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주일 성수에 관한 말씀으로 우리의 교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러면 한국교회의 초대교회는 어떻게 주일을 섬겼을까요? 홍용택 씨가 정리한 소래교회 한국의 최초의 교회죠. 초력교회에 대한 초립교회 주일 성서에 대한 자료가 있어요. 이 정리한 자료를 제가 좀 더 이렇게 정리해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서울의 교회는 황해도 장면 대구면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그의 주변에 그 일대에 위치한 모든 가게가 다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바쁜 농사철일 때도 일손을 다 멈추고 경건하게 예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는 지주로부터 시작해서 소작농 그리고 머슴까지도 다 한자리에 앉아서 자료에 의하면 한 입 그리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만약에 상점을 열게 되거나 주일에 일을 하게 되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되게 부끄러워했다는 거예요. 너무 철저하게 지키니까 지키지 않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거예요. 부끄러워하면서 일을 하거나 했다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머슴살이를 하더라도 이 소래 지역에 가는 것을 대개 영광으로 여겼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른 지역에는 이 소작농이나 집에 일하는 일꾼들 머슴들에 대한 처우가 되게 낮았어요.
근데 이 소외 지역은 어쨌든 머슴과 주인을 동일하게 여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함을 실천되는 곳이 이 소래 지어 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머슴들이 이 지역에 가는 것을 소원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좀 더 어려운 말을 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을 단지 예배하는 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날로 여겼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단순히 뭔가 행동을 멈춘 게 아니라 이것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누림이며 영원한 안식에 대한 확장이라는 신학적인 견지도 뚜렷했다는 거예요. 그냥 단지 교회에서 야 주일날 일하지 마라고 해서 멈춘 게 아니라 이 주일에 일을 멈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는 사역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판단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 깊은 이렇게 내면적인 어떤 그런 결단과 이런 것들이 다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보다 엄청 오래전의 이야기잖아요.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느낌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하나님을 섬긴 게 아니라 사상 신학 가치관을 가지고 섬겼던 거예요. 소육교의 모습을 제가 세 가지로 좀 정리해 봤습니다.
첫 번째로는 제가 교리서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주일 성수를 하기 위해서 방해되는 것은 이 소련교회가 다 멈췄습니다. 성전의 문을 닫고 일손을 멈추고 심지어 머슴까지도 일을 멈추게 했어요. 얼마나 이게 철저했냐 하면 상점을 열거나 일을 하는 사람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열심히 이 주의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죠. 주일에 대한 별 의식이 없이 의식이 없이 그냥 주의를 지키는 것과 주의를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꽉 차서 지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거예요. 주일을 지켜도 되고 안 돼도 가는 생각이 사로잡힌 것과 주일은 꼭 지켜야 될 안식의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근데 이 소리교회의 성도들은 주일을 그런 안식의 날 또 은혜의 날 그리고 기적의 날 그리스도가 살아나신 날이잖아요. 그래서 기적의 날로 여기면서 이 주일을 지켰다 이렇게 돼 있어요.
물론 신학자들이 정리한 역사학자들이 정리해낸 내용이긴 하지만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참 이렇게 옛날 어른들이 이런 신학이나 또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서 삶을 살았다는 게 되게 존경스럽더라고요.
두 번째로 소래교회는 무엇을 멈추는 것을 주일 성수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을 주일 성수로 여겼어요. 지금의 우리의 주일 성수의 개념은 되게 방어적이고 소극적이에요. 뭔가를 하지 않는 것에 머물렀지만 실제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무엇을 하는 것 전도하고 교제하고 구제하는 것에 주일에 더 집중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주일 성수를 지키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보다는 방어적으로
이번 주 주일을 가야 되네.
