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대로느낀대로 ‘걷기은빛순례’ 현장보고(이부영).hwp
이부영 은빛순례자께서 쓰신 은빛순례보고입니다.
바쁜 시간에도 서울과 지역을 오르내리면서 앞장서서 은빛순례에 나섰던 그 마음,
걷기순례보고에서도 그 마음이 팍팍~ 느껴집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걷기 은빛순례’ 현장보고
- 2018/3/1~11/22, 서울 탑골공원~백령도
이부영(한반도 평화만들기 은빛순례단,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
1. 글머리에
걷기순례를 하나에서 열까지 수발한 수지행자는 일정을 최종 정리하면서 2018년 3월 1일부터 11월 22일까지, 서울 탑골공원에서 서북단 백령도까지 모두 108곳을 걷고 강연하고 경청했다고 밝혔다. 어찌 보면 우리 강토의 온갖 사연이 맺힌 곳, 108번뇌로 몸살을 앓고 있는 곳을 순례한 셈이었다. 사실상 순례를 논의하기 시작한 2017년 9월부터 2018년 2월말까지 준비하느라고 모인 일정들 그리고 본격일정 중에도 이리저리 돌아다닌 추가일정까지 합산한다면 일정은 꽤 늘어날 터이다.
은빛순례는 한국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고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뤄냈으면서도 지난 반세기 이상 분단대결과 불평등을 빚어내는데 직접적 책임이 있는 60대 이상의 세대들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얘기를 듣기 위해 앞장서자고 해서 시작된 것이다. 또한 이런 뜻에 공감하는 50대 이하의 금빛세대들의 도움과 격려를 받아 나서게 되었다. 지난해 논의를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미국과 북한 사이에 언제 전쟁이, 그것도 핵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비장한(?) 분위기 속에 나서게 되었다. 연말연시를 지나면서 평창올림픽이 순조롭게 열리고 한미, 북미 정상회담으로 발전하면서 전쟁위기에 대한 긴장감은 북핵협상과 남북관계의 발전에 대한 조심스런 낙관으로 변했다.
걷기 순례가 시작될 무렵 남북, 북미관계는 지난 70여 년 분단과 전쟁 그리고 대결체제를 살아온 남북 한반도 주민들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지경으로 화해-공존 쪽으로 급진전되었다. 지금까지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북미 정상회담도 열렸다. 그러나 북측이 핵-미사일 실험장을 폭파하는 등 전향적 자세를 보였지만 미국은 북측의 무조건적 항복이나 다름없는 완전비핵화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면서 제재와 봉쇄를 오히려 강화하는 강경기조를 밀어붙이자 북미협상은 정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한국 답방이 성사되고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게 되면 핵협상 국면으로 다시 진입하게 될는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반도 전반에 북핵협상과 남북교류에 낙관적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걷기순례를 진행하면서 순례단은 우리 사회 곳곳에 한국전쟁의 묵은 찌꺼기가 거의 치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거기서 발산되는 남남갈등-대립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이른바 남남갈등의 온상이 팽개쳐져 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다. 국민이 세금 내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도 해결하라고 정치권력도 맡기는 것 아닌가. 그러나 역대정부들은 상태를 악화시켰거나 방치해왔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광주 5.18과 제주 4.3을 해결하고자 나선 것은 획기적인 조처였다. 정부가 70년이나 늦게 철이 났다고 할까.
2. 주목할 사례들의 범주
가. 남남 갈등대립의 진원지 참배: 국립현충원의 네 분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 은빛순례의 목적을 분명히 하자는 뜻에서 여기서 시작했다. 이어서 김구, 여운형, 손병희 선생들의 묘역도 참배했다. 5.18 국립묘지, 4.3제주항쟁 기념관, 한국전쟁기념관, 각 지역의 전몰군경충혼탑과 한국전쟁 피학살자 묘역들도 참배했다.
