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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단락 육체의 탄식(8:1-14)
Ⅰ. 육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탄식(8:1-4)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
믿는 이의 주님과의 연합이 깊을수록 즉 이 여자가 도달한 것 같은 단계에 이르면, 그는 그의 겉사람 곧 육체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된다. 속 마음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 같지만, 바깥 몸은 오히려 나날이 후패해 간다. 성령이 비록 반드시 죽을 이 몸을 살릴 것이지만 이 몸은 여전히 죽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더욱 완전하게 나타나지만, 몸은 여전히 하나의 가시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진보할수록, 영적일수록, 하늘에 속할수록 그는 오늘의 완전함이 여전히 육체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비록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았지만, 그도 마음속의 탄식을 금하기 어려우며,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롬 8:23). 우리가 육체를 따라 살 때에는 몸의 구속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이 실제적으로 완전케 될 때에야 비로소 겉사람과 속사람이 얼마나 다른지를 느끼게 된다. 몸의 어떠함이 비록 장애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하나의 약함이 된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몸의 구속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이것은 없어서는 안 될 은혜이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1절). 이 뜻은, 당신과 내가 오늘보다 더 친밀한 위치에 있기를 갈망하며, 당신이 몸 안에서는 나의 오라비 같기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당신과 나의 하나님 안에서의 관계가 이제 나타나기를 갈망한다. 그렇다면 내가 사람 앞에서 당신을 시인할 때, 또 사람 앞에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표시할 때, 누구도 나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약함이 나와 함께한다고 느끼며, 내 마음에서 당신을 대하고 싶은 것만큼 당신을 대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처음에 내가 추구한 것은, 당신과의 입맞춤으로 당신을 얻고 당신이 나에게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오히려 당신과의 입맞춤을 사모하며 당신에게 사랑을 표시함으로 당신의 마음이 만족을 얻기 원한다. 그러나 여기에 육체의 간격이 있다. 당신이 아직 당신 자신을 나의 오라비같이 나타내지 않았다면, 내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마땅히 섬겨야 할 만큼 당신을 섬길 수 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절, 만일 참으로 그날이 온다면, 나는 오히려 당신을 이끌고 하늘의 예루살렘에 갈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영원히 은혜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맺은 모든 열매는 그날에 향기로운 포도주가 되어 당신의 영원한 기쁨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내게 준 모든 영적인 열매 가운데 나 자신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날에 이르러 오늘의 모든 석류는 다 향기로운 즙이 되어 당신의 마음을 만족케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당신께 드릴 수 있으며, 나의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3절, 그날에 이르러 그분의 왼손이 나의 머리를 받쳐 올려 그분을 보게 할 것입니다. 그분의 오른손은 나를 안고 나로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을 대면케 할 것입니다. 이날을 내가 사모하며, 이날이 빨리 오기를 갈망합니다.
4절, 예루살렘의 딸들아! 그녀는 이제 휴거의 소망 가운데 살며, 그녀는 이제 내 손안의 사람이다. 그녀의 현재의 느낌은 사적인 것이다. 너희들은 놀라지 말고, 육체의 손을 내밀어 간섭하지 말며, 그녀가 내 면전에서 깨어날 때까지 부디 기다려다오.
