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와 호박
松堂 박성환
1.
우리 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 영어 교과서(Modern English: 권중휘 지음)에 실렸던 다음 이야기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 날 한 소년이 들에서 일하다가 시원한 상수리나무(도토리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커다란 호박들이 호박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줄기가 힘없이 축 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줄기가 감당하기에는 호박이 너무 크다며 호박줄기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년은 도토리나무를 올려다보게 된다. 자잘한 도토리들이 튼튼한 가지에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호박에 비하면 도토리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주 작고, 도토리나무는 그 둥치가 호박나무줄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굵고 튼튼하다. 왜 저렇게 연약한 호박줄기에 저렇게 큰 호박이 열리고, 이렇게도 크고 튼튼한 도토리나무에 이렇게 작은 도토리가 열리는 걸까? 왜 그런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게 되어 있는 걸까? 하느님께서 그렇게 지으셨으니 하느님은 참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크고 튼튼한 도토리나무에는 그에 걸맞은 큰 호박이 열리고, 저렇게 실낱같이 연약한 줄기에 작은 도토리가 열리게 하면 나무나 줄기는 둘 다 큰 부담 없이 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열매를 매달고 있을 것 아닌가. 그것이 이치에 맞고 공평하지 않은가? 소년은 하느님은 자기 생각보다 못하다 여긴다. 큰 호박과 작은 도토리,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 덧 잠이 들어 비몽사몽간 꿈속을 헤맨다. 꿈속에서는 크고 튼튼한 나무에는 커다란 호박이 열려 있고, 가늘고 연약한 호박줄기에 자잘한 도토리들이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되어 있는 것이 꿈속에서도 매우 흡족하여 빙긋이 만족한 웃음을
머금는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도토리나무에 열린 호박 하나가 그의 얼굴에 직통으로 떨어졌다.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면서 얼른 아직도 얼얼한 것 같은 코를 만져본다. 다행히도 그의 코는 아무렇지 않았고 제자리에 박혀있었다. 그는 다시 도토리나무의 도토리들과 건너편 호박줄기의 호박들을 번갈아 보고는 자기의 코를 어루만진다. “그렇구나! 하느님은 역시 세상을 공평하게 지으셨구나!” 도토리나무에 호박이 열려 있었더라면 내 코는? 하고 안도의 숨을 내 쉰다.
“공평(公平)”이라는 것에 대한 인간의 개념과 하느님의 개념은 일치하는가? 아니면 이 소년처럼 인간이 생각하는 공평의 잣대와 하느님의 그것은 서로 어긋나는 것인가? 약한 줄기에 커다란 호박을 열게 하고 튼튼한 나무에 자잘한 도토리를 열게 한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판단이 옳은가? 튼튼한 도토리나무에 작은 도토리를 열게 하고 연약한 호박줄기에 커다란 호박을 열게 한 하느님의 처사가, 그래서 그 도토리나무 밑 그늘에서 시원하게 쉴 수 있게 해준 하느님의 조물(造物)하심이 옳은 일인가?
2.
일본소설가 엔도 슈사큐는 <침묵>이라는 작품에서 약한 자의 배교(背敎)와 숭고한 인간애(人間愛)-사랑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천황을 살아있는 신(神)으로 섬기는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당연히 금지 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처형당하였다. 기독교도를 가려내는 방법으로 땅바닥에 성화(聖畵: 예수의 초상)그림을 깔아놓고 사람들을 지나가게 하였다. 밟고 지나가는 자는 무사통과지만, 밟지 않는 자는 기독교도로 치부되어 처형하였다. 성화를 밟는 것은 배교의 표현으로 강요되던 일이었다. 심성이 여리고 신앙심이 약한 교인은 밟는 순간의 고통이 크지만 결국 성화를 밟고 배교하고 만다. 신앙심과 심성이 강인한 자는 감히 성화를 밟지 않고 기꺼이 목숨을 내놓거나 고난의 길을 택한다. 죽음과 고난을 견뎌야 하는 힘든 길을 택한다는 의미로 볼 때 성화를 밟는 것은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순교(殉敎)는 최고의 영광으로 간주되고, 강한 자들의 특권이며 최고의 영예로 찬양 받는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나 심성적으로 강한 사제(司祭)의 경우, 그런 강인함을 지닌 영웅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의 순교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이 소설은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는 불쌍한 신도들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배교의 길을 택하는 한 신부(神父)의 모습--사제에게 배교는 가장 괴롭지만 숭고한 행위일 수 있다는 상황적 진실로서 배교에 대한--한 연약한 사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부는 믿음을 지키는 것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가장 숭고한 가치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죽어가는 농민들의 괴로운 비명소리였다. 교만한 관리들이 신부인 그를 배교시키기 위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농민들을 가마니에 말아 바다에 내던진다. 이 신부는 약한 사제였다. 그가 강하다면 신도들의 신음소리에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강하다면 그는 기꺼이 영광을 위해 죽을 것이다. 약하기 때문에 신도들의 신음을 무시하지 못한다. 신부는 순교를 통한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배교를 통한 인간애-사랑을 택한다. 신부는 예수님의 초상을 밟고 몸부림친다. 그리고 아프다는 말을 신음처럼 내 뱉으며, “그리스도께서도 사랑 때문이라면 배교했을 것이다”라고 자위한다. [이승우, “약한 자의 초상,” 현대문학, 2005-9281- 286에서 재인용]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배교자가 되는 신부의 약함은 행위의 형태가 아니라 행위의 동기가 중요함을 시사한다.
