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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17. 6. 6일로 동유럽 자유여행을 출발한지 열 사흘이 되는 날이다.
자다르(Zadar) 시도 어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주차난이 심각했다.
도심을 우회해 보트클럽을 경유하고 있다.
마침 전자제품 판매점 앞에 공용주차장이 있어서 진입했다.
그러나 이곳도 빈 공간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겨우 주차를 마치고 부두를 걸다가 Gradski most 를 건넜다.
다리는 차량이동이 불가능하고 사람들의 보행만 가능했다.
Zadar - Gradski most에서 항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드리아해 전경이 환상적 이었다.
요트와 유람선이 항구에 정박해있다.
과거 사회주의 잔재는 찾아볼 수 없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
부두를 감상한 후 구 시가지로 이동했다.
세관의 문이 있었다.
이곳은 세금을 징수한 곳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과거에도 오늘날처럼 외국선박의 입출항은 규제를받았다.
통행세를 지불해야 하였던 것이다.
과거 사람들의 일상을 엿보는듯 했다.
자다르 항
거리를 따라 나로드니 광장으로 이동했다.
광장 앞에 교회가 있다.
교회 앞에 있는 공간이 나로드니 광장이다.
광장주변에 많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다.
마침 오후시간대라 교회 건물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늘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원한 맥주와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오후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다시 도나티 성당으로 이동했다.
도나티성당은 9세기에 건축 되었다.
첨탑이 하늘로 솟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감히 쳐달볼 수 없었다.
금빛처럼 성령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기때문이다.
앞에 성 아나스타샤 교회도 있었다.
고대 로마시대 공화정의 본산이라 할 수있는 공공광장 포룸 도 있었다.
민주정치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로마 포룸이 있는 곳에서 로마시대 정치인들의 열띤 연설을 상상해보았다.
민주정치는 토론과 설득의 결과다.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정치인들은 혼신의 노력을 쏟고 있었다.
과거와 오늘날이 차이가 없어보였다.
자신의 생각을 강력히 주장하는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설득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이곳은 로마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로마시대 사람들의 혼이 녹아있었기때문이다.
도시 구획이나 건물의 배치가 그랬다.
나로드니 광장
고대 로마시대 건물의 잔해와 기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둥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섬세했다.
과거의 눈부시고 화려했던 건물은 사라져서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주변은 당시의 삶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뒷모습을보는 것처럼 써늘하고 황량했다.
잔해는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시대 기상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귀족의 생활 공간이었다.
고대 로마시대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이면을 엿볼 수있었다.
수치심의 기둥을 뒤로하고 바다의 문으로 이동했다.
아드리아해(Adria)를 건너면 과거 로마제국이 위치하고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아드리아해(Adria)를 건너 자다르(Zadar)까지 이르렀다.
쉽지 않는 도해(渡海)다.
그러나 고대 로마 인들에게는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날의 정치인이나 재벌이 별장을 짓는 것처럼 로마시대 귀족들은 이곳에 투자를했다.
그리고 로마문화를 이곳으로 유입시켰다.
그래서 이곳에 로마문화가 꽃을 피웠다.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아드리아해 파도가 넘실거렸다.
아드리아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다 오르간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어떤 사람은 제방 둑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철학자가 되어있었다.
바다는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시원하고 가슴이 트이는 듯했다.
어떤 사람은 낚시의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이들은 과거 로마시대 사람들이었다.
로마시대 유적
어딘선가에서 오르간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오르간 소리같았다.
바닷가에 오르간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르간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디서 들려오는 지 주의를 집중했다.
귀를 기울였다.
어느 곳에서 들려오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라고 특정지울 수도 없었다.
오르간 소리가 계속 들렸다.
물결의 파장이 클수로록 진동의 폭도 길었다.
신기하고 기묘했다.
감동이었다.
자연의 이치가 놀라움을 주웠다.
탄성을 연발했다.
오르간 소리에 매료 되어갔다.
성 아나스타 교회
다시 태양의 인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태양의 인사는 별로 감흥을 주지 못했다.
