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崔致雲, 應賢, 壽峸 3명의 江陵崔氏 門中의 詩文을 모아 엮은 간략한 시집으로 1869년(高宗 6) 후손인 崔明秀와 崔命根이
편찬했다. 釣隱 崔致雲(1390·1440)은 1417년(太宗 17) 式年文科에 급제. 承文院에 등용된 뒤 集賢殿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1433년(世宗 15) 經歷으로 平安道都節制使 崔閏德의 從事官이 되어 野人 정벌에 공을 세웠고 그 뒤 知承文院事, 判承文院事, 工曹와 吏曹의 參議, 左承旨 등을 역임했다. 1439년 工曹參判으로 計稟使가 되어 明나라에 가서 野人 문제를 의논했으며, 이 해 藝文館 提學이 됐고 그 뒤 여러 차례 사신으로 明나라를 왕래, 외교적 공적을 이룩했다. 한편 왕명으로 無寃錄을 註釋하고 律文을 講解하는 등 刑獄에 관해서 王의 諮問에 응했으며 뒤에 吏曹參判을 지냈다. 睡軒 崔應賢(1428·1507)은 崔致雲의 아들로 1454년 (端宗 2) 增廣文科에 급제 著作 博士 典籍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가 1483년(成宗 14) 司成을 거쳐 執義가 됐다. 1487년 吏曹와 戶曹의 參議를 지냈고, 그 뒤 同副承旨, 忠淸道觀察使, 同知中樞府使, 慶州府尹, 大司憲 등을 역임했다. 1499년(燕山君 5) 同知成均館事, 1502년 漢城府左尹에 이어 工曹, 刑曹, 兵曹參判을 지냈다. 猿亭 崔壽峸(1487·1521)은 金宏弼의 문인. 趙光祖, 金淨 등과 交遊했으며 깊은 학문 연구로 士臨間에 명망이 높았다. 詩文, 書畵, 音律, 數學에도 뛰어 났으나 1519년(中宗 14) 己卯士禍로 동지들이 처형되자 벼슬을 단념, 명산을 유람하다가 1521년 辛巳誣獄에 관련, 사형되었다. 뒤에 伸寃 되고 領議政에 追贈. 앞에 金世均의 序가 있다. 권1: 釣隱遺稿:慈母石 등 詩 13수와 高麗太祖塑像告由文, 賜祭文, 墓碑銘 등 文 9편이 들어 있다. 권2: 睡軒遺稿:慶川營廳壁上 등 詩 4수와 送崔大憲歸江陵序, 神道碑銘幷序 등 文 7편이 들어 있다. 권3: 猿亭遺稿:贈金沖菴 등 詩 10수와 行狀 등이 수록돼 있다. |
첫댓글 혹시 임영세고의 원문내용을 볼수 있는 방법이?
영인본 같은 것이 나온 것이 있나요? 아시는 분......
찿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