약한 신부의 배교가 사랑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강한 자의 순교처럼 영광됨에 손색이 없다고 한다면 공평하지 못하다 할 것인가? 도토리나무 그늘을 좋아하게 되는 인간사를 위하여 호박이 연약한 줄기에 열리게 한다는 것이 공평하다고 정당화 될 수 있는 일인가?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현실--하늘의 법은 무겁고 지상의 현실은 비참하다. 인간사(人間事)는 매순간 결단을 요구받고 있는데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는 것 아닌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모든 처사는 매사에 다 공평하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가?
3.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 (영화 <밀양>의 원작)에는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빌미로 교묘하게 마음의 고통을 탈피하려는 이기적인 면모를 띤 인간이 등장한다. 그자는 유괴살인을 했으면서도 심적 고통에서 탈출하려고만 하는 자이다. 이 죄인에게 유괴-살해된 아이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겪는다. 기독교인이 된 그녀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겠다고 생각하고 교도소로 찾아가서 마침내 범인을 대면한다. 그런데 정작 용서를 고마워해야할 범인은 자기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면서, 피해자의 용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죄인인 자기를 주님께서 용서해주셔서 요즘은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말을 너무나 평온하게, 피해자의 어머니로서는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담담하게 늘어놓는다. 유괴-살인범을 용서해야 할 자기를 제치고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용서해버린 하나님! 정작 가장 큰 상처를 준 자기에게 한 마디도 용서를 구한 적 없던 범인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지 않는가! 가해자인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빌미로 유괴-살인자라는 죄책감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본 여인은 세상이 왜 이런 곳인가? 절망의 나락에 빠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큰 죄를 저지른 자가 하나님을 팔아 살인자라는 죄책감과 심적 고통으로 부터 빠져나가는 것이라니! 가해자인 용서 빔의 주체는 피해자인 용서함의 주체와 중첩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인간사의 이치에서 보면 제3자의 위치에 있는 하나님이 섭리(攝理)의 주체라고 하지만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가해자의 이런 용서 받음과 피해자의 절망은 공평한가? 가해자의 용서 빔의 대상이 된 하나님은 과연 공평함을 조율(照律)할 수 있는 섭리적 존재인가?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그래서 언제나 공평성이 확보되어 있다는 것인가? 도토리나무 밑 그늘 속의 소년의 코를 무사하게 하셨으니 공평한가?
4.
많은 사람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흉악범들의 죗값은 인간들의 합의로 정해진 법에 의해서도 조율(照律)되지 않고 있다. 사형선고를 받았어도 억울한 피해자 가족도 포함된 국민들의 혈세로 감옥에서 호식호숙(好食好宿)의 인권을 누리고 있다. 살해당한 사람은 최고의 인권유린인 죽음을 당하였으되,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 죄인은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인권이라는 방패막이 밑에서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최소한이지만 인권을 누리며 생존한다. 사형은커녕 감옥에서 인권이 유린되었다며 정부에 손해배상청구소송까지 한단다. 죄를 지었어도 인권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살해당한 피해자와 끝날 줄 모르는 숱한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피해자가족의 인권은? 최소지만 보장되어 있는 가해자의 인권과 참담한 심적 고통에서 신음하는 유족의 인권 사이에 공평성은 있는가? “죽는 놈만 억울하다”는 우리 옛말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살해당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줄 방도는 유족들에 의한 무당(巫堂)의 해원(解寃)의 굿판밖에 없단 말인가?
인간애-사랑과 인간적인 도리 때문에 교리와 어긋나는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사람을 강한 자--순교라고 할 만큼--가 매도하는 것이 과연 공평한 일인가? 그저 일률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을 위한다면서, 개별적 사안의 상황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 전후좌우를 깊게 촌탁(忖度)하지 못한 인간들의 이치에 따라 튼튼하다고 도토리나무에 큰 호박을 열게 하고 약하다고 호박줄기에 자잘한 도토리를 열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 아래 소년의 코와 머리를 박살내야 하는가?
장단상교(長短相較: 노자)란 말이 있다. 긴 것과 짧은 것이 실체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그 둘이 서로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긴 것은 짧은 것과 비교될 때만 긴 것이고, 그것이 더 긴 것과 비교될 때는 오히려 짧은 것이 되어버린다. 길다는 것과 짧다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이지 절대적인 설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공평이라는 것과 불공평이라는 것도 문제되는 상황에 따라 진정한 공평성을 구현할 수 있는 기준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법은 공평성과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고 법과 공평, 법과 정의 사이에는 아직도 엄청난 간극(間隙)이 있다. 도토리의 크기와 호박의 크기만큼의 간극처럼.
(2012.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