Ⅱ. 휴거되기 전(8:5-14)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 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그가 성벽일찐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찐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5절, 이 책은 두 번 여자가 광야에서 올라온다고 말한다. 첫 번째로 광야에서 올라온 것은(3:6) 그녀가 어떻게 표류하는 생활을 벗어 버렸는가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그녀가 이미 주님의 죽음 안에서, 주님의 생명 안에서, 주님이 그녀에게 주신 은혜 안에서, 주님과 완전한 연합을 하기 시작했음을 본다. 그때로부터 그녀는 계속 전진하여 완전히 광야의 생활을 벗어났다. 비록 나중의 체험 가운데에서 한두 차례 주저한 곳이 있지만, 그러한 주저함은, 우리가 감히 당연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용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표류하는 생활은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지나가는 것인데, 주님은 왜 여기서 또다시 그녀가 광야에서 올라온다고 말씀하는가? 그녀는 여전히 광야에 있다가 이제야 올라오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광야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광야가 표류하는 생활일 뿐 아니라 세상적인 장소라는 것을 안다. 우리의 영성에 있어서 광야가 있을 뿐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광야가 있다.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표류하는 광야를 벗어나야 할 뿐 아니라 육신적인 면에서도 이 세상의 광야를 벗어나야 한다.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주권을 잡으실 때, 우리는 심한 기복이 있는 생활을 벗어 버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휴거의 부르심을 들을 때, 우리는 세상의 광야에서 벗어나야 한다. 곧 그리스로의 십자가는 우리로 영적인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우리로 세상의 환경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두 번째 광야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적인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여기서 또 제삼자의 입을 빌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광야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라고 묻는다. 그는 여기에서 한 여자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광야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가까이 올수록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도대체 이 여자가 누구인가?"
여기서 우리는 광야를 벗어나는 휴거는 결코 갑자기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과 한 걸음 한 걸음 동행한 것의 결과임을 본다. 휴거는 주님과 동행한 마지막 한 걸음에 일어난다. 사람이 본 것은 아마도 땅으로부터 하늘에 이르는 그 단계의 갑작스런 변화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휴거의 마지막 걸음에 불과하다. 휴거의 시작은 결코 이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와 같이 하늘의 끌림을 받아야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에서 벗어나고, 한 걸음 한 걸음 세상과 더 멀어지며, 한 걸음 한 걸음 세상과의 분별에서 더욱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사가 완전케 될 때에 이르러 그녀는 자기 자신이 이미 주님 앞에서 깨어난 것을 본다. 우리는 에녹의 휴거가 이와 같음을 본다(창 5:22, 24). 우리는 결코 휴거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며, 갑자기 우리의 영성(靈性)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휴거의 준비는 오늘날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계속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계속 올라가고 올라가서 주님이 우리를 맞이할 때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마치 자신은 힘이 없어 걸을 수 없는 것 같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는 곧 자신을 짐으로 여겨 사랑하는 자에게 지우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는 마치 그녀의 다리의 힘줄이 하나님에 의해 끊어진 것 같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는 마치 이길 힘이 없이 계속 광야의 노정을 걸어온 것 같다. 주님만이 우리를 예비하여 우리로 들림받게 하실 수 있다. 의지하는 생활이 적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그분만 의지하는 단계에 이르러야만이 성령으로 하여금 이같이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는'그녀가 누구인가 하는 기이한 말을 하게 할 것이다.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전에 더러운 죄인이었는데 은혜로 찾은 바 되고, 은혜로 부르심받고,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신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한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하나님의 관대함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관대함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세 전의 계획과 선택 그리고 시간 안에서의 그분의 아들을 통한 구속과 성령의 역사를 포함하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된 한 죄인을 찾았을 때, 그분은 그녀를 그리스도의 그늘과 보호 아래 두신다. 거기서 그녀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녀를 위해 수고하신다. 그녀가 깨어날 때, 그녀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깨어난다.
여기의 사과나무와 2장 3절의 불수감나무는 사랑이 가득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 그녀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녀가 첫날 이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첫 번째로 본 것은 사랑이 충만한 그리스도이다. 그녀가 찾은 첫 번째 사실은 그녀가 사랑이 가득한 그리스도의 그늘과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본래의 어떠함이다. 그녀의 영성이 높고 깊을 때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그녀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는지!
