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분 | 주 요 업 적 | 비고 (관직 등) |
무과 출신 | 제14세조, 제15세조, 제17세조 우리 장손 직계 선조들은, 문과 중심의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총 여섯분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셨는데 1500년대 이후에는 세분이 계셨다. 선조들께서는 종6품에서 정3품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역임하셨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하시고 2등 공신에 봉해지는 보국충절을 보여줌. | 어모(禦侮)장군 훈련원 판관 병절교위 의병장 등 |
문과 출신 | 제16세조, 제19세조, 제20세조, 제21세조 조선시대에 총 7명의 문과 급제자가 있었는데, 1500년대 이후에는 4분이 조정에 나아 가셔서 다양한 벼슬을 하셨다. 고려시대 만큼 재상이나 왕가의 일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정5품에서 정3품의 벼슬에 이르는 등 명문 가문의 맥을 이어 가셨다. 불행하게도 우리 장손 직계 중 관직에 출사한 조상은 제21세대가 마지막이다. |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경연참찬관 통덕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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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출신 | 제18세조, 제21세조 - 25세조 시기적으로는 1800년대 이후부터 구한말까지이다. 이때는 선조들께서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머무르시면서 유학자의 길을 걸으시거나, 처사(處士)로 불리우면서 활동하시고 세인들의 명망을 얻으셨다. 이 시기에는 조정에 외척들(안동 김씨)의 부패와 혼탁한 권력투쟁(대원군, 민비), 농민의 난으로 인하여 관직에 나가기를 꺼려하셨다고 한다. 대신 향리에서 학자의 길을 걸으시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 한 삶을 살으 셨다. 증조할아버지이신 25세조까지는 字를 사용하실 만큼 유학자로서의 전통을 이어 가셨다((25세조의 字는 형오 亨五).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맥이 끊어진 것은 할아버지(26세조)께서 일본에 건너가신 후 부터이며, 아버지가 학업을 포기하신 것이 결정적이었다. | 처사, 유학자 |
本家의 다지리 移居 | 우리 세조들께서는 고려시대 당시 장흥군에 정착하신 이후 그곳에서 본가를 유지하였으나, 18세조부터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보성, 화순, 완도 등지로 이거, 독립세가를 이루기 시작했으며, 우리 장손은 다지리 249번지(현재 209번지)로 옮겨 와서 마을에 씨족사회를 형성하였다. | 이전에는 장흥군 관산 지역에 거주 |
종중 묘지 안지 | 본가를 다지리로 이거한 18세조부터 묘지를 화순군 內(다지리, 동면 등)에 개별적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2018년에 현 종중묘지를 조성하여 합동묘역에서 선조들을 모시고 있다. | 이전에는 장흥군 內 에 봉묘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