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은 "희언자연(希言自然)"이라는 말부터 시작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또는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로 해석을 한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은 "도가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라 풀이한다. 크게 다음과 세 가지이다.
1. 자연은 말이 없다.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나도 처음 <<도덕경>>을 읽을 때는 이렇게 읽었다.
우리는 보통 큰소리로 말을 많이 하며 자기 과시를 하거나 길게 논리를 늘어 놓으며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다.
그러나 "희언자연"을 만나고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가르침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천지(하늘과 땅)가 합하여 온갖 일을 이루어 내지만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하지 않는다는 거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하는 등 자연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것을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말로 선전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거다.
말은 중요하다.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남의 말을 듣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배 철현교수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감동적인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 그 말을 '다바르(dabar)'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단어에는,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란 의미도 지니고, 그 말이 실행된 '사건'이란 뜻도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말은 잘 하고,
실천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즉 말이 사건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건 말로 공수표를 쓴 것이다.
말이 지켜지지 않고, 심지어 타인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며 악이 된다.
못 배운 사람,문명적이지 못한 야만적인 사람은 자신이 던진 말의 결과를 헤아릴 여유가 없을 정도로 어리석어,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이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고,주위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악취가 나는 험한 말을 서슴지않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조용하지만 변화무쌍한 자연과, 그 자연의 변화를 주도하는 시간의 특징은
침묵이다. 그래 나는 다음 말을 좋아했다.
노자의 "희언자연(希言自然, 긴 말 없는 게 자연이다)" 그리고 공자의 "천하언재(天何言哉, 하늘이 언제 말하더냐!)".
그래 나는 늘 말은 자신의 침묵이 만들어낸 보석이라고 보았다.
침묵을 통해 단련된 자신의 인격과 품격이 드러난 말은 자연스럽고 찬란하게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겐, 말(言)에 해당하는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이 있다.
로고스는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거대한 문법'이다.
이를 동양 철학에서는 '도(道)'라고 본다. 나는 이 '도'를 '삶의 문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문법은 문자가 발명되고 더 중요해 졌다. 글 뿐만 아니라,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문법을 숙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문법이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 즉 언행이 다듬어지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란 뜻이다.
그런 사람은 누구로부터 지적 받아 자신의 잘못을 수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법'이란 이타심에서 나온 상대방에 대한 배려하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의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를 말씀 대신 로고스라고도 한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에서 로고스는 '인간 세상을 문법으로 움직이는 에너지'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말은 에너지인 셈이다. 인간은 두 발로 서면서 얼굴이 생기고 말을 하면서,
그 말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우연한 경험을 기초한 생각은 타인을 부정하는 구별을 만들지만, 로고스를 통한 새로운 안목은 타인을
나의 일부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타인이 바로 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하는 '구별된 공간'으로 나를 인도한다.
배 철현교수에 의하면, 그 말을 "고대 히브리 예언자들은 '다바르'라고 불렀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로고스('logos)'라고
명명"하였고, "갠지스 강의 시인들은 '다르마(dharma)로 이 말을 가슴에 품었고, 중국인들은 '언'이라고 여겨,
입으로 나오는 소리로 자신의 인격을 표현하였다" 한다.
'다르마'란 산스크리트어는 중국으로 와 '법(法)'이 된다.
여기서 '법'이란 한 사회의 유지를 위한 법령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기 위한 모두가 공감하는 삶의 이치이자
도리이다.
'법(法)'이란 한자어를 풀면 '수(水, 물)'과 '거(去, 가다)'가 만나 만들어진 것이다.
법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만물은 흐른다. 말도 그렇다.
그런 흐름으로 말은 말을 낳는다. 말은 리듬과 파동을 수반하며, 소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귀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따라서 말하기와 듣기는 하나이다. 그래서 태초의 인류에게 소리는 늘 신성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다섯가지 감각 중에서 가장 무딘 것이 '청각'이라 한다. 그런데 그 '귀'가 '트이면' 다른 감각기관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고 한다.
