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 하느님의 믿음 »과 함께 청하기 (20-25절)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20-21절)
세 번째로 성전에 예수가 들어감을 소개하는 날 아침부터 시작된 이 짧은 단락은 이중으로 앞선 단락과 연결된다. 곧 방금 전에 « 기도의 집 »으로 성전에 대해 말한 데 비해, 이 단락은 기도 쪽으로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연장시킨다. 예루살렘과 성전으로(20절) 아침에 그들이 이동할 때, « 그들 »은 « 그 무화과나무 »를 발견한다. 이 단체적인 시선(제자들?) 안에서 « 그들 »은 같은 나무(정관사 ‘그’와 함께)임을 알아보지만, 변화된 나무의 외관을 본다. 나무는 완전히 « 뿌리에서부터 말라버렸다. »
베드로가 « 기억 »하면서 개입할 때, 그는 스승에게 말하지만(« 랍비 ») 예수의 소원을 해석하면서 그것을 ‘저주’라고 알아본다. « 당신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를 보십시오. » 촌부 베드로는 일반적인 자명한 이치로 이것을 해석한다. 그는 관찰될 수 있는 것의 정상적인 이해를 특기하기 위해 거기 있다. 물론 완전히 말라버린 형상은 예수의 소원이 눈에 보이는 효과를 얻었다고 확인하게 한다. 이 나무에서 « 열매 »를 먹는 것과 관련된 미래로의 출구는 나무가 말라버렸기 때문에 완전히 닫힌다. 그럼에도 예수는 자기 말의 실현을 위해 어떤 유예기한도 정하지 않았다. 이 말의 ‘정상적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무화과 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여기, 그것이 예수와의 만남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인 그대로 예고되진 않았던 직접 결과가 있다. 사건이 시간을 앞서고, 표현한 소원을 그 강력함으로 초월한다.
베드로의 회상은 앞선 장면의 무화과나무를 참조케 하지만, 베드로의 말은 그 전날에 비해 새로운 것을 도입한다. 11,12에서는 솔선이 예수에게 있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 거기로 접근하는 이는 예수다. 11,20에서는 그룹 전체(« 그들 »)가 무화과나무를 보며, 관심을 나무의 메마른 상태로 유도하고, 저주처럼 들은 예수의 말과 이 상태를 연결하는 이는 베드로다. 그럼에도 베드로의 시도는 그대로의 과거로 되돌아가도록 예수를 끌어들이기에 실패한다. 예수는 베드로의 관점에서 무화과나무의 운명을 고려하기를 거부한다. 예수는 « 하느님의 믿음을 가져라 »라고 대답하면서, 제자들을 다른 층위(« ‘그들에게’ 말했다 »)로 곧 이중의 형상행보에 따라 소개된 역설적인 실행주체로서의 그들의 능력의 층위로 데려간다.(23-24절) 관심이 무화과나무의 운명에서, 자신이 믿음과 함께 말하면서 완성한 것과 말의 주체 쪽으로 쏠린다. 이렇게 예수는 제자들을 말의 효과에 대한 관찰자의 자리에서, 결핍의 인정 속에 뿌리내린 말의 활동의 실행으로 넘어가도록 초대한다.
사실 무화과나무 형상의 변화는 그 전날 말했던 것의 정확한 실현과는 다른 것이며 더 많이 말한다.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다면, 나무는 이제 열매를 맺지 못할 뿐더러 잎도 갖지 못한다. 나무가 잎을 잃어버렸으므로, 나무의 외양이 더 이상 식욕을 채워줄 가능성으로 속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그 기만하는 외양을 박탈당한다. 나무에 잎이 없으므로, 나무에서 갈망에 대답할 어떤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력이 끝장났으며, 또 갈망을 일깨우고 무엇을 먹을 시장기를 유지할 가능성도 끝난다. 더 이상 이 말라버린 나무에서 먹을 것을 찾으러 올 위험은 없다. 어떤 면에서는 나무가, 그것을 가까이서 보았을 때 그인 것의 진리로 되돌려졌다. 나무가 말라버렸으므로, 사람들은 더 이상 나무에서 먹을 것을 발견할 것이라 상상하면서 나무쪽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 앞에서, 갈망은 실제로 여전히 갈망하며, 과일이 충족시킬 수 있었을 필요로 이동시키지 않는다.
