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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창작과비평) ■
돼지들
이지호
어느 날 돼지들이 사라졌다.
노란 우의를 입은 사나이가 피리를 불었다고 했다. 꽥꽥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돼지들이 따라나섰다고 했다. 돼지를
몰고 가는 바람의 목관에 몇 개의 구멍이 있었다고 했다. 그 구멍 속으로 돼지들이 산 채로 묻혔다고 했다.
마을에 낯선 투명한 음계들이 떠다닌다.
마을의 지하 군데군데가 팽창하고
증오는 모두 네 개의 발자국을 가졌다는 소문이 돌고
막걸리잔에 붉은 핏발들이 가라앉았다.
골목엔 안개가 돌아다니곤 했다고 했다. 그 위로 은하 같은 봄꽃이 떨어지고 몇몇은 돼지발굽 모양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돼지들이 사라진 마을에 꽥꽥대는 고요가 돌아다닌다고 했다. 텅 빈 돈사마다 기르던 예의를 가두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고 했다.
병든 발굽을 하고 봄이 지나가고 음계의 어느 쉼표에도 돼지들이 살지 않는다.
포클레인 몇 대가 지방도를 따라 꽥꽥거리며 지나갈 뿐
사라진 돼지들이
우적우적 마을을 먹어치우고 있다.
그리고 어제
최씨 성을 가진 한 사내가 빈 돈사에 목장을 맸고 오늘 마을 입구로 포클레인 한 대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다.
- 2011년 <창작과비평> 신인상 당선작
■ 이지호 시인
- 1970년생
- 충남대 식품영양학과 졸업
- 시집 <말끝에 매달린 심장> 외
《 심사평 》
이지호의 시는 현실을 아우르는 탄탄한 서정성이 가장 큰 장점이다. 소도시나 농촌을 배경으로 한 그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의 운행을 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팽팽한 인식을 놓지 않는다. 운문과 산문을 적절히 교직하여 리듬을 만들어내는 능력 역시 높이 살 만했다. 또한 많은 편수를 투고했음에도 골고루 수준 이상의 성취를 보여준 것이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꽤 오랫동안 공들인 것이 틀림없는 이 신인의 시세계가 앞으로 더욱 무르익을 것임을 의심치 않기에 그를 신인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박현준 진은영 강성은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내일을여는작가) ■
백마라사(白馬羅紗)
이설야
백마처럼 하얀 양복을 입고 오랜만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사나워진 말굽이 방 안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백마라사에서 사온 검정 재봉실이 거미줄처럼 계속 풀려나왔다. 엄마는 손목에다 검정 실을 칭칭 감곤 했다.
발정 난 도둑고양이, 아기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던 밤. 잠결에 아버지에게서 빠져나온 엄마의 거뭇한 아랫도리를 보았다. 피 묻은 내 얼굴이 간신히 통과한 곳, 세상의 모든 울음이 처음 터지던 곳간을 보았다.
가래 끓던 바람이 문지방을 밟고 오면 도둑고양이와 생쥐와 지렁이들도 함께 울어주던, 백마라사 상표를 매단 하얀 양복이 무서웠던 집. 끊어진 검정 실을 간신히 이어가던, 그래도 그리운 화평동 집이었다.
- 2011년 <내일을여는작가> 신인상 당선작
■ 이설야 시인
- 1968년 인천 출생
-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 심사평 》
흔히 좋은 시를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인 ‘삶의 진정성’은 단지 각자가 체험한 것들을 곡진하게 그린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대다수의 시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핍진함이나 밀도와 상관없이 모두 ‘진정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삶의 진정성’은 그런 면에서 딱히 시와 체험의 진실성 또는 순수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현실세계의 그 이해나 평가의 눈으로 가늠해보거나 양도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나’와의 마주함이 참된 의미의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응모 기간이 짧은 탓에 응모작이 적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60여 명의 예비시인들이 참여한 일정한 수준의 시들을 보면서 느낀 생각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체험이 진실하며, 그 진실이 심사위원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진실하다고 홍보하기보다 결코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꾸밈없는 마음이 시적 소통의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심사위원들은 최종 4명의 작품들을 심사대상으로 삼고 숙고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각기의 작품을 돌려 읽으면서 그 장·단점을 기탄없이 토의하는 자리를 가진 바 있다.
먼저 「가상훈련」외 4편을 응모한 이다희씨의 시들은 과장 없는 담담한 묘사와 안정적인 구성이 돋보였다. 하지만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날개를 꿈는 법’과 같은 다소 개연성 없는 돌출한 표현 등이 눈에 거슬렸으며, 저만이 개성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 소품들이라는 인상이었다. 또한 「해의 지문이 손등에 필 때」외 12편을 응모한 이자영씨의 시들은 다양한 소재와 상상력으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걸 뒷받침하는 표현력을 좀 더 갈고 닦아야 할 것으로 보였으며, 특히 서정시의 시간성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시적 집중성이나 긴장미가 떨어졌다.
당선자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권지연씨의 「나비의 거리」외 5편은 거의 흠잡을 데 없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한 이미저리나 무리하지 않는 상상력, 자연스런 리듬감 등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다만 화려하고 능란한 수사가 구체적인 시공간을 확인할 수 없게 하고 있으며, 역동적이기보다 정물적인 시세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당선작으로 뽑은 이설야씨의 「백마라사」외 4편은 사실 특별한 개성이나 기교가 드러나는 작품들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삶을 경험을 가는 실로 한 땀씩 엮고 꿰맨 듯한 시들의 보여주는 눌변訥辯의 미학에서 시적 진정성과 함께 어느 시적 유행에도 휩쓸리지 않는 저만의 시세계를 개척해갈 것 같은 정신의 강인함이 느껴져 당선작으로 선정하는데 그 뜻을 같이했다.
당선자에 축하의 말을 전하고, 아깝게 당선자에서 제외된 예비시인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전한다.
- 심사위원 : 임동확 권성우 김은경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세계의 문학) ■
라의 경우
안미린
복제되고 다음 날 같다
가가 다에게 고백을 했다
전생에 나는 너를 잡아먹은 적이 있어
나는 외계인이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어?
어른이었어,
여자애라면 머리를 돌돌 말아 고정시켰지
노을과 환타가 동시에 쏟아졌을 때 가는 울었어,
다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
강제적인 첫 경험들 말야
목이 부러진 인형에 얼굴을 붙여 주는 시간
내와 네의 발음을 구분하는 숙제
색연필을 쏟은 와락 같은 거
색깔이 덜 마른 벽에 대한 불안 같은 거?
옷핀의 구조 같은 거
셀 수 있는 모서리
잔디로 결정된 풀들의 길이
여름의 정글짐
겨울의 정글짐
물을 먹지 않고 마시는 감각과
씨앗 근처의 눈부신 맛
팔을 벌려 납작해지며 벽을 안아 봤던 날
나도 몰래 홀수로 얼음이 얼고
무수해졌어
자기 이외의 생명?
자기 이외의 생명,
메롱하는 것
나는 라에게 거짓말을 했다
네 키와 같은 사람은 거리에 가까워
너와 마주 댄 등은 깊이에 가까워
라는 흔들릴 만큼 웃었다
나는 제외될 만큼 웃었다
꽉 쥔 주먹만 들어가는 장갑이 일곱 개 완성되었다.
-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당선작
■ 안미린 시인
- 1980년 서울 출생
-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 외
《 심사평 》
"안미린의 시들은 자유로운 어법 그 자체였다. 과감하게 생략하고 비약하고 가로질렀다. 말맛이 탱글탱글 살아 있었다. 시선은 다이내믹하게 줌인과 줌아웃을 했다. 그럼에도 행간에 계절의 지나감과 경험했던 감각들의 애틋함이 다소곳이 숨겨져 있었다. 언어로는 힘주지 않아 경쾌했고 감수성에는 깊이가 있어 묵직했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구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풀처럼 심어 두곤 했다. 신뢰감 이상을 맛보았달까. 이런 신인이 이제 새로이 시인의 세계에 진입하여 우리의 동료가 된다는 사실에 설렜다."
