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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무엇인가?
20210616
"지난 6월 22일 이 전시회 관람기를 다음 카페에 올렸더니 삭제되었다. 그리고 이 게시물이 청소년유해물이라는 판정을 받아 6월 29일까지 활동이 정지되었다. 이의를 제기하여 그날 활동이 재개되어 이 관람기에 대한 착오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다시금 이 관람기를 카페에 올렸다. 그랬더니 관람기 삭제와 더불어 이번에는 7월 22일까지 활동정지 처분을 받았다.
다음카카오와 겨우 연결하여 다시 이의를 제기하였더니 카페 활동을 풀어준다. 무엇이 문제이며 이미 올린 관람기를 되돌려 받고 싶다 했더니 관람기는 되돌릴 수 없고 신체 노출 사진을 제거한 뒤에 다시 올려보라고 한다.
그래서 신체 노출로 의심 받을 만한 작품들을 빼고 관람기를 다시 올렸더니 이번에는 별 문제가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시대의 얼굴' 전시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포함해 모든 연령층이 관람할 수 있는 전시회다. 그 전시작품들 중에서 청소년에 유해한 작품이 있다면 박물관측은 관람객 연령을 조정하였을 것이다. 전시회 초상화의 신체 노출은 큰 문제가 없다고 박물관측에서 판단하여 관람연령을 정하였을 것이다. 박물관측은 전시 초상화가 요즘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여성들의 노출 정도라고 판단했거나 이 정도 노출은 요즘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daum카카오에서 천편일률적 규칙을 적용, 특별한 문제가 없는 전시회 관람기를 강제로 삭제한다면 네티즌의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통제하거나 검열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이는 시대의 가치를 거스르거나 시대 상황을 전혀 모르는 판단에 해당된다. 아래에 자기 검열에 의해 신체 노출로 의심 받을 수 있는 작품들을 없앤 관람기를 이곳에 소개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대의 얼굴' 초상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는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19세기 중반부터 수집한 방대한 컬렉션에서 중요한 76명 78편의 작품을 추려 선보이는 특별전이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National Portrait Gallery'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미술관으로 1856년 세워졌으며 가장 큰 규모의 초상화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전시 관람을 알아보니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전시회 관람이 제한되고 있었다. 30분 간격으로 한 회당 50명 선착순(인터넷 예매 40명, 현장 발권 10명)으로 관람 인원이 제한되었다. 인터넷으로 전시 예약과 예매를 한 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하였다.
'얼굴'에 무엇이 씌어 있을까? 얼굴에서 그것을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까? '시대의 얼굴', 전시회의 주제는 '얼굴에서 그 시대와 역사의 의미를 읽어보라'는 뜻이겠지? 이런 생각을 품고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장 1층 특별전시실로 입장했다. '전시를 열며'라는 전시 소개글에 "초상화를 본다는 것은 ‘그림 속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적인 경험인 동시에 ‘그림 속 인물과 만나는’ 심리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초상화를 본다는 것은 그림 속 인물을 바라보며 그와 만난다는 너무도 기본적인 내용이 전시 앞글로 버티고 있다. 초상화만이 아니라 모든 그림의 1차적 의미는 그림을 보고 그림을 통한 심리적 경험이 아닌가? 소개글은 "전시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주제,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과 자화상’은 초상화가 가진 다양한 의미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라는 전시 중심 의미로 이어진다. 으음, 5개의 주제에 따라 배치한 초상화들을 따라가며 초상화에서 그 주제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전시관람의 1차 목표가 되는군.
전시회 소개에서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의 16세기~현대사의 주요 인물 초상화를 통해서 초상화의 사회적 의미와 장르적 특성 조망"이라는 전시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상화의 사회적 의미와 장르적 특성'을 살피는 것이다. 전시장은 '초상화의 사회적 의미와 장르적 특성'이 다섯 개의 주제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이것을 살피러 전시실로 들어가는 준비 단계가 영상실이었다. 영상을 통하여 이번 전시의 목표를 분명히 각인시키고 주요 초상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 시대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조반니 모렐리(1861~1891)의 인용문에 뒤이어 이번 전시회의 주요 인물들을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관람 전에 대충 보고 지나쳤는데, 전시 관람을 마친 뒤에 이 영상을 한 번 더 보았더니, 전시회 전체가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전시장은 테마별로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76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1부 : 명성, 세상에 떨친 이름
2부 : 권력, 세상을 움직이는 힘
3부 : 사랑과 상실
4부 : 혁신, 진화하는 초상화
5부 : 정체성과 자화상
1전시실 입구 오른쪽 벽에서 셰익스피어의 반짝이는 대머리 얼굴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그의 희곡 <한여름밤의 꿈>에서 화해와 평화를 갈구하는 모습 같다. 그 왼쪽 벽면에 영국 국립초상화박물관을 창립한 토마스 칼라일의 "초상화라는 작은 촛불이 빛을 비춤으로써 어떤 이의 삶은 처음으로 빛을 본다."가 적혀 있다. 이 시대에는 초상화 대신에 사진이라는 말이 적합해 보인다. 1전시실로 들어갔다. 첫 번째 초상화 셰익스피어, 영국을 넘어 세계의 위대한 극작가의 초상화를 만난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 특히 권력의 욕망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이 어른거린다. "전시를 보는 동안 그림 속 인물과 눈을 맞추고 그의 인생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사람의 눈빛과 표정을 담아 가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전시 소개글의 문장을 떠올리며 1전시실 16명의 초상화를 따라갔다.
16번째 초상화는 현재 생존한 에드 시런(Ed Sheeran, 1991~)이다. "에드 시런은 천재적인 싱어송라이터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 중 한 명이다."라고 설명글에 적혀 있다. 이 초상화는 북아일랜드의 초상화가 콜린 데이비슨이 2016년에 에드 시런을 방문하여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수염이 덥수룩하다. 그는 2015년과 2019년 두 차례 대한민국에서 공연도 했다. "그러니까 내 사랑/ 너의 사랑스런 품 속에 날 안아줘/ 무수히 많은 별빛 아래에서 나에게 키스해 줘/ 두근거리는 가슴에 머리를 대봐/ 내 생각이 들릴지 몰라/ 우린 딱 맞는 짝인 것 같아." 에드 시런의 'Thinking out Loud'(2014)의 노랫말이 감미롭다.
5부 전시실의 마지막 작품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 1960~ )의 '시간의 지도(Map of Days)'를 감상하며 관람을 마친다. 벽면에 붙은 글은 5부의 주제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면서 전시회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처럼 보였다. 읽고 또 읽고 거듭 읽어보았다. <그레이슨 페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체성이란 혼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스스로 만들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아의 본질"이라고요. 전시를 통해서 '나를 보여주는 오래된 전통'을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찾으셨다면 좋겠습니다." 자아의 본질은 주체와 객체('나'를 객체로 하는 주체)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것, 그래서 시대와 역사적 환경에 처한 주체의 표정들 속에서 수많은 객체이면서 동시에 주체인 그들 욕망을 발견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이 전시회를 통해서 '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찾았는가? 벽면의 글이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이 시대의 자본과 그 어두운 그림자들을 오늘의 젊은이들에게서 읽는다. 그들의 욕망이 불타다 사라지는 곳에서 삶의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나타나는 듯하다. 욕망의 성취와 실패가 삶의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될까? 모두 각자의 삶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내 모습 속에서 과연 관람한 초상화들의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을 얼마나 발견할 수 있을까? 그것들을 포함하여 이 시대의 욕망, 자본에의 욕망이 꿈틀꿈틀 숨어 있겠지. 그럼에도 내 모습에 자연과 술, 예술 감상과 표현의 욕망이 숨어 있음을 타인들이 알아낼 수 있을까? 타인에게 화제가 될 인물도 되지 못하는 주제에 '시대의 얼굴' 전시회를 관람하고 허풍을 떨어대는군. 정체성이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다고 해도 나는 숨은 욕망을 따라 살다가 깨끗이 사라지련다.
1. 영상실, 전시 소개 영상
우리가 초상화를 볼 때 과거 언젠가 그림의 주인공이 화가 앞에 앉았던 순간을 마주친다.
-시어러 웨스트
루이즈 조플링(1843~1933)이 앉아있다가 일어서는 장면이 연출된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 시대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조반니 모렐리(1861~1891)
2. 제1부 : 명성, 세상에 떨친 이름
"초상화라는 작은 촛불이 빛을 비춤으로써 어떤 이의 삶은 처음으로 빛을 본다."
-토머스 칼라일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시인, 극작가. 존 테일러가 1500~1510년경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영국이 낳은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지방 소도시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장갑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20대였던 1580년대 후반부터 극단 활동을 시작한 그는 처음에는 배우로 경력을 쌓았지만 이후, 공립 극장과 왕실에서 상연할 작품을 쓰며 희곡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인 원고로 치부되던 당시 희곡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생명력 있는 문학작품으로 인정받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그림은 지금까지 알려진 셰익스피어 초상화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을 때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18세기의 골동품 연구가 조지 버츄에 의하면 이 작품은 한때 셰익스피어의 대자(代子) 윌리엄 대버넌트의 소유였다. 이 초상화는 예술적 가치보다도 역사적 가치에 주목해야하는 작품으로 1856년에 국립초상화미술관이 설립되었을 때 가장 먼저 입수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다.
1930년대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한 시인. 오거스터즈존이 1937~1938년경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웨일즈 출신의 시인 딜런 토머스는 19살의 나이에 이미 습작 노트 네 권을 200편의 시로 가득 채울 정도로 문학적 재능과 열정이 가득했던 인물이다. 이 중 상당수는 <18편의 시>(1934)와 <25편의 시>(1936)로 출간되었다. 1940년부터는 BBC 방송국 작가 및 방송인으로 일했으며 시 전달 능력이 탁월해서 공개 낭송회나 시 녹음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그는 1950년대 미국의 경제적 풍요 속에 개인의 가치가 경시되는 것에 대항한 대항한 비트Beat 세대 시인과 음악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가수 밥 딜런이 시인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토머스의 동향 출신 화가 오거스터스 존의 작품으로 딜런 토머스가 막 결혼했을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토머스는 당시 존과 가까이에 살았는데 이 그림을 위해서 두 번에 걸쳐서 모델을 섰다. 화가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혈기왕성한 초상화의 주인공은 "맥주 한 병이면 매우 참을성 있게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18세기 최고의 비극 배우, 비극의 뮤즈. 존 다우먼이 1787년에 그림. 초크.