다시 <<도덕경>> 제23장으로 되돌아 온다. 하늘과 땅도 가끔씩 말을 하기는 한다.
가끔씩 회오리 바람이나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가 하늘과 땅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천지의 말도 아침 마절이나 하루 이상 계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천지도 이렇게 가끔씩 짧게 말할 뿐인데, 어찌 사람이 그토록 오래 말을 계속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 가 하는 이야기다.
노자 <<도덕경>> 제23장의 말은 "복잡한 방법론을 동원한다고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답을 쉽게 얻기 위해서는 방법론이 간단명료해야 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이렇게 말했다. '간단해서는 안 된다. 가장 간단해야 한다.'
자연이 말 수가 적다는 것은 도의 미니멀리즘을 다르게 표현한 문장이다. 도란 구구절절 복잡한 것에 있지 않고
간단하고 단순한 것에 있다.
아침 내내 부는 바람이 없고 하루 종일 내리는 비가 없다는 구절은 도의 이러한 단순성을 자연현상에 빗댄 것이다.
복잡한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자연도 이렇게 간단하고 단순한데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연을 닮아 말 수를 줄이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
도는 하나(一)라는 단순한 진리로 수렴되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져도 그것이 적용되는 원리는 동일하다.
그래서 도를 만나면 도와 하나가 되고, 덕을 만나면 덕과 하나가 되고, 실(失)을 만나면 실(失)과 하나가 된다.
원리가 하나인데 실을 만났다고 득(得)과 편을 먹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한 동질적인 것들은 동지로서의 일체감을 느끼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함께 기쁨을 누린다.
그래서 도를 만나면 도와 사람이 함께 기뻐하고, 덕을 만나면 덕과 사람이 함께 기뻐하고,
실을 만나면 실과 사람이 함께 기뻐한다.
만일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동지적 일체감이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지고 불신만 남게 된다."
인터넷에서 만난 해설이다. 깔끔하다. 나도 이해가 잘 된다.
希言自然(희언자연) :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도가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故飄風不終朝(고표풍부종조) 驟雨不終日(취우부종일), 그러므로 회오리바람도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낙비도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孰爲此者(숙위차자) 天地(천지), 누가 이런 일을 주관하는가? 천지 자연이다.
天地尙不能久(천지상불능구) 而況於人乎(이황어인호), 천지 자연도 이처럼 이런 일 일을 오래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故從事於道者(고종사어도자) 道者同於道(도자동어도, 德者同於德(덕자동어덕) 失者同於失(실자동어실),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사람은 도와 하나가 되고, 덕을 따르는 사람은 덕과 하나가 되고,
잃음을 따르는 자는 잃음과 하나가 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도의 실현에 종사하는 자는 도와 같아지고, 덕의 실현에 종사하는 자는 덕과 같아지며,
도를 상실한 일에 열중하는 자는 그 상실된 것과 하나가 된다.
同於道者(동어도자) 道亦樂得之(도역락득지) 同於德者(동어덕자) 德亦樂得之(덕역락득지),
同於失者(동어실자) 失亦樂得之(실역락득지)
사람이 도와 일체가 되면, 도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덕과 일체가 되면,
덕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실과 일체가 되면, 실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한다.
좀 다르게 말하면, 도와 같아진지는 자는 도 또한 그를 즐거이 취하고, 덕과 같아진 자는
덕 역시 즐거이 그를 취하며,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잃음 또한 그를 즐거이 취한다.
信不足焉有不信焉(신불족언유불신언) : 신뢰가 부족하면 불신이 따른다.
大道廢(대도폐) 有仁義(유인의), 큰 도가 사라지면, 어짐과 의로움가 있게 되고
慧智出(혜지출) 有大僞(유대위), 지혜가 나타나나, 커다란 위선이 판을 친다.
六親不和(육친불화) 有孝慈(유효자),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면 효와 자애가 있게 되고
國家昏亂(국가혼란) 有忠臣(유충신), 나라가 혼란하면 충신이 있게 된다. ---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