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는 대명사다. 그건 독일에 있던 한 정당의 이름일 뿐 아니라 그 형성과정과 목표와 체계와 그것이 불러온 결과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어두운 면에 대한 한 전범이 된다. 인류가 만든 수많은 광기와 학살의 역사를 접할 때면 늘 그렇듯 이 책도 단순히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일 수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지금 여기를 보았을 거다. 안 그래도 개인에게 억압적인 한국사회인데 더군다나 요새 하 수상한 시절이라 지금 곁에서 벌어지는 모습들과 닮은 모습들도 눈에 띄고 말이다.
난 이 책에서 우선 어릴 적 내 모습을 본다. 초등학교 때 한 1년 정도 난 나치에 열광했었다. 책과 게임 등에서 접한 나치의 모습은 날 흥분하게 했다. 난 곳곳에 하겐크로이츠를 그리고, 제복을 입고 행진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장래희망은 당연히 무능한 민주주의 병든 한국을 쇄신해 강한 국가로 이끄는 지도자가 되는 거였다. 이렇게 1년 정도 고이 파시스트로서의 꿈을 키워갔지만 안타깝게도 불타는 마음을 쏟아부을 그럴듯한 유소년 파시스트 단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 1년이 지나자 난 거짓말같이 스스로를 반성하고 다시 예전처럼 지낸 듯 했지만, 이후에도 그 때와 비슷한 기분이 수시로 찾아오곤 했다. 대체 언제 왜 그럴까.
거리낌 없이 파시스트가 되는 매커니즘에서 우선 중요한 요소로 간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70여년 전 독일의 아이들이 왜 열성적으로 유겐트 활동을 했고, 왜 난 오래전 파시스트들을 닮고 싶어했고, 왜 지금도 수많은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나치의 군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나치의 무기체계를 줄줄 외울까.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열렬히 찬동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역시 간지는 중요하다.
멋있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멋있지 않으면 자신을 거기에 투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자신들이 마음껏 따라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정체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무엇이다. 나치가 그 비실용성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고집한 그들의 군복디자인은 간지난다. 자발적으로 나치 친위대가 된 수많은 아이들에겐 국가사회주의적 정책의 세부보다 저 디자인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동일선상에서 바라볼 수는 없지만, 파시즘을 불러오게 된 그 간지에의 추구는 지금도 패션으로 우리 곁 도처에 상존한다. 중산층의 신화, 엔터테이너의 퍼포먼스, 스포츠스타의 몸, 어떤 경우 정치적이나 성적으로 소수의 입장이나 심지어 반전이나 평화마저도.
이런 간지가 작용을 하는 부분은 정체성의 확립이다. 개인이 삶으로 확립해가는 정체성이 아니라 집단으로 창조되어 일괄적으로 부여되는 정체성. 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건 차이와 동질성이다. 자신들의 집단에 속하지 않는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차이를 부각하고, 집단내에서 같은 모습으로 같은 행동을 하면서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한다. 이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개인들의 차이는, 마치 차원공리에서 2.07차원이나 2.71차원이 모두 2차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무시되어 버린다.
이렇게 집단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건 지독히 편안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 평안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지금도 그런 집단들의 둥지를 짓는데 열심이다. 그 등지에서 벗어나려 무던히도 애를 쓰건만 난 여전히 뒷담화하면서 친해지는 게 가끔은 서글프고, 별 확신이 없으면서도 타인의 생각에 열렬히 동의해주는 자신의 모습에 취하는 게 가끔은 부끄럽고,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있었음을 깨닫는게 참담하고, 공연장 떼창에 몸이 달아오르는게 살짝 경계되기도 하고, 뭐 그렇다.
이런 걸 잔혹한 범죄에 사람들을 내몬 나치의 모습과 비교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 계속 반복되어도 진부해지지 않는 주제인건 그걸 자각하고 인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적극적 혹은 소극적 동의로 나치즘의 협력자와 공범이 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겐 그들을 인정하고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난 그래서 이 책이 마음에 든다. 이 책은 나치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스테레오 타입을 아무 생각없이 형성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을 담담히 바라볼 뿐이다. 시대의 분이기를 따라 나치의 계획에 뛰어든 아이들도, 그들을 적극 이용하고 계획을 짜낸 어른들도, 그 움직임을 걱정하던 어른들도, 소수지만 의미있는 저항을 한 아이들도.
결국 그 모든 건 어떤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움직임들이다. 각자 스스로의 삶에 있어 거대한 세계와 마주치며 고민하고 나름의 해답을 찾으려는 역동적인 움직임. 그 개개인들의 세계사에 마음이 끌리고, 그 움직임들이 우리를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해주리라 믿는다.
첫댓글 그 선택적 역동성은, 결국엔 자신을 알아가는 ""자유""의 길이기에 ......깊은 침묵으로 오래 머물다갑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