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제3권(卷之 三)
기(記)
8. 매월루 기문(梅月樓記)
<개요>
1490. 5. 김일손이 지은 합천 매월루(梅月樓)의 기문. 1489년에 합천에 부임한 수령 김영추(金永錘)가 객관의 동북쪽에 3칸의 누각을 지으니 매월루였다. 김일손이 이곳을 한번 가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경상도관찰사 정모(鄭某)와 함께 이곳을 찾아 수작하던 중 합천수령 김영추가 기문을 부탁하였다. 이에 매월루의 청아·단박함이 후일에도 김영추를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적었다.
嶺以南山水之勝 邑居之雄 樓觀之美 固不爲不多 陜亦巨郡也 此地有名山大川 奇蹤異迹 在新羅爲大良州 高麗顯宗 以所生不善 且有所忌 久遯于野 竟由大良院君卽尊位 相傳遺址猶存 若夫竹竹之死節 巨仁之隱淪 崔孤雲之仙遊 皆在此地 是固好古君子之欲一經過者也
조령 이남 지역은 산수와 웅대한 읍과 아름다운 누각이 꽤 많은 곳이다. 합천(陜川)역시 큰 군이어서, 이곳에 명산대천이 있고 기이한 자취와 유적이 있다. 신라 때에는 대양주(大良州)라 하였다. 고려 현종은 태어난 시기가 좋지 않았고 또 기휘하는 바가 있어서 오랫동안 초야에 숨어 살았는데, 마침내 대량원군(大良院君)을 거쳐서 왕위에 올랐다. 전해 오는 유지가 아직 남아 있는데, 예컨대 죽죽(竹竹〔1〕의 사절과 거인의 은륜과 최고운(崔孤雲)의 선유(仙遊)가 다 이곳에 있다. 옛것을 좋아하는 군자라면 한번 들러 볼 만한 곳이다.
〔1〕죽죽(竹竹) : 신라 선덕여왕 때 대야주(大耶州) 출신의 장군이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金品釋)의 부하로서 백제 장군 윤충(允忠)과 싸우다가 성이 포위되자, 품석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고 죽죽은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歲己酉春 永嘉金候永錘子衡 由義盈令 出紐郡章 下車未幾 絃誦之聲四達 余方家食道州 欲一觀游刃之迹 兼得山川古今之異 而顧無緣焉 尋得無妄之災 困於縲絏 幸蒙聖恩 放還柴荊 杜絶人事 時蓬原鄭公某爲使相 余於公忝姻屬 且居門生之後 按部多暇 以書抵余 邀致懇款 强起疎慵
기유년(189, 성종20) 봄에 본관이 안동인 수령 김영추가 의성과 영덕의 수령을 거쳐서 합천에 부임하니, 오래지 않아 고을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내가 막 벼슬을 버리고 도주(道州)의 집에서 묵고 있을 때라 고을에 베푼 선정의 자취도 볼 겸 고금의 기이한 산천을 한번 보고자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다. 얼마 뒤에 뜻하지 않은 재앙을 당하여 배소에 갇히는 곤경에 처하였으나 다행히 성은을 입어 방면되고, 집에 돌아와서는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때 봉원인(蓬原人) 정모(鄭某) 공이 관찰사가 되었는데, 나는 공과 인척 관계이고 공의 문하생이기도 하였다. 공이 고을을 순찰하고 여가에 내게 글을 보내어 한번 만나기를 간절히 당부하여 게으른 나를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從行數日欲辭 公曰 陜之爲郡 地僻而務簡 可與子淸話竟夕 且郡主人 乃余觀察西海時舊僚佐 亦可人也 盍往觀乎 先是 金候構新樓於客館之東北 凡三楹 前鑿方池種藕 丹雘未半 而相公驟登 余行踵至 公憑欄指余曰 斯樓不侈不陋 不敞不隘 甚宜於皇華之便適 作者之名字 不可泯於後 子當記之
공을 좇은 지 수일 만에 사례하고 돌아오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합천군은 땅이 궁벽하고 사무가 간단하니 그대와 더불어 밤이 새도록 청담을 나눌 만하며, 군수 김공은 내가 서해를 관찰할 때 보좌하던 사람인데 역시 같이 놀만한 사람이니, 어찌 가보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앞서 김 군수는 객관의 동북쪽에 새로 누각을 지었는데 모두 세칸 이었고 그 앞에는 네모반듯한 못을 파서 연을 심었다. 단청은 반도 채 되지 않았으나 정공이 누각에 올라가기에 나도 따라 올라갔다. 공이 난간에 기대어 나에게 이르기를 “이 누각은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으며, 넓지도 좁지도 않아서 사신을 접대하기에 매우 알맞으니 이 집을 지은 사람의 이름자가 후세에 민몰되지 않도록 그대가 기문을 지어 주게.” 하였다.