사실을 너무 비약하고 있었기때문이다.
태양이 뉘엿뉘엿 사라지려하고 있었다.
보헤미안처럼 태양이 사라지면 그곳이 곧 보금자리나 다름없었다.
숙소가 아직 결정되지 못했다.
이방인에게는 정처가 있을 없었지만 오늘따라 외롭고 쓸쓸하다.
보금자리를 찾기위해 자다르(Zadar) 시 변두리로 이동했다.
아드리아해(Adria) 파도가 귀청을 때리고 있다.
서울이 생각나고 가족이 떠올랐다.
그러나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몸은 점점 위축되어갔다.
도로는 포장도 되어있지 않았다.
이러한 시골에 숙소가 있을까 싶었다.
태양의 인사
그러나 자다르 시는 관광지다.
희망을 가지고 이동했다.
멀리에 모텔 이라는 불빛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민박집이었다.
집 주인과 대화를 시도했다.
피곤이 엄습해왔다.
밤이 깊어가고 있어서 이곳을 숙소로 결정해야했다.
민박 주인도 믿음직 스럽고 호감이 갔다.
숙소에서 바라본 아드리아해
방이 3층에 위치하고있어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올라가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러했는데 말없이 가방을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방의 구조가 아드리아해(Adria)를 바라보고 있었다.
낭만적 이면서 한폭의 그림이었다.
행복했다.
이곳이 시골이라는 것을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적막 강산 이었기때문이다.
자다르 항구 해적선
아드리아해(Adria)의 파도소리가 낭만적 이어서 감상에 젖게 했다.
이부자리를 펴고 이생각 저생각하면서 시를 쓰고 있는데 그만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아드리아해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식사는 선배 두분이 준비했다.
해물구이와 파프리카를 곁들인 것이다.
여기에 된장국이 준비 되었으니 환상 적이라 할 수있었다.
식탁은 3층 베란다에 준비했다.
아드리아해(Adria)가 바라보이고 있는 곳이다.
식탁위에 올려놓은 음식이 예술이었다.
식사를 하며 아드리아해(Adria)를 바라보고 있다.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동유럽을 거의 섭렵하다 시피하고있다.
그러나 과거 사회주의국가들은 생각해볼 수 없었다.
그런데 현재 과거 사회주의국가들을 여행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동유럽 자유여행이 더욱 감회가 깊었다.
식사를 마치고 크로아티아 스플리트(Split) 시로 이동하고 있다.
오늘은 2017. 6. 7일로 동유럽 자유여행을 출발한지 열나흘이 되는 날이다.
자다르시에서 스플리트(Split) 시까지는 163km 다.
정상적인 속도로 이동한다면 2시간 1분이 소요될 것 같다.
D424번 지방국도로 진입해서 진행하다가 수베닉과 슬플리트 방향으로 이동했다.
다시 D424번 지방국도로 이동해 E65번 고속도로와 합류했다.
자다르(Zadar) 시에서 지방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E65번 고속도로와 합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될 것 같아 D424번 국도를 포기하고 E65번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아드리아해(Adria)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던 아드리아해(Adria)가 살며시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이제까지 크로아티아 여행을 감행하지 못했다.
기회는 늘 있었지만 그때마다 다른 일고 겹쳤다.
그렇다고 해서 크로아티아 여행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동유럽 여행을 할 수있게 된 것은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스플리트 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아드리아해(Adria)는 파도가 잔잔해서 마치 내해의 호수처럼 느껴졌다.
E65번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다.
시베닉(Šibenik)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33번 지방국도로 진입하면 시베닉(Šibenik)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시베닉(Šibenik)은 이번 여행일정에서 빠져있다.
디오클레티아 궁전
아쉽지만 스플리트 시로 이동하고 있다.
2차선 고속도로는 한산하고 낭만 적이다.
스플리트(Split) 시의 안내판에 보이기시작했다.
곧바로 갈림길이 나타났다.
E65번 고속도로에서 1번 지방국도로 좌회전하여 스플리트(Split) 시로 이동했다.
