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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이 만든 영원 지옥설
죽은 악인들이 영원히 불타고 있는 지옥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과 사람이 짧은 일생에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교리는 사랑과 자비의 감정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심지어 공의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에도 얼마나 모순되는가. 그러나 이 교리는 널리 유포되어 있고 그것이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교의 신경(信經)이 되고 있다. 어떤 유명한 신학 박사는 말했다.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광경은 성도들의 행복을 영원히 증진시켜 줄 것이다. 같은 성정을 가지고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다른 사람들이 그처럼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과 그들과 전혀 구별되어 있는 자신을 볼 때 그들의 행복감은 한층 더 커질 것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진노를 받는 자들 위에 영원한 형벌이 집행되고 그 고난의 연기가 자비를 받은 자들의 눈앞에서 피어오를 때 비참한 자들의 운명을 면한 그들은 아멘 할렐루야! 주님을 찬송할지어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어느 페이지에서 이런 말을 찾을 수 있는가? 구속을 받아 하늘에 있는 자들이 자비와 동정의 감정,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 있는 정서마저도 모두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냉정해지고 야만인처럼 잔인하게 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책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이미 인용한 것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학식 있고 또한 정직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단의 궤변에 속임을 당하고 있다. 사단은 그들에게 성경의 강한 표현들을 곡해하게 하고 창조주께 속하지 않고 자기에게 속한 악의와 원한의 뜻을 성경 구절에 붙인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하나님께서 끊임없는 고통을 목격하고 기뻐하시고 그분께서 지옥의 불속에 던진 자들의 고통과 괴로움과 저주의 소리를 듣기를 즐거워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해도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될 것인가? 그 처참한 부르짖음이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의 귀에 음악으로 들릴 수 있을까? 사람들은 악인들에게 과해지는 끝없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파괴한 악으로서의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모독인가! 마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가 그 고통을 영원히 계속시키시는 이유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 불쌍한 희생자들은 자비의 희망없이 끊임없는 고통으로 미친 것처럼 되어 저주와 참람된 말로 분노를 쏟아 놓으므로 그들의 죄의 무게를 영원히 더하고 있다.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죄가 계속하여 증가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높여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 지옥설로 말미암아 초래되어온 악은 사람의 마음으로 능히 헤아릴 수 없다.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고 동정이 넘치는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으로 어두워지고 공포로 가리워졌다. 사단이 하나님의 품성에 물들여 놓은 거짓된 색깔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우리의 자비로운 창조주를 두려워하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심지어 증오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인가? 강단에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온 세계에 퍼져 있는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무서운 견해는 수천, 아니 수백만의 회의론자와 무신론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바벨론의 독주
영원 지옥설은 바벨론이 모든 나라에 마시우고 있는 “진노의 포도주”라는 거짓 교리 중 하나이다(계 14:8, 17:2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들이 이런 이단설을 받아들이고 거룩한 단에서 그것을 전한다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마치 거짓 안식일을 로마교에서 받은 것처럼 그것도 로마교로부터 받았다.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그것을 가르쳐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받은 빛은 우리가 받은 빛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시대에 주어진 빛에 대하여만 책임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비치는 빛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버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가르쳤다는 이유로 거짓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바벨론에 선고된 정죄를 받게 된다. 우리는 바벨론의 가증한 독주를 마시게 된다.
또한 영원 지옥설을 반대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것과 반대되는 오류에 빠져 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므로 그분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지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이 근본적으로 불멸이라고 믿고 있으므로 인류는 최종적으로 모두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두려운 경고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순종하게 하고자 위협하는 것이며 글자 그대로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죄인이 비록 이기적 쾌락을 계속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할지라도 최후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교리는 하나님의 자비만 생각하고 그분의 공의를 무시하기 때문에 육신적 마음을 즐겁게 하고 악인들로 하여금 죄악을 범하기에 담대하게 해준다.
보편 구제설을 믿는 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교리를 지지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경을 곡해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데는 그들 자신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갑작스런 사고로 즉사한 믿지 않는 청년의 장례식에서 보편 구제설을 믿는 한 목사는 다윗에 관하여 쓴 성경절, 곧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삼하 13:39)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그 설교자는 말하였다. “나는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을 떠난 자, 혹 술취한 상태에서 죽은 자, 범죄로 새빨갛게 물든 그들의 두루마기를 씻지 못한 채 죽은 자, 이 청년처럼 아직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고 믿음의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우리는 성경에서 만족을 얻는다. 성경이 이 두려운 문제에 관하여 답을 해주기 때문이다. 암논은 참으로 죄를 많이 지었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술주정뱅이로 술에 취한 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는 암논이 내세에서 좋은 일을 당할 것인지 나쁜 일을 당할 것인지 길흉을 알았음에 틀림없다. 다윗은 그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삼하 13:39).