무화과나무는 성전과의 관계에서 의미하기를 계속한다.1) « 시장기 »와 함께 예수를 내버려둔 무화과나무 곁에서처럼, 예수는 하나의 갈망을 갖고 성전에 오지만, 거기서 자신이 찾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튿날 아침,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감은 지성소와의 유사성을 확인한다. 실용성 주위에서 부산함에도 불구하고 지성소는 메말라 있다. 곧 지성소는 만일 그곳이 갈망이 커지는 성지인 « 기도의 집 »이 되지 않는다면, 그곳을 고무해야하는 생생한 갈망을 유지하지 못한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만큼이나 완전히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성전의 특징을 규정한다. 첫째로, 성전이 멀리서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의 시선에 나타나는 그대로. 둘째로, 읽으라고 주어진 그대로의 글 안에서 듣게 하는 « 나 »의 관점으로 성전을 평가하는 예수의 말 안에서 드러나는 그대로. 이 본문의 틀 안에서 또한 그룹이 되돌아가는 성전의 문제다. « 잎이 무성한 » 외관 아래 성전의 부산함의 진리인 것이 드러난다. 이 진리는 성경에 따르면 « 기도의 집 »의 특징을 규정하는 갈망의 범위 밖에 있다. 말라버림의 형상 아래, 보이는 성전의 미래현실이 예고된다.
믿음과 기도 (22-25절)
베드로의 지적을 바로 해설하는 대신, 예수는 자신을 동반하는 그룹(« 그들 »)에게 말하면서 대답한다. 이렇게 예수는 « 하느님의 믿음을 가져라 »고 말하기 때문에, « 기도의 집 »에 대한 추구와 연결시키며, 기도를 하는 자의 편에서 기도조건에 대한 작은 담화를 이어 말한다.
« 하느님의 믿음2) »인 것은 알아듣기 힘들다! 분명한 것은 이 형상이 독자를 추구에 놓는다는 것이다. 확신에서 약함의 뉘앙스를 포함하는 « 사람의 믿음 »과 비교해서, « 하느님의 믿음 »은 과오를 범하지 않는 믿음과 일치할 것이다. 신적인 믿음은 단단하고 굳건한 하느님의 자질들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사실 모든 것이 산들조차 무너질 때 최후의 보루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전형적인 바위로 묘사된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의 확고함에 비해 비교될 수 없는 자질이지만 그래도 믿음이 남아있는 자질을 가져야 한다. 곧 본문의 후속에서 보는 것처럼 가능과 불가능을 고려하지 않고 유지되고, 소유하는 힘에 근거하지 않는 관계의 신뢰도 안에서 강력함이라고 말하자. 우리가 믿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한계에서, « 하느님의 믿음 »은 절대적인 특성을 갖는다. « 하느님의 믿음을 가져라 »는 이 명령형에 이어지는 말들에서 곧이어 특징지어질 믿음의 장르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느님의 믿음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확실함에 근거한다.
이어지는 본문은 주제적 논리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 세 가지 말의 연속처럼 보인다. 이 세 가지 말은 이야기의 형상들보다는 연결하기가 쉽다. 등위접속사와 종속접속사가 이 말들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는 문구로 도입된다. 이 형식을 우리는 이미 그 범위를 강조하면서 여러 번 언급했다.(3,28과 9,1 참조) 이 형식은 말하는 자의 참여와 그가 말하는 것의 진리를 보증함을 동시에 지시한다. 그럼에도 이 진리는 말한 것을 실행하는 이를 위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
첫째 말은 예수가 무화과나무에게 말한 것과 유사한 어조다. 이 말은 예수가 무화과나무에게 말한 것처럼 « 이 산 »에게 말할 « 어떤 사람 »의 잠재성을 검토한다. 그럼에도 이 비교는 차이들을 보여준다. 예수는 무화과나무에게 하나의 기원(그리스어의 기원법)을 말했으나, 화자는 산에게 명령(그리스어의 명령법)한다. 무화과나무의 경우는 화자인 예수의 신원이 말의 가치와 관련된다고 생각할 수 있음에 비해, 산의 경우는 누구든지의 문제이며 발생할 기이한 결과를 알아듣기 어렵다. 어떻게 산이 말 한마디로 바다에 던져질 수 있고, 이것이 단지 믿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실현은 상상할 수 없고, 불가능해 보이며, 부조리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어지는 것과 이 발화문을 분리해선 안 된다. 이 발화문이 기도에 대해 말하기 위한 기초로 쓰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가능·불가능의 문제에서 나와서, 발화행위 과정들을 분석해야 한다. 곧 말하는 행위 안에 주체의 자질이 강조된다. 만일 그가 « 그의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 곧 그의 믿음이 굳건하면, 어떤 동요도 어떤 주저함도 어떤 조건도 없다. « 하느님의 믿음 »처럼 확고부동한 믿음이다.
