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자신의 집안은 물론 다른 집안의 족보에도 해박해야 제대로 된 양반으로 대접받았다.
보학 (譜學)이라는 것이 있다.
보학이란 족보학을 말한다.
그 사람의 족보가 어떻게 내려왔는가, 조상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살았는가를 추적하고 이를 정리하는 분야다.
물론 이 분야는 대학의 정규 교과과목에 들어 있지 않다. 일반인은 보학이라는 분야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보학은 조선시대 양반 계층에서 주로 따졌으며 양반의 필수적인 교양으로 인식됐다.
자신의 집안은 물론 다른 집안의 보학에 해박해야 제대로 된 양반으로 대접받았다.
예를 들어 잘 모르는 어떤 집에 방문하거나, 처음 만나 수인사를 나눌 때 으레 보학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열었다.
입향조(入鄕祖·그 지역에 처음 들어온 조상의 이름)가 어떻게 되는가,
불천위(不遷位·4대가 지나도 위패를 옮기지 않고 계속 모시는 제사)는 어떻게 되는가,
갈장(碣狀)은 누가 썼는가, 몇 대조 할아버지가 언제 과거에 합격했고, 어떤 상소문을 썼다가 파직되어, 어디로 유배를 갔는가, 유배를 갈 때 어떤 문집과 시를 남겼는가…
갈장은 누가 썼는가?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상대방의 보학에 대한 지식을 은연중에 살폈다.
A급인가, B급인가, 아니면 C급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대화에 등장하는 용어 자체를 못 알아들으면 C급으로 판정한다.
예를 들면 갈장’이라는 용어도 하나의 지뢰로 작용할 수 있다. 갈장을 누가 썼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상대방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으면 이 사람은 C급 정도구나 하고 짐작한다.
그 다음부터는 대화의 수준을 확 내려버린다.
갈장은 사대부가 죽은 뒤에 비석에 새기는 묘갈명(墓碣銘)과 그 사람의 평생 이력을 정리한 행장(行狀)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이러한 전문용어를 구사하면서 은연중에 상대방의 보학적 교양정도를 테스트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보학의 효력과 권위가 거의 사라졌다.
영남지역에 아직도 보학에 대한 교양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영남 가운데서도 특히 유교문화의 뿌리가 남아 있는 안동에는 보학의 유풍이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있다.
보학은 선비 집안의 후손이 지니는 남다른 자존심의 원천이다.
영호남은 1960년대 후반부터 지역감정으로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접어든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시작됐다.
박통의 공과(功過)가 있는데, 그 과(過)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지역감정의 조장, 즉 호남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이후로 5·6공을 거치면서 계속 영남 출신 대통령이 배출되자 이 지역감정은 골이 깊어진 감이 있다.
호남 사람들은 박통에서부터 YS정권에 이르기까지 35년 동안 차별받았다고 생각한다.
즉 지역개발, 인사, 교육, 행정 모든 분야에서 호남은 소외됐고 낙후됐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물론 광복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던 호남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것은 영남 정권 35년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 소외감이 아직도 호남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깊숙이 박혀 있다.
그러다보니 일부 호남인들에겐 ‘호남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1000년이 넘는 동안 계속해서 영남에 눌려 살아왔다고 하는 호남피해사관(湖南被害史觀)’으로까지 비약될 정도다.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영남이 계속 패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조선왕조의 왕가는 전주 이씨다.
조선왕조가 전주(全州)에 관향(貫鄕)을 둔 전주 이씨 이성계에 의하여 개창됐지만 후기로 오면서 안동 김씨가 세도를 쥐고 안동 사람들이 계속해서 요직을 다 점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는 안동 김씨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집안의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력은 지대했다.
안동이 바로 영남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안동이라는 관향 때문에 안동 김씨를 경상도와 연결하는데, 따지고 들어가면 안동 김씨들은 서울 사람들이다.
족보에만 관향이 ‘안동’으로 기재되어 있을 뿐 실제로 거주한 곳은 서울, 구체적으로 서울의 장동(莊洞)이다.
장동은 경복궁의 서북쪽을 가리킨다. 지금의 청와대 근처인 청운동과 옥인동 근방이다.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는 의미를 지닌 청풍계는 서울에 살던 안동 김씨들의 본거지였다.
안동 김씨 200년 집권과 60년 세도의 산실이었다. 그 기반이 서울의 장동 일대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안동 김씨가 아니라 ‘장동 김씨’라고 해야 맞다.