세라 시든스는 18세기에 활동했던 최고의 비극 배우다. 1782년 최고의 성격파 배우 겸 제작자였던 데이비드 개릭의 <운명적 결혼>에서 이저벨라 역을 맡으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비극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로 비극 전문 배우가 되었으며 1812년 맥베스 부인(Lady Macbeth) 역을 끝으로 무대를 떠난다. 조슈아 레이놀즈, 토머스 로런스, 토머스 게인즈버러 등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들이 앞 다투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녀는 드높은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1831년 그녀의 장례식에는 5천 명 이상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이 세밀한 작품은 3대 리치먼드 공작이 의뢰한 동시대 '미인' 초상화 연작 중 하나로 시든스는 당시 유행하던 일상복 차림이다. 이 초상화는 작가 스스로가 "(시든스의) 무대 밖 모습은 희극에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배우로서 시든스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담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1788년 전시되었을 때 '교태스러운 시골 아낙'의 초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진 생략
넬 귄(Nell Gwyn, 1651?~1687)
자신의 이미지를 이용해 명성을 쌓은 넬. 사이먼 버렐스트가 1680년경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배우 엘리너 넬 귄은 공개 연극 무대에서 공연한 최초의 여성중 한 명이다. 런던 빈민가 출신으로 극장 관객들에게 오렌지를 팔거나 굴 껍데기를 까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이후 런던 드루리 레인(Drury Lane) 극장의 희극 배우로 활동하게 되면서 타고난 미모와 재치로 국왕 찰스 2세에 눈에 들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찰스 2세의 수많은 정부 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인기가 많았던 인물로 찰스와 제임스 두 아들을 낳았다.
이 작품의 작가 사이먼 버렐스트는 당시 궁정의 주요 인물 대부분을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그렸던 네델란드 출신의 화가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서 이 여배우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특히 성적 매력이 강조된 그림들을 그려서 그녀가 이미지를 유통하고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 작품에서 귄은 거의 흘러내릴 듯한 옷을 입고 유혹적인 자태를 과시한다. 귄은 통상적인 행동 규범을 따르지 않은 이런 이미지를 영리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명성을 관리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의 아버지. 고드프리 넬러가 1702년에 그린 그림. 캔버스에 유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자 사상가 중 한 명인 아이작 뉴턴은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론 물리학과 천문학 분야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과학 사상과 관련해서 가장 큰 공헌은 만유인력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뉴턴의 주요이론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와 <광학>(1704)이라는 두 권의 책에 담겨 이후 과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703년부터 죽을 때까지 왕립학회의 회장직을 수행했다.
생전에도 뉴턴의 엄청난 명성은 도처에서 그의 초상화에 대한 수요를 만들었고, 뉴턴은 기꺼이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다. 이 작품은 고드프리 넬러가그린 네 점의 뉴턴 초상화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화가의 재빠르고 힘찬 븟질이 생동감을 더해주는 그림이다. 머리와 어깨 구도, 가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기존 요소를 따르고 있는 그림이지만 꿰뚫어보는 듯 강렬한 시선은 뉴턴의 천재성을 드러낸다. 뉴턴은 죽을 때까지 이초상화를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류의 기원을 탐구한 박물학자. 존 콜리어가 1883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인류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낸 찰스 다윈은 1831년 세계 항해에 나선 비글호에 탑승하면서 본격적인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5년간 탐험대에 있으면서 남아메리카를 비롯해서 갈라파고스 군도, 호주, 남아프리카를 탐사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이때의 경험은 나중에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진화론에 관한 그의 저작 <종의 기원>(1859)의 밑바탕이 됐다.
이 작품은 다윈이 사망하기 한 해 전인 1881년 런던 린네협회(Linnean Society)를 위해서 제작한 작품을 다윈 사후에 다시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그린 화가 존 콜리어는 다윈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의 포화 속에서 그를 옹호했던 토머스 헉슬리의 사위다. 다윈의 아들 프랜시스는 <찰스 다윈의 생애>(1887)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아버지를 그린 초상화 중 콜리어 선생 것을 제일로 친다"라고 언급하였다.
19세기 최고의 스타 작가. 대니얼 매클리스가 1839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찰스 디킨스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이다. <픽윅 클럽 여행기>(1836~1837)로 이름을 알린 후 총 15편에 이르는 소설을 썼다. 이 가운데 <올리버 트위스트>(1837~1839), <크리스마스 캐럴>(1843), <위대한 유산>(1860~1861) 등은 영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대부분의 작품이 디킨스가 공동 창립해 편집자로 활동한 <하우스홀드 워즈> 같은 문학저널에 연재되었다.
이 초상화는 디킨스가 27살 무렵 그린 것으로 깃 넓은 검정색 외투와 조끼를 입고 목에는 다이아몬드 장식이 있는 우아한 남성용 공단 스카프를 두른 디킨스의 모습은 젊고 자신만만한 문인의 모습 그 자체다. 이 초상화는 이후 왕립미술원에도 전시되면서 디킨스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20세기 최고의 미녀. 유서프 카시가 1946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런던의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42년 열 살의 나이에 배우로 데뷔했다. <녹원의 천사>(1944), <작은 아씨들>(1948) 등에 아역으로 출연해서 호평을 받았고 이후 연기의 폭을 넓혀갔다. 당대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던 그녀는 <클레오파트라>(1962) 촬영 당시 같이 출연한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과 사랑에 빠져 1964년 결혼하기도 했다. 말년의 테일러는 에이즈 연구 기금 모금에 헌신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인물 사진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유서프 카시는 흑백대비가 강조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카시는 한 장의 사진을 완성하기 위해서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고 연구했으며 램브란트, 홀바인 등 과거의 대가들로부터 빛의 효과를 빌려와 작품에 적용하기도 했다. 카시는 모델의 자세를 세심하게 연출하고 조명을 사용해 영구적인 위엄이 깃들 수 있도록 했다.
(위)믹 재거 卿(Sir Mick Jagger, 1943~ )
전설적인 록밴드 롤링 스톤스의 보컬. 데이비드 베일리가 1964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믹 재거, 키스 리처즈, 브라이언 존스, 빌 와이먼, 찰리 와츠로 구성된 록밴드 롤링 스톤스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인기를 구가한 밴드 중 하나로 꼽힌다. 롤링 스톤스의 대표적인 히트곡으로는 <새티스팩션>(1965), <스트리트 파이팅 맨>(1971), <앤지>(1973) 등이 있다. 믹 재거는 밴드 활동 외에도 <퍼포먼스>(1970), <네드 켈리>(1970) 같은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반세기 이상 문화 아이콘으로 군림하며 대중음악에 기여한 공로로 2003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데이비드 베일리는 런던의 새로운 문화와 패션을 주도하는 남성들의 초상을 수록한 <핀업 사진집>(1965)과 <굿바이 베이비 앤 아멘<(1969)을 통해 1960년대 런던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갓 스물을 넘긴 믹 재거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베일리의 <핀업 사진집>의 뒤표지로 선택되었다.
(아래)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 폴 매카트니(Sir Paul Mcartney1942~), 링고 스타(Sir Ringo Starr, 1940~), 존 레넌(John Lennon, 1940~1980)("The Beatles")
팝 역사상 최고의 밴드 비틀스!!. 노먼 파킨슨이 1963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그룹으로 손꼽히는 비틀스는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청년들이 문화의 주체로 떠오른 1960년대 스윙잉 식스타스(Swinging Sixties)를 규정하며 영국 밴드가 세계무대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 대단한 밴드는 1963년 <플리즈 플리즈 마>에서 1970년 <렛잇비>에 이르기까지 1억 5천만 장에 달하는 앨범 판매고를 기록했다.
데뷔한 해에 촬영한 이 사진은 네 멤버가 얼굴을 쭉 붙이고 있는 모습인데, 비틀스 초기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노먼 파킨슨이이 사진을 찍은 그 해에 열광적인 비틀스 팬을 일컫는 비틀마니아(Beatlemania)가 생겨났고 이후 이들이 활동한 7년간 세계 어디를 가든 경찰의 보호가 필요한 슈퍼스타가 되었다. 비틀스의 앨범 판매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음악은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민중의 왕세자비, 패션 아이콘. 테런스 도너번이 1986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영국 귀족 집안 출신인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는 20세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 웨일스 공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전통적인 왕족의 틀을 깨고 '민중의 왕세자비'(People's Princess)로 불리며 아내이자 어머니, 수많은 자선단체의 대사, 패션과 미의 아이콘으로 일생 동안 수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가 공식 일정에 나설 때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으며 세계적 명성을 구가했다.
테런스 도너번이 촬영한 이 작품은 세련되고 단정한 모습의 다이애나비를 포착하고 있다. 왕실 가문의 일원이 되면서 그녀는 항상 미디어에 노출되는 데 적응해야 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빈번히 사진 찍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됐다. 다이애나비는 찰스 왕세자의 사이에서 윌리엄과 해리 두 왕자를 낳았지만 이들의 결혼 생활은 1996년 파탄에 이른다. 1997년 그녀는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길지 않았던 생을 마감했다.
*사진 생략
나오미 캠밸((Namoi Campbell, 1970~)
모델계의 흑진주. 마리오 테스티노가 1996년에 촬영. 코로모제닉 프린트.
나오미 캠벨은 1980-90년대 최고의 명성과 인기를 구가하며 슈퍼모델 전성기를 이끈 6인 중 한 명이다. 잡지 표지를 장식한 횟수만도 500회가 넘는 그녀는 영국 출신 흑인 모델로서는 최초로 영국판 <보그>(1987년 12월) 표지에 등장했다. <보그>(1988년 8월) 프랑스판과 러시아판(2000년 9월), <타임>(1991년 9월) 표지를 장식한 첫 번째 흑인 모델이기도 하다. 흑인 모델이 드물었던 시기의 패션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거듭난 그녀의 삶은 편견과 싸우는 여정이었다.