스플리트(Split) 시는 반원형의 아름다운 포구로 환상적인 도시다.
19만명 안팎의 인구가 거주하는 작은 도시다.
아드리아해(Adria)에 면한 주요 항구로 관광 및 휴양도시로 알려진 곳이다.
디오클레티아 궁전
스플리트 시는 305년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건설한 도시다.
그 후 많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나, 1945년 크로아티아 영토에 귀속되었다.
따뜻한 기후와 역사적 건축물이 많아 관광도시로 각광받고있다.
유적 지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궁전이 손꼽힌다.
그 밖에 로마시대의 대성당, 베네치아 고딕 스타일의 공회당, 고고학 박물관 등이 남아 있다.
스플리트 시는 옛전부터 교통의 요지다.
아드리아해 연안의 경제중심지이기도 하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여객선 터미널 앞 공용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곧바로 부두를 걷기시작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그러나 해양성 기후의 무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부두 가에 앉아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가로수 그늘의 벤치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한가롭게 해안가를 거닐 면서 산책하는 사람도 있었다.
평화롭고 낭만적 이었다.
바다를 관망하는 사람도있었다.
부둣가 산책을 마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궁전으로 이동했다.
나로드니 교회
디오클레티누스 황제 궁전 입구서 부터 막히기시작했다.
시장과 카페, 레스토랑, 선물가게를 드나드는 관광객들때문이다.
디오클레티누스 황제 궁전은 중앙시장을 경유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입구서 부터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관광지는 어느 나라나 마찬 가지다.
이곳도 관광객들이 가게를 서성이며 선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으로 곧바로 이동했다.
역사적 유물을 관찰하기위해서다.
스플릿 공원
궁전은 웅장하고 빼어났다.
고대 로마시대 건축양식이 집약된 건물이었다.
넋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궁전의 일부가 주민들의 생활 터전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색적인 도시의 풍경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궁전은 부와 권력을 상징하고 있는 곳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노년을 보내기 위해 건설한 궁전 이기때문이다.
동서와 남북이 각각 150m, 200m 에 이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이곳에서 11년간 머물렀다.
지금은 파괴되고 볼품없는 작은 궁전에 불과했지만 4세기 경에는 5,000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 했던 곳이다.
성곽 내부의 골목길은 미로처럼 얽혀있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호텔, 카페, 레스토랑 등이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침이면 구시가지의 작은 광장에서 시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갓 잡아 온 생선을 팔기위해서다.
그래서 짙은 바다냄새를 맡을 수있었다.
인간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어시장도 탐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로마시대 건축물 안에서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
이곳은 분명 로마와 다른 특색이 있었다.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해가고 있었다.
일정대로 여행을 진행해야 하기때문이다.
정오가 넘어가고 있다.
부둣가에서 간단히 정오식사를 마치고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로 이동했다.
스플리트(Split)에서 두브로브니크(Dubrovnik )까지는 대략 230km 다.
정상적인 속도로 이동한다고 해도 3시간 4분이 소요될 것 같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로 이동하기 위해서 경관이 수려한 8번 지방국도를 따라 이동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 1번 지방국도를 따라 이동하다가 E65번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전방은 천 미터가 넘는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산의 허리를 잘라 도로가 개통되어 있었다.
정상은 1,762m 고지다.
정상 아래에 교회가 있었다.
생과 사를 가르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곳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수양하는데는 이곳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았다.
교회는 맛배 벽돌집이었다.
지붕위에 굴뚝처럼 생긴 박스안에 작은 종이 매달려있었다.
박스 위에 솟아있는 조그마한 십자가가 이곳이 교회임을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잠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삼라만상이 고요했다.
산천은 햇볕에 그을려 타는듯 했다.
그리고 뾰쪽한 바위가 노출되어 존재 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무엇 인가 잡아보려고 이곳까지 왔다.
그러나 잡힐듯하다가도 잡히지 않았다.
이곳에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허상에 불과했다.
마음을 비면 행복은 가까이에 있었다.