- 심사위원 김소연 시인 심사평 중에서
- 심사위원: 김소연 김수이 김행숙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문학동네) ■
넝쿨장미
남지은
뾰족한 악몽을 밀어내고
담장에 오르는 새벽
나는 내가 비좁다
창을 열면
내 안으로 눈이 내리고
붉은 새가 걷는다 붉은 새가
떼로 날아오르면
검게 찢어지는 하늘이
칼들이 쏟아져내리고
아버지가 보인다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
모두가 찌르고 모두가 찔리고
모두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다
내 안으로만 쌓이는 눈
창이 열리면
나는 나를 뚫는다
새가 새를 뚫는다
- 2012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남지은 시인
- 1988년 전남 여수 출생
- 강남대 국문과 졸업
-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 심사평 》
응모작들을 뒤적이면서 말이 많은 시는 싫다, 라는 생각을 했다. 별다른 필연성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들이 나를 지치게 했다. 이미지의 조형성을 포기한 채 너무 쉽게 말을 낭비하고 있거나 책임질 수 없는 해석을 함부로 남발한다는 인상을 주는 응모작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추리고 추려 고른 작품 역시 말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는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이 진정 많아서라기보다는 많은 듯이 보이고 싶어서 나타난 현상 아닐까. 그 많은 말들 가운데 정작 기억에 남는 표현, 진정성을 담고 있는 문장, 세계에 대한 그럴듯한 통찰을 제시해주는 구절은 얼마나 될까.
당선작으로 결정된 남지은씨의 작품은 예각적이고 도발적인 이미지로 세계의 단면을 절개해 내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넝쿨장미」를 비롯한 그의 응모작 역시 말이 충분히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잉여를 걷어낸 간결함과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가 함축한 냉각된 폭발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 남진우 시인, 문학평론가
● 당부컨대(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예비신인들이여, 젊은 시인들의 시, 특히 미래파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자. 물론 미래파와 같은 시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습작기에 있는 문학도에게 미래파 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미래파 시가 시의 거대한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살아 있는 시인의 시는 뒤로 미루자(나중에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대신 ‘죽은 시인의 살아 있는 시’를 모델로 삼아 필사하고 암송하자. 베껴쓰고 소리내며 외워보자. 그러다보면 어느 날 눈이 확- 떠진다. 자기가 쓴 시의 잘잘못이 훤히 보이기 시작한다. 자기 시에 스스로 점수를 매길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순간이 습작기의 끝, 진정한 등단이라고 본다. 자기 시를 냉정하게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래서 내가 왜 쓰는지, 무엇을, 누구를 위해 시인으로 사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그는 지구 안에서, 지구 위에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설 수 있다. 그때부터 그는 시인이다. 그가 시인이다. ……
남지은씨의 「넝쿨장미」는 첫눈에 들어왔다. 문장이 간결하고 단단해서 오랜만에 ‘언어 경제’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 시였다. 넝쿨장미라는 특별하지 않은 대상을 가족사와 연결시킨 발상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참신했다. “나는 내가 비좁다”에서 “나는 나를 뚫는다”에 이르는 성장통이 서로를 원수로 여기면서도 결별하지 않는 가족사의 비극을 배경으로 잘 드러나 있다. 언어를 절제한 만큼 의미-이야기가 증폭된다는 시의 ‘황금률’이 모범적으로 적용된 시다. 언어를 절제한 만큼 드라마가 커지는 시다. 하지만 「밤에 가까운 밤에」「도마뱀」같은 시에서는 대부분의 신인들이 안고 있는 결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남지은씨를 신인상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선뜻 동의하면서도 한 가지 옵션을 걸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현대시 백 년을 빛낸 시와 시인을 하나하나, 깊숙하게 만나보라는 것이다. 법고창신, 온고지신은 결코 투박하거나 낡은 사자성어가 아니다. 우리는 시가 있어서 시를 쓰는 것이고, 시인이 있어서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겨우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한 걸음 앞서 나아가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첫 시집 출간이 진짜 데뷔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 이문재 시인
* …이 모든 작품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장점의 힘으로 본심에 올랐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본심에 올린 작품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거기까지 왔을 것이다. 이분들의 작품이 당선작이 못 된 이유는 단점 때문이 아니다. 그 장점이 다른 응모자의 장점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막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분들은, 심사평에서 지적받은 단점들을 보완하겠다며 어느 하나 모난 데가 없는 두루뭉술한 시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더 강력하게 키워나가서 어느 한 군데 날카로운 모가 있는 시를 만드는 게 나을 것이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 심사평에서 언급된 응모작들
김용각 - '지문'외 7편
남지은 - '넝쿨장미' 외 4편
장은주 - '나는 온기를 앓고 있어' 외 4편
한연희 - '코끼리 볼링센터' 외 6편
김희정 - '현실의 아이' 외 6편
안희연 - '멋진 악몽' 외 6편
총 671명의 3,932 편이며,
최종적으로 김용각, 남지은, 백인기 세 명의 작품으로 압축되었음.
- <문학동네> 2012년 가을호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창작과비평) ■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안희연
나는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와 반대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워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좀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나는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
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
빈 액자를 걸어두고 기다려보는 거예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 속에
새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들은 밤새도록 곤두박질치는 장면을 상연 중입니다
무릎을 켜면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엔
나는 샛노란 국자를 들고 죽은 새의 무덤을 휘젓고 있겠지요
* 고트호브: 그린란드의 수도로 '바람직한 희망'이라는 뜻
- 2012년 <창작과비평> 신인상 당선작
■ 안희연 시인
- 1986년생
-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 심사평 》
창비신인시인상에 접수된 426명의 원고를 심사위원 3인이 한달 간 검토했고, 각자 3명 내외로 2차심에 추천했다. 이들의 원고를 약 2주간 검토한 후 10월 18일 최종회의를 진행했다. 시를 통해 실패를 무릅쓰고 세계라는 감성공동체에 지속적으로 참여해나갈 강한 의지와 체력이 엿보이는 신인을 우리는 만나고 싶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언어가 인상적이나 알맞은 그릇에 담기지 못해 언어의 긴장감과 시적 전개가 다소 정체되어버린 김지은의 시편들을 아쉽게 내려놓으며, 최종적으로 심도 깊게 논의한 것은 김숙, 안희연, 장혜령 3인의 작품이었다.
김숙의 저녁의 겨울 외 5편은 탄탄한 서정을 갖추었고 언어를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서정적인 언어를 지루하지 않고 세련되게 다루는 솜씨가 인상적이다. 특히 표제작이 매우 아름다워 오래 붙잡고 있었다. 응모된 거의 모든 시편들이 큰 편차 없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으나, 다른 시적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의지가 다소 약해 보였다. 시의 매혹은 어떤 완성에서 온다기보다, 지금껏 내가 내딛지 못한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가는 중에 낯설고 막다른 상처처럼 얻어지는 듯하다.
장혜령의 이방인 외 9편은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 특히 이방인은 수작이다. 사유는 날카로우며 유연하다. 언어는 개성적인 에스프리로 흠뻑 젖어 있다. 돌발적으로 툭 던져지는 듯한 구절은 시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놀랍게도 뚜렷한 하나의 전언을 향해 화살표처럼 모여든다. 장혜령은 당선자가 결정되기 직전까지 우리를 고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고심을 이방인이라는 시를 통해서만 주로 안겨줬다는 데 아쉬움이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이방인을 통해 보여준 강점들이 거의 발휘되지 않았다. 만약 이방인이 이번에 응모한 시편들 중 비교적 최근에 창작된 것이라면, 장혜령은 지금 명백히 도약하고 있는 중이다.
