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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찾아 떠나는 기행(紀行) [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1. 연재를 시작하며
제주의 역사에서 제주를 오갔던 예술가들을 통해 예술이 어떻게 사회와 만나며, 또 그들의 삶이 어떻게 예술에 투영되고, 교감하는 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세, 근대, 현대라는 시간의 여울 속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예술가들. 그들은 시대에 따라 선비, 장인, 화가 등으로 불리면서 거대한 문화예술의 맥을 이끌어갔다. 또한 근·현대의 예술가들의 도항은 유배, 전쟁, 유학, 노동 등의 원인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기획은 제주와 관련이 있는 예술가들을 재조명하고 예술 사회학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자 마련되었다. 제주의 문화를 이해할 때 제주와 연관이 있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이 중요해진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시간, 그들의 예술적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섬을 떠나거나 돌아온 제주 출신예술가, 제주를 찾았던 외지 예술가들의 궤적을 더듬어 동시대의 사회상을 조명하고자 한다.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예술작품은 시대가 담긴 코드
지난 6월 26일 제주도립미술관의 역사적인 개관으로 제주도에는 문화 공간 하나가 더 늘어났다. 제주를 찾는 사람마다 이구동성 '박물관이 어느 지역보다도 많다'라고 하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제주에는 땅의 규모나 인구에 비례해서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은 것은 틀림이 없다. 물론 관광도시라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박물관·미술관을 늘리는데 한 몫 하 였을 것이다. 아무튼 제주에 문화공간이 다양해질수록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고조되고 있고, 점차 그에 부응하는 예술의 수준이 새롭게 요구되고 있다.
▲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는 1935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제주~시모노세키~오사카 항로에 취항했다. 당시 삶의 터전을 찾으려는 사람 외에도 많은 제주 예술가들이 예술혼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몸을 실었다.
사람들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인류가 남긴 문화의 흔적들과 만난다. 인류가 남긴 흔적에는 그 시대의 코드가 있다. 그것은 유물이자 작품들로서 시대마다 혹은 사회마다 미의식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술가의 영혼이 담겨져 있는 작품에는 예술가의 삶과 그가 살았던 사회가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를 조명하는 것은 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자 동시대의 미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의미있는 일이다. 예술은 시·공간을 넘어선다. 비록 예술가들이 현존하지 않더라도 그가 남긴 작품에는 시대적 코드가 담겨 있어 오늘날의 예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말들의 섬으로 오는 예술가들
뒤돌아보면 제주는 예술의 불모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척박한 섬이었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라는 담론을 만들면서 육지 사람들은 제주를 마소 키우는 목장 정도로 생각하였고, 파도가 덮치는 삭막한 섬이자 야만의 섬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았던 제주에는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문화가 서로 교차했으며 그것은 언제나 물길로 이어졌다. 때로는 외세의 점령 때문에 외부의 문화가 이입되어 남겨졌고, 유배인들의 제주 입도는 그들의 고급 문화예술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출륙금지령은 제주사람들에게 역사의 큰 아픔이었지만 그것은 폐쇄적이었기에 제주의 독창적인 문화를 생산하는 메카니즘이 되기도 하였다.
섬에 오는 사람이 있으면, 섬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섬에 오는 사람들과 섬을 떠나는 사람들의 목적은 서로가 달랐다. 과거에 섬으로 오는 예술가들은 승려나 선비들이었지만 그들은 죄인이 된 유배인, 혹은 관리로 공직을 수행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현상은 근대에 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주에서 일본으로 도항하는 예술가들이 생겨났다. 당시 일본은 세계적인 수준의 문화·교육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의 서양문물의 도입은 동양의 지배를 꿈꾸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제주 출신 예술가 지망생들의 일본 진출은 이후 제주의 문화·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해방이 되면서 육지로부터 불청객과 같이 좌익 예술가들이 입도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다시 한반도 등지의 예술가들이 제주에 피난을 와 임시 정착을 하였다. 이들의 영향으로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제주의 젊은이들은 다시 서울 등지로 진출하여 그곳에 정착하기도 하고, 혹은 현지에서 예술 활동을 하다가 귀향하였다.
2009년 현재, 많은 육지의 예술가들이 제주에 자발적으로 입도하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제주의 풍토를 좇아 바람을 따라 섬에 온 것이다. 어떤 이는 바다가 좋아서 머물러 있고, 어떤 예술가는 제주 자연이 좋아 떠날 날을 기약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 말들 의 섬이라고 불리던 이곳으로 말과 바람을 찾아오는 예술가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예술은 풍토를 먹고 산다. 예술가들은 그 풍토를 표현하기 위해 섬으로 오는 것이다.
바다를 건넌 예술가, 문화예술의 이동
섬에 살던 사람들은 이 섬이 화산섬이라는 사실에 힘겨워했다. 화산섬은 분출된 용암 덩어리로서 늘 흙이 부족하여 농사의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래서 이 섬에 남고자 하는 사람들은 배를 만들어 주변 지역과 교역을 시도했고, 살아가기 위해 바다의 해산물을 채취했다.
