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회한다고 과거가 달리지지도 얺고, 걱정한다고 미래가 달라지지도 않는다.
과거는 현재의 나와 남들의 기억들에 의존하지만, 그러한 기억들은 분명하거나 확실하지도 않으며, 진실한 앎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 극단적인 방식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나와 남들이 어떤 느낌과 생각과 의도와 인식으로 어떤 일을 형성하고는 그렇게 기억하니까 그렇게 기억된 것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기억도 그러하고 크고 중요한 기억도 그러하며, 나쁜 일의 기억도 그러하고 좋은 일의 기억도 그러하다.
시실 과거의 어떤 일들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기억의 내용이나 그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비로소 과거가 결정된다.
그리고 과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결국에는 사라지고 만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어떤 일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무것도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때때로 바라는 대로 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사실은 내가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미래는 당연하게도 미리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래는 지금 여기서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바에 의존하여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과거나 미래의 일에 되도록이면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후회와 걱정은 보통 나와 남에 대하여 지나치게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거나 바래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지금에 와서는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과거는 무엇을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니, 과거의 일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또는 누가 이렇게 해 주었더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한 바람은 애초에 가능한 일이 이니며, 오히려 그런 바람이 충족되지 않은 것이 자신이나 남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이나 남에 대하여 실망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태문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일이며, 또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르고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보통은 자신이나 남에게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는데, 만일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분노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남이 내가 바라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이다.
일상 생활에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그렇게 해 주어야 할 의무도 없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거나 요구할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지신의 마음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남의 마음에랴.
3.
그러한데도 과거의 일이나 대하여 지나치게 후회하거나 미래의 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은 현재의 소중한 시간을 잡아억는 악마에게 사로잡힌 것과 같다.
과거의 일은 좋은 일이거나 나쁜 일이거나 현재의 기억에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혹시 내가 잘못하여 자신이나 남에게 해를 끼쳤다면 충분히 반성하고 참회해야 하겠지만, 그 일에 계숙 붇들려 있을 필요는 없다.
미래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준비한 대로 행하고자 하면 그것이 바로 나의 미래인데, 그러한 미래는 곧바로 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나치게 후회하거나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나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 발지라제의 게송
https://cafe.daum.net/sutta-nipata/ROAu/104
[참고] 들에 핀 백합을 보라_마태복음 6:25-30
https://cafe.daum.net/sutta-nipata/IU5Z/54
[덧붙임] 분노에 관하여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것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실망하게 되고, 실망을 참지 못하게 되면 분노가 일어난다. 따라서 분노는 만일 바라는 어떤 것이 충족되면 곧 사라지겠지만, 보통은 여러 가지 까닭으로 바라는 것이 총족되는 일은 드물다.
분노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또 때로는 분노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분노는 일상적인 일에서 아주 사소한 까닭으로 자주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그 일상적인 일이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란 것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어떤 까닭으로 분노하든지 간에, 분노 자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것이다. 화를 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분노에 빠져 버리면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른바 순간적으로 또는 장기적으로 심신미약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분노를 일으키는 까닭은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안정된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바라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충족의 정도도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고, 그에 따른 분노의 정도도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곧 내가 지금 분노하는 것이 항상 정당하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설사 어쩔 수 없이 분노가 일어나더라도 분노에 온 몸과 마음을 맡겨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을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하고,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본노의 불에 빠져서 그것을 다스릴 수 없게 되면 애초에 바라던 것을 얻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바라는 것을 얻는다 하더라도 자신과 주위의 모든 것을 이미 불태워 비려서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 참으로 쓰기 힘들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싸움에서는 먼저 화내는 자가 진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미 엄청나게 많이 져 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지고 싪지 않다.
[참고] 분노가 일어난다면
https://cafe.daum.net/sutta-nipata/IU5Z/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