얼핏 보기에 공식 촬영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사진은 패션 사진작가 마리오 테스티노가 패션 브랜드 베르사체(Versace)를 위해 파리에서 촬영한 것이다. 선글라스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 자신감을 발산한다. 선글라스에 비친 작가의 모습도 작게 보인다.
외모가 브랜드인 잉글랜드 축구 선수. 로렌조 에이지어스가 1998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밀착인화.
데이비드 베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1992-2003), 레알 마드리드(2003-2007), LA갤럭시(2007-2012), 파리 생제르맹(2013) 등의 팀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19번의 대회 우승을 경험했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6년간 활동했다. 2003년에는 대영제국훈장을 받았고 2010년에 BBC 스포츠 공로상을 수상하는 등 영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로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이 작품은 1998년 로렌조 에이지어스가 촬영한 것으로 베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과 다양한 포즈를 취한 모습을 담은 두 개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축구 실력만큼이나 멋진 외모로 대중의 관심을 받았는데 그 자신만큼이나 유명한 아내 빅토리아 애덤스와 함께 미디어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셀러브리티이기도 하다. 자신의 패션 브랜드, 향수, 위스키를 비롯한 다양한 상업광고에 출연하면서 전 세계 누구라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외모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미술 공예 운동의 창시자, 디자이너, 사회주의자. 조지 프레더릭 와츠가 1870년에 그린 그림. 캔버스에 유채.
윌리엄 모리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공장식 대량 생산에 반발해 중세 장인정신을 되살리고자 했던 '미술공예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벽지와 직물 디자이너로 활약했으며 스테인드글라스 분야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작업을 요하는 수공예의 매력에 빠져 수예와 목각을 독학하고 잊혀진 필사본 장식 문자 기술을 복원해 내기도 했다. 이후 직물 공예까지 관심을 확장한 그는 자신의 집 안방에 베틀을 들여놓을 정도로 공예가 갖는 중요성을 역설하고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이 그림은 30대 후반에 접어든 모리스를 묘사한 희귀한 작품이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부인에 의하면 모리스가 초상화 작업을 위해 포즈를 취한 것은 1870년 4월 15일 단 한 차례뿐이었다. 이 작품은 초상화 주인공 사후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미술관에 입수된 예외적인 경우로 당시 모리스의 유명세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명성. 앨버트 찰스 챌린이 1869년에 그림. 패널에 유채.
메리 시콜은 자메이카 출신의 간호사로 크림 전쟁 때 간호 활동을 펼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당초 그녀는 나이팅게일의 간호단에 참가하려 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뒤 혼자서 전쟁터로 간다. 그곳에서 군인들을 위한 간호소를 운영하며 명성을 얻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여성이 되었다.
이 그림은 지금까지 전하는 메리 시콜의 유일한 초상화다. 60대에 접어든 황혼기의 시콜은 수수하지만 그녀 삶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모습이다. 카리브 해의 전통 스카프를 걸치고 있는 가슴엔 크림 전쟁에서의 업적을 기리는 훈장 세 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생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난 뒤 메리 시콜은 곧 잊혀졌다. 이 그림도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2004년에서야 발견되었다. 초상화가 그려질 때 주인공의 명성은 사회 분위기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 천재 싱어송라이터. 콜린 데이비슨이 2016년에 그림. 리넨에 유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 중 한 명인 에드 시런은 10대 초반이던 2005년에 처음으로 음반을 녹음한 뒤 2011년 정식 데뷔 앨범을 발표할 때까지 여러 장의 미니 앨범을 발표하고 공연을 통해 가수로서 경력을 쌓았다. 2014년에 발표한 앨범 <X>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2017년과 2019년에 발표한 앨범들도 영국과 미국의 차트를 점령하며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는 활동 초기부터 SNS를 통해서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누구보다도 인터넷의 막강한 영향력을 잘 알고 이를 활용해서 명성을 만들 줄 아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북아일랜드 출신의 초상화가 콜린 데이비슨이 그린 것으로 실물보다 크게 제작한 시런의 초상화 두 점 가운데 하나다. 데이비슨은 시런의 집을 방문하여 이 작품을 그릴 때 시런이 연주하는 모습이 아니기를 바랐다고 밝힌 바 있는데 작가의 기대대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사랑
너의 사랑스런 품 속에 날 안아줘
무수히 많은 별빛 아래에서 나에게 키스해 줘
두근거리는 가슴에 머리를 대봐
내 생각이 들릴지 몰라
우린 딱 맞는 짝인 것 같아.
-에드 시런 <Thinking out Loud>(2014)
3. 제2부 : 권력, 세상을 움직이는 힘
그대가 사람이라면 날 모를 수는 없지
-토마스 헤이우드, 엘리자베스 1세에 관한 희곡, 1605
(왼쪽)헨리 8세(King Henry Ⅷ, 1491~1547),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영국의 절대 군주,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 미상의 작가가 1597~1618경에 그림. 패널에 유채.
헨리 8세는 1509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여섯 번 결혼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그의 치세는 나라 밖에서는 야심적 면모로, 나라 안에서는 무자비함으로 요약된다. 형의 아내였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지만 후계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던 그는 첫 번째 결혼을 무효로 만들며 앤 불린을 왕비로 맞았다. 이 결혼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이 로마 가톨릭의 영향에서 벗어나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성공회 국가로 가는 결과를 낳았다.
헨리 8세는 영국의 절대 군주로서 자신의 공적 이미지를 통제하고 유통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왕이었다. 화면을 꽉 채우는 위풍당당한 풍채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스 홀바인이 창안한 화풍을 따르고 있다. 헨리 8세의 사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원래 열여섯 명의 영국 군주 초상화 세트의 일부로 제작된 것이다. 정복왕 윌리엄으로부터 메리 1세의 초상화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아 엘리자베스 1세 재위 기간에 여왕의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로서 지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영국과 결혼한 여왕, 초상화로 보여주는 여왕의 권위. 니컬러스 힐리어드가 1575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 패널에 유채.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는 25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녀의 치세는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던 영국을 훗날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으로 나아가게 한 기반을 마련한 시대로 평가받는다. 당시에는 드물게 미혼의 여성 군주였던 그녀는 후계자를 얻을 수 없다는 정치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남성 배우자의 존재가 국내외적인 간섭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며 단독으로 통치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처녀 여왕'의 이미지를 고수하며 자신의 공적인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정화가였던 니컬러스 힐리어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여왕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그림은 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다양한 장치로 가득하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옷은 순결함과 불변성을, 가슴에 착용한 불사조 모양의 팬던트는 재생과 처녀성을 상징한다. 손에 쥐고 있는 붉은 장미는 튜더 왕가의 상징물로 그녀가 왕조를 계승하고 지켜나갈 진정한 통치자임을 암시한다.
권위를 내려놓은 왕의 모습. 헤릿 판혼트호르스트가 1628년에 그린 그림. 캔버스에 유채.
원래 찰스 1세는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청년이 되어서는 뛰어난 역량을 가진 형과 비교 당하는 삶을 살았다. 다행히 프랑스 출신의 헨리에타 마리아와의 결혼에서 여섯 명의 자녀를 얻으며 비교적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누렸다. 그의 인생은 형 헨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의회 해산과 중세, 종교 단일화가 불러온 사회적, 정치적 혼란으로 내전이 일어났고 의회파에게 패배하면서 1649년에 처형당하고 만다.
실물을 보고 그린 이 초상화는 찰스 1세의 일상적이며 사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왕의 초상화가 각종 권위와 왕권을 상징하는 장치로 가득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이 풍기는 진지하고 학자적인 분위기는 아주 예외적이다. 찰스 1세의 고급스러운 의상과 이 그림의 화가가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최고 권력자의 초상화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든 그림이다. 이 그림은 열렬한 예술 수집가이자 후원자였던 찰스 1세가 대형 단체 초상화 제작을 위해서 헤릿 판호트호르스트를 초청했을 당시에 그린 것이다.
왕의 권력을 빼앗은 자의 당당함. 로버트 워커가 1649년경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지방 지주 집안 출신의 올리버 크롬웰은 정치가, 군인을 거쳐 국가를 통치하는 호국경의 지위까지 오른 인물이다.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신분으로 최고 통치자가 된 사람이기도 하다. 독실한 청교도였던 크롬웰은 국왕 찰스 1세를 신뢰하지 못했으며 내전이 발발하자 타고난 지도자로서 면모를 드러내며 뛰어난 군사력으로 의회파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1658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지만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의 사후 2년만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2세가 즉위했다.
이 초상화는 찰스 1세를 처형한 해에 그린 것으로 새로운 권력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제작되었다. 왕을 대신한 권력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끝에 화가 로버트 워커가 택한 해결책은 역설적이게도 찰스 1세의 궁정화가였던 반 다이크가 그린 왕실 초상화에서 여러 가지 요소를 빌려오는 것이었다. 크롬웰의 갑옷과 지휘봉, 허리에 장식 띠를 묶어주는 시종의 모습은 모두 크롬웰이 얼마 전 전복한 체제에서 애용되었던 군 지휘권의 상징이다.
노예제 폐지에 헌신한 인생. 토머스 로런스가 1828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윌리엄 윌버포스는 18세기에 활동한 보수당 출신의 정치가다. 성서에서 밝히는 예수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기는 복음주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이상적인 원칙과 개인적 매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노예무역과 노예제 폐지를 위해서 일생을 바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791년 의회에서 모든 노예 거래를 없앨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이후 20년간 쉼없이 노력했다. 1807년 마침내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다. 이후 그는 노예제의 전면 폐지를 위해 힘쓰다 1833년 노예제 폐지법이 의회를 통과하기 직전에 눈을 감았다.