時都事金先生某 在座公贊成之 余辭以文拙 不足以張大相公之榮命 而糚䌙金候之制作 然公固命之 金候亦爲余言之 誠意之交至也 則不能不效其譾薄 因索名於公 久之曰 因吾所見 可乎 初登樓也 見古梅數株 對立於庭牆 入夜就寢 見透簾蟾光 廉纖如鉤 合扁之曰梅月 余起曰 善乎 公之命名也 梅庭月華 詩家淸料也 而一般雅賞 又稱其爲樓 斯樓也而文之以斯名 所謂名不虛得者也
이때 자리를 같이했던 도사 김 선생 모씨도 찬성하였다. 내가 글이 졸렬하여 대상공(大相公)의 영광된 명을 충분히 받들어서 김 군수의 제작을 빛나게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공이 굳이 명하고 김 군수 또한 내에게 지성으로 권하므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공에게 누각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부를지를 물으니, 잠시 후에 말하기를 “내가 본대로 해도 되겠는가? 내가 처음 누각에 오를 때 오래된 매화나무 몇 그루가 뜰에 마주 서 있는 것이 보였고, 밤에 잘 때 주렴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이 보였는데, 달이 마치 갈고리같이 가늘게 보였다. 이것을 합하여 매월이라 함은 어떻겠는가?” 하였다. 내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좋습니다. 공이 명명한 것은 매화 뜰에 밝은 달빛이란 뜻이니, 이는 시인들의 맑은 시의 소재가 되고 모든 사람들의 좋은 완상거리가 되고 또 누각에 걸맞으며 누각은 이 이름으로서 빛이 나니, 그 이름이 허황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樓之宏大敞豁 帶山河而據城郭 富景致傅奇麗者 不必較也 至於礱斲合奢儉之節 黝堊得文質之中 玲瓏窓戶 宛轉欄檻 蕭然冷然 與物相宜 其端莊簡淡 此之猶齋眉賢婦 伴鶴處士 可以久要而無富貴之淫也 是則嶺之南 斯樓爲最 蓋工無不善 而亦金候運斤之妙也 金候 爲人淸爽精密如其樓 他日候去樓存 觀斯樓 亦可以知金候 然則候將因此而久於玆土也歟
이 누각의 크고 넓은 전망과 산하를 두르고 성곽을 의거한 풍부한 경치와 빼어난 아름다움은 따질 것도 없거니와 재목을 다듬은 데 있어서도 사치와 검소의 절제를 알맞게 하였고, 단청도 외양과 바탕을 알맞게 하였으며 영롱한 창호와 굽이도는 난간과 헌함은 쓸쓸하면서도 깨끗하여 외물과 잘 어울렸다. 그 단정하고 장엄하고 간명하고 담박함은 비유컨대, 남편을 공경하는 어진 아낙과 같기도 하고 학을 벗하는 처사와 같기도 하여 오래 살펴보아도 부귀의 사치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곧 영남에서 최고의 누각이라 하겠는데 이는 대체로 목공의 솜씨도 훌륭하지만 역시 김 군수가 목공을 잘 운용한 덕분이었다. 김 군수는 사람됨이 깔끔하고 정밀하여 그 누구와 같으니 훗날 군수가 떠나가고 누각만 남아 있을 때 이 누각만 보아도 가히 김 군수를 볼 수 있겠다. 따라서 군수는 장차 이로 인하여 이 땅에 오래 남게 될 것이다.