6절에서 그녀가 자신의 본래의 어떠함을 보았을 때, 그녀는 겸손의 느낌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자신의 헛됨과 체험의 쓸모없음과 마음의 믿을 수 없음과 추구하는 것이 그녀에게 무엇을 줄 수 없음을 보게 된다. 그녀가 앙망할 것을 주님뿐이다. 그녀가 '끝까지' 갈 수 있는가 없는가는 결코 자신의 '버티는' 힘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하심과 지키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모든 영적인 온전케 됨이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사람들에게 계속 도움을 주기에 충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과 그분의 보호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을 알았으므로 그녀는,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고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은 사랑하는 곳이며, '팔'은 능력이 있는 곳이다. "나는 당신이 나를 마음에 인같이 그렇게 영원하게 품어 주시고, 도장같이 그렇게 마멸되지 않도록 팔로 이끌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전에 제사장이 그의 가슴과 어깨에 이스라엘 백성을 품고 메었듯이, 당신이 오늘 마음속에서 계속 나를 기억해 주시고 팔로 나를 계속 부축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나는 나의 약함과 공허함을 알며,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 주여, 나는 아무 의지할 데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기까지 나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라고 한다면, 다만 당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고 나 자신에게 해를 입힐 뿐입니다. 오늘날 나의 모든 소망은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능력에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도 당신을 사랑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를 압니다. 이제 내가 당신께 바라는 것은,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입니다. 이전에 나는 나에게 아주 강한 힘이 있는 것처럼 당신을 붙잡았습니다(3:4). 그러나 나의 강한 붙잡음이 지극히 연약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내가 의지하는 것은 결코 나의 붙드는 능력이 아니고 당신의 붙드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말할 수 없고, 당신을 내가 붙잡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은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했는데, 누가 능히 사망을 흔들 수 있겠는가? 부모의 탄식, 아내의 눈물, 친구의 슬퍼함도 사람을 사망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다. 사망은 그것이 얻은 사람을 지키려 하고 단단히 가두어 두려고 하며, 풀어 주지 않으려 한다.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당신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므로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나를 사랑하신다면, 당신의 질투도 반드시 따라올 것입니다. 당신의 질투는 음부같이 잔혹하여 반드시 책망하며 온전케 되기를 요구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으로도 나의 마음이 나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는데, 당신이 얻는 것이 많을지라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눈은 당신께 속한 사랑이 세상 사람에 의해 더럽혀지고 다른 사람에 의해 침략당하는 것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질투하시는 것은 당신이 태고 적부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출 20:5). 또한 당신의 사도도 일찍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질투를 말하지 않았습니까?(고후 11:2) 당신이 질투하신다면, 누가 능히 내 안에서 당신의 질투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내 안에서 능히 당신의 질투를 막겠습니까? 당신이 나의 모든 원수를 멸해 주시고 당신을 막는 모든 것을 제해 주시어 당신이 유일한 주가 되시고 만유의 하나님이 되시며 견줄 만한 사람이 없는 왕이 되셔야 당신을 만날 때까지 내가 지키심을 얻고 나의 정결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질투가 음부보다 잔혹하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것이 음부보다 더 잔혹합니까? 비록 가장 아끼는 것, 가장 사랑스러운 것, 가장 귀한 것일지라도 음부가 죄인을 받을 때에는 결코 당신의 아끼는 것, 당신의 사랑스러운 것, 당신의 귀한 것을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물이 음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애통해함이 그것의 마음을 약하게 할 수 없으며, 간청함이 그것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음부는 긍휼이 무엇인지 모르며, 체휼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음부는 동정함이나 어떤 느낌도 없습니다. 그것은 잔인합니다. 내가 만일 나 자신을 정결한 처녀와 같이 주님께 드린다면, 또한 만일 내 몸에서 어떤 것이 당신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당신은 어떤 것도 개의치 않고 당신이 완전히 승리하실 때까지 이것을 처리하실 것입니다. 비록 보내기를 서운해하는 친구, 친한 친척, 사랑하는 애인이 그곳에서 권고하고 애걸하며 눈물을 흘릴지라도, 당신은 어떤 것도 돌보지 않고 당신의 느낌만 돌보실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보호를 받습니다.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리라". 여호와는 본래 불과 같은 분이시다(히 12:29). 그분의 사랑과 질투는 불과 같아서 그분이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태우신다. 영원하지 않은 모든 것, 지나가는 것, 세상에 속한 것,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다 태워질 것이다.