이 그림은 윌버포스가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며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의원직에서 물러난 뒤에 그려졌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차례만 모델을 섰으며 그나마도 채 완성을 못했다. 그림 속 윌버포스의 얼굴은 온화하지만 통증 때문인지 자세는 틀어져 있다. 그림을 그린 작가의 친구였던 존 하퍼드는 이 그림을 '중견 정치가의 지성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 상냥함'을 모두 포착해낸 것으로 평가했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1979~1990), 철의 여인. 노먼 파킨슨이 1981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마거릿 대처는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가로서 그 업적에 대해서 극과 극의 오가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1954년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한 뒤 1959년 핀치리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총리로서 두 번의 임기를 보냈으며 첫 번째 임기 때는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두 번째 임기 때는 보건, 교육 등의 공공 분야에서 시장 논리를 도입해 규제를 완화하고 영국의 공공 부분 전반을 민영화하면서 큰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그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이 사진은 총리관저에서 사용할 공식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촬영된 것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진작가 중의 한 명인 노먼 파킨스의 작품이다. 대처가 입은 맞춤 정장은 작가가 제안한 것으로 질서와 효율성이라는 그녀의 공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차림이다. 화면 뒤쪽의 빛줄기가 대처의 얼굴을 가로지르며 부드러운 이미지로 매력을 더한다. 이날 촬영한 다른 사진이 공식 초상화로 최종 낙점되었던 것을 보면 그녀가 작업 결과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합과 용서의 힘. 질리언 에덜스타인이 1997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민주적 선거 방식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자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다. 1944년 이래로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해왔다. 1962년 8월 5일 체포되어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0년 석방되었다. 수감 기간 동안 만델라는 자유, 인권, 인종 평등을 상징하는 국제적 인물로 부상한다. 1993년 노벨평화상을 비롯해 수많은 국제적 명성의 상을 수상했다.
이 사진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를 공개하고 보복 대신 화해를 유도하기 위해 설립된 '진실과 화해 위원회' 프로젝트의 일부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작가 질리언 에덜스타인은 이 사진을 위해서 대통령 관저를 방문해서 단 10분 동안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만델라의 시선은 국가 원수로서 권위를 강조하기보다는 내일을 향한 강렬한 성찰의 순간을 보여준다.
세상을 바꾼 힘, 월드와이드웹의 창시자. 션 헨리가 2015년에 제작, 청동에 채색.
팀 버너스 리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의 창시자로 현대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옥스퍼드대학교 재학 당시 구형 TV와 프로세서를 납땜해 가며 컴퓨터를 제작하기도 했던 그는 이후 통신회사 생활을 거치며 월드 와이드 웹을 발명했다. 세상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발명을 하고도 그 성과를 모두가 쓸 수 있도록 공유한 것으로도 현대 사회에 기여한 인물이다.
션 헨리는 평범한 모습을 한 인물 조각을 제작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초상 조각 역시 소박한 옷차림을 한 일상의 모습을 선택함으로써 모델의 유명함이나 명성에 상관없이 작품의 대상이 '누구나'일 수 있다는 개념을 보여준다. 헨리는 이틀 동안 버너스 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집과 직장에서 그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로 이 조각을 만들었다. 노트북이 담긴 가죽 백팩을 맨 평범한 모습을 매우 현대적으로 묘사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청동을 사용하여 위대한 유산을 남긴 주인공에 어울리는 영원불변성을 전달하고 있다.
철학자의 면모를 지닌 정치가. 로런스 앨머 태디머가 1891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스코틀랜드 출신의 밸프어는 20세기 초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가 중 한 명으로 1874년에 정계에 입문한 이래 1902년 총리직을 맡는 등 비교적 순탄한 정치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원래 철학자가 되고자 했었는데 <철학적 회의에 대한 변론>(1879)이라는 저서를 남긴 바 있다. 총리가 된지 3년 만에 자유무역과 보호주의로 양분된 당을 규합하지 못하고 1905년 사임한다. 이스라엘 건국에 단초를 제공한 '밸푸어 선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을 그린 로런스 앨머 태디머는 네덜란드 출생으로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고전주의 양식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화가다. 그는 공식적으로 초상화 의뢰를 잘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밸푸어를 그린 이 작품은 희귀한 가치를 가진다. 밸푸어는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가 중의 한 명으로 누구보다 권력의 핵심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이 그림에서는 조용히 생각에 잠긴 채 마치 철학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침묵 당할 때 목소리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말의 힘과 영향력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 UN 연설문, 2013
(왼쪽)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 1997~ )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권력. 쉬린 네샤트가 2018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에 아카이벌 잉크.
파키스탄 출신의 여성 교육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2009년 그녀의 고향이 탈레반에 점령됐을 당시 자신의 삶과 여성 교육 탄압에 대한 글을 써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2012년 학교 통학 버스에서 탈레반 대원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큰 부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해 아동과 여성 교육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2014년에 최연소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말랄라 기금을 조성해 모든 소녀가 안전한 환경에서 무료로 양질의 초중등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 작품은 이란 출신 영화감독 쉬린 네샤트가 작업한 두 점의 초상화 중 하나다. 작가는 일련의 사진을 찍은 후 두 점을 선별해 그 위에 라맛 샤 사옐(Rahmat Shah Sayel)이 2011년 파슈토어로 쓴 시를 장식 서체로 새겨 넣었다. 사진 속의 말랄라는 도전적인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는데 이런 포즈는 전형적인 권력자 초상화의 특징이지만 말랄라의 인생은 그녀가 가진 내면의 힘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도록 이끌었는지 역설한다.
남자들의 세상에서 꿋꿋하게 일어선 여성의 힘. 존 에버렛 밀레이가 1879년에그림. 캔버스에 유채.
초상화가, 교육자, 여성 참정권론자인 루이스 제인 조플링은 여성 화가는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되던 당시 예술계의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던 인물이다. 1887년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조건에서 교육받을 것을 주장하며 여성 미술 학교를 설립했다. 1901년 영국왕립예술가협회에 입회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으로 남자 회원과 나란히 협회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으로 느끼는 한계에 좌절하기도 했다.
조플링 자신에 따르면 '도전적이며 상당히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는 이 그림은 작가 멀레이의 화실에서 제작한 것으로 그녀의 남편을 위해서 의뢰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초상화가가 지녀야 할 모든 지식을 갖고" 포즈를 취했기에 단지 다섯 번의 짧은 작업 끝에 빨리 완성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작품은 말레이의 거침없는 화풍과 구도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잘 보여준다. 1880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탁월하다'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패션계의 살아 있는 권력,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알렉스 카츠가 2009년에 그린 그림. 리넨에 유채.
미국판 <보그>의 편집장 애나 윈터는 세계 패션계를 이끄는 살아 있는 권력이다. 1984년부터 3년간 영국판 <보그>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2013년에는 보그사의 모회사인 컨데나스트(Conde Nast)의 예술 감독이 됐다. 그녀의 강렬한 개성에 영감을 받은 로런 와이스버거는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3)를 썼고 이는 다시 2006년 메릴 스트립(Meryl Streep)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둔다. 2017년에 패션 및 저널리즘에 대한 공로로 남성의 기사 작위에 해당하는 '데임' 작위를 받았다.
알렉스 카츠는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90세를 넘긴 나이에도 매일 그림을 그리고 연습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추상미술이 유행하던 시기에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꾸준히 작업했던 그는 오늘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갖춘 거장으로 꼽힌다. 실물을 보고 그린 습작에 바탕을 둔 이 그림은 윈터가 처음으로 초상화의 모델이 된 작품이다. 카츠는 "애나를 그릴 때는 저절로 붓이 움직였어요. 바로 포착이 됐죠. 명령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에요. 스타일이 탁월하죠" 라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자신감이 뿜어내는 당당한 힘. 마틴 파가 2012년에 촬영. 피그먼트 프린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의 유수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1970년대에는 파트너 맬컴 매클래런과 함께 런던 킹스로드에 '렛 잇 락(Let It Rock)'이라는 의상실을 연다. 이후 이 매장은 영국 핑크족의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90년과 1991년에 연이어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된 웨스트우드는 2004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박물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사진작가 마틴 파는 지난 40년간 영국 사회를 다룬 다큐멘터리 사진의 흐름을 바꾼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는 통찰력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현대 사회의 비정상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주로 찍는다. 유명인사의 초상 사진을 찍을 때는 주인공을 부조화스러운 다양한 배경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화장실에서 포즈를 취한 웨스트우드의 이 초상 사진이 잘 보여주듯 종종 장난기와 유머를 작품에 불어 넣는다. 세련되지 않은 배경에도 불구하고 웨스트우드는 자신감을 뿜어내고 있으며 티셔츠에는 그녀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구가 당당히 새겨져 있다.
4. 제3부 : 사랑과 상실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1983~2011)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난 에이미를 추모함. 말린 두마가 2011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런던 출신의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어린 나이에 데뷔했지만 뛰어난 실력으로 팝 음악계의 판도를 바꾼 가수였다. 그레미상을 다섯 번이나 수상했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가수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그녀의 반항적인 성격과 떠들썩한 사생활은 미디어가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힌 소재가 되었다. 2011년 27세의 나이로 그녀가 죽었을 때 이마저도 흥미로운 기삿감으로 다뤄지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화가 말린 두마는 현대 문화에서 이미지의 확산 문제에 관심을 갖는 작가다. 그녀는 와인하우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미디어에 노출된 이미지를 활용해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사후 추모의 의미를 담은 이 작품은 얼굴 부분을 확대해 가장자리는 잘라내고 특징을 단순화시켰다. 엷게 드리워진 파란색은 와인하우스의 굴곡진 인생의 우울함과 블루스(Blues)라는 그녀의 음악적 성향을 표현한다.
(왼쪽)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
영국 최고의 전쟁 영웅, 에마의 연인. 윌리엄 비치가 1800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허레이쇼 넬슨은 가장 걸출한 영국 전쟁 영웅 중 한 명으로 그를 기리는 기념탑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있을 정도로 명성이 빛나는 인물이다. 카리스마와 자신감이 넘치고 야심찼던 그는 평생 자신의 평판을 의식했다. 전투에서는 종래와는 다른 독자적인 '넬슨식 접근법(Nelson Touch)'으로 뛰어난 업적을 달성했다. 1793년 코르시카 전투에서 한쪽 눈을 실명하고 1797년에는 오른쪽 팔을 잃었다. 1798년 나폴리에서 건강을 회복 중이던 넬슨은 해밀턴 경의 부인 에마와 사랑에 빠지며 세기의 로멘스의 주인공이 됐다. 이후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 함대를 격파하지만 치명상을 입고 전사했다.