第相公於斯樓命名 必以梅月者 其有在乎 鹽梅調羹 高宗所以命傳說 卿士惟月 箕子所以告武王 公於此得無觸所見而興所思乎 公梅月襟懷也 淸素著望 固家世之一事 而今以廊廟之器 委分決之寄 行且入相 思所以揮調羹之手 和甘酸不齊之味於鼎鼐 謹休咎之應於身與家 而達之朝廷 所以徵之月者 固應念玆在玆
다만 상공이 이 누각에 꼭 매월이라고 명명한 데는 의도한 바가 있었다. 소금과 매실로 국에 간을 맞추듯 현재를 적소에 기용하여 조화롭게 다스리라 한 것은 은나라 고종이 부열(傅說)〔2〕에게 명한 것이고, 관리는 달(月)과 같다고 한 것은 기자(箕子)〔3〕가 무왕에게 고한 말이다. 공이 이를 보고 자극을 받아서 생각해낸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매월과 같은 흉금을 지닌 분이다. 청렴하고 소박하기로 명망이 드러나 실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일의 한 가지이다. 장차 재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조정에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상이한 견해를 조화시키고 일신과 가문에 허물을 없게 하여 조정에까지 미치게 할 것을 생각할 것이다. 달을 누각 이름에 가져다 쓴 까닭이 본디 이러한 생각에 응하여 잇게 된 것이다.
〔2〕부열(傅說) : 은(殷)나라 고종 때의 이름난 재상이다.
〔3〕기자(箕子) :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숙부로 기(箕)땅의 자작이다. 주왕이 포악하여 이를 간하여도 듣지 않아 도망하였다가 은나라가 멸망한 뒤 주 무왕(周武王)에게 서경의 홍범(洪範)을 전해 주었다 한다.
若夫嘲弄素艶 恥玩淸光 乃騷人之事 非相公之事 況時方仲夏 梅子靑黃 月旣望矣 圓影且缺 梅非其時 而月過其度 相公之思 其有在乎 後之繼公而登斯樓者 亦可以目其名而思其實 不但以梅月爲玩愒之一物 可也 某一介孤士 物外白放 何當待歲之晩 更扣金候 少酌樓上 詠疎影暗香之句 而一喚詩魂乎
대체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화조를 조롱하고 밝은 달을 즐기는 것은 시인들의 일이요, 상공의 일은 아니다. 더욱이 때는 바야흐로 중하라 매실은 푸르고 누르며, 달은 이미 보름을 지나 둥근 그림자가 다시 이지러지고 있으니 매화는 그 때가 아니요, 달도 그 정도를 지나갔으니, 상공의 생각은 필시 의도한 바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공의 뒤를 이어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 역시 누각 이름을 보고 그 실상을 생각하며 매월을 하나의 희롱거리로만 여기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일게 고단한 선비로서 사물 밖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노니는 사람이니, 언젠가 연말을 기다렸다가 김후를 다시 찾아가서 누각 위에서 술도 한잔하며 성긴 달그림자와 은은한 매화 향기의 시구를 읊어 시혼을 한번 불러 보려 한다.
弘治紀元庚戌五月日 濯纓子盆城金馹孫記
홍치 경술년(1490,성종21) 5월 일 탁영자 분성 김일손이 쓰다.
- 번역문 출전 2012년간 탁영선생문집, 2014. 9. 30. 죽산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