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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7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14
설교 제목: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1~23
설교를 위한 묵상: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을 기리는 절기는 기독교회의 가장 큰 절기다. 그런데 그 절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되살리는가에 기독교 신앙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언제나 신앙은 그 정신이 살아서 세상을 선도하기도 하고 그 정신이 쇠퇴하고 희미하게 되어서 세상에 동화되거나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기독교 신앙을 진단해 본다면 그 근본 정신이 매우 희미해지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왜곡을 넘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거나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언제나 인식의 지체현상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회의 인식을 선도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등불이라는 말에 담긴 자기 인식의 언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을 선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정수인 성경과 선배들의 모범을 바르게 배운다면 우리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언제나 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그 절기가 담고 있는 정신을 밝히 드러내어 현실을 진단하고 그 처방을 제시하고 함께 고쳐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성경을 펼쳐서 그 절기를 통해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신앙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면밀하게 공부하고 묵상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부활절을 한 주 지나서 나는 요한복음 20장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창조의 시작임을 강조할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창세기를 패러디하여 소개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이런 관점을 먼저 제시한 사람은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Tom Wright)다.
설교 개요:
1. 부활 이야기를 소개하는 복음서 기자들
2. 요한복음이 소개하는 예수님 이야기 – 두 천사
3. 동산지기를 발견하다
4. 숨을 내쉬며 말하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5.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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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 이야기를 소개하는 복음서 기자들
지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리는 절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하여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니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절기를 통해서 전수됩니다. 절기를 지키면서 부모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키면서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새롭게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 각성과 확신이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 차이나는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신앙의 가치를 드러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그 절기를 통해서 깨달아야 할 기독교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임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하면 우리의 신앙은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것이며 다음 세대에게도 명확한 전통을 전수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입니까? 또는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서 왜 중요합니까?
이런 질문은 언제나 근본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 우리는 성경을 더 집중적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귀를 더 기울일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저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하여 두 가지 기본 전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전제는 신앙인에게 구원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입니다. 하나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답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기록한 사복음서를 비교하고자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본 것에 대한 사복음서의 설명을 비교하겠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그 무덤의 문을 가로막고 있던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사를 보았습니다. 이에 대한 사복음서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마태복음 28:2~4)
마가복음: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마가복음 16:4~6)
누가복음: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복음 24:3~5)
요한복음: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한복음 20:11~13)
이 본문을 보면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천사라고 말하고, 마가복음에서는 흰 옷 입은 한 청년, 누가복음에서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흰 옷을 입었다는 말과 찬란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천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복음서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천사들을 보았다고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 요한복음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2. 요한복음이 소개하는 예수님 이야기
요한복음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독특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공관복음을 영어로 시놉틱(The Synoptic Gospels)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같은 관점(눈)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시놉틱의 어원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ynoptic < Greek synoptikos < synopsesthai “to be going to see together”, from syn- + opsesthai “to be going to see”
그러면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에서 제외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관점이 매우 특이하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이 시작이 창세기와 유사하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창세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부터 함께 계신 바로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씀도 매우 특별합니다. 여기서 거하셨다는 단어는 천막을 치고 사셨다(ἐσκήνωσεν)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막은 하나님이 사막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제작하라 명하신 바로 그 성막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뜻을 준행하는 백성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백성이며 성막의 백성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성경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에덴동산에 들이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임무와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언제나 돌아오시는가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성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을 기억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말씀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 바로 그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천막을 치고 사시는 것처럼 자기 백성에게 오셨다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 백성에게 보여주셨다고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바로 그 사실을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에서 특별한 의미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에서 두 천사가 하나는 머리맡에 앉아 있고 다른 하나는 발치에 앉아 있었다고 소개한 것입니다. 두 천사가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는 모습은 성막의 지성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궤를 덮은 덮개에 금으로 쳐서 만든 그룹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은 시은소, 곧 은혜의 보좌입니다(히 4:16). 다른 말로는 속죄소로서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이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곧 속죄의 제물이 되신 분이며 화목제물이라는 말입니다(롬 3:25). 예수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는데 20장에서는 그것을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에서만 두드러지게 표현된 예수님의 무덤에 있는 두 천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또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곧 성전이라는 말인데요, 요한복음 20장은 두 천사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이 바로 성전의 가장 중심에 해당되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성전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이며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언제나 확신하셨습니다(요 8:29).
우리 교회는 이런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렇게 인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3. 동산지기를 발견하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무덤에 간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고 소개합니다. 그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한복음 20:15
사도 요한은 정말 독특합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방식이 매우 특별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산 떡으로, 빛으로, 생수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할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그리면서 두 천사를 그의 머리맡과 발치에 둠으로써 예수님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보좌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요한이 사용한 오해 시리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말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요한복음 11:49~52
가야바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민족을 위하여 더 나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대제사장으로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에 대하여 적절한 말이었다는 것을 요한은 드러냅니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에 자주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동산지기로 예수님을 오해한 마리아의 이야기에도 그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동산지기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에덴동산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아담입니다. 대제사장의 이야기가 그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진실이었던 것처럼 마리아의 착각도 사실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동산지기이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을 지키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은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시고 함께하시면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바로 그 중심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 1:18, 참고: 엡 1:22, 5:23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산지기이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동산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머리이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동산지기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리고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가 온 땅을 비옥하게 하듯이,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까지 알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엡 3:10).
4. 숨을 내쉬며 말하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두려워 문을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사건입니다. 그 대목을 요한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1~23
이 장면은 정말 새롭고 독특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파송의 그림이며, 다른 하나는 숨을 불어넣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부르는 것이 곧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창 2:19). 무엇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세상의 통치자로 세우시면서 그에게도 그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숨을 내쉬시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권세를 받습니다. 그 권세는 죄를 사하는 권세입니다. 그 권세를 가지고 인간은 무엇을 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통치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소임이자 특권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에도 그런 권세를 주셨습니다. 시편 2편은 그 대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편 2:8~9
하나님의 아들들은 철장(鐵杖)의 권세를 가지고 이방 나라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들을 질그릇 같이 부술 것입니다. 여기서 질그릇처럼 깨어질 이방 나라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것은 시편 2편의 처음에 소개됩니다. 그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시편 2:1~3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 헛된 일을 꾸미는 사람들을 깨뜨릴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싸움을 싸우셨다고 이렇게 소개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로새서 2:15).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런 싸움을 싸웠을까요?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6:3~10, 표준새번역 성경
5.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이다!
오늘 저는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요한복음에서 특별하게 소개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창세기의 이야기를 모방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그 생명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이야기를 요한복음은 들려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 있던 두 천사는 예수님이 곧 화목제물이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분임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은혜의 보좌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동산지기로 소개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에덴동산 지킴이로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일에 중심이 되신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고 말씀하시고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을 이어가시려고 교회에게 명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죄 사함의 권세를 부여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방법으로 선한 싸움을 싸움으로 이 세상에서 헛된 것을 붙들고 사는 이들의 생각과 철학을 깨뜨립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동참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활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단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인생이 나이 들어 가는 것을 가리켜 익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생이 나이 들어 가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우리의 처소로 보내시며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일에 믿음으로 동참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어떤 소원을 주시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능히 새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새 아담으로,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