7절에서 '많은 물'은 믿는 이가 거친 시련이다. '홍수'는 원수의 핍박이다.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의 불은 결코 시련 때문에 꺼질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의 불결은 핍박으로도 엄몰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시련과 핍박은 내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이 사랑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즉 대치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일만 마디의 방언과 천사의 말로 당신의 사랑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나는 선지자의 말씀 전하는 것과 비밀을 분명히 아는 것과 각양의 지식과 온전한 믿음으로도 당신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모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자신은 여전히 멸시 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 소유한 재물과 귀한 것의 일부분일 뿐, 이러한 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대치하는 것은 멸시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더 많은 일과 더 바삐 수고하는 것과 더 힘든 봉사로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단지 자신을 당신께 드려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8절, 이러한 주님의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주님의 사랑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오히려 그녀보다 더 어린 사람을 생각했었다. 그녀의 작은 누이는 비록 생명은 있지만 믿음과 사랑이 아직 주님에 대한 정감이 생길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다. 현재 그녀의 주님과의 연합은 매우 완전하므로, 그녀는 주님 앞에서 그녀 안의 모든 느낌을 자유롭게 토로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두 유방이 없구나 그녀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 우리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꼬?" 그녀는 아직도 무엇이 사랑의 생활인지를 알지 못하는데 결국 어느 날 그 영원한 애인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녀를 이끌어 사랑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우리는 그녀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명으로 말하자면 작은 누이이고, 사랑의 생활로 말하자면 그녀의 두 유방은 아직 자라지 않았다. 이러한 무리의 사람은 사랑어린 관심과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녀의 이러한 상태에 만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청혼을 받는 것은 믿는 이의 생활 가운데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마음대로 거절할지 모르지만, 사랑에 대한 주님의 요구는 모든 믿는 이에게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누이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그녀는 이제 마음으로 항상 염려하면서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 대해 주님과 상의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와 같이 주님의 뜻 가운데 살므로 이제 '우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가 관심하는 것이 주님이 관심하시는 것임을 알므로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이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므로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연합은 이미 완전하고 나눠짐이 없으므로 기도하는 것도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녀가 성벽일진대"(9절). 만일 그녀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어떤 것이 있어서 성벽과 같이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어떤 것과 분별을 갖게 하고 간격이 생기게 한다면 우리는 '그 위에 은 망대를 세울 것'인데, 즉 구속으로부터 얻은 모든 높고 귀한 것을 다 그녀 위에 세울 것이다. 그녀가 만일 이미 성령을 의지하여 분별과 격리의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구속의 열매를 그녀 위에 더하여 세워야 한다.
만일 그녀가 '문'이라면,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고,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그녀를 두르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사람의 생명을 그녀에게 더해 주어야 한다 (나무는 인성이며 백향목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인성이요 영광의 인성이며, 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사람의 생명이다). 그녀가 하려는 이 모든 것은 결코 그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요 그녀와 주님이 함께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말은 비록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만, 오히려 주님의 마음의 뜻을 대표하고 있다.
"나는 성벽이요"(10절). 나는 이미 분별된 사람이다. 주님은 이미 나로 하여금 모든 깨끗하지 않은 것과 세상에 속한 것과 평범한 것에서 분별되게 하셨다.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나의 믿음과 사랑이 세상과 분별되는 근거이다. 주님은 이미 나를 세우셨고, 나의 두 유방은 망대와 같이 자랐다. 내가 이러한 단계에 이르러야 하나님 보시기에 평안한 자 같은데 그 뜻은, 이러한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나는 안식하기 시작하는 사람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강의 생활은 분별의 생활에 근거하며, 믿음과 사랑의 성장에 근거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간단하게 간증을 하는데, 거기에 자만하고 자족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그녀는 자기가 성벽이라고 자랑할 수 있고 두 유방이 망대와 같다고 자랑할 수 있으나, 다만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평안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할 뿐이다.