이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라고 가슴 깊히 새겼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 )까지는 장 거리다.
그래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접경에서 숙박 했으면 하였다.
숙소는 ‘zimmer(방)’나 캠핑장 정도면 만족이었다.
그러나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구절 양장을 돌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입경 했다.
여권을 제출하니 금방 통과시켰다.
네움(Neum) 이라는 마을이 나왔다.
산둥성이에 형성된 마을이다.
그림이었다.
이탈리아의 “친퀘테레(cinque terre)” 마을을 연상하게 했다.
렌트 카에서 내려 네움(Neum) 마을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렌트 카에서 내릴 수 없었다.
이곳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영토이기때문이다.
이곳을 경유 해야만 하였다.
8번 국도를 따라 두브로브니크(Dubrovnik ) 시로 계속 이동했다.
오른쪽은 아드리아해(Adria)다.
바닷물 비취색깔처럼 파랗고 잔잔했다.
스플릿 해안
고요했던 바다에 갑자기 물결이 일고 있다.
한 척의 어선이 이동하고 있었기때문이다.
한 폭의 수채화같다고나 할까 꿈속에서나 느낄 수있는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해안가 언덕에 빨간 집들이 촘촘히 붙어있었다.
천국인가 싶었다.
너무 아름다워 탄성이 터졌다.
다시 크로아티아 쪽 국경 검문소가 보였다.
수십대의 차량이 일렬로 멈춰서있었다.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여권을 제출했다.
너무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입국 했을 때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알고보니 이유가 있었다.
요즘 이슬람교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인 I·S 의 준동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여권을 돌려받은 후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로 이동했다.
아드리아해 바다의 파란 물결이 잔잔하다 못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이상국가에서나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가고싶었던 곳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방문하지 못했다.
나의 꿈이 실현 되고 있는 중이다.
가슴이 울렁거리기시작했다.
누가 이곳을 천국이라고 했던가?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를 보지 않고서는 천국을 논하지 말라”는 영국 버나드 쇼의 말이 생각났다.
맞는 말이었다.
이곳은 천국이었다.
현수교 다리를 넘으면 두브로브니크(Dubrovnik ) 시다.
그러나 숙소가 아직 미정이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 ) 시에 도착하면 숙소가 있지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 ) 시에 도착하자 곧바로 인포메이션(information)으로 이동했다.
안내인은 두브로브니크 시내 숙소가 거의 매진되어 방을 구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에어비앤비(Airbnb)와 북킹 닷컴을 연결시켰다.
Apartment 라도 찾아보기위해서다.
그러나 이것도 없었다.
난관이었다.
다시 회원들의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뾰쪽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다시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시에서 시외로 이동했다.
변두리에서 모텔을 찾기위해서다.
그렇다고 해서 숙소가 시외에 있다고 보장할 수도 없었다.
현수 교를 넘어 8번 국도로를 따라 30분 이상 이동했다.
이미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방을 구하지 못하면 렌트 카 속에서 잠을 자야 했다.
전방에 큰 빌딩이 보였다.
호텔같기도 하고 오피스텔같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레스토랑이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레스토랑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다.
놀라고 말았다.
그가 한국인 이었기때문이다.
그는 시장개척을 위한 기업의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 이곳에 잠시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빌라 바빌론아라는 모텔이 있는데 빈방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했다.
그의 말대로 이동했다.
빌라 바빌론아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다행히도 거기에 빈방이 있었다.
방은 3층과 4층에 있었다.
끙끙 거리며 3층과 4층까지 가방을 운반해야했다.
가장 연장자가 3층에 그리고 우리팀이 3층에서 묵기로했다.
그리고 대장 부부가 4층으로 올라갔다.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웠다.
먹는 것이 일상과 다르고 긴 여정탓일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대장과 가장 연장자간의 보이지 않는 충돌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대장은 3층 방에서 묵고싶었는데 나이많은 연장자가 기어이 대장을 4층으로 올려 보냈기때문이다.
고집때문에 사달이 발생하고 말았다.
서로 말도 섞지않을 것 같았던 분위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누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