이 점에서, 첫 번째 말은 이어지는 말과 유사하다. 게다가 이 두 말은 « 그런 연유로 »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 두 말의 비교를 정당화하는 이유를 드러낸다. 곧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주체에게 말해진 것은 예수의 상대화자들의 기도를 위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일반 화자(« 누구든지 »)의 자세들은 « 너희 »의 청원기도의 모델로 쓰인다. 두 말은 유사한 형식으로 끝난다. « 그러면 그에게 그대로 될 것이다. » 그리고 «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될 것이다. » 두 경우에서 또한 믿음의 문제다. « 만일 누가 » 마음으로 주저 없이 « 그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 « 너희가 그것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이다. 매번 « 하느님의 믿음 »인 굳건한 믿음 덕분에 효과적인 말의 문제다. 두 말은, 화자가 말하는 것과 화자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 ...을 믿기(croire que) »라는 표현을 포함한다. 곧 모든 의심을 배제하면서 말에 의지하는 굳건한 확신이다.
이 두 상황에서, 말한 것과 이루어지는 것과 그대로 되는 것 사이에 대립을 세우는 동사들의 시제를 잘 관찰해야 한다. 말(발화의 현재)과 화자에게 일어나는 결과(미래형) 사이에 간격이 있고, 믿는 순간과 « 그대로 되는 » 순간 사이에 간격이 있다. 사실 예수는 그가 말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가 ‘본다’고 하지 않았다. 강조는 말해진 말 속에 기한이 말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놓인다. 곧 말하는 주체의 믿기 안에서, « 그대로 될 것이다 »는 표현 안에 발화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요구하거나 명령하는 자가 믿을 때, 그가 말한 것과 일어나는 것은 일치한다. 믿기는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일종의 승리다. 곧 믿기는 « 될 » 것을 앞지른다. 격차가 말하기의 현재와 도래할 것의 현재를 일치시키는 믿음 속에서 사라진다. 이 확신은 자기암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한이 발화된 말과 믿으면서 말하는 주체에게 ‘확인된’ 그 효과 사이에 존속하기 때문이다. 기한이 존재하고 또 말의 텅 빈 울림소리를 표시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한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 속에 시간의 집중이 있다. 이 확신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그에게 도달할 것이다. 이런 연유로 수동태 동사들인 « 들려져서 » « 던져지는 »에서 만큼이나 기도한다는 사실에서 형상에 놓이지 않고 드러나는 타자에게 곧 제삼자에게 열리면서 의지해야 한다.
산에 말한 이 놀라운 말에서 기도의 승인은 말을 하는 듯하다. 이 승인은 이 상상할 수 없는 말의 행위라는 역설적인 모델 위에서 기도행위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이 승인은 기도하는 자에게 믿기 차원의 강화로 개진된다. 이 모델에 따르면, 기도하기는 말이 없다고 알려진 힘에 자유롭게 길을 내어주면서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의 체험을 기다려야 한다 할지라도 결핍과 갈망의 근거 위에서 자신의 청이 응답을 받았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역설은, 기도가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기도가 중요하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그가 결국 혜택을 입고, 그가 갖지 않은 힘의 통과에 열리게 하는 결핍 앞에 서 있게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말의 연속은 덜 분명하다. « 그리고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 ... ‘탕감해 주어라.’ » 기도에서 빚의 탕감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3) 탕감에 대한 이 말이 무엇을 덧붙이는가?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의 믿을 수 없는 표징과 기도행위에 관한 놀라운 말 다음에, 본문은 윤리적 실천의 단순한 권고로 되돌아오는 것일까?