윌리엄 비치의 생생한 묘사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넬슨의 고향인 노리치(Norwich)시가 의뢰한 전신 초상의 습작이다. 머리 모양을 수정한 흔적은 명확히 보이는 반면, 실명한 회색 눈동자를 갈색으로 표현한 부분은 수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초상화는 넬슨의 모습을 충실히 담았다고 평가받는다.
(오른쪽)에마 해밀턴(Emma Hamilton, 1765?~1815)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허레이쇼 넬슨의 연인. 조지 롬니가 1785년경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허레이쇼 넬슨의 연인으로 유명한 에마 해밀턴은 평범한 대장장이의 딸로 태어났다. 신분상승이 불가능했던 시대에 자신의 외모와 능력을 발판으로 무용수, 여배우에서부터 나폴리 여왕의 친구로까지 성장했던 인물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녀는 1791년 나폴리 주재 외교관이었던 윌리엄 해밀턴과 결혼하면서 귀족 부인이 되었고, 이후 나폴리에 머물던 넬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에마와 넬슨의 연애 사건은 당시 유럽 귀족 사회를 뒤흔든 일이었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영국으로 돌아와 넬슨과 함께 생활했다. 이후 넬슨이 죽자 재정난에 시달리던 그녀는 파산한 뒤 1815년 프랑스에서 궁핍한 삶을 마감했다.
이 그림은 스무 살 무렵의 에마를 그린 그림으로 18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초상화가 중 한 명이었던 조지 롬니가 그렸다. 그는 에마 해밀턴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에마의 그림 수십 점을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럽 최고의 신부 후보, 보헤미아의 겨울 여왕. 로버트 피크가 1610년경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엘리자베스 공주는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영국의 왕이 된 제임스 1세의 딸이자 찰스 1세의 누나다. 그녀는 다른 나라의 왕위 계승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왕실간의 결혼 협상에서 중요한 존재였다. 16세에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신교도 왕자인 프리드리히와 결혼했으며 1659년 남편이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면서 보헤미아의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서 추방당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미망인이 되어 헤이그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 작품을 그린 로버트 피크는 주로 궁정 장식화를 그린 화가였는데 왕실 자녀의 초상화도 다수 작업했다. 14세의 엘리자베스를 그린 이 초상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점은 보석으로 치장한 공주의 화려한 옷차림이다. 머리에는 루비와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꽂고 다이아몬드 사슬 장식이 가슴을 가로지르도록 배치함으로써 그녀가 부유하고 아름다운 신부 후보로서 자격을 갖추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의 반대를 무릅쓴 사랑. 피터 릴리가 1661~1662년경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클래런던 백작의 딸 앤 하이드와 제임스 2세는 영국 왕실이 유럽 대륙에서 망명 중이던 시절에 만나 사랑에 빠진 뒤 비밀리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왕정이 회복되자 더 좋은 조건의 배우자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이들의 비밀 결혼은 부정당하게 되었다. 결국 찰스 2세의 도움을 받고서야 이들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앤이 세상을 떠난 뒤 1685년에 제임스는 형의 왕위를 물려받아 영국의 국왕이 되었다. 그로부터 삼년 뒤에는 명예혁명으로 축출되어 다시 한 번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앤과 제임스의 두 딸 메리와 앤이 이후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했다.
이 그림은 이들의 결혼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직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두 사람의 우아한 모습과 제임스 2세가 입고 있는 갑옷 등을 통해서 이 그림이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뿐만 아니라 스튜어트 가의 부와 군사력을 기리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대 캐플 남작 아서 캐플(Arthur Capel, 1st Baron Capel, 1604~1649)과
부인 엘리자베스(Elisabeth, Lady Capel, ?~1661) 그리고 그 자녀.
변하지 않는 가치, 가족의 사랑. 코닐리어스 존슨이 1640년경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 중의 하나였던 캐플 가(家)의 남작 아서는 원래 찰스 1세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회파였다. 이후 내전 기간 동안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의 폭력성에 반대하며 왕당파로 돌아선다. 결국, 찰스 1세가 처형되면서 그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작위를 계승한 장남 아서 역시 1683년 즉 찰스 2세와 그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의 암살 계획에 관여한 혐의로 런던탑에 투옥되었다가 의심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나머지 자녀들은 무사히 성장해 성공한 정치인, 재능있는 식물화가, 저명한 원예가로 성장했다.
이 작품은 캐플 가족이 안락한 생활을 누리던 시절에 남작 내외와 그 자녀들을 그린 웅장한 가족 초상화다. 아이들은 왼쪽부터 큰아들 아서, 차남 헨리, 찰스, 엘리자베스, 장녀 메리 순이다. 화면 뒤로 보이는 넓은 정원은 이들이 살았던 캐플 저택의 정원으로 가족의 부를 보여준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네델란드 이민자 집안 출신의 코닐리어스 존슨으로 상류 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던 작가다. 이 가족 초상화는 안토니 반 다이크의 <찰스 1세와 헨리에타 마리 그리고 두 자녀>(1632)에서 영향을 받았다.
여왕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 미상의 영국 화가가 1588년에 그림. 패널에 유채.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월터 랠리는 진정한 의미의 '르네상스인'이었다. 그는 시인이자 탐험가였으며 군인이었고 정치가였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세계사>(1614), 엘리자베스 1세를 주제로 한 연작시 <신시아> 등 30여 편의 단편시와 산문 작품이 남아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북미 탐험대를 결성했으며 정착지에 '버지니아'라는 이름을 헌정해 여왕을 기리기도 했다. 그의 경력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 급격히 내리막을 걸었고 제임스 1세 치하에서 런던탑에 투옥되어 생의 대부분을 보내다 1618년 반역죄로 처형당한다.
이 초상화는 여왕에 대한 랠리의 헌신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그가 입은 옷은 여왕의 상징색인 흑색과 백색이 대비된 것으로 역시 여왕의 보석이었던 진주로 장식되었다. 보존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 초승달 아래의 물결무늬는 그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암시한다. 달의 여신 신시아를 여왕에, 물결을 자기 자신에 비유한 랠리는 달이 조류를 지배하듯 자신도 기꺼이 여왕의 지배를 받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사랑의 맹세. 안토니 반 다이크가 1638년경 그림. 캔버스에 유채.
조지 스튜어트는 영국의 국왕 찰스 1세의 사촌으로 프랑스에서 성장했으며 십대 초반이었던 1632년 오비니의 제9대 영주가 되었다. 클래런던은 그의 저서 <반란의 역사>에서 스튜어트를 "위대한 희망을 품은 신사로 다정하고 사람을 끄는 성품을 지녔으며 기백이 드높다"라고 평했다. 국왕에게 충실한 전형적인 젊은 군인이었던 그는 영국 내전 동안 찰스 1세 편에 서서 싸웠지만
1642년 스물을 갓 넘긴 나이로 에지 힐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 초상화는 스튜어트가 2대 서퍽 백작의 딸 캐서린과 비밀리에 결혼한 1638년 무렵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것이다. 양치기 복장을 한 채 느긋하게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바위에 기대있는 그의 모습에서 곧 그에게 불어 닥칠 정치적 소용돌이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바위에는 그들의 비밀 결혼을 암시하듯 "사랑은 내 존재보다 강하다(ME FIRMIOR AMOR"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운명이라 믿었던 사랑. 리 밀러가 1939년에 촬영. 모던 젤라틴 실버 프린트.
영국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 리어노라 캐링턴은 현실과 상상, 동물과 인간을 결합한 환상적 분위기의 그림과 글로 유명하다. 랭커셔에서 직물 사업을 하는 집안에 태어난 그녀는 1937년 막스 에른스트를 만난 뒤 사랑에 빠졌다. 몇 달 후 19세의 캐링턴과 45세의 에른스트는 프랑스로 사랑의 도피를 떠나게 되고 이듬해 프랑스 남부 생 마르탱 다르데슈의 오래된 농가로 이주해 이곳에서 협업하며 창작에 몰두했다.
이 작품은 미국 출신 사진작가 리 밀러가 캐링턴과 에른스트의 생 마르탱 다르데슈 집에 머무는 동안 촬영한 일련의 사진 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이들의 집은 초현실주의 예술가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전쟁이 시작된 뒤, 에른스트가 체포되면서 두 사람의 목가적인 생활은 끝이 난다. 캐링턴 또한 스페인으로 탈출한 뒤 신경쇠약에 걸려 요양소에 감금되고 둘의 사랑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은 1941년 우연히 재회했지만 다시 관계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후 캐링턴은 멕시코로 이주해 201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연인의 친밀함. 세실 비턴이 1946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스웨덴 스톡홀름 태생의 그레타 가르보는 1920~3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전설적인 배우다. 무성영화 <예스타 베를링의 전설>(1924)이 성공하면서 미국 MGM 스튜디오와 계약을 맺었고 <크리스티나 여왕>(1933)과 <안나 카레니나>(1935)로 가장 잘 알려졌다. 이후 <두 얼굴의 여인>(1941)이 흥행에 실패하자 은막에서 은퇴한 뒤 좀처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우 사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이 사진은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가르보와 비턴이 함께 한 첫 작업에서 촬영한 것이다. 비턴은 1932년에 가르보를 처음 만난 뒤부터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서 1946년에 청혼까지 했지만 거절당했다. 평소 은둔자처럼 살던 가르보는 새 여권 사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촬영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소파에 편하게 누운 자세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포즈를 취했다. 1946년 미국판 <보그>에는 누워있는 얼굴을 확대해 세로로 사진을 실었다.
*사진 생략
케이트 모스(Kate Moss, 1974~)
첫사랑의 열정과 풋풋함. 마리오 소렌티가 1993년에 촬영. 잉크젯 프린트.