11절에서, 믿는 이가 들림받기 전에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하게 하는 또 한 가지는 곧 일에 대한 보상이다. 솔로몬은 지키는 자들에게 맡긴 그의 공장, 곧 그의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일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영원히 종의 위치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그분의 사업을 지킬 뿐이다. 그분이 오실 때, 그분이 우리에게 위임한 모든 것은 여전히 그분의 것이다.
'바알하몬'은 '많은 사람의 주(主)'란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주님은 솔로몬과 같이 모든 것의 주(主)요 또한 우리의 주(主)라는 것을 보여 준다. 솔로몬의 상례(常例)는 지키는 사람이 실과를 얻는 것이지만, 그가 얻은 실과를 위해 그는 솔로몬에게 은 일천을 바쳐야 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지킨 것과 관리한 것과 물 준 것으로부터 얻은 열매를 우리의 보상으로 삼게 하신다. 주님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은 하나도 헛된 것이 없는데,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것에 대해서도 보상을 받을 것이다(마 10:42).
"그 가운데의 실과를 위하여 필히 일천 세겔의 은을 내야 한다"(다른 번역). 솔로몬에게도 그의 몫이 있다. 일천의 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반드시 계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19장, 마태복음 25장과 많이 다르다. 거기에서는 우리의 은사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여기의 은 일천은 모든 지키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마땅히 회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최저한도의 요구, 즉 주님이 모든 믿는 이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음을 안다. 이 요구가 곧 여기의 은 일천이다.
12절에서, 여자는 이제 많은 지키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분별해 낸다. 그녀는 솔로몬을 대신해 포도원을 지키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다. 솔로몬이 일찍이 그녀에게 포도원을 주었으므로, 그녀에게는 자기의 포도원이 있었다. 현재 포도원이 그녀 앞에 있다는 것은 이 포도원이 그녀의 것이라는 뜻이며(창 13:9, 참조), 또한 그녀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의에 따라, 지키는 사람은 모두 솔로몬에게 은 일천을 내야 하는데, 사랑을 따라 그녀가 행한 것이 율법을 따라 행한 것보다 더 적단 말인가? 아니다. 그녀도 솔로몬에게 은 일천을 준다.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봉사를 보는데, 어떤 것은 율법을 인한 것이요 어떤 것은 사랑을 인한 것이며, 어떤 것은 두려움 때문이요 어떤 것은 감사 때문이며, 어떤 것은 본분 때문이요 어떤 것은 사랑함 때문이다. 그녀는 비록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며,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고, 단지 본분에 따라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다르지만 그녀는 결코 주님이 그녀의 본분에 따라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적게 행할 수 없다.
솔로몬이 얻은 것이 있을 뿐 아니라 그를 대신해 실과를 지킨 사람도 얻은 것이 있다. 그녀를 도와 일한 모든 사람에 대해, 그녀는 그들이 마땅히 얻어야 할 영광과 칭찬을 그들에게 돌아가게 했다. 그녀는 그들이 마땅히 얻어야 할 분깃을 탈취하지 않았다. 부디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의 동역자들의 영광을 빼앗지 않기를!
