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란 감정으로 촉연수에서 좋지 않은 괴로운 느낌에 해당한다.
촉연수(觸緣受)란.. 감각작용에 의한 감촉이 생기면.. 그 결과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이 생기는데..
슬픔은 그 가운데 괴로운 느낌에 속한다는 것.
느낌이란 접촉에서 접촉을 하는 자에게 생기는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접촉 그 자체는 아니다.
예를 들면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이 생겼는데.. 그 슬픔은 돌아가신 사건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돌아가신 분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슬픔 대신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
이렇듯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등은 느낌을 받아들이는 자인 일인칭이 있을 때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아를 깨쳤다는 것은 그런 일인칭이 없음을 몸과 마음으로 깨친 게 된다.
따라서 그는 즐거움이나 슬픔을 느낄 자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무아를 깨친 자라 하여 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아라고 할 때 무아는 몸과 생각이라는 2원적 존재의 주인인 일인칭 자아가 있음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회사에 간다" 라고 할 때.. 회사에 다니는 행위보다 우선하는 자아가 있다. 그것을 선험적 자아라고 한다.
"나는 은퇴했어" 라고 할 때.. 그 나는 은퇴라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해서 "나는 죽는구나.." 하듯 죽지도 않았는데.. 죽을 걸 아는 자아가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아주 맑게 하고.. 그런 마음으로 자아를 관찰하니..
행위보다 우선하는 자아가 없다는 걸 발견했다.
그 말은..
회사에 다니는 자를 나라고 하는 것임을 분명히 보는 것이요.
미래에 있을 죽는 자의 주인인 자아는 없다는 것을 관찰한 게 된다.
하여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담담히 "그런 나는 없다"라고 답할 수 있다.
이렇듯 그런 자아는 없다고 하여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또 다시 말하면..
나는 학교에 가는 것은 아니나.. 학교 가는 자를 나라고 하듯.. 그런 나는 있는 걸로 안다.
우리는 과거의 행을 기억하고 있다.
과거의 행을 한 자는 누구인가?.. 누구가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한 자를 나라고 지칭한다.
나는 실재하지 않지만, 이름으로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과거의 그 몸과 생각을 나라고 해도 된다.
석가모니는 전생이 있고, 전생을 볼 수 있다고 하는 데..
과거의 행은 오늘 모습이듯.. 오늘 모습을 있게 한 자가 틀림없이 있으며.. 그런 자의 전생을 나의 전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아를 깨치면 슬픔이 있을까?.
안과 색 2법6쌍[12처]이 만나 접촉이 생기면.. 접촉으로 인한 느낌이 일어난다.
그것은 자아에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생명 현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무아이든 유아이든 살아있으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니 기쁨이나 슬픔 역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무아를 깨친 이와 그렇지 못한 유아인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유아인 우리는 그 슬픔을 내 슬픔으로 느낀다. 그런데
무아인 그는 슬퍼하는 자를 나라고 할 뿐..
제삼자가 보면..
유아이든 무아이든 슬퍼하는 자로 보인다.
그러기에 유아인 제삼자는..
부처도 슬퍼하는구나 한다.
이런 묘한 상태를 석가모니는
깨친 자는 첫 번째 화살은 맞지만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고 하셨다.
5온이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있지만.. 5온의 주인은 없기에 더 이상 슬픔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잡. 470. 전경>을 보면..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몸의 접촉으로 괴로운 느낌이 생겨 큰 고통이 들이닥치고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더라도 근심과 슬픔으로 원망하거나 울부짖거나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발광하지 않는다.
그런 때를 당해서는 오직 한 가지 느낌만 일으키나니,
이른바 몸의 느낌[身受]만 일으키고 마음의 느낌[心受]은 일으키지 않느니라.
비유하면 사부가 첫 번째 독화살만 맞고 두 번째 독화살은 맞지 않는 것처럼,
그런 때를 당해 오직 한 가지 느낌만 일으키나니, 이른바 몸의 느낌만 일으키고 마음의 느낌은 일으키지 않느니라.
즐겁다는 느낌과 접촉하더라도 탐욕의 즐거움에 물들지 않고,
탐욕의 즐거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그 즐겁다는 느낌에 대해서 탐욕의 번뇌에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
괴로움과 접촉한 느낌에 대하여도 성내지 않고,
성내지 않기 때문에 성냄이라는 번뇌에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
잘 새겨 음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