나. 남남 갈등대립을 넘어서는 독립운동 기념관, 의병항쟁기념관, 독립지사 생가 참배: 분단 프레임이 남남 이념갈등과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면 독립운동, 동학혁명과 의병항쟁은 분단 프레임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원체험(原體驗)이다.
다. 보수 진보가 함께 귀중하게 지키려는 문화재 고적 사찰 방문: 각 지방의 지방자치단체들이 보존에 힘을 기우리는 문화재 고적을 방문하고 독립운동가 문화예술인의 생가 기념관을 방문했다. 이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는 보수 진보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라. 보수단체와 대화추진: 여야정권교체가 있고난 뒤 소외감을 느끼는 자유총연맹 민주평통 고엽제피해월남참전군인회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들과 대화를 가지려했다.
마. 공직사회의 중요성에 비춰 강연과 경청순례 시도: 전주시청과 제주시청 공무원 대상 강연과 질의응답. 정권이 바뀌어도 바뀐 정권은 5년이면 지나간다는 공직자들의 공무원 집단이기주의, 보신주의는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다. 광역지방자치단체와 기초지방단체는 오락 연예 등 주민 위락을 위한 행사뿐 아니라 사회정치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하겠다.
바.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종교지도자들과의 만남 추진
3. 구체적 사례들의 내용
가. 이승만, 박정희 vs 김대중, 김영삼: 보수세력들은 이승만 박정희만을 참배한다. 진보세력은 김대중만을 참배한다. 김영삼은 보수 진보가 고루 참배한다. 은빛순례단 가운데서도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처음 참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몹시 고통스러웠던 게 사실이었다. 이 장애부터 넘어서는 게 중요했다. 서거한 국가원수들을 보수-진보 진영으로 갈려 참배하는 관례부터 넘어서야하겠다.
나. 순천의 여순사건 피해자유가족의 경우: 여순사건피해자 위령비에서 유가족 30여명과 함께 참배 제례를 올렸다. 80여 세부터 70대 중반에 이르는 노령의 유가족들에게 제례를 올린 뒤 어떻게 살았는가를 물었다. “어려서부터 빨갱이 새끼 소리 들은 기억밖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들을 대해 우리 정치가 격리와 희생만 강요했지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20여분 거리의 죽도봉 공원에 있는 전몰군경 현충비에도 함께 참배드리자고 제안했다.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유족들에게 유족회장이 “이 길이 한을 푸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설득하여 가해자측의 현충비에도 함께 참배했다. 행사 뒤에 유족들에게 소감을 물었다. 오히려 개운하다고 했다. 한을 푸는 치유과정이 아니었나 생각됐다. 피해자들이 마음을 열고 용서하는 과정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최근 광주5.18대량학살에 대한 정부차원의 사과와 트라우마 치유작업이 실시되었고 제주 4.3항쟁의 경우에도 정부 사과와 치유작업에 대한 약속이 있었다. 늦었지만 정부의 해원을 위한 노력이 기우려지는 것은 다행이다.
다. 보수-진보 분단프레임을 극복하고 있는 철원군 사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철원군에서는 100주년 기념사업을 보수-진보 양측이 함께 벌여가기로 합의했다. 당초 철원군 농민회는 3.1독립만세운동 당시 경기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가장 오랫동안 시위를 벌였던 기록을 찾아냈으며 이 사실을 동네 어른들에게 확인하자 어른들도 자랑스런 고향의 3.1운동 기억들을 부모들에게서 들은 대로 확인해주었다. 자연스럽게 함께 3.1독립 100주년사업을 해나가기로 했는데 농민회 젊은이들을 좌경용공으로 생각하는 극우성향의 노인들이 문제였다. 젊은이들과 함께 하자고 다짐한 개방적 노인층이 극우 노인들을 설득했다. 또한 철원이 배출한 걸출한 독립운동가 박용만 장군의 선양사업도 함께 하기로 합의했다. 철원의 사례는 분단-전쟁 이후에 심화된 분단 프레임을 그 이전의 독립운동이라는 공동의 원체험(原體驗)으로 극복해낸 사례로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분단 이전의 민족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 되어 싸웠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그 기억은 그 동안의 분단과 동족상잔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일깨우는 각성제가 될 것이다.
