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주는 의미는
임성욱
(시인/사회복지학박사)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도, 낭만도, 생기도 거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벗어나려고 한다. 고통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등으로. 이들은 어디에서 올까. 바로 욕심에서 온다. 성서에서도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했다. 욕심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모든 것이 과분하면 고통이 들어온다. 소유한 게 없으면 도둑맞을 고통을 갖지 않아도 된다. 어디에 있든지 간에 편하다. 과거의 유목민들은 초지가 사라지면 다른 초지를 찾아가야 했기에 소유를 많이 하지 않았다. 때문에 재물을 쌓아둘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를 즐겼다. 저장문화가 발달 되지 않았을 때는 산야에 있는 열매 등을 많이 따놓을 필요도 없었다. 물고기 역시 마찬가지다. 때문에 먹을 만큼만 잡았다. 그래서 늘 자연은 풍부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 역시 마찬가지다. 탐욕스런 백인들이 총 들고 들어와 살육전을 벌이면서 땅따먹기 싸움을 하기 전까지는 아메리카 대륙은 평온했다. 개인 소유의 땅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게 풍부했다. 저녁 찬거리가 필요하면 전사 한 두 명이 나가서 화살로 적당한 짐승 한 마리 잡아 오면 끝이었다. 이런 그들의 영혼은 맑았다. 온 산하가 아름다운 정령으로 가득 찼다. 우리네 시골도 마찬가지였다. 문명의 찌꺼기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십시일반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이에는 혈족여부도 가리지 않았다. 지나가던 거지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불과 4,50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래서 극빈자나 거지들은 마을 사람들의 생일, 제삿날까지 알았다.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다. 정작 당사자는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있어도 그들은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 장만하는 기척이 보이지 않으면 알려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비록 물질적 풍요는 지금과 같지 않았어도 정신적 풍요는 훨씬 더 컸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삶의 질이 높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모두가 아우성이다.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권력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망나니 춤을 추고 있다. 현재의 정치권을 봐라. 인간의 꼴이 아니다. 마치 아귀들의 난장판 같다. 겉으로는 번드르한 말을 하지만 그놈이 그놈이다. 뺀질거리는 꼬락서니는 기름장사 손가락 같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집에 들어가서 자녀들 얼굴을 어떻게 보느냐고. 어린 손자들은 어떻게 대하느냐고. 하기야 그런 양심 있었으면 그러겠는가. 아무리 재물을, 권력을 많이 가져도 그들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감돌지 않는다. 무한욕심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이 떠날 날이 없는 것이다. 사실 고통은 필요하다. 허리에 극한 통증이 온다고 강력한 진통제만 쓸 수 있는가.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은 허리가 망가져 버릴 것이다. 고통을 못 느끼기 때문에. 무통증은 곧 함부로 허리를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물주께서는 어딘가가 좋지 않으면 통증이라는 고통을 줬다. 빨리 알아차려서 적절한 대처를 하라고. 배고픔이라는 고통이 없으면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때가 되면 배고픔이 오는 것이다. 갈증 욕구를 못 느끼는 사람에게 수시로 물을 먹여주듯이. 원하는 권력을, 재물을 못 가져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고통이 주는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