패션업계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 중 한 명인 케이트 모스는 14살의 나이로 모델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더 페이스>, 1993년영국판 <보그> 표지를 장식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후 300회 이상 각종 잡지 표지와 주요 광고에 등장했다. 2006년 영국 패션 어워드에서 '올해의 모델'로 선정되었고 2013년에는 패션 산업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이 사진은 원래 캘빈 클라인의 향수 광고용으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을 찍은 작가는 모스의 연인이었던 마리오 소렌티로 당시 두 사람은 열렬한 사랑에 빠져있었다. 평소 소렌티가 찍은 모스의 사진에 관심을 가졌던 캘빈 클라인은 두 사람을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로 보내서 10일 동안 광고 사진을 찍게 한다. 그 결과 탄생한 일련의 흑백 사진들은 맨얼굴의 꾸밈없는 모스의 젊음과 연인을 향한 매혹적인 눈빛을 담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작품으로 모스는 슈퍼모델로 발돋음했으며 소렌티 역시 패션 사진작가로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5. 제4부 : 혁신, 진화하는 초상화
데이커 부인 메리 네빌(Mary Neville, Lady Dacre, 1524~1576년경)과
제10대 데이커 남작 그레고리 파인즈(Gregory Fiennes, 10th Baron Dacre, 1539~1594)
유화물감의 정교함이 돋보이는 그림. 한스 유워스가 1559년에 그림. 패널에 유채.
1541년 제9대 데이커 남작 토머스 파인즈가 처형되면서 홀로 남은 메리 네빌은 몰수당한 집안의 작위와 명예를 되찾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약 17년간의 노력 끝에 아들 그레고리에게 작위를 돌려주는 데 성공한 그녀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눈에 뜨는 화가였던 네델란드 출신의 한스 유워스에게 이를 기념할만한 그림을 주문한다.
이 뛰어난 초상화는 유화물감을 정교하게 사용해서 그린 것으로 이전까지 영국 초상화가 보여준 표현력을 뛰어 넘는 혁신적인작품이다. 모자를 한 화폭에 담은 희귀한 작품으로 반지를 끼려고 하는 모습으로 표현된 사람이 데이커 부인이라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이런 포즈는 흔히 왕조의 권력을 차지한 것을 상징한다. 또한, 2인 초상화에서 통상 남성이 차지하는 화면의 왼쪽에 데이커 부인을 배치한 것도 특기할만하다. 마치 데이커 가문의 권력을 다시 찾아온 사람이 다름 아닌 메리 네빌이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14대 애런들 백작 토머스 하워드(Thomas Howard, 14th Earl of Arundel, 1585~1646), 캔버스에 유채
위대한 화가 루벤스의 혁신적인 유화.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629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애런들 백작 토마스 하워드는 영국 최고 명문가의 상속자로 태어났지만 부친이 엘리자베스 1세 암살 기도에 연루되면서 집안이 몰락한 와중에 성장했다. 제임스 1세 치하에서 백작 칭호를 되찾았고 이후 찰스 1세 때는 왕의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신하로 입지를 굳혔다. 그는 당대 최고의 미술품 수집가이자 감정가로 유명했다. 당시 예술계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는데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가 찰스 1세의 궁정에 입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초상화는 당대 최고의 화가 루벤스의 작품으로 그가 외교관 자격으로 런던에 체류했던 1629년에 그린 것이다. 루벤스는 유화물감의 점성을 충분히 활용했던 화가로 유려한 붓질로 대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데에 뛰어났다. 이 작품에서 루벤스는 애런들 백작의 당당함과 위엄을 표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백작의 모습은 정교한 세부 묘사 없이도 충분히 역동적이고 생생하다. 약 한 세기 전, 데이커 남작 모자의 초상화가 보여준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의 혁신적인 유화다.
3대 런던데리 후작 찰스 베인 스튜어트(Charles Vane-Stewart, 3rd Marquess of Lodonderry, 1778~1854)
19세기 낭만적인 군인 이미지의 전형. 토머스 로런스가 1812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외교관이자 군인인 찰스 베인 스튜어트는 나폴레옹 전쟁과 전후 정치적 소용돌이 한복판에 섰던 인물이다. 위풍당당한 기병대 장교로 1809년부터 1812년까지 1대 웰링턴 공작의 부관이 되어 도우루, 탈라베라, 바다호스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튜어트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로런스의 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다.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서 낭만적 면모를 갖춘 군 아이콘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림 속에서 스튜어트는 경기병대 제복을 입고 페닌슐러 훈장을 목에 걸고 위풍당당한 기병대 장교로서의 맵시와 광채를 자랑한다. 로런스는 현란한 붓질과 혁신적인 색감으로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활동했는데 1820년부터는 조슈아 레이놀즈를 이어 왕립미술원 원장직을 수행했다. 이 작품은 동시대인의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영국 군 초상화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우루, 탈라베라, 바다호스 전투
1808년~1814년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침략에 맞서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국 연합군이 벌인 전투.
루이스 캐럴이 찍은 선구적인 사진. 루이스 캐럴이 1858년에 촬영. 모던 크로모제닉 프린트.
세계적인 아동 문학 작가, 수학자,아마추어 사진작가. 모두 루이스 캐럴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성인이 된 뒤 줄곧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살면서 강의를 하고 수학 관련 학술서를 저술하는 한편으로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활동했다. 사진이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캐럴의 활동은 꽤나 선구적이었다. 1856년 5월 1일자 캐럴의 일기에 따르면 새로 산 오트윌 주름상자 카메라로 생전 처음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사진 속 소녀는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 학장의 딸 앨리스 리들로 유명한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다. 캐럴은 리들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수시로 집에 들러 함께 놀면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앨리스와 그 여동생 이디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앨리스는 1862년 어느 나들이에서 캐럴이 해준 이야기를 글로 적어달라고 했고 캐럴은 공책에 삽화까지 곁들여 글을 완성했다. 이 이야기는 훗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출판되었다. 사진 기술의 발달은 예술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비교적 수월하게 초상화를 만들 수 있는 일대 변혁이었다.
초현실주의 양식의 환상적인 사진. 앵거스 맥빈이 1950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오드리 헵번은 동시대 배우 가운데 가장 여러 번 사진 모델이 된 사람 중 한 명이다.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며 여러 차례 중요한 상을 수상한 그녀는 확고한 직업윤리를 갖추고 자신의 공적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보적인 배우로,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그녀는 공들여 만든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여배우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사진은 원래 헵번이 유명세를 타기 전인 1950년에 광고사진으로 촬영한 것이다. 당시 '신선한 얼굴'을 발굴하라는 요청을 받았던 작가는 아직 무명이었던 헵번을 기용했다. 광고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헵번은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고대 건축물의 미니어처 소품과 인물을 배치한 기괴한 비율이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작가 앵거스 맥빈은 이보다 앞서서 당대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은 일련의 사진들을 촬영했는데 모래 위로 솟아 있는 헵번의 모습과 소품들에서 전작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꺽이지 않는 강인함을 표현한 로댕의 초상 조각. 오귀스트 로댕이 1884년에서 1886년 사이에 조각, 청동.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는 19세기 말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 활약한 인물로 시인, 극작가, 비평가, 잡지 편집자로 이름을 알렸다. 12세 때 얻은 골결핵으로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한 뒤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았지만 결코 그에 굴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아동 모험 소설 <보물섬>(1883)의 '외다리 존 실버'는 그를 모델로 하였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내 영혼의 선장이다" 라고 노래한 시 <불멸>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당대를 대표하는 조각가 로댕이 헨리와의 우정의 상징으로 제작한 것이다. 흉상 조각은 고대부터 있던 형식이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로댕에 의해서 다시금 조명 받았다. 진흙으로 원형을 만든 뒤 청동으로 주물을 했기 때문에 진흙의 자유로운 표현이 작품의 결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상화된 모습으로서의 초상 조각이 아닌 대상의 본질을 포착한 표현감 넘치는 작품이다.
대상의 형태를 해체한 초상화. 패트릭 헤런이 1947년부터 1949년까지 그린 그림. 캔버스에 유채.
T.S. 엘리엇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로 평론가, 극작가로도 활동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황무지>(1922)와 <네 개의 사중주>(1943) 등은 현대 문학의 기초가 되었다. 진보적인 문예 서적을 내는 출판사 파버 앤 파버(Faber & Faber)의 편집장으로 일했고 194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초상화는 무명의 젊은 화가 패트릭 헤런의 작품으로 1947년부터 1949년에 걸쳐서 그려졌다.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줄 수 있냐는 헤런의 편지에 엘리엇은 긍정적으로 답을 주었고 헤런은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 실물을 보고 스케치했다. 이때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거의 삼년에 걸쳐서 작업이 진행되었고 작가는 천천히 소환되는 기억을 통해서 그림을 완성했다. 인물의 정면과 옆모습, 두가지 관점이 결합된 입체파의 경향을 보이는 작품이다.
대량 생산된 '조립품 같은 효과'를 내는 초상화. 앤디 워홀이 1985년에제작. 캔버스에 합성 플리머 페인트, 실크스크린 잉크.
조앤 콜린스는 영국 왕립연극학교 출신으로 50~60년대 연극과 영화 무대를 풍미한 영화배우다. <인형의 집>(1946)과 <미인대회>(1951)로 연극과 영화에 데뷔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파라오의 땅>(1955)으로 할리우드에 데뷔했다. 1981년에 출연한 TV 시리즈 <다이너스티>에서 알렉시스 캐링턴 콜비를 연기하며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받았다. 2015년에는 평생 자선 활동에 헌신한 공로로 기사 작위인 '데임' 칭호를 받았다.
앤디 워홀이 제작한 이 작품은 콜린스가 <다이너스티>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때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한 것으로, 카메라 불빛에 밝아진 색감 때문에 얼굴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만을 단순화해 보여준다. 워홀은 이 작품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실크스크린 인쇄 과정을 즐겼다. 자신의 회고록 <팝이즘>(1980)에서 그는 이러한 작업이 작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을 지우며, 대량 생산된 "조립품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에 선호한다고 밝힌 바 있다. 초상화에 표현된 대담함과 단조로운 색조는 80년대의 피상적 매력을 드러낸다.
영원히 변화하는 초상화. 마이클 크레이크 마틴이 2008년에 제작. 통합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벽걸이 LED 스크린.