라. 보수단체들과의 대화 강연연찬: 자유총연맹 대전지부, 고엽제월남참전 전우회 대구지부, 민주평통 정책상임위원회(대전) 등과 강연과 대화연찬을 가졌다. 보수단체들은 진보정권으로 바뀐 뒤, 소외감과 불안감을 가지고 있어 그들에게 호소와 불만을 들어주는 것이 필요했다. 소속원들이 대다수 자영업자 중소상공인들이어서 전쟁과 위기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남북의 화해, 대북투자 등이 한국경제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데도 동의했다. 개성공단이 설치되어 그곳에 투자했던 중소상공인들이 얼마나 기업으로서도 성공했는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박근혜 이명박 정부가 그런 정책을 선택했을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진보개혁정권이 대북경제교류 화해정책을 선택하고 우리 중소상공인들이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대북협력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의 역할분담이고 정책조화이며 이런 정책을 추구할 때 우리는 평화와 경제활성화를 병행-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자 이들도 대부분 동의했다.
마. 공직자들에 대한 강연연찬: 전주시청(600명) 제주시청(300명) 등 두 곳 지방자치단체에서 공직자들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박근혜 정권 당시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받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유진룡 장관과 국장급 공직자들이 그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해직되었던 사례를 지적했다. 블랙리스트 작성은 민주, 인권에 배치되는 행위로 공직자들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문광부 장관과 공직자들은 청와대 지시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던 것이다. 이런 지시를 청와대로부터 받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공직자들에게 물었다. 곤혹스런 질문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 종교지도자들과의 경청순례: 김희중 대주교(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회장), 이영훈 목사(순복음교회 당회장), 이흥정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KNCC), 설정 스님(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이정희 천도교 교령, 한은숙 당시 원불교 교정원장 등 국내 주요 종교지도자들을 예방하고 한반도평화를 위한 남남갈등을 극복하는데 함께 협력하자는데 합의했다. 이 분들의 은빛순례에 대한 동의표시는 내년 3.1국민평화선언에 가장 높은 도덕적 힘을 부여할 것이다.
사. 은빛순례 여정에 꼭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거의 전 여정에 함께 하면서 좌우 대립으로 희생된 원혼들, 동학혁명 의병전쟁 독립운동에서 희생된 원혼들, 우리 역사의 존경받을 위인들의 사당들을 마주했을 때 그들을 위무하고 해원하는 춤을 올려준 박소산 학춤꾼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러일 전쟁에서 일본해군의 급습으로 자폭한 러시아해군병사들을 위해 인천 부둣가에서도 해원춤을 받쳤다. 그 무더운 2018년 7월 여름 통영 고성에서, 찬비 내리는 11월 삼척 강릉 바닷가에서도 그는 쉬지 않고 춤췄다. 영혼과 하늘에 받치는 그의 춤 공양은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비는 기도였다.
4. 걷기 은빛순례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
지난 9개월 가까이 전국 각지를 순례하는데 지역의 생명평화 인연으로 맺어진 많은 자원자들의 참여와 성원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한반도전쟁위기에 맞닥뜨려 아이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절박한 심경으로 참여했다는 순수한 시민들을 만날 때는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찬비가 쏟아지는 해변가를 일행들 말고는 아무도 지켜봐주는 사람들도 없는 가운데 걸어갈 때 마음속으로 자신과 대화하면서 이렇게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하는구나, 작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우리 자신이 은빛순례에 나서기 전에 우리 산천 곳곳에서는 이미 바른 실천을 찾아나서 바른 길을 걷고 있는 시민들이 있었다. 은빛순례는 우리가 앞서가니 우리를 따르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이미 바른 길 찾아 나선 시민들의 실천을 찾아 서로 나누도록, 함께 가도록 이음쇠 노릇을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