안희연의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외 9편은 매우 감각적인 언어를 수집하고 배치하면서도 자신이 구사하는 언어의 진폭을 상당히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당연히 그것은 진지한 고투의 산물이다. 동시에 실패를 무릅쓰고 부단히 다채로운 시공간을 창조하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조탁된 시의 행간에는 침묵이 생명체처럼 도사리고 있고, 그 침묵이 주는 텐션은 매혹적이다. 이 모든 덕목은 최근 신인들에게 그리 흔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 현재보다 미래를 더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 신뢰를 보내며 당선자로 선정했다.
심심찮게 관찰되는 무거운 추 같은 미완의 세계를 발목에 매달고 난바다를 건너 또 다른 시의 영토로 한 번 더 도약하는 것은 지금부터 온전히 그의 몫이다. 앞으로 있을 그 고투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부디 매혹을 선사해주길. 이 새로운 시인이 우리의 예감과 기대를 멋지게 증명해주길 부탁한다.
- 심사위원: 김중일 박성우 이영주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산맥) ■
허공의 마디
김대호
어떤 식으로든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말이 있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내 앞에 서 있던 말이 떠났고 이 일 저 일 시간을 궁리했다
나이들면 표정에 마디가 생기나 보다
나무의 옹이 같은 것이었는데, 단단한 그 안에는
뱉고 싶었던 말이 굳어 있을 것이다
할 말 못하고 있는 생각이 흐르다가 또 다른 마디가 되고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던 분기점을 돌아
아침에 같은 약을 두 번 먹는 지점에 서 있고
어느 날, 마디에서 헛기침이 새나왔다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던 말 말 말들
입만 벌리면 허공에라도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낯설어서,
아니, 민망해서
입을 꽉 다문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 2012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 김대호 시인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2010년 수주문학상 수상
-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 심사평 》
시산맥을 통해 등단하는 시인들에게 시산맥은 고향일 것이며, 그런 시인들이 고향인 시산맥을 지키는 기둥들이 될 것이라는 공통된 합의를 바탕으로 심사위원들이 심사에 임했다는 사실을 우선 말씀드린다. 최종심에 올라온 분들은 이진욱, 김대호, 오유경, 이선자와 홍영수 등 다섯 분이었고 이 중에서 김대호와 이진욱 두 분을 등단의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탈근대의 시대에 이르러 시인들이 깨닫게 된 것은 언어가 기본적으로 은유라는 사실이었다. 김대호는 이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채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대호는 “어떤 식으로든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말이 있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내 앞에 서 있던 말이 떠났고 이 일 저 일 시간을 궁리했다”라는 「허공의 마디」의 1연에서 축자적(literal) 표현이 더 이상 자존(自存)할 수 없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김대호는 「은밀함에 대하여」에서 “태초에 우리는 은밀하였다”라고 전제하면서 “지금 은밀함은 해석이 잘못되어 천대 받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은밀함의 자손이다”라고 현시대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런 탈근대적 인식의 구체적 작품화가 「그늘을 베다」, 「개를 몰고 산책하다」와 「까마귀」 등에서 시도되고 있는데 은유가 편리하게 상징으로 안착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김대호의 시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진욱은 「희곡(喜曲)을 기다리다」의 괄목할만한 성취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상연하려고 쓴 연극의 각본”인 희곡(戱曲)이 아닌 이 시의 제목에서 제시되고 있는 ‘즐거운 노래’라는 뜻의 ‘희곡(喜曲)’이란 용어는 코믹 오페라인 희가극(喜歌劇)을 연상시키는데,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쓰기’하면서 극적 상상력이 의미심장하게 발휘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어둠이 납작하게 내린 날/ 모서리에서 동선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어 늙은 배우는 처음부터 피곤에 절어 있었어”라고 현실의 정경이 연극의 무대와 빈틈없이 오버랩되는 첫 부분부터 이진욱은 자신의 공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진욱은 극적 상상력이 충분히 발휘되었을 때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항」에서 “섬의 길목에서 유혹했던 남동풍 따라/ 매일 대폿잔을 들고 오신 아버지/ 그 발자국을 뒤밟아/ 어머니는 하루같이 물질하셨고/ 한소쿠리씩 검버섯을 캐 오셨다/ 처녀 같던 바다에 주름은 겹겹이 쌓여 갔다”라는 묘사는 한국시에서 통상적으로 보이던 부모 묘사의 센티함을 극적 상상력으로 멋지게 극복하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없소」, 「독을 만지다」와 「보리숭어」는 앞의 두 작품보다는 다소 힘이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욱의 시세계에서 극적 상상력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기대하게 하였다. 등단한 두 분께 축하의 말을 전한다.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산맥) ■
희곡(喜曲)을 기다리다
이진욱
1
어둠이 납작하게 내린 날
모서리에서 동선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어 늙은 배우는 처음부터 피곤함에 절어 있었어 행동이 느려지는 순간 효과음은 아래쪽에 모로 세웠어 쉰 목에서 나오는 대사는 푹 삶아 졌어 꿈틀대는 거친 숨결도 그렸어
2
중간 즈음 언덕도 하나 만들었어 그곳에 사는 소년의 눈동자를 세밀하게 써 내려갔어 조명은 절정이 막 지날 때 F. I* 됐어
아- 조금 늦었어
아무 대사도 못 쓰겠는데 원고지 속 배우들은 나만 보고 있어 Staff도 관객도 극장 경비도
3
오늘 밤에는 못 오지만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해 달랍니다**라는 말을 소년은 늙은 배우를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어
4
사실,
내가 틀렸든 부족했든 모두 비웃었어 막이 내린 뒤 늙은 배우가 원고지에서 튀어나왔어 소년은 상기된 얼굴로 눈치만 봤어 끌고 가지 못할 희곡을 쓴 내 탓이라고 원고지 속에서 웅성거렸어 자판도 창문도 천정도
눈이 빠질 듯 아팠고 귓속은 윙윙거렸어
조용히 해 제발!
5
파쇄기로 밀려들어 간 늙은 배우는 잘려나갔어 준비 없는 무대에 그림을 그린다고 나만 호들갑을 떨었어
소년의 중얼거린 말은 나에게 했던 것이었어
6
난 지금도 비상구를 찾아 꺼진 모니터 안에서 우두커니 기다렸어 먼지 쌓인 무대처럼
*페이드인 F. I(Fade-In): 무대가 차츰 밝아지는 것, 용명(溶明)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중 소년 대사 인용
- 2012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 이진욱 시인
- 1969년 전남 고흥 녹동 출생
- 원광대 경영학과 졸업
- 시집 <눈물을 두고 왔다>
《 심사평 》
시산맥을 통해 등단하는 시인들에게 시산맥은 고향일 것이며, 그런 시인들이 고향인 시산맥을 지키는 기둥들이 될 것이라는 공통된 합의를 바탕으로 심사위원들이 심사에 임했다는 사실을 우선 말씀드린다. 최종심에 올라온 분들은 이진욱, 김대호, 오유경, 이선자와 홍영수 등 다섯 분이었고 이 중에서 김대호와 이진욱 두 분을 등단의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탈근대의 시대에 이르러 시인들이 깨닫게 된 것은 언어가 기본적으로 은유라는 사실이었다. 김대호는 이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채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대호는 “어떤 식으로든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말이 있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내 앞에 서 있던 말이 떠났고 이 일 저 일 시간을 궁리했다”라는 「허공의 마디」의 1연에서 축자적(literal) 표현이 더 이상 자존(自存)할 수 없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김대호는 「은밀함에 대하여」에서 “태초에 우리는 은밀하였다”라고 전제하면서 “지금 은밀함은 해석이 잘못되어 천대 받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은밀함의 자손이다”라고 현시대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런 탈근대적 인식의 구체적 작품화가 「그늘을 베다」, 「개를 몰고 산책하다」와 「까마귀」 등에서 시도되고 있는데 은유가 편리하게 상징으로 안착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김대호의 시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진욱은 「희곡(喜曲)을 기다리다」의 괄목할만한 성취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상연하려고 쓴 연극의 각본”인 희곡(戱曲)이 아닌 이 시의 제목에서 제시되고 있는 ‘즐거운 노래’라는 뜻의 ‘희곡(喜曲)’이란 용어는 코믹 오페라인 희가극(喜歌劇)을 연상시키는데,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쓰기’하면서 극적 상상력이 의미심장하게 발휘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어둠이 납작하게 내린 날/ 모서리에서 동선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어 늙은 배우는 처음부터 피곤에 절어 있었어”라고 현실의 정경이 연극의 무대와 빈틈없이 오버랩되는 첫 부분부터 이진욱은 자신의 공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진욱은 극적 상상력이 충분히 발휘되었을 때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항」에서 “섬의 길목에서 유혹했던 남동풍 따라/ 매일 대폿잔을 들고 오신 아버지/ 그 발자국을 뒤밟아/ 어머니는 하루같이 물질하셨고/ 한소쿠리씩 검버섯을 캐 오셨다/ 처녀 같던 바다에 주름은 겹겹이 쌓여 갔다”라는 묘사는 한국시에서 통상적으로 보이던 부모 묘사의 센티함을 극적 상상력으로 멋지게 극복하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없소」, 「독을 만지다」와 「보리숭어」는 앞의 두 작품보다는 다소 힘이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욱의 시세계에서 극적 상상력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기대하게 하였다. 등단한 두 분께 축하의 말을 전한다.