자하 하디드는 이라크 출신의 건축가로 '곡선의 여왕'이라고도 불린다. 다중 시점, 분절된 기하학적 형태를 활용한 자유롭고 유연한 설계로 유명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비롯하여 세계 도처에서 그녀가 설계한 건축물을 볼 수 있으며 2004년에는 여성건축가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비유되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영국개념 미술의 거장 마이클 크레이크 마틴이 제작한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초상화다. LCD 화면을 캔버스로 삼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끊없이 색채를 변주하는 이 작품은 서서히 그러나 계속해서 변한다. 색채의 변화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무작위적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이미지가 두 번 반복되는 일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늘 변화를 꾀하고 정형화된 틀을 거부했던 하디드였기에 이 영원히 변화하는 컴퓨터 초상화는 어쩌면 그녀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여왕을 묘사한 최초의 홀로그램 초상화. 크리스 러빈과 먼데이가 2012년에 제작. 라이트 박스에 렌티큘러 프린트.
엘리자베스 2세는 격변의 20세기에 왕위에 올라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군주다. 100세 생일을 약 두 달 앞두고 지난 4월 9일 별세한 에딘버러 공작 필립공이 남편이다. 대중매체의 시대에 걸맞게 그녀를 앞서간 어떤 통치자보다 자신의 삶을 공개적으로 이끌어오고 있으며 그 결과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 됐다. 여왕의 수많은 공식적인 이미지는 앤디 워홀, 루시언 프로이드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매혹적인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조명 예술가 크리스 러빈과 홀로그래피 작가 롭 먼데이가 협업한 것으로 저지 섬의 영국령 8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여왕은 이 작품을 위해서 두 번 모델을 섰는데 대관식에서 착용했던 다이아몬드 왕관을 썼다. 만 개 이상의 이미지를 촬영해 3차원 초상으로 구현한 이 작품은 여왕의 첫 번째 홀로그램 초상화다.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사진 촬영과 달리 홀로그래피는 다양한 각도에서 연속적으로 촬영한 스틸 사진으로 구성된다.
6. 제5부 : 정체성과 자화상
엘리자베스 1세의 충성스러운 신하. 안토니스 모르가 1568년에 그림. 패널에 유채.
헨리 리는 14살의 나이로 궁정에 들어간 뒤 평생 영국 왕실을 섬겼던 인물이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 때 무기고 수장으로 있으면서 여왕의 즉위기념일을 축하하는 여러 행사를 기획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이 행사는 당시 궁정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연회 가운데 하나여서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이 초상화는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수석 궁정화가였던 안토니스 모르가 유럽 대륙을 여행하던 헨리 리를 그린 것이다. 그림은 주인공의 정체성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옷은 엘리자베스 1세의 색인 검은색과 흰색이며 옷소매에는 여왕의 상징물인 혼천의와 연인의 매듭이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여왕의 옹호자로서 헨리 리의 역할을 나나낸 것으로 해석된다. 엄지손가락에 건 반지나 팔에 묶은 반지는 기사도적인 애정의 표시로 여왕, 또는 친구나 연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나타낸다.
대서양 노예무역의 생존자. 윌리엄 호어가 1733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카타르박물관.
아유바 술레이만 디알로는 세네갈의 부유한 성직자 집안 출신으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흑인이었다. 1730년 노예 매매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붙잡혀 노예가 된 뒤, 미국으로 팔려갔다. 3년간의 고생 끝에 런던에 오게 된 그는 독실한 신앙심과 높은 교육 수준 덕분에 상류층과 교류하며 궁정에 소개되었고, 결국 공개 모금을 통해서 노예 신분을 벗어나게 된다. 이듬해에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책으로 펴냈다. 디알로는 영국 사회가 서아프리카 문화와 정체성, 이슬람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 초상화는 자유를 얻은 노예를 처음으로 화폭에 담은 작품으로 아프리카인을 동등한 사람으로 예우한 최초의 유화이다. 디알로가 입은 옷과 목에 건 붉은색의 코란은 서아프리카 사람이자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최고의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1765년경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잠시 더 남아 있는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기를
결코 그만두지 않으리
그가 현을 켜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사랑했던 그를 한번이라도 스치듯 더 볼 수 있길 바라며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의 죽음에 대한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애도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은 독일 쾨텐 출신의 작곡가로 최고의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 중 한 사람이다. 1759년 처음 런던에 입성한 뒤 하노버 스퀘어 룸(Hanover Square Rooms)에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함께 개최한 정기 연주회로 유명해졌다. 40여 편의 교향곡, 소나타, 협주곡, 첼로와 비올라 다 감바 연주곡 등을 작곡했다.
음악가로서 아벨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 작품의 작가인 게인즈버러와 아벨은 비올라 다 감바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인생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절친한 친구였다. 아벨이 활을 쥐고 있는 모습을 보면 화가 자신도 이 악기를 능숙하게 다를 줄 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벨은 게인즈버러에게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 답례로 그림과 소묘 작품을 선물 받았다.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
베이스비올(bass viol) 또는 비올(viol)이라고 부르는 현악기로 크기와 생김새가 첼로와 비슷하다. 15세기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으며 첼로가 등장하기 전까지 많이 연주됐다.
남자와 여자의 인생을 모두 산 사람. 장 로랑 모니에 원작을 토머스 스튜어트가 1792년에 다시 그림. 캔버스에 유채
슈발리에 데옹은 프랑스 출신 군인이자 외교관, 검객이었으며 남녀 양성을 오가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한 세상의 호기심이 상당했지만 그 자신은 이를 공개적으로 논하기를 거부했다. 간첩 혐의로 프랑스에서 추방된 뒤 1785년부터 영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갔다. 데옹은 펜싱 기사로 활동하면서 상당한 명성을 쌓았다. 경기 때에는 주로 이 그림에서처럼 검정 드레스를 입고 프랑스의 생 루이 십자 무공 훈장을 달았다.
이 그림은 프랑스 화가 장 로랑 모니에의 원작을 동시대의 화가 토머스 스튜어트가 모사한 작품이다. 1792년 3월 23일 자 <퍼블릭 애드버타이저> 기사에 따르면 모니에의 작품이 1791년 왕립미술원에 전시되었는데 대중이 "대체로 만족"했다고 한다. 데옹은 새로 들어선 프랑스 혁명 정부로부터 계속 연금을 지급받고자 했는데 이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려는 듯 머리에 커다란 삼색 리본을 자랑스럽게 단 모습이다.
(위)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1947~2016)
글램 록의 선구자. 브라이언 더피가 1973년에 촬영. 크로모제닉 프린트
가수이자 작곡가 데이비드 보위는 인류가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바로 그 해에 싱글 '스페이스 오디티'(1969)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록 음반 <알라딘 세인>(1973) 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으며 40년 이상 활동을 이어간다. 마지막 앨범 <블랙스타>는 2016년 사망 이틀 전에 발매됐다. 음악과 문화의 아이콘이자 무대 위에서 다른 페르소나로 끊임없이 변신하며 정체성에 대한 실험적 접근을 시도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이 사진은 보위의 여섯 번째 앨범 <알라딘 세인> 표지를 위해서 촬영한 것이다. 독특한 메이크업과 미래적인 의상, 연극적 퍼포먼스로 유명했던 보위는 이 촬영을 위해 자신의 화려한 무대 위 자아 중 하나로 꾸몄다. 앨범의 표지는 이것과 비슷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사진이 최종적으로 선택되었으며 이후 대중문화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가 됐다.
(아래)애나 메이 웡(Anna May Wong, 1905~1961)
최초의 아시아계 헐리우드 스타. 도러시 와일딩이 1929년에 촬영. 클로로브로마이드지 인화.
배우 애나 메이 웡은 LA 태생의 중국계 미국인으로 무성영화 시대의 아이돌이자 인종 편견에 맞섰던 인물이다. 비 아시아계 배우가 관행적으로 아시아인 역할을 맡던 시대에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최초의, 그리고 한동안은 유일한 중국계 여성이었다. <나비부인>을 바탕으로 한 영화 <바다의 대가>(1922)에서 첫 주연을 맡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국적이거나 전형적인 역할만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그녀는 "왜 영화에서 중국인은 거의 항상 악당이죠? 그토록 잔인하고 살인과 배신을 일삼는 악당, 풀밭에 도사리는 뱀같은 존재, 우린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한 바 있다.
영국 사교계 사진작가 도러시 와일딩이 촬영한 이 사진은 웡이 편견과 차별에 지쳐서 헐리우드를 떠난 해인 1928년에 촬영한 것이다. 이 해는 웡이 주연을 맡았던 영국 무성 멜로극의 고전 <피커딜리>가 개봉된 해이기도 하다.
"젊은 숙녀들이 공부에 진지하게 열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졌다.
특히나 글을 쓰는 일은.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여성들은
"지식인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응접실에 앉아 바느질 일을 해야 했다."
-해리엇 마티노(1802~1876), (데버러 러츠 지음, 박여영 옮김, <브론테 자매 평전>, 2018년 재인용)
앤 브론테(Anne Bronte, 1820~1849),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1818~1848),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e, 1816~1855)
19세기 여성의 삶과 사랑을 그린 소설가들. 페트릭 브란웰 브론테가 1834년 무렵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영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자매로 그림의 왼쪽에서부터 앤, 에밀리, 샬럿 브론테다. 자매는 요크셔의 작은 도시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대담하고 열정적이며 상상력이 뛰어난 문학 작품을 창조해 냈다. 대표작은 각각 <애그니스 그레이>,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로 모두 1847년 출판 당시부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세기에는 여성 소설가로 활동하는 것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액턴(Acton), 엘리스(Ellis), 커러 벨(Crrrer Bell)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자매를 그린 그림 중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자매의 남자 동기였던 브란웰이 화가를 꿈꾸던 17세 때 그렸다. 그림 뒷편에 희미하게 보이는 형상이 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것으로 여겨졌다가 1914년 찬장에서 접힌 채로 발견되었다. 초상화미술관은 그림이 오랫동안 방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접히고 물감이 떨어진 부분을 그대로 보존했다. 이 초상화는 예술성이 부족해 보여도 세대를 불문하고 모든 관람객을 매혹하는 힘을 지녀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내가 바칠 것은 피, 땀, 눈물 뿐. 월터 시커트가 1927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윈스터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던 인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가 가운데 한 명이다.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총리가 되어 영국을 이끌었다. 영광의 시대에 태어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세계의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본 그야말로 현대 영국의 역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처칠은 꽤 훌륭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는데,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편안해 보이는 이 그림은 그의 그림 교사였던 시커트가 선물로 그려준 것이다. 1927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원래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소. 정말 내게 화가로서의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계시오"라고 적었을 만큼 적극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초상화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선물로 받자마자 다른 이에게 주었다.
