수도 없는 널....
또다시 죽도록 그리워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무책임한 말들을 던지는거야?
"유하연........ 정말 보고싶었다......"
와르르.... 무너진다....
죽어도 누구에게도 기대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특히나.... 한솔에겐 절대 다시는 마음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마디의 말로...
4년간의 맹세를 산산조각 내버린다.....
"돌아와라 이한솔"
한솔이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들이 앞으로 쏟아져내렸다...
"하연아....... 나도 후회해.... 왜 너에게서 도망친건지.....
왜 다시 너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건지..... 몇번이나.. 죽고싶었어.....
지금도... 널.... 사랑해.....
하지만, 지금 내겐...... 나에게 헌신을 다하는 민우가 있고,..
나의 아들인 상현이가 있어.......
난... 앞으로 절대로 책임감없이.. 배신하지 않겠다고.....
널 버리고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다짐했었어....
........ 그래서... 안돼.......너무 늦어버렸어.......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구......"
눈을 감는다........
너무 아파서....
숨쉬기가 곤란해진다...
이래서... 맹세했던건데..... 이렇게 아픈느낌이.... 견딜수 없어서...
절대... 기대는 말자고.......
기대하지 말자고.......
"하연아....... 몇일만 있다가 가....."
".....그럴 수 없어..."
"몇일만... 단 3일만이라도....."
말할 기운을 모조리 잃어버린 나는...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유하연.... 예전처럼.... 날 안아줘...."
놀라서 바라본 한솔의 눈이... 안타깝게 날 바라보고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을... 거부할 수 없다....
마지막까지도 이기적인 한솔을......
아직까지도... 간절하게 남아있던.... 언제나 내 가슴 깊숙히 잔재처럼
깔려있던..... 나의 그리움을 이용하는.... 한솔을......
젠장... 사랑하고있는건가?...
"음....한 열흘정도 나랑 유럽여행 갈래?
모든 준비는 내가 할께...하연씬 몸만 오면돼!.. 갈꺼지?
출발은 내일 모레야...."
발랄하게 말하던 정민의 모습이....
하연의 얼굴위로 겹쳐진다....
정민을 봤을때........ 한솔의 모습이 겹쳐져서 괴로웠었다...
하지만, 왜 지금 한솔을 보고있는데 정민의 모습이 겹쳐지는걸까?
배려해주는 모습들.....
꽤나 쌀쌀맞은것 같지만... 나에게는 따뜻했던 정민........
사랑하는 한솔을 앞에두고....,
이상하게 정민이 보고싶어졌다....
하지만... 미안해 정민씨....
쌓였던 그리움들과... 추억들을... 난 저버릴수없다구....
정민씨는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지만,
한솔은... 이 자리를 벗어나면.... 끝이라구....
지금만큼은.......... 금기된 모든것을 버리고,
한솔을 바라보고싶어..
단 3일이야.
3일만 날 지옥속에 던져넣을꺼야....
유럽여행은... 그 후에 가자고....
"하연아......"
"응?"
"누구 생각해?"
"아니... 생각할 사람 없어...."
"... 그래.."
"잠깐.... 약속이 있었거든..... 전화좀 할께...."
핸드폰 번호를 모르는 난 114에 전화해 이정민법률사무소를 찾았다....
몇번의 신호음이 가고, 사무직원이 그녀를 바꿔주자 명랑한 그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구? 아! 하연씨~!"
반갑게 전화받는 목소리에..... 한솔을 대할때와는 다르게 마음이 아파온다..
"미안.... 유럽여행... 좀 미루자..."
"무슨소리야?"
"일이생겼어...."
"너 회사도 때려쳤다면서 일은 무슨일!!"
화가 난것처럼 정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 여기... 부산이야...."
".... 부산? 거긴 또 왜간거야!!"
"미안.... 3일후에 올라갈께...."
전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흐른다......
많이... 화났겠지?
그렇게.. 잘해줬던 사람에게 뒷통수 맞는 기분...... 나도 알고있다고...
정말 미안해.... 이런 기분 느끼게 해서.....
"그래. 알았어. 끊어."
전화기가 뚝 끊어졌다.....
"정민?... 내가 너한테 전화했을때 나왔던 이름이네?"
무뚝뚝 하지만,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음성으로 한솔이 묻는다..
"신경꺼.... 동지일 뿐이야..."
"무슨 동지?"
"실연당한... 동지..."
"..... 그래... 자! 나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보러 가야지"
한솔이 애써 미소를 짓고는.... 나에게도 미소짓기를 강요하듯 바라봤기에
나 역시 씁쓸한 미소를 건냈다...
부산의 바람이......
어제처럼.... 날카롭게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옆에서 걷던 한솔이... 슬쩍 내게 팔짱을 낀다....
If --- 16 (정민)
"영국편으로 두 장......특등석........23일출발.............."
전화기 저편에서 경쾌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몇 분 안 되는 그쪽의 시간이 내 심장 고동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
고동소리가 점점 길어지면서...내 심장이 멎어버린다.
"예...., 죄송합니다..오래 기다리셨죠..마침 항공편이 있네요..
대한항공.....괜찮으십니까?.."