내가 직분자니까 주일을 지켜야지
이런 생각의 중심에 있다면 아닌 분도 있겠지만 이 당시에 100년 훨씬 전에 있었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진짜 주일의 의미를 잘 알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하는 것을 결정하고 그렇게 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세 번째로는 주일을 단순히 쉬는 것 멈추는 것으로서의 안식이 아니라 참 안식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겁니다. 머슴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예배하는 것 이런 거죠. 일부의 안식 있는 자나 가진 자의 안식이 아니라 모두의 안식이 되도록 했다는 거예요. 소를 주인이 일을 안 하면 머슴이 일을 안 하면 소도 일을 안 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동물의 안식 그리고 머슴의 안식 그리고 있는 자 구분 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안식의 날이 되기 위해서 함께 노력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우리가 가진 생각이나 가치관보다 믿음보다 훨씬 더 깊은 신학적인 배경들과 마음의 다짐들과 어떤 이론들이 아마 이들에게 있었던 것은 초기에 선교사들이 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안식은 쉼으로 새로운 가치관과 삶이 창조되는 창조의 시각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죠. 근데 이때 그렇게 여겼고 그렇게 해서 이 자료를 모아놓은 거예요. 주류 성자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그 역사학자들이 이걸 모아서 보증을 해서 우리 교단에서 발표한 자료예요. 이 자료가 제 개인적으로 임의로 추출한 게 아니라 거기에 보면 이 사람들은 주의를 새로운 가치관을 만드는 날 그러니까 쉬면서 쉰다는 건 내 안에 새로운 가치관이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뭔가를 안 하고 더 하는 것을 통해서 내 삶에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아요. 되게 중요한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뭔가를 창조해야 되는 창조의 시간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창조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단순히 쉬는 것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안식은 새로운 가치관이 창조되는 새로운 삶이 창조되는 창조의 시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가 견고히 세워지는 창조의 시간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 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저는 역사적인 사실을 그냥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거예요. 학자들이 모아놓은 글들을 전달하는 거지 제가 서울역 교회를 옛날에 돌아가서 막 찾아서 막 연구한 게 아니라 그냥 연구한 내용을 전달하는 데 연구한 내용이 이거예요.
그럼 거짓이 아니라는 거죠.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는 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동참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주일을 철저히 지킬수록 주일 성수를 할수록 하나님의 창조는 세상에 견고히 자리 잡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창조의 역사가 그 내면과 삶이 일어나고 그렇게 지켜있는 교회를 통해서 주변에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파괴의 날이 아니라 창조의 날이에요. 주일은 그래서 우리가 주의를 지킨다는 건 그냥 단순히 뭔가 멈추는 것에 이상의 것이 이 안에 들어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러분과 저는 주일 성수를 하기 위해서 정말 힘을 쓰고 애를 쓰는 새로운 것이 내 안에 창조가 돼요. 돌아보면 저도 고등학교 때 고3 때도 옛날 이야기니까 이야기가 요즘과 비교될지 잘은 모르겠지만 고3 때도 계속해서 이제 주일 예배를 하러 갔고 보통 저희는 성과대가 워낙 큰데 고3들은 좀 빠지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고3 때도 성가대를 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새벽도 매일은 아니지만 주일 새벽은 꼭 가려고 했고 또 저희 학교가 불교 학교라서 주일에 시험을 많이 쳐요. 시험을 안 치면 제가 불이익이 되잖아요. 근데 저는 주일 시험도 거절했어요. 돌아보니 이 말씀과 이렇게 비춰보니 내 안에 뭔가 창조적인 것이 있다면 그 창조적인 기운이 내 안에 있었다면 내가 아마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애썼기 때문이지 않을까
해외를 나가도 해외에는 수요예배를 안 드려요. 그럼 저는 제 방에서 몰래 저 혼자 수요 예배를 드려요. 길게 드리지는 않죠. 짧게 그냥 찬양 잠깐 하고 말씀 읽고 잠깐 기도하는 정도 제가 저한테 말씀을 전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수요일을 지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는 것 안식을 지킨다는 건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창조의 시간 안에 내가 머물러 있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은 새롭게 되는 여러분의 삶을 창조하는 창조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의 목장의 식구들을 자녀들을 여기에 더 앉혀놔야 되는 거예요.진짜 새 삶이 창조되길 바란다면 우리 교회나 내 가정이나 자녀들이나 부모들 친척 이웃들에게 뭔가 했다면 여기에 앉혀놔야 그 내면과 삶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저희 목장에 이제 한 분이 오셔서 그분을 이제 VIP로 삼아서 계속 기도하고 교제할 텐데 어쨌든 그런 마음을 자꾸 주셔요. 저뿐만 아니라 목장의 식구들도 동일하게 그러다 보니 자꾸 이렇게 모이게 되고 모이다 보면 뭔가 이야기가 또 나오고 그러면 또 VIP들이 자꾸 만들어져요.
그래서 우리가 이러다가 원래 20명이 될까 좀 겁은 나요 3명으로 시작한 목장인데 지금 한 9명 됐거든요. 원래 20명 될까 좀 걱정은 돼요. 근데 비결이 보세요. 다 새가족이잖아요. 교회 안다녔던 분들이에요. 물론 오늘 이제 세 분인데 두 분은 옛날 교회 집사직이었고 원래는 한 분은 이제 한 3년간 교회를 다니셔서 저희가 집사직은 드렸지만 나머지는 그냥 진짜 교회가 처음 근데 주일날 교회에 앉아 있는 걸로 새로운 삶이 창조되는 거예요.
머물러 있는 것으로만 그렇게 여기고 주일이 강압의 날이나 구속의 날이나 또 뭘 훼방하는 날이나 사람을 힘들게 나지 않으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천 주일을 우리 교회가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