그러나 그날에 주님이 그분의 일꾼에게 상을 주실 때, 그녀 자신도 실과 지키는 사람 안에 포함되어 은 이백을 얻을 것이다. 공의에 따라 그녀는 실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은은 결코 아니었다(11-12절). 그러나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다 주님의 일을 상업적으로 여기지 않아야 하며, 주님도 그녀의 상을 상업적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녀가 마땅히 얻어야 할 실과 외에 주님은 그녀에게 다른 영광도 주신다. 심판대 앞의 문제는 마태복음의 그 노선과 상합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사랑이지 결코 책임이 아니다. 일과 상의 문제는 본래 여기서 이야기할 수 없으나, 성령은 오히려 이것들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책임의 안목에서 본 것이 아니라 사랑의 안목에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과 완전히 상합된다.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13절). '너'는 주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동산'은 복수이다. 그분은 그녀의 동산에 거할 뿐 아니라(6:2) 또한 많은 동산에도 거하신다. 그분은 사람의 마음에 거하시는데, 완전히 그분을 따르는 사람의 마음에 거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이 기뻐하는 모든 자의 마음에도 거하신다. 이제 여자는 그분을 이렇게 부르면서 그분에게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라고 말한다. 이 '귀를 기울인다'는 뜻은 모두 그곳에서 듣는다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제 다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녀들은 이미 처리를 거쳤으므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하고 '듣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안다. 그녀들은 이미 빨리 듣고 더디 말해야 하는 것을 알았다. 그녀들과 그녀는 이제 다 이전같이 그렇게 말이 많지 않고, 약간의 체험이 있어도 끊임없이 그녀들과 주님과의 상황을 말하지 않는다. 이제 이러한 것이 이미 없어졌다. 이제 그녀들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말하기를 좋아함으로 말하지 않는다. 무릇 자질구레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다 땅에 속한 생명이 그곳에서 주권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들은 다 듣고자 하며,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그녀들의 생명이 주님의 가르침에 있으며, 그녀들의 일이 주님의 명령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들으며,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스스로는 움직일 수도 없다. 주님의 음성이 없으면 계시가 없고, 빛이 없으면 지식이 없다. 믿는 이의 일생은 다 주님의 음성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주여, 우리가 듣기를 기다릴 때에 주님이 나로 들을 수 있게 하소서. 구하면 얻을 것이고, 찾으면 찾을 것이며,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였으니, 당신이 나로 듣게 하시고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여호와가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만일 주님의 말씀이 힘있게 들릴지라도 내가 듣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이 나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이것만이 유일하게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나를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녀는 이제 이미 공과를 배웠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이러한 가장 깊이 있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14절, 여기의 말과 2장 17절은 같은 것으로, 거기에도 이와 같은 기도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가리키는 일은 결코 같지 않다. 우리는 이 책에서 어떻게 광야가 두 번 언급되는가를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주님의 오심도 '산에 있는 암 사슴과 어린 사슴'(다른 번역)과 같다는 것을 두 번 말한다. 그분이 첫 번째로 산에 있는 것은 믿는 이와 그분과의 교통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그분이 어떻게 믿는 이와 완전한 교통을 갖고자 하는가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가 아직 지나가지 않고 날이 아직 새지 않았을 때, 곧 오늘날 주님이 아직 강림하지 않으셨을 때이다. 거기서 주의하는 것은 교통이므로, 우리는 그분이 베데르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분리'가 다 완전히 지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여기의 이 '오다'는 장래의 문제로 아마도 매우 가까운 시기이지만, 누구도 언제인지는 모르므로 2장과 같이 시간적인 제한이 없다. 여기서는 교통의 문제가 아니므로, 산도 결코 베데르산이 아니고 향기로운 산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주님의 재림과 그분의 왕국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금으로 수놓은 세상이 있게 되는데 마치 향기로운 산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는 여자의 체험이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바다에 들어가 흐르면 흐를수록 깊어지지만 더 이상 자취는 찾을 수 없는 것 같음을 본다. 이제 그녀가 소유한 모든 것은 세상에 남겨놓고 몸만 남아 있을 뿐이며 마음은 이미 다른 세계에 가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부르짖음을 발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당신이 오실 때 암사슴이나 어린 사슴과 같이 빨리 오소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암사슴이나 어린 사슴이 향기로운 산에서 어떠하듯, 당신이 오실 때에 당신도 당신의 왕국 가운데 강림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랑이 비록 완전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있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오실 때 참으로 '믿음은 보이는 것으로 변하고 찬미는 간구를 대신하게 됩니다'. 사랑은 그늘이 전혀 없는 완전한 극치에 이를 것이고, 죄 없는 상태에서 주님 앞에서 그분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입니까? 그러므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