- 이만식(시산맥 편집기획위원)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지용신인문학상) ■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
김관민
미안해요, 당신을 윤리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신발을 신발장에만 가두려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수학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모든 걸 계산하려고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국어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을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속에 살게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심심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음악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눈에 들리지 않는 음표들만 늘어놓았으니
당신은 얼마나 짜증났을까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인데
당신은 책이 아닌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데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죠
오, 정말 미안해요
또다시 당신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네요
- 2013년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
《 심사평 》
쓸데없는 장식 뺀 ‘돌직구’ 표현
시를 읽는 가장 큰 재미는 다른 데서는 들어보지 못한 말을 그 시에서 처음 듣는 데 있지 않나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은 세상을 보는 남들과는 다른 눈과 귀와 손이 있어야 할 것이고, 거기서 남들과는 다른 어법이 나오게 되는 것이리라.
이번 응모작품은 그 양에 있어 전년보다 훨씬 많았고 수준도 결코 뒤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비슷비슷한 소리들이 많아 시를 읽는 재미가 반감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음 작품들은 여러 면에서 심사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안개, 당신의 행방’(이주)은 우선 아름답다. 그윽한 수묵화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안개가 자욱한 숲길을 걷는 느낌도 주면서, 특히 뒷련에 이르러서는 사람 사는 일의 아득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빼어난 서정시로 읽어 틀림이 없겠지만, 자기만의 목소리나 어법이 모자란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미안하다’(김동연)는 말하자면 환경시라 할 수 있겠는데, 호소력도 있고 표현에 무리는 없지만 너무 뻔한 소리다. 옳은 소리, 지당한 말씀이 다 좋은 시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잘 지내니?’(조영훈)는 발랄한 발상과 표현이 장점이다. 하지만 외국어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걸린다. 시 하면 일단 폼을 잡고 인상을 쓰고 보는 것도 가관으로 그런 점을 극복하고 있는 면은 살만하지만, 이 작자의 다른 시들은 어쩐지 좀 가볍다는 느낌을 준다.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김관민)는 우선 어법이 특이하다. 이 점은 같은 작자의 ‘악성종양’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런 어법은 우리 시에서 보기 어려웠던 터여서 신선한 느낌을 준다.
쓸데없는 장식 없이 핵심으로 돌진하는 시법도 시에 힘을 더해준다. 당선작의 수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이상의 네 작품을 놓고 토의한 끝에 심사자들은 김관민의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그의 앞으로의 활약에 크게 기대를 건다.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산맥) ■
관절염
이상윤
어머니 무릎에 강이 흘렀다
걸음을 옮기면 강물소리가 들렸다
그 강엔,
물렁뼈에 의지한 지구의 중력과
어머니가 걸어 온 세상의 길들이 산다
오래전 샛강이었을 때
어머니는 운동화를 깁다 새벽 강을 건넜고
빈 쌀독을 다독거리다 눈 덮인 겨울 강을 건넜다
늘어나는 나의 발 치수에 맞춰
강폭은 넓어지고 수심은 더 깊어졌다
어제도 차오르는 강 수위를 낮추려
약손한의원과 샛별약국으로 가는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고 난 어머니는
광목천으로 시린 강의 마디를 여몄다
언제부턴가 내게도 강물소리가 났다
어깨에 샛강이 흘렀다
강물이 등줄기를 타고 잠자리까지 차올랐다
아침저녁 강물소리를 들으려
귀는 강의 초입에 쫑긋 서 있었다
산다는 건 몸에 강을 하나씩 들이는 것이다
저녁 바람 뒤끝이 젖었다
내일도 강물소리가 무척 요란하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누군가 파스를 붙였나 보다
마을에 어머니의 강물냄새가 난다
- 2013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 이상윤 시인
- 1969년 경북 경산 출생
- 국민대 대학원 영어영문과 졸업
- 고등학교 영어 교사
- 2013년 <시산맥> 시 등단
-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 동시집 <아빠는 쿠쿠 기관사> 외
《 심사평 》
- 체험이나 상상력으로 부조해내는 능력
이런 시산맥의 취지를 반영하듯 이번 공모에는 평소보다 많은 70여분의 작품(평론 2편 포함)이 응모되었다. 멀리는 해외에서부터 연령별로는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작품이 응모되었는데, 응모된 작품의 질을 따지기에 앞서 응모자들의 열정에 고마움과 감동을 먼저 느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을 모두 당선작으로 할 수는 없으므로 심사위원들은 정밀한 심사에 들어갔다. 이들 작품 중 결선에 오른 작품은 평론 2편을 포함해서 10편이다. 두 분 응모자의 평론은 심사 결과 아직 전문적인 비평의식과 안목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아쉽게도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시산맥은 앞으로 단 1편의 평론이 응모되어도 글의 수준이 시산맥의 기대에 부응하는 수준이라면 기꺼이 선정할 예정이다. 평론가를 지망하는 분들의 많은 응모를 기대한다.
이번 심사는 인사동 근처에 있는 시산맥 사무실에서 결선에 오른 작품을 심사위원들이 돌아가며 읽고 A,B,C로 등급을 매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최종 결선에 오른 시작품은 강정아, 김태인, 노현수, 박은석, 신종수, 오광석, 이상윤, 조철형 등 여덟 분의 80여 편의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등단작으로서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하지만 작품을 꼼꼼히 살펴본 결과 1)몇 작품은 좋은데 작품의 질이 고르지 못한 경우, 2)표현이나 상상력은 좋은데 시적 울림이 약한 경우, 3)작품이 지나치게 장황하여 응집력이 떨어지는 경우, 4)한자어나 개인상징 등을 사용하여 시가 보편성을 잃고 생경하게 읽히는 경우, 5)지나치게 고전이나 소재주의에 집착하여 패러디시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경우, 6)시적 기교가 앞서서 체험이나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 등의 지적되었다. 이러한 냉정한 평가를 뚫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작품들은 신종수의 「네버랜드에서 가져온 시간」 외 9편, 김태인의 「눈 사골국」 외 10편, 이상윤의 「라브카페」 외 9편 등이다.
먼저 신종수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안정된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일상사의 직, 간접적인 체험들을 형상화 하려는 노력이 엿보였지만, 시의 길이에 비해서 응집력과 울림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흠이었다. 이 시인은
앞으로 시의 몸에 숨어있는 감각을 짚어내어 울림을 만들어내는 법을 터득해나갈 필요가 있다. 시의 울림이나 응집력은 체험과 상상력과 시적 언어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화음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 김태인의 작품들은 시적 대상을 관찰해서 효과적으로 운용해내는 언어표현 능력이 돋보였으나, 시인의 체험이 구체화되지 못하고 일반론에 그치거나, 의도적인 한자어 사용으로 문맥의 흐름이 어색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김태인의 작품들은 당선작과 끝까지 겨루어 당선의 영예는 차지하지 못했으나 낙선작 중에서 가능성을 가장 많이 보여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을 마지막까지 고심하게 만들었다.