이 말에서 어떤 결론을 추리할 수 있는가? 영원한 고통이란 다윗의 신앙에서 찾아볼 수 없지 않는가? 우리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보편적인 순결과 평안에 관한 더욱 기쁘고 더욱 광명하고 더욱 박애적인 가설(假說)을 지지하는 당당한 논증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 그러면 왜 그러했던가? 그는 예언적 안목으로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다보고 그 아들이 온갖 시험에서 벗어나고 속박에서 해방되어 죄악적 부패에서 순화되고 완전히 거룩하고 지혜롭게 된 후, 이미 승천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영혼들의 무리에 가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죄와 괴로움의 현 상태에서 놓여 나서 성령의 거룩한 입김이 그의 어두워진 영혼에 내어 뿜겨질 곳으로 가서 그의 영혼이 하늘의 지혜와 영원한 사랑의 즐거움으로 일깨움을 받고 품성의 성화를 얻어 하늘 거민들의 안식과 교제를 같이 나누는 데 있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늘의 구원이 우리가 이생에서 행한 일에 전혀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현재의 심적 변화나 신앙이나 신앙 고백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곡해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에덴에서 뱀이 말한 거짓말, 곧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는 가장 비열 한 죄인, 곧 살인자와 도둑과 간음한 자들도 죽은 후에는 영원한 복지에 들어갈 준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처럼 성경을 곡해하는 자는 어디에서 자신의 결론을 끌어오는가? 그는 다윗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마음을 나타낸 단 하나의 문장에서 그 결론을 취한다.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그의 슬픔의 강도(强度)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해져서 그의 마음은 죽은 자에게서 산 아들, 곧 죄의 형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도망간 아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구절이 근친 상간(近親相姦)의 죄를 범한 술주정뱅이 암논이 죽은 즉시 복된 곳으로 가서 거기서 순결해지고 죄없는 천사들과 교제할 자격을 얻게 된 증거가 된다고 한다. 그것은 육신적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참으로 적절하게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은 사단 자신이 만든 것으로써 그의 일을 효과적으로 해주는 교리이다. 이런 교리로 말미암아 죄악이 편만해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한 거짓 교사가 따르는 노선은 다른 많은 거짓 교사들이 따르는 노선을 예시해 준다. 성경의 몇 말들을 그 문맥과 상관없이 끊어 내어 그 본래의 의미와 전혀 반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그처럼 조리가 서지 않는 구절들을 왜곡시켜 성경상에 아무 근거도 없는 교리를 증명하는데 사용한다. 술주정뱅이 암논이 하늘에 있다는 증거로 인용한 증언은 술취한 자가 하늘나라를 얻지 못하리라고 한 분명하고 솔직한 성경 말씀에 완전히 반대되는 하나의 추론에 불과하다. 이런 모양으로 의심하는 자, 믿지 않는 자, 회의론자들은 진리를 거짓말로 바꾼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궤변에 속아서 육적 안정이라는 요람에서 잠을 자고 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죽는 시간에 하늘로 직접 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신조에 의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게 되었다. 곤란과 번민과 실망으로 마음이 눌릴 때 자기의 가냘픈 생명의 줄을 끊어 버리고 영원한 세계의 복락을 향하여 날아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율법의 무시와 형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범한 자들을 벌하실 것에 대하여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한 증거를 주셨다. 그분께서 무한히 자비하시므로 죄인에게 심판을 집행하지 않으신다고 스스로 안심하는 자들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쳐다보아야 한다.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신 것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은 모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죄인과 같이 되셨다. 그분께서는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외면당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의 심장은 터지고 그분의 생명은 부서졌다. 이 모든 희생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사람이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처럼 큰 희생으로써 마련된 속죄에 동참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그 죄책을 지고 범죄의 형벌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편 구제론자들이 하늘에서 거룩하고 행복한 천사들처럼 된다고 하는 경건치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라. 이 허락은 오직 목마른 자들에 한해서만 주어진 허락이다. 오직 생명수의 필요성을 깨닫고 모든 다른 것들을 상실하고서까지 그것을 찾는 자들에게만 그것이 공급될 것이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 7). 여기에는 또한 조건들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우리는 죄를 거부하고 이겨야 한다.