예술은 경제적인 토대 위에 자란다. 최소한의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예술은 싹을 피우기 어렵다. 그래서 제주의 예술은 생산력만큼 비례하여 경제적인 토대 위에서 소박하게 자라났다. 생활 속에 배어나오는 소박미란 실용성을 염두에 둔 기술의 결과였다. 예술에 앞선 전제가 기술이다. 삶에 직접적인 기술은 소규모의 문명에서는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의 지적처럼, '단순한 기술, 즉 목공, 야금(冶金), 재단(裁斷), 도살(屠殺), 직조(織造) 등과 같은 것만을 필요로 한다. 이런 기술이 소규모 문명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완벽하지도 잘 발달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제주의 문화는 작은 문명의 편린이었다. 탐라가 고려에 복속되고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더 큰 문명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도 예술 자체를 위해 예술이 존재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제주의 음악으로는 노동요가 많이 전해오지만 악기가 없어 허벅 장단에 의존했다. 그림은 종교의례용과 실용적인 기록화 정도에 그쳤고, 시는 과거시험을 위한 수단 이상을 넘지 못했다. 적어도 출세를 하려면 중앙(서울)을 바라봐야만 했다.
현재 제주문화 중 고대의 문화적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탐라국의 문화를 유추할 자료가 너무나 적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연구에서 어려운 점은 바로 기록이나 유물이 미미하다는 것에 있다. 이는 과거의 시간을 더듬어 갈 수 있는 것이라곤 유물과 문헌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어떤 흔적이나 기억도 지워버린다. 자신으로부터 시간이 멀어질수록 기억이나 기록도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예술에 대한 이해는 시대마다 다르고 체제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제주를 떠나거나 제주에 오는 예술가들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예술가를 통해서 사회를 읽는다는 것은, 작품을 통해 예술가를 읽는 것과 같이 깊은 연관이 있다. 한 예술가를 이해하려면 사람, 작품, 사회를 통찰해야만 한다. 예술가는 사회의 구조 속에 있으며, 그의 작품은 그 사회를 반영하고 그 사회는 그의 예술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예술과 사회는 상호 작용을 원활하게 하고, 그 가운데에 예술가가 있어 자신의 작품에 심상(心象) 표현과 사회적 내용이 깃들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예술 작품은 당대(當代)의 문화적 코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단순한 사람의 이동이 아닌 문화·예술을 실어 나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전은자·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이중섭미술관 학예사> 2009년 7월 7일 <제민일보>
▲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전은자
신뢰가 있는 미술관, 활기가 넘치는 성공적인 미술관을 만들어
큐레이터 전은자는 50대에 큐레이터를 시작한 늦깎이 기획자다. 여고시절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큐레이터에 뜻을 두게 된 것은 다시 미술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지인의 권유로 큐레이터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정부에서 실시하는 큐레이터 시험에 합격하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이중섭미술관을 살리기 위해서 전시기획·원화확보·관람서비스 개선·아트상품 개발이라는 4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노력한 덕에 이중섭 원화는 2009년 10억의 예산으로 2점을 확보했다. 아트상품은 관람객들의 의견과 설문을 통해서 그들이 원하는 아트 상품을 개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중섭미술관은 관람객이 늘어났고, 아트상품 판매도 급증했다. 관람객 서비스면에도 중요한 관람객들은 맨투맨으로 상담을 했다.
이중섭 미술관의 소문은 한국, 일본으로 확대되면서 일본에서도 이중섭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전시기획 횟수는 19회에 달했다. 전시회를 새로 열 때마다 관람객은 넘쳐났다. 관람인원이 2만명이 넘는 전시만도 8개나 된다. 관람객 수도 2008년 약 7만명에서, 2011년 약 12만명으로 늘어났고, 아트상품 판매도 2008년 9400만원에서 2011년 1억3100만원으로 늘었다. 전은자 큐레이터는 관람객에게 신뢰가 있는 미술관, 활기가 넘치는 성공적인 미술관을 만들어 한국 국·공립미술관의 표본이 되고 있다.
이븐 할둔 [Ibn Khaldun] (*註)
정식 이름은 Walῑ al-Dῑn ⁽Abd ar-Raḥmān ibn Muḥammad ibn Muḥammad ibn Abῑ Bakr Muḥammad ibn al-Ḥasan ibn Khaldūn. 1332년 5월 27일 튀니스에서 출생, 1406년 3월 17일 카이로에서 사망했다. 최초로 비종교적인 역사철학을 발전시킨 아라비아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다.
걸작 〈역사서설(歷史序說) Muqaddimah〉 등을 남겼고,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에 대한 완벽한 역사서도 저술했다. 이슬람 사상사에서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던 이븐 할둔은 카이로에서 제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중의 한 사람인 알 마크리지는 당시에 만연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분석에서 그의 스승과 같은 통찰력을 발휘했으며 그는 당시의 사회상황을 세부적으로 조명한 몇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 10디나르 지폐에 그려진 이븐 할둔
15세기 이집트에서 역사서술이 괄목할 만하게 부활한 것을 이븐 할둔의 영향으로 보는 것은 크게 무리가 아니다. 이후 16, 17세기의 오스만 제국에서 몇몇 탁월한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이븐 할둔의 저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역사서설〉은 튀르크어로 부분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븐 할둔의 비견할 수 없는 천재성에 합당할 만큼 세계적인 관심이 그에게 쏠리게 된 것은 〈역사서설〉의 프랑스어 완역본이 나온 186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글 C. Issawi) |
첫댓글 전은자는, 흔히 하는 식으로, 누구누이, 누구 각시인고?
지금으로선...
왁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