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는 국적은 일본이지만 충북 부강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불후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조부모 혹은 고모, 고모부의 집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라났다면 아마도 나는, 내가 그렇게도 혐오하고 경멸하는 그런 인간들의 사상과 성격과 생활을 그대로 물려받고, 결국에는 나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후한 운명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 박열을 통해 알려졌고 이후에 그녀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네다 후미코 라는 제목의 단행본도
출판되어있다.
나는 개씨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 개씨끼(이준익 감독의 영화<박열>에서
박열은 도쿄의 땅바닥을 기어 다니듯 생활하는 자신에 관해 자작시에서 "개새끼"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이 시를 읽었을 때 후미코는 "어떤 강한 감동이 온 생명을 높이 들어 올렸다"라고 느꼈다. 감동이 생명을 꿰뚫었다' 도 '뒤흔들었다'도 아니라 '높이 들어 올렸다'라는 표현을 썼다. 아마도 내부에서 강한 그 무엇을 느껴나보다.
후미코는 박열과 동거를 시작하며 공동생활을 위한 3개 조항을 만들었다. 무정부주의자 같은 면모다.
제1조- 동지로서 동거할 것
제2조-내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제거 할 것
제3조-한쪽이 사상적으로 타락하여 권력자와 악수하게 되는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해소할 것
후미코가 이토록 평등을 고집했던 이유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곧장 예속관계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이는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어떤 인간관계에도 다 해당된다는 것을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경험으로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열의 무릎에 후미코가 앉아 있는 사진이다. 후미코는 박열이 무릎에 앉아 소녀처럼 앙증맞은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고, 박열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오른팔로 턱을 괸 채 왼손으로는 후미코의 가슴을 만지는 도발적인 사진이다.
설명이 붙지 않으면 사진이 선명하지 않아 잘 볼 수 없다. 교도소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 한장에도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다.
1919년 가을 일본에 온 박열은 1920년에 조선인 학생 15~16명과 혈거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들은 친일파 조선인과 일본인 차별주의자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했으나 반년 만에 해산했다.21년 11월에는 흑도회를 조직했다.
박열이 폭탄을 입수하려는 계획을 처음 세운 것도 이즈음이다.
후미코와 박열은 '흑도'를 창간했다. 창간호에서는 간행 취지를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고정된 주의가 없다. 인간은 일정한 틀에 갇혔을 때 타락하고 사멸한다.
.......
우리에게는 우리로서의 존업한 체험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며, 방침이 있고 또 끓어오르는 뜨거운 피가 있다.
박열은 살아남아 후미코가 죽은 뒤 9년이 지나 옥중에서 전향을 했고 1945년에 출옥했다.
해방후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후미코는 23세에 옥중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후미코를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도 그냥 사람들이 붙이기 좋아서 붙인 이름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