주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 11)고 말씀하신다. 현인은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 그날이 그림자와 같으리”(전 8:12, 13)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죄인에 대하여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롬 2:5, 6, 9)라고 증거한다.
“너희는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엡 5:5)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마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로다.”(히 1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4, 15).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품성과 죄를 취급하시는 당신의 방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출 34:6, 7), “여호와께서 …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시 145:20, 37, 38)진다. 하나님의 정부의 권위와 능력은 반역을 진압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보응하는 징벌을 나타내는 모든일도 자비롭고 오래 참고 긍휼이 많은 하나님의 품성에 완전히 부합될 것이다.
악한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판단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노예적인 굴복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께서 사랑을 받으실 만하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지혜와 공의와 자비를 충분히 깨달은 후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특성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분께 이끌려가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 가르치시고 친히 모본을 보이신 사랑과 자비와 친절의 원리는 하나님의 품성과 의지의 사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 이외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셨다고 주장하셨다.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구주의 교훈과 완전히 일치된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유익을 위하여 또한 당신의 심판을 받는 대상자의 유익을 위하여 악인들에게 벌을 내리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부의 율법과 당신의 품성과 공의로움에 일치되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다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증거들로 사람들 주위에 둘러 주시고 당신의 율법을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의 노력으로 그들을 따라오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그분의 율법을 무효로 만들고 그분의 자비를 거절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면서도 그 선물을 주신 분을 멸시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가증히 여기시는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함을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어야 할 결정적 시간이 올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반역자들을 당신의 편에 묶어 두실까? 그들이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강요하실 수 있겠는가?
사단을 지도자로 삼고 그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어 온 자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교만과 허위와 방탕과 잔혹이 그들의 품성으로 굳어졌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 세상에서 그들이 멸시하고 증오한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겠는가? 진리는 거짓말하는 자에게 결코 듣기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온유는 자부심과 교만으로 더불어 화합할 수 없다. 순결과 부패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다. 이타적 사랑은 이기적인 사람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다. 완전히 세속적이요 이기적인 관심에 몰두되어 있는 자들에게 하늘이 어떤 기쁨을 줄 수 있겠는가?
회개의 기회를 무시한 악인들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허비한 자들이 갑자기 하늘로 옮겨져 언제나 그 곳에 있는 고상하고거룩하고 완전한 상태를 목격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충만하고 얼굴에서 기쁜 빛이 흐르고,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부단한 빛의 줄기가 구원 얻은 자들에게 비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에 하나님과 진리와 성결에 대한 증오심으로 충만해 있는 자들이 하늘의 무리들과 섞여서 그들의 찬양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을까? 그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들에게 하늘에 적합한 품성을 이룰 수 있는 은혜의 시기가 여러 해 동안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순결을 좋아하는 마음을 배양하지 않고, 하늘의 방언을 결코 배우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너무 늦었다. 하나님을 반역한 생애가 그들을 하늘에 적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하늘의 순결과 성결과 평화는 그들에게 괴로움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은 태우는 불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 거룩한 곳에서 피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하여 차라리 멸망받기를 원할 것이다. 악인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들이 하늘에서 제외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자원해서 되는 일이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공의롭고 자비로운 처사이다.
마치 홍수 때의 물과 같이 마지막날의 불은 악인들의 불의가 도무지 고쳐질 수 없다는 하나님의 판결을 선포한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할 의향이 없다. 그들의 의지는 반역에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생명이 끊어졌을 때, 그들의 생각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범죄에서 순종으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돌이키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가인을 살려두심으로 죄인에게 마음대로 죄악의 길을 계속해서 걷도록 허용하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예증을 세상에 보이셨다. 가인의 가르침과 모본의 영향으로 그의 자손들의 다수가 죄에 빠지게 되어 마침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 6:5)이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창 6:5, 11)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자비로써 노아 시대의 악한 거민들을 제거해버리셨다. 그분께서는 자비로써 부패한 소돔의 거민들을 멸망시키셨다. 사단의 기만적 능력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찬성과 칭찬을 받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반역으로 인도한다. 가인의 시대, 노아의 시대, 아브라함의 시대, 롯의 시대에 그러하였고 또한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도 역시 그렇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키는 것은 우주에 대한 자비에서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생명은 의인이 받을 유업이요 사망은 악인이 받을 몫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신 30:15)노라고 말하였다. 이성결절에서 말하는 사망은 아담에게 선고된 사망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아담의 범죄의 형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생과 대조적인 위치에 있는 “둘째 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