끝으로 이번에 시산맥 신인상 당선자로 선정된 이상윤의 작품들은 시적 주체나 대상들을 시인의 체험이나 상상력으로 부조해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특히 이번에 당선작으로 선정된 「관절염」, 「직립의 숲」, 「빈 집」, 「그리운 수족관」, 「새의 독백」 등은 체험과 상상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일정한 울림을 내장하고 있는 작품들이어서 미더웠다. 우선 어머니의 관절염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 「관절염」은 “어머니의 무릎에 강이 흘렀다/ 걸음을 옮기면 강물소리가 들렸다/ 그 강엔./ 물렁뼈에 의지한 지구의 중력과/ 어머니가 걸어온 세상의 길들이 산다”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이 체험과 상상력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언어표현의 묘미마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다음으로 ‘직립의 숲’으로 상징되는 문명을 비판적 안목에서 그리고 있는 「직립의 숲」은 ‘직립’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삶의 모순을 설득력 있게 형상화 해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빈집」은 할머니가 살던 빈집을 의인화하여 과거 할머니의 구체적인 삶과 연계해서 정감 있게 표현해내는 능력이 돋보였고, 「그리운 수족관」은 마트를 동물원으로 비유해서 사랑으로 맺어진 개인사를 ‘고래밥’이라는 과자를 통해 이야기하는 방법이 이채로운 작품이다. 끝으로 새장 속에 갇힌 새의 독백형식으로 되어있는 「새의 독백」은 비교적 일상적인 소재이지만 시인의 뛰어난관찰과 표현 능력에 의해서 현대인의 고독한 삶이 구체성을 얻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상윤 시인의 시들은 시산맥 신인상 등단작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등단작으로 선정되지 않은 「라브카페」와 같은 작품이 고흐의 삶을 울림 있게 형상화하고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시인의 체험과 일정한 거리감을 노정함으로써 패러디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재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당선자에게 다시 한 번 축하를 드리고 아쉽게 낙선한 분들께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글: 박남희)
- 심사위원: 박남희, 이영식, 김광기, 나금숙, 안차애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창작과비평) ■
사과를 기다리며
전문영
1
할머니는 오래된 노래를 지우듯 화분의 잎을 닦는다
사과가 담겨 있던 스티로폼 망이 찢어지던 날
땅에 떨어졌던 사과는 모두 묻었다 그 자리를 더듬듯
할머니는 스티로폼 망으로 꽃을 만들어 가지 끝마다 매단다
사과는 이제 없는데 저 조그만 해먹 위에서 무엇이 쉬고 있는지
할머니는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2
어느 날 손가락들이 한 나병 환자를 두고 갔다
그것은 달밤의 계곡물 위로 사과가 떠내려가는 일과 같고
이후 그녀는 늘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사과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진딧물이 기어오를까 두려워 발밑을 살피는 것이다
매주 목요일 내가 그녀의 등에 물을 끼얹으면
그녀는 안심한다 사과 먹는 벌레가 다 쓸려 내려간다고
샤워기를 등에 갖다 대면 그녀의 손등은 살짝 구부러진다
이제 막 사과를 쥐려고 하는 사람처럼
창문은 얼룩져 밖을 헤아릴 수 없고
그녀는 사과 같은 건 모두 놀이터에 있다고 믿는다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놀이터에서
한 소녀가 발을 굴러 그네를 띄우고 있다
그 어떤 사과도 도달하지 못했던 천진한 곡선을 그리며
발바닥이 깨끗하게 펴진 채로 공중에 떠오른다
그 순간의 출렁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바나나, 멜론, 포도, 복숭아…… 다만 사과는 아닌 그 무엇이다
소녀는 아직 사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3
조카는 사과밭 사이를 뛰었다 숨었다 정신이 없다
일교차가 심할수록 사과는 덜 시어진다고 하니
조카는 분명 지금 달아져가는 중이다
어른의 손가락은 아이들의 첫 사과인지도 모른다
내 검지를 쥔 조카의 악력이 대단하다
다섯 손가락이 각자의 위치로부터 힘껏 내 검지를 밀어낸다
조카는 기도란 미는 힘이란 것을 벌써 안다
기도가 기도를 밀고
손바닥이 손바닥을 밀듯이
사과나무가 자신의 손목을 밀어내자
나뭇잎은 간구하던 몸짓 그대로
손끝이 조금 말려든 채 흙 위에 눕는다
사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 2013년 <창비> 신인산 당선작
■ 전문영 시인
- 1984년 서울 출생
-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연출과 졸업
《 선정 이유 》
전문영은 이채롭고 탄력적인 단언과 시를 장악하는 독자적 진술의 거침없는 화법으로 자기 스타일을 밀고 나가는 뚜렷한 개성에 도달하고 있다. 놀랍도록 개방적인 방식과 단독자적인 자세로 세계의 질서와 대결하며 잠재적 현실의 발명에 이르는 그의 시편은 우리 시의 예외적인 경험이 되리라는 믿음과 새로운 독자를 창조하는 활로를 열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 심사위원: 김민정, 김성대, 진은영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문학동네) ■
세상의 모든 최대화
황유원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그러나 약은 치료하기도 하는 것,
병명보다 더 많은 치료제를 잔뜩 싣고 가던 기차가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
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올 때의 기분이란
그 기분 누가 알겠냐마는 환자들만은 알지,
환자들은 꿈속에서 거기까지 걸어가 그 약을 모두 주워 먹은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깨어나 기차의 차가운 몸을 이해하지 넘어진 채 몸을 뒤로 돌리던 기차를 이해하며 몸을 정확히 당신들 반대편으로 돌리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오늘밤 그들의 기도가 기차처럼 길어져 결국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돈 기도들의 속도가 기차를 조금씩 허공에 뜨게 해 마침내 이륙한 기차를 바라보며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려 복부를 강타당한 남자처럼 철로가 신물을 토할 때 신물 위로 기타가 쏟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누가 알까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꿈에서 엎질러진 아이나 알까
아무리 길게 써도 저 레일에는 모자랄 것이므로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고요한 밤, 캐롤을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린 아주아주 거룩한 밤, 깨진 전구를 뛰어넘어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산타를 엉망진창으로 때려눕히고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기타를 모두 수리해야 하는 수리공의 마음은 망가진 리프(riff)들을 밤새 고치고 있는 기타리스트밖에 모르지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나?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본 적 있니!
구겨진 리듬을 잘 펼치면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무엇까지 덮어볼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최대한 붉은 와인을 박스째 주문해
뱃속에 와인을 만 박스나 싣고 가는 기차가 오늘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누가 이해하겠냐마는
사랑을 한 박스나 마시고도 제대로 서 있는* 조니 미첼은 이해하지, 어쩌면 술집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다 이름을 아무 데서나 콸콸 쏟아버리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이해하지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 Joni Mitchell, 〈A Case of You〉중에서.
** Amy Winehouse.
-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황유원 시인
- 1982년 울산 출생
- 서강대 철학과 졸업
- 동국대 인도철학과 박사 수료
-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 심사 경위 》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는 총 734명이 4535편의 작품을 응모해주셨다. 최근 몇 년 동안 줄곧 세 분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맡아주었는데 올해는 네 분이 심사위원으로 수고해주셨다. 응모작을 4등분해서 김혜순, 남진우, 신형철, 이문재가 개별적으로 예심을 진행했고 각자 3~5명 정도의 응모자를 본심에 올렸다.