"네.."
"내일 3시 출발입니다...즐거운 여행되십시오"
간단한 인사멘트와 함께 예약번호를 받아 적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됐다..하핫!"
전화를 끊고는 어린애처럼.....그렇게 기뻐하면서.....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음...치약..칫솔...옷가지...또...또...,뭐가 필요하지?"
여행 물품을 챙기며.....간단한 거라도 두개씩 챙기는 것을 잊지 않으며....,
콧노래와 함께 여행가방이 완성된다..
약간의 갈증....
어느새 간단하게 챙긴다는게...두개의 큰 장기여행용가방으로 변해버렸다.
하연꺼 하나...... 내꺼 하나....
"저기...여기 간단한 마실 것 좀 부탁해"
"네..."
나의 재촉이 무서웠던지....키폰한지 일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얼음을 띄운 오렌지 주스를 들고 나타났다....처음 보는 얼굴이다.....새로 왔나??
탁자 위에 놓곤 휭하니 사라지려는 신입을 보곤 괜한 웃음이 베어 나왔다.
"뭘 그렇게 빨리 가는 거야?...젠장..야! 너 이리 와봐!"
"네....변호사님...음료가 맘에 안 드시나요?...다른 걸로??....."
"아니..그게 아니고......내가 무서워?"
"아,아니..그게...네..조금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면서...그녀는..
수줍은 듯이...아니 겁먹은 듯이 입을 달싹거린다..
"너...., 유럽 가봤어?"
내가 잡아 세우자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한 신입 잡고는 괜한 여행얘기들을 지껄인다..
내가 왜 이러지?....
이젠...눈물까지 글썽인다..어쭈??
"...그만 가봐!.....내 얘기....지루해?"
그제야..내 두 눈에 베인 장난끼를 발견했는지..
신입직원의 경직된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아마...첨엔 안 그러더니...
얘기가 계속 될 수록 어린 애를 보는 것처럼..날 바라보고 있다..
젠장....재수없다...이런 대우...근데.....기분이 별로 안 나쁘다...
"아뇨...별로.."
"의왼가?"
"예??..예...조금요...., 근데...좋아요.."
"그래?...그럼 나 무서워 안 해도 돼...그러니깐...
내가...아니..내 말은 말이지.....젠장....나 인제...
편안하게 대하라고...알겠냐?"
"네..."
웃음 섞인 대답을 하고...줄 행낭치 듯이 재빨리 문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부끄러운가?...칫"
얼음이 살짝 얹어진..주스를 한모금 마시고 테이블위에 내려놓는 순간...,
쫙~하는 기분나쁜 경음이 들리더니.....잔이 내 손을 타고 흘러내린다..
빨간 피와 황금빛 주스가 바닦으로 함께 흐른다.....
"에잇...씨발..뭐야?.....
내가 그렇게 힘이 센가?..깨져버렸잖아...."
큰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탈로 제법 건장하게 만들어진..... 이탈리아 산이다..참고로..
잔이 손을 벗어남으로서 깨어져버렸다....테이블 위에서....
붉은 피와 함께 섞이고 있는 노란 액체가..테이블위에 떨어진다...
불안한....불길한 감정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작은 심장을 향해 고동치듯이..날 만지고 지나간다..
진정해...잘 되고 있어...걱정마...잘 되고 있잖아..
책상서랍 맨 밑에 두었던 노란색 서류봉투가....떠오른다..
유....하....연......
아냐...잘 될꺼야.....
왠지 모르게 날 향해 뻗어오는 불안감을 지운다....
눈을 감고...그렇게.....날 다스린다..
고개를 절래절래....흔든다.....
공상에서 날 깨우는 전화벨소리에.....은은하게 깔렸던 바흐의 음색이..줄어든다..
하연의 어색함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에.....
서랍 속 노란 봉투가 다시 한번 내 기억을 흔틀어 놓고 지나간다.....
심장이.... 움직임을 멎으면....금방이라도 멈춰버릴것처럼...
그렇게 심하게 요동친다..
"일이 생겨서...삼 일 후에 출발하자"
머릿속은 멍한데...그녀의 말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제길....
이건...이건...그런 불안감이 아닌데...
뭔가...또 뭔가가 있는 거지?....
제발.....이게 그런 불안감이면 좋겠는데.....젠장할....
"어디야?"
"응...부산"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없음이...이미 진이 다 빠져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의 전화에...나도...
몇 방울...피의 상처가 욱씬거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는다..
"삼 일 후야... 꼭... 기억해"
"응"
힘이 없다....
내 작은 몸뚱아리 하나를 가눌 힘이 없다.....
삼 일 후......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그런 불안감에 사로잡혀있다..
그녀가 떠나가버리면.....없어져버리면....나...어떻하지?
...
삼일이라는 시간이...지났다..
삼년보다 어느때의 삼일보다...더 긴 시간이 지났다..
난 지금 김포국제공항 제2청사에...있다...
아침이고 저마다 출국과 입국을...반복하고 있다...
시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출입문을 바라본다....
시선은 한곳으로 고정 돼 있고....검은 선글라스의 세상속에..묻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