실제로 ‘장김(莊金·장동 김씨)’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호남 차별 35년, 영남 차별 200년
한국의 족보에 기입하는 관향 또는 본관(本貫)이라는 용어는 한번 경주 김씨면 그 사람이 서울에서 300년을 살았더라도 족보와 묘비명에 ‘경주 김씨’라고 기재한다.
이를 읽는 사람이 보면 경주에서 살았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실제로는 서울 사람이지만 외부인들은 경주 사람으로 인식한다. 안동 김씨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패권과 세도는 경상도 사람들이 누린 게 아니라 서울 사람들이 누린 것이다.
대략 170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 모든 인물과 권력, 재력이 집중됐다.
물론 수도이니까 예전부터 집중되는 현상은 있었지만 노론 일당의 집권이 계속되면서 서울 집중에 가속도가 붙었다.
예전에는 정권교체가 자주 이뤄져 실권한 당파 사람들은 지방에 내려가 살았다.
교체가 되면 이긴 당파는 서울에 살았지만 패한 당파는 낙향하여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서울 집중이 가속화하면서 생긴 말이 귀경천향지풍(貴京賤鄕之風)’이다. ‘서울을 귀하게 여기고 시골을 천하게 여기는 풍조를 말한다.
사람 자식은 서울로 보내고 말 새끼는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는 말도 대략 이 시기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종합하면 조선후기 세도는 경상도 사람들이 누린 게 아니다.
서울 장동에 살던 장동 김씨 집안이 누렸다.
호남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도 이 대목을 착각하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다 해먹은 것으로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조선 후기는 경상도 사람들이 지역 차별과 정치적 소외를 받았던 역사다.
안동 일대에서 손꼽히는 명문이 퇴계 선생의 진성(眞城) 이씨 집안, 서애 유성룡의 풍산(豊山) 유씨, 학봉 김성일의 의성(義城) 김씨 집안이다.
의성 김씨 학봉파(鶴峯派) 후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 숙종 이후 이 집안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한 것이 ‘참의(參議)’라고 한다.
지금의 차관보(次官補)에 해당한다. 정부 중앙부처 1급 국장급이다.
영남에선 참의 벼슬이 아주 높이 올라간 경우이고 대부분은 ‘교리(校理)’ ‘정언(正言)’ ‘장령(掌令)’ ‘사간(司諫)’ 벼슬에 그쳤다.
정부 부처의 과장급 정도 되는 벼슬이다.
대부분의 영남 선비들은 평생 벼슬을 못하고 강호의 처사(處士)로 인생을 끝냈다.
그러니 얼마나 원망이 많았겠는가.
능력이 아니라 출신지역 때문에 당한 불합리한 차별이었다.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 경상도의 남인이 철저하게 견제를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는 지역차별의 정치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차별 기간이 대략 200년이다.
근래 호남차별이 35년이라면, 조선후기 영남차별은 200년이다.
안동 지역에 ‘팔고조도(八高祖圖)’라는 게 있다.
조부의 조(祖)가 누구인가
조부의 외조(外祖)가 누구인가
조모의 조가 누구인가
조모의 외조가 누구인가
외조의 조가 누구인가
외조의 외조가 누구인가
외조모의 조가 누구인가
외조모의 외조가 누구인가를 따져서 도표로 그려놓은 것이다.
안동에서는 선비 집안이라 하면 팔고조도를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만들다보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리 모두 피를 주고받은 친척인 것이다.
보학을 하려면 어떤 수업과정이 필요한가. 우선 한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사서와 삼경은 물론 여러 집안에 남아 있는 문집을 섭렵해야 한다.
이 과정이 이론이라고 한다면 실전이 필요하다.
실전은 문집을 번역하는 일이다.
번역을 해봐야 실력이 생긴다.
다음에는 해당 문중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
만나보면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 발견된다.
그리고 중요 인물이 살던 집터나 정자, 기타 유적지를 반드시 답사해야 한다.
현장에 가봐야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분위기를 알아야 정확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현재 대학의 한문학과 교수들은 학교와 학회 내에서만 활동한다.
일반 집안사람들과는 거리가 있다.
보학을 하려면 현장의 문중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야 하는데, 이 현장 감각을 익히려면 대학 밖에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기회가 많다.
근래에 비문 짓는 경향을 보면 영남지역은 아직까지 순한문으로 된 비문을 선호한다.
한국 사회의 전통을 읽어내는 독해법 중 하나는 보학이다.
보학을 알아야 한국 사회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