18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초상화가. 1747~1749년 무렵에 자신이 그림. 캔버스에 유채.
초상화로 유명한 조슈아 레이놀즈는 18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왕립미술원의 초대 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회화 이론서를 저술하고 고전 시기 미술과 옛 거장들로부터 도덕적, 영웅적 상징들을 빌려와 일명 '장엄한 양식'(grand manner)을 초상화에 도입하기도 했다.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 장르를 격상시키겠다는 일념에서 늘 자신을 신사 혹은 '학식 있는 문필가'의 모습으로 표현하곤 했다.
젊은 시절의 레이놀즈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작업 중인 자신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의 다른 자화상들과 다르다. 한창 작업에 몰두한 듯 옷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고, 단단한 눈빛으로 화면 밖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화가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과 미래에 대한 포부마저 느껴진다. 강렬한 명암 대비는 레이놀즈가 평생 존경했던 화가이자 자화상의 대가인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풍경화가. 1799~1804년경에 자신이 그림. 연필, 흑색 초크에 백색 및 적색 초크로 밝은 명암처리.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인 존 컨스터블은 고향 서퍽(Suffolk)에서 영감의 원천을 찾았다. 1802년에는 '자연의 그림' 즉 풍경화만이 회화 장르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되는 역사화에 비교될 수 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는 야외에서 변화하는 하늘의 모습을 정밀하게 포착한 수백 장의 유화 스케치를 그리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실내 작업을 할 때도 작품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 자화상은 컨스터블이 런던의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 1799년 내지는 그 이후 몇 년 사이에 그린 습작이다. 당시 젊은 예술가들은 모델을 구할 수 없는 경우에 자기 자신을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림 속에서 컨스터블은 아주 단순한 흰색 리넨 스카프에 조끼를 입고 그 위에 깃을 높게 세운 모직 외투를 입은 검소하고 수수한 모습이다.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이 그림을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만든다.
찰스 1세의 궁정화가이자 17세기 최고의 초상화가. 1640년경에 자신이 그림. 캔버스에 유채.
안토니 반 다이크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제자로 플랑드르 출신이다. 영국으로 건너온 뒤 찰스 1세의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17세기 영국에서 활동했던 화가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중 한 명이다. 반 다이크는 경직되고 섬세한 세부 묘사에 치중했던 영국 초상화를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유려하고 세련된 양식은 20세기 초까지도 영국 초상화에 지배적인 힘을 발휘했다.
이 그림은 반 다이크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일곱 점 가운데 마지막 작품으로 예술성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그림이다. 화면 속의 그는 근사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나 팔 부분의 줄무늬로 보았을 때 그림 작업 중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옷은 넓고 빠른 붓질로 그려낸 데 비해 얼굴은 완성도 있게 마무리하여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작품의 액자는 화려한 해바라기 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반 다이크 자신이 디자인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 생략
도리스 진케이슨(Doris Zinkeisen, 1897~1991)
화가, 무대 디자이너이자 무대의상 디자이너. 1929년경에 자신이 그림. 캔버스에 유채.
도리스 진케이슨은 화가, 무대 디자이너, 무대의상 디자이너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무대 디자이너로 일할 당시 그녀가 노래도 하길 원했던 제작자에게 맞서 자신의 자리는 '무대 뒤'라는 단호한 입장을 고수했다. 다양한 연극과 영화에서 무대의상과 무대장치를 설계했으며 1936년에는 초호화 대서양 횡단 여객선 퀸메리호의 레스토랑 벽화를 그렸다.
당시 유행하던 화장이 강조된 모습에서 무대의상 디자이너로서 그녀의 재능이 엿보인다. 중국풍으로 화려하게 수놓인 숄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도발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월드 투어 중 시드니에 머물 당시 호텔 침실에서 대부분 작업이 이루어졌다. 1929년 왕립미술원 전시 때는 그레이엄 존스턴 부인이라는 결혼 후 이름으로 출품했는데 이 작품의 창작자로서 나서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는 드러내고자 한 점은 모순적이다.
세계인을 사로잡은 현대미술의 거장. 2005년에 자신이 그림. 캔버스에 유채.
전 작업이 즐거워요.
작업이 즐겁지 않다고 말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뭔가 잘못된 겁니다.…
예술은 메시지를 널리 알릴 수 있는 힘을 지녔기에 항상 희망을 품고 있죠.
-데이비드 호크니, 1971
데이비드 호크니는 가장 유명한 영국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으로 소묘, 회화, 판화, 디지털 기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팝아트 운동의 대표 주자였던 호크니에게 초상화는 전 작품을 하나로 엮는 실과도 같으며, 자아 성찰에 몰두하던 시기에는 하루에 한 점씩 그리는 것을 목표로 몇 달씩 도전을 이어가기도 했다. 1980년대 에이즈 위기 시대에는 목탄화로 진솔하게, 최근에는 렘브란트처럼 여러 성격 유형을 탐구하듯 아이패드로 자화상을 그린다.
이 작품은 2005년 할리우드 힐스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에서 거의 실물 크기로 제작한 연작 중 하나다. 호크니는 모델을 단 몇 차례만 만나서 관찰하며 모든 작품을 완성했는데 사진을 참조하거나 사전 밑그림 없이 유화물감으로 바로 캔버스에 작업한다. 이 작품은 관람객, 작가 호크니, 그리고 이 작품의 모델인 호크니의 친구이자 뉴욕 출신의 큐레이터 찰스 데어 샤이프스 삼자 간의 시선 구성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글럭 프레임의 창시자. 1942년에 자신이 그림. 캔버스에 유채.
글럭의 본명은 해나 글럭스타인으로 런던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다. 성 역할 규범에 끊임없이 저항했던 인물로 성별이나 출신 성분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서 1918년에 "접두사나 접미사 혹은 남의 이름을 따온 부분이 없이"라고 확고히 밝히며 성별 구분이 없는 이름인 글럭으로 개명했다. 글럭은 3중 액자 구조의 '글럭 프레임'(Gluck Frame)을 설계해 특허를 받았고, 1950년대에는 영국에서 유화물감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42년에 그린 이 자화상은 글럭의 대다수 작품과 마찬가지로 크기는 작지만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낸다. 도도한 표정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한편 슬픔과 피로함이 동시에 묻어난다. 명백한 색감이 느껴지는 것은 목에 두른 무늬 있는 스카프뿐, 나머지는 저채도의 중간 색조를 띤다. 화면을 얼굴로 가득 채운 구성이나 이마의 주름과 입술선을 미화하지 않고 그려낸 점에서 화가의 엄격한 성격이 드러난다.
영국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 1927-1929년경에 자신이 그림. 캔버스에 유채.
폴 베즐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미술계에서 구상주의를 완전히 벗어난 추상미술의 선구자다. 파리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이끌려 1926년 파리에 정착한 뒤에는 본명 마저리 왓슨 윌리엄스를 폴 베즐레로 개명하고 작품 경향도 점차 추상적으로 변한다. 앙리 마티스, 호안 미로, 바실리 칸딘스키 등과 같은 유명 예술가와 교류했으며 1934년에 추상미술가협회인 추상-창조 그룹(Abstraction-Creation)의 회원이 됐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자신이 선도적으로 발전시킨 추상 화풍을 잘 보여준다. 대담하면서도 단순한 인물의 형태는 그녀가 과거의 인상주의 화풍과는 결별하고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와 추상적인 형태를 도입한 실험적인 작업으로 나아갔음을 선언한다.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1963~)
영국 현대 미술계의 악동. 2002년에 자신이 제작. 마모시킨 동에 금도금.
영국의 현대 미술작가 트레이시 에민은 왕립예수학교 출신으로 1997년 왕립미술원에서 개최한 《센세이션》전에 출품한 <나와 동침한 모든 이들 1963~1995>(1995)과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린 1999년 터너상 후보작 전시회에서 선보인 <나의 침대>(1996)가 대표작이다.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서 자기 삶의 은밀한 부분을 상세하게 드러낸 저항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트레이시 에민이 처음으로 청동을 사용해 작업한 조각 작품이다. 이 조각상은 자아를 보여주는 것에 몰두하는 그녀의 작업의 핵심에 맞닿아 있는 작품으로 살아있는 작가의 데스마스크를 통해서 작가가 자신의 삶과 신체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에민은 이 작품에서 "스스로를 밀봉된 표본 혹은박물관 전시품으로 만듦으로써 말 그대로 자신을 미래 세대가 관찰할 대상으로 변모시켰다"라고 말했다.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 1960~ )
도예가이자 사진작가, 신랄한 비평가. 2013년에 자신이 그림. 4판 에칭, 작가소장용.
도예가이자 사진작가, 화가인 그레이슨 페리는 사회의 불공정함, 위선을 신랄하게 비평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주로 도예 작업을 하지만 직물이나 판화까지 매체를 확장해 예술가와 장인의 지위를 구분하는 전통적 관념에 도전한다. 과거와 현대의 다양한 주제를 탐구하며 사회의 불공정과 위선에 대한 서슴없는 비판을 담은 작품을 주로 만든다.
이 그림은 자화상이지만 화가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의 지도 같은 모습인데 이것은 페리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성벽 안팍의 구역들은 작가가 인생에서 겪은 각종 사건과 경험, 감정을 상징한다. 지도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작가의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썼다. 페리는 도시가 그것이 자리하고 있는 풍경에 의존하고있다고 설명하며 그 역시 자신이 속한 풍경에서 영향을 받고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말한 바 있다.
초상화는 '나'와 '나를 보는 사람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레이슨 페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체성이란 혼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스스로 만들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아의 본질"이라고요.
전시를 통해서 '나를 보여주는 오래된 전통'을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찾으셨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