발화문 처음에 명백하게 놓인 기도를 위한 수직자세 형상은(« 서서 »), 빚 탕감을 포함하는 수평적인 관계와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이 빚 탕감은 «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으로 명확히 진술된다. 이 명시는 마주 대하거나 나란히 있는, 같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전제한다. 이런 수평관계 안에서는 청하지도 않고, «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 ‘있는’ 것도 ‘그만둔다.’ 다시 말해,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을 덜어내기 위한 행위를 한다. 탕감하기는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지만 또한 모든 형태의 정당한 요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구하기의 반대이다. 서 있는 자세는 기도자세와 어울린다. 기도자세에서 기도하는 이는 자신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를 보고 서 있을 때, 수평으로 해야 하는 것에서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두 영역 사이에 일치(화합)가 유지되어야 한다. 요청하거나 명령하기에서 행해야 하고 탕감해야 하는 것이 없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는 청원에 관한 가르침 속에 어떤 것이 부족하다. 우리가 위를 향하는 기도자세에 있을 때, 수평적인 관계를 방해하거나 빚지게 하는 것에서 면제해 주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믿는 이의 기도는 권능과 연결하지만, 용서하고 감내해야 할 죄의 방패막이는 되지 못한다. 어쨌든 생명처럼 가장 소중한 빚인 지불할 수 없는 빚이 있다.
성전에서 말을 하기 위해 성전으로 되돌아가기 직전에, 예수는 이 이동에서 자신을 동반하는 이들에게 이 이중관계 곧 믿음으로 청원하기와 탕감하기를 보존하라고 당부한다. 예수가 무화과나무(그리고 성전)를 그 진실 속에 복원시켰듯이, 예수는 기도하는 자의 참된 자리를 가르친다. 기도하는 자가 불가능 속에서 일하는 것을 강조한 후(22-23절), 예수는 그를 그의 관계들의 진실로 부른다. 기도는 진실을 원하며, 진실하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각자는 그의 빚을 탕감 받아야 하며 탕감해주어야 한다. «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탕감해 주신다. » 진실 안에 있기, 절대타자와 함께처럼, 타인과 참된 관계에 있기이다.
이렇게 마지막 부분에 Mc에서는 드물게 나오는 형상인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가 등장한다. 이 형상은 다른 형상인 « 하느님의 믿음을 가져라 »와 연결된다. « 하느님 »에서 역설적인 형상인 « 하늘 »로 국한된 « ‘너희’ 아버지 »까지의 이 통과는 기표를 두 배로 한다. 내밀한 관계는 근접할 수 없는 간격을 인정하는 동시에 긍정한다. « 하늘에 » 있기는 « 땅에 » 있기와 대립된다. 이 « 아버지 »의 자리가 하늘에 있다면, 그분이 « 너희 아버지 »인 이들을 위해 땅에서는 그분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그분의 현존이 말하는 것은 이 결핍 안에서다. « 우리 아버지 »라 불리는 분이 « 땅 »에 없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그분에 대해 말하게 한다. 모든 인간에게 결핍된 이는 그 아버지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에게서 태어났지 않았는가? 그분은 그의 신원의 뿌리 자체다. 이와 같이 기도하는 « 너희 »에게는, 너희 신원 자체가 그분을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라고 부르게 한다. 가장 멀리 있고 가장 높이 있으며 가장 접근하기 힘든 분은 또한 가장 깊고 가장 가까우며 뿌리에서 너희를 위해 애쓰는 분이다. 너희가 산에게 하는 인간의 말 안에, 거기 스며들려 하는 이 « 하느님의 믿음 », 접근할 수 없는 절대타자에 대한 이 믿음이 있다. 하지만 이 절대타자는 내면화되어 있고, 이를 증명하는 너희 안에 어떤 것이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 너희 아버지 »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