본심에서 논의된 응모자들의 명단을 표제작 제목을 기준 삼아 가나다순으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나무라기엔 늦은」외 네 편을 투고한 김진규씨, 「사진」외 다섯 편을 투고한 박혜민씨, 「샤브샤브」외 네 편을 투고한 장형순씨,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을 투고한 황유원씨, 「속눈썹 나무 숲에 대한 진술서」외 네 편을 투고한 김은정씨, 「오브제」외 다섯 편을 투고한 임정민씨, 「원만이 아저씨」외 네 편을 투고한 이동호씨, 「인력의 이유」외 여섯 편을 투고한 박민규씨, 「임계」외 네 편을 투고한 김정희씨, 「점원들의 점심시간」외 네 편을 투고한 최몽휘씨, 「코시체」외 여덟 편을 투고한 용윤선씨, 「타인을 읽다」외 네 편을 투고한 한연희씨, 「최초로 레몬을 먹어본 개가 레몬에게 갖는 두려움」외 네 편을 투고한 백록담씨, 「하얀 숲」외 네 편을 투고한 오솔뫼씨.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며칠간 숙독하고 본심회의에 참석했는데, 놀랍게도, 본심은 불과 십 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네 분의 심사위원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당선자로 염두에 둔 응모자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을 응모한 황유원씨였다.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황유원씨의 작품이 어째서 우수한가에 대해 잠깐 동안 의견을 교환하고 그를 당선자로 최종 확정했다. 마라톤이 되기 일쑤인 심사회의를 백 미터 달리기로 만들어준 황유원씨에게 축하의 인사를, 함께 달려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심사평 》
* 김혜순 시인
응모된 시편들을 읽으면서 감각의 낯선 부분을 두드리는, 그런 드문 기쁨을 주는 시들을 만나기를 바랐다. 무릇 새로운 시인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다면 서툴지만 깊거나, 낯설지만 다층적이거나, 어눌하지만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확장한 시들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황유원씨의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엔 이제까지의 한국시에서 익숙했던 이미지도 들어 있고, 낯선 이미지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시편들로 시인이 어떻게 이미지를 구축하는가에 따라 얼마나 ‘다른’ 시가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지 구축의 묘미라고나 할까. 형식이 내용을 구축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시 다섯 편들을 읽고 있노라면 이미지들이 시 텍스트의 표면을 부풀리면서 상승하고, 하강하면서 숨겨진 차원을 드러내는 모습이 유쾌하고도 풍자적이다. 능숙하게, 세련되게 나선형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미지를 타는 재미도 남다르다. 그렇지만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리듬의 구사, 너무 능숙한 이미지 운용은 오히려 시인 스스로 경계해야 할 덕목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심사위원들은 이 신인을 탄생시키는 데에 최단 시간에 합의했다.
* 남진우 시인
너무 싱거운 심사였다. 네 명의 심사위원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당선작으로 밀고 싶은 응모자가 동일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이런저런 심사에 참여해봤으나 이런 전광석화 같은 결정은 처음이었다.
그만큼「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의 작품을 투고한 황유원씨의 시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상당한 것이었다. 이 응모자는 언어를 다루고 시적 얼개를 짜고 상상력을 진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고 있으며 작품 간의 수준의 편차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서 기차와 기타를 넘나들며 화자가 펼치는 분방한 진술은 음악으로 표상되는 예술적 도취의 세계에 대한 갈망과 현실에서 그것의 좌절을 힘있게 전달하고 있다. 또다른 작품 「레코드 속 밀림」이나 「풍차의 육체미」에서 도 긴 호흡의 시적 질주로 우리 시단에 새로운 장거리 주자가 탄생했음을 예고하고 있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좋은 서사를 만들어낼 능력은 없지만 재치 있고 세련된 문장을 쓰는 일 정도라면 자신 있다, 라는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는 응모자가 적지 않다고 느꼈다. 번듯하게 시의 꼴을 갖춘 작품들에서 그런 내심이 감지될 때면 답답함이 커진다.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문장을 써놓고 그 문장이 자신이 투여한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맥락도 없이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주어와 술어를 어색하게 연결하기만 하면 이근화나 신해욱의 좋은 시와 비슷하게 보일 거라 믿는 것일까. 소설에 비해 시가 독자를 속이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사행성 글쓰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그런 와중에 다른 심사위원이 본심에 올린 황유원씨의 「세상의 모든 최대화」를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올해는 이 사람이 당선자가 되거나 아니면 당선자가 없겠구나. 다행스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당선자를 뽑지 말자고 주장하는 심사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이런 도입부는 분석이고 뭐고 하기 이전에 바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의미와 리듬이 서로 뒤엉켜 달려나갈 조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 이문재 시인
본심에 올릴 만한 작품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마지막 연까지 따라 읽을 수 있는 응모작이 많지 않았다. 낯설었다. 근래에 없던 일이다. 당선작은 순식간에, 그것도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지만, 내게 할당된 응모작의 전반적 수준은 예년에 견주어 현저하게 떨어졌다. 고양이와 개가 곳곳에서 출현하고 각주(脚註)가 수시로 달렸다. 다양한 서체(書體)를 동원했고, 그럴수록 문장이 길어졌다. 부모나 가족이 등장할 때는 어김없이 대화체였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분량이 길었고, 길어진 만큼 산만했다. 시를 수렴, 확장시키는 중심이 없었다. 무엇을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했다. 쓰기 자체에 대한 열정만 대단해 보였다.
‘사람에 관한 시’는 만만치 않다. 습작기의 시는 한 인간의 삶을 제대로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물에서 시작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낯익은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그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다. (대상)관찰, (의미)발견, (문장)표현이 시쓰기의 기본이자 핵심이다. 저 세 단계(원칙)를 벗어나는 시쓰기는 없다.
황유원씨의 당선작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활달한 상상력이었다. 활달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시적 대상이나 시 속의 상황, 또는 시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누가 알겠냐마는" "말하자면" "상관은 없겠지만"과 같은 표현은 거리를 확보하지 않으면 쉽게 구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렉기타, 알약, 포도주를 가득 싣고 가는 기차—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시는 제법 강한 흡인력을 내장하고 있었다.
시쓰기에 대한, 아니 삶에 대한 은근한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자폐적 독백을 뛰어넘는 개방적 대화의 문체에 신뢰가 갔다. 근래에 만나기 힘들었던 구심력-방사선적 상상력이었다.
- 《문학동네》 2013년 가을호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산맥) ■
배추를 여니 나비
김일곤
아내는 배추를 열어 노랑나비, 한마당 가득 날린다
나는 철없이 나비를 타고 놀다
샛노란 문양 노랑노랑 읽다가
고향집 마당가에서 치자 꽃물들이던 누이 생각하다가
어머니의 쪽진 가르맛길 달려도 보다가 문득
뚱딴지처럼 김장배추가 되고 싶은 거다
아니, 아삭아삭한 김치로 익고 싶다
싸락눈표 소금에 절여진 나는 채반에 다소곳 누워 순명을 고한다
설폿한 날개 밑에 양념이 입혀지고 소가 박힌다
항아리 안에 어긋 나긋 누워서
폭 익으려면
옴짝달싹하지 말라고 지그시 가슴에 누름돌을 올린다
갑갑하고 돌연 서럽기도 하였으나
꾹 참아내며 그냥 한데 섞여 가라앉고 부드러워지며
숙성되기 간절히 바란다
맵고 짠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함부로 설익지 않고 착 달라붙도록 갖은 양념에 폭 익은 나,
질항아리에서 탈출
끼니마다 나비의 날갯짓으로, 애초롬한 얼굴로,
가족들 둥근상 위에 오른다
긴긴 삼동 고구마 삶기 맞춤한 날은
내 샛노란 날갯죽지가 쭉쭉 찢어져도 좋아
가족들 손끝에서 훨훨
- 2014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 심사평 》
어긋남도 틀어짐도 없이 깁고 꿰매는 수행법의 詩
요즘 시단의 현상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대부분의 작품들이 산문시의 형태로 응모되었다. 서정시처럼 행갈이가 되어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도 시의 문장이나 플롯들이 산문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서정이 부재한 이미지나 플롯들이 시적 긴장감과 시적 반추의 미학적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듯도 했으나 어쩐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쪽의 방향성을 갖는 문제가 심각한 상황인 듯도 하였다.
그 중에서 김일곤, 박광석, 박정우, 신정순, 원춘옥의 응모작들이 각기 개성이 있고 작품수준 또한 고르고 탁월해 보였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을 최종 본심에 올려 심사위원들은 중론을 모으다가 김일곤, 박광석, 박정우의 작품으로 대상을 좁혀 다시 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김일곤의 「배추를 여니 나비」에서는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하게 하는 노랑나비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날아다니며 노닐다가 순명을 고하는 사물(김장김치)이 되고자 한다. 지그시 가슴에 누름돌을 올린 숙성된 삶이 되고자 하며, 가족의 둥근상 위에 올려지기를 바라는 소박하면서도 분골쇄신의 헌신적 사랑이 잘 구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결연하지 않고 해학적인 묘미를 더한 그 심정의 형상성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텍스트는 「윤달」에서 새로운 시각(視角)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화자의 어머니가 윤달에 수의를 짓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당신이 입을 수의를 짓는다는 생각만 해도 화자는 울컥해지는데 정작 당사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듯하였다. 어긋남도 틀어짐도 없이 깁고 꿰매는 수행법과 삼베옷 수의에 연꽃 입술과 초승달까지 그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잔잔하게 텍스트와 그 행간에 비친다. 또 「회전문」에서는 판옵티콘(Panopticon)의 원형(圓形)구조로 회전문을 대상으로 삼으며 통제하고 조율하는 섬뜩한 문명의 구조를 하나의 낯선 물질적 대상에 포착하여 풀어내기도 한다. 가볍게 지나치는 구조지만 시인이 제시하는 대상적 의미에 집중하다 보니 생각만으로도 답답하고 어지러운 물건이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는 김일곤의 창의적 발상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빛이 났다.
박광석의 「말티즈와 아내」 등의 작품은 재미도 있고 일상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의미들이 신선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치환적인 요소나 의미가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상적인 것에서 작품을 구상하면서도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이 또 상대적인 결함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듬는 시적 텍스트의 밀도를 기대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또 박정우의 「달빛 살인 1」과 「달빛 살인 2」의 연작은 시적 분위기가 묘했지만 나름대로 신선하고 긴장감을 갖게 한 작품이었다. 묘사와 진술이 적절하게 잘 진행되어 안정감도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구현하고자 하는 시적 의미를 연작으로 구성하기보다는 하나의 작품에 집중시키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작품성이 좋아 보이는 대부분의 연작들도 마찬가지였다. 연작은 연작 나름대로의 시적 의미나 그 가치가 충분하기는 하지만 응모작으로는 아무래도 단편적인 작품이 좋지 않았겠느냐는 중론이었다.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박광석, 박정우의 신선한 감각과 가능성, 그리고 완성도가 높고 원숙한 경지를 보이는 김일곤의 작품을 놓고 가능성이냐 완성도냐를 논의하는 심사위원들의 설전이 뜨거웠다. 하지만 가능성을 높이 산 작품들은 호불호가 분명했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은 심사위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아 결국 김일곤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기로 합의하였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경합을 벌인 박광석, 박정우 님의 문운과 건투를 빌며 당선자인 김일곤 시인께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 심사위원: 김광기(글) 나금숙 박남희 송용구 이영식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와반시) ■
육교주점
김유미
사내는 백화점 쇼윈도에 눈이 베인 구름을 만났다
이 곳이거나 저 곳 어디든 거처가 되는 구름과의 포옹을
사람들은 익숙한 만남이라 불렀다
만남 후 구름이 사랑하지 못할 여자와 아이가
골목을 서성이는 꿈을 자주 꾸었다
빛바랜 안내문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
여자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구름은 질투하는 구름이 될 텐데
둘을 떠나는 버스에 태워 보내고
사내는 손을 흔드는, 고개를 숙이는
정류장으로 남아야 되나
구름과 사내가 앉아 술을 마시는 육교의 계단
그들의 대화가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구름은 자신을 쫓아와
일과 집과 사람들을 빼앗아 간 제 울음을 말한다
구름은 언젠가 제 울음을 수소문하는
발길이 되었을 때 숨이 차오른다 하고
사내는 울음소리를 내며 육교 밑을 지나가는
앰블런스가 숨이 차오른다 한다
오징어대신 빨갛게 튼 손을 펼쳐
천 년 전의 얼음 같은 여자와 아이를 세워 놓고
이목구비를 뗐다 붙이곤 하는 구름
육교는 다양한 울음들이 오가며 성황을 이루었다
가끔 구름의 울음이 먼발치에서 육교를 바라보다 되돌아갔다
구름과 사내는 모르는 척, 안 아픈 척하며
서로의 지병을 다스리자는
밀약을 했다
- 2014년 <시와반시> 신인상 당선작
■ 김유미 시인
- 전남 신안 출생
- 시집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
《 심사평 》
새로운 시를 찾습니다.
절실하나 낯선 언어
낯설되 뜨거운 언어
뜨겁되 신선한 언어
시 너머의 시를 기다립니다.
<시와반시> 신인상 공모의 문구이다. 이런 문구는 기실 신인들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라 시인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시의 조건일 터이므로 신인상에 응모된 작품을 읽고 심사를 하는 일은 힘들고 어려울뿐더러 마음이 무겁다. 그런 한편 또 새로운 시인들의 등장을 기대하는 설렘 또한 쉽사리 숨겨지지 않는 것이이기도 하다. 예선을 거쳐 넘어 온 작품들은 <육교주점> 외 5인의 45편이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기존의 시가 가진 문법과 언어들에서 탈피해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새로운 언어와 어법을 갖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와반시>라는 시 전문 계간지의 제호 때문이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시도들은 그동안 <시와반시>의 신인상에 응모하는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경향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시, 라는 강박관념에 얽매인 탓인지 난삽하거나 혼란스러운 언어유희에만 치우친 작품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즉 낯설되 절실하지 않고 또 뜨겁되 낯설지 않으며 신선하되 뜨겁지 않는 시들을 만나는 일은 곤혹스럽다. 그 재기발랄한 언어들 속에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넉넉하고 날카로운 인식의 징후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물론 이는 새로운 시를 창조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고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걸 반증하는 일이기도 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상상력과 형상을 가진 작품들을 만나는 일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5인의 작품들을 오래 읽고 심사숙고한 결과 <육교주점>외 9편을 응모한 김유미씨의 작품을 집중해서 읽기도 했다. 김유미씨의 작품들에서 호감을 가졌던 건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 즉 현실인식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이 분이 가진 당대의 현실에 관한 인식과 그 인식을 나름대로 형상화하는 힘이 녹록치 않다고 생각된 때문이었다. 김유미씨가 투고한 작품들은 크게 두 개의 시각으로 나누어진다고 보았는데, <육교주점>, <골목의 효능 >,<밀고하는 사람>,같은 경우 당대의 현실에 관한 나름의 해석과 묘사였고<안부를 묻는다>,<베란다라는 가명>,<자루>등은 현대인의 일상과 개인의 내면에 관한 묘사였다. 이는 이 분의 언어과 시각이 개인의 내면에만 폐쇄적으로 갇혀있지 않고 세상과 개인이 두루 열려 소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유미씨의 작품들 속에는 구름과 나무와 바람과 빗방울이라는 전형적인 자연의 이미지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를 현대사회의 일상으로 끌어와서 부박하거나 남루한 삶의 편린들을 신선한 감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점들이 인상적이었다. 언어를 장황하게 소비하지 않고 절제하면서 시의 구조를 단단하게 구축한 점, 현실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고 있으면서도 그 현실을 비교적 자유롭게 상상하고 해석하는 조곤조존한 어조도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점이었다. 직장과 가정을 잃고 도시의 이곳저곳을 떠돌다‘육교’라는 지상에서 한 뼘 들려진 공간에서 만나는 이들을 감정과 감상에 치우치지 않는 차분한 어조로 풀어낸 <육교주점>, 아이와 대립하는 아침식탁의 엄마가 자신의 엄마를 불러내어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안부를 묻는다>, 고함과 흐느낌과 의자와 창문으로 벽을 쌓아올린 골목이라는 공간에서 이 벽들을 허물어버리는 상상을 하며 소멸과 확장에 관해 사유하는 <골목의 효능>같은 작품에서 개인과 사회를 보는 만만치 않은 안목들을 엿볼 수 있었던 점도 신뢰를 갖게 했다. 응모한 작품 10편의 수준 또한 고른 편이었고 그 시편들마다 인상적인 비유와 해석이 있었던 점도 좋았다. 선정된 시 외에도 ‘관계들은 깨물고 오므리고 감추고 펼쳐보는 손가락의 방향으로 걸려있다’, ‘자루 때문에 내 팔이 길어졌네’, ‘아이스크림 같고 불안 같고 오래 같은 세상의 모든 바람 속 계단’등의 발견들이 있는 다른 시편들은 대상의 표피를 너머 깊숙한 바닥까지 내려앉을 수 있는 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투고한 시편들이 가진 완성도가 지나치게 안정적이어서 오래 시를 수련한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거칠지만 힘 있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신인을 기다리는 <시와반시>의 바램을 충족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기우이기를 바란다. 이 분의 시에서 느껴지는 염결성, 즉 한 편 한 편의 시에서 느껴지는 삶을 진지하게 인식하고 사유하는 태도에 신뢰를 보낸다. 이런 점들이야 말로 혼탁한 세상을 견뎌내며 시를 쓰고자하는 시인이 가져야 할 최선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모처럼 만만치 않은 시적 깊이를 가진 시인 한 분을 만나게 될거라는 예감을 가져본다. 모쪼록 묵묵히 시의 길을 수행하며 큰 정진을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하며 마음으로 축하를 보내는 바이다.
- 심사위원: 김형술, 조말선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천강문학상) ■
꽃피는 칼
최정아
칼자루도 없이
칼은 새파랗다
봉안鳳眼이 조각되어 있는 칼날, 칼이 하는 일은 바람을 베는 일이지만
자투리 필요한 한 뭉치 바람이 스스로 와서 베일 때가 많다.
이 칼은 광석이 아니다. 양쪽 날을 가지고 있는 검劍의 끝은 여전히 벼려지는 중이어서 휘어져 있다. 누가 산속에 칼을 꽃아 두고 갔나. 새파랗게 녹슬면서 가끔 꽃도 피우는 그 칼을 누군들 쉽게 뽑겠는가.
칼 한 자루를 오래 감상했다
향기가 일획으로 지나간다.
정점으로 향한 떨림의 순간, 바람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고 칼은 별자리 방향을 따라 빛이 바뀐다.
칼은 스스로 시들어 칼집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간다.
칼 가는 사람도 없이 파랗게 날을 세우고 휘두르는 힘이 다 빠지면 절옆으로 휘어진다. 한 데 엉키는 칼끝을 조심해야하며 봄이면 멀리 동쪽에서 찾아오는 꽃이 있어 서리와 동풍을 빼내야 한다.
일합一合의 불꽃도 없이
꽃피운 칼
갈라지는 칼끝에서 꽃잎 떨어진다.
- 2014년 <천강문학상> 대상 수상
■ 최정아 시인
- 1950년 수원 출생
- 장안대 문에창작학과 졸업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 2009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 시집 <바람은 색깔을 운반한다>
《 심사평 》
제6회를 헤아리는 천강문학상은 국내외의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가 응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등단 여부에 관계없이 기성문인에게까지도 응모의 기회가 주어지는 상이며 멀리 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 가운데서도 수상자가 나올 만큼 범위가 넓습니다.
또한 대단히 공정하고 엄격하게 이루어지는 심사는 상의 위상을 한층 드높이고 있어 역량 있는 문인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바이기에 심사에 임하는 마음도 그만큼 긴장되었습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넘겨진 작품은 347분 총 2,538편이었습니다.
작품 모두는 작자의 기량을 한껏 발휘하고 있다고 보아졌습니다.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작품들의 산문화였습니다. 이것이 요즈음 우리 문단의 일반적인 경향인 듯도 합니다.
시에는 산문시라는 갈래가 있습니다만 산문시가 산문과 구별되는 것은 그만큼 응축된 시정신과 간곡한 전언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는 미흡한 산만성이 엿보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모든 작품들에 유사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명과 기타 신분을 모르는 상황에서 작품을 심사하는데 주제나 소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작품들 나름의 특성을 찾기가 어려웠으며 동일 작자의 작품이라 하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천강의 충절과 의로운 정신이 반영되고 내포된 작품들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문학상의 특별한 성격을 헤아릴 때 그분의 삶과 행적에 대한 관심과 기림은 우선되는 내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심사에 임할 때 심사위원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기준 삼았습니다.
첫째, 소통성 유무였습니다.
시가 가지는 필연적인 모호성과 난해성 이외의 이해불능, 불통의 시여서는 독자가 수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를 쓴다는 의의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둘째, 앞서도 지적한바 얼마나 개성적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각자의 얼굴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듯이 시도 작자에 따르는 각각의 자기 얼굴과 자기 목소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참신성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로 쓰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를 썼겠습니까. 그러나 시가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늘 새로웠기 때문입니다. 창작의 기본이 새로움인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넷째, 응모한 여러 편의 작품들이 균등한 수준을 이루고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작가의 기량을 가늠할 수 있게끔 여러 편의 작품들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살폈습니다.
다섯째,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뜨거운 감정이라 할지라도 시로 형상화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생경한 시의 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시로 형상화 되어 감동을 이끌어낼 때 비로소 그 작품을 우리는“시”라고 부르게 됩니다. 특별히 천강문학상의 취지와 정신을 생각할 때 감동적인 내용이 형식과 잘 조화를 이루었나를 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대략 이런 기준을 염두에 두고 본심에 임하였습니다.
여러 번의 숙독과 심의를 거쳐 최정아씨 (<꽃피는 칼> 외)를 대상 수상자로, 김대성씨 (<버드나무 활극> 외)와 정진혁씨(<녹이 슬었다> 외)를 우수상 수상자로 뽑았습니다.
최정아씨의 작품들은 여러 편의 작품들이 고른 수준이었으며 <꽃 피는 칼>에서 보여주는 비약적인 은유와 상상력, 식물이미지와 광물이미지의 결속 등을 높이 살만 합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은 항용 꽃이 중심이 되는 것이지만 잎이 주인이 되는 변용의 묘, 충돌하면서 합일하는 비유의 심안은 만만찮은 기량을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굽힘 없는 생명의지, 그리고 생명의 순환 과정을 그린 사색의 깊이도 간과할 수 없는 점이었습니다.
김대성씨의 작품 <버드나무 활극>은 감각적인 묘사가 수용자의 시각과 청각과 촉각 등을 모두 동원하게 합니다. 무생물들이 생명을 얻고 힘차게 움직이는 역동성은 제목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한 편의 활극입니다. <버드나무 수목장>이나 <묵밥>은 죽음과 이별이 제재이지만 슬픔을 극복하는 의지가 긍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슬픔의 승화가 주는 정화의 세계가 독자를 이끕니다. 그러나 좀 더 정연한 정리가 되었으면 하는 점과 더불어 감동의 깊이가 의도만큼 이루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정진혁씨의 <녹이 슬었다> <오이지> <목련이 페이지를 열었다>들에서 읽게 되는 목숨의 유한성은 운명이라는 말을 일깨웁니다. 그중에도 <오이지>의 선명한 비유는 공감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시가 마땅히 지녀야 할 긴장감이 부족한 것은 이 글의 지나친 산문성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하면서도 주제를 흩트리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 간 저력에 주목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김인숙씨의 <자주달개비의 문>과 김인후씨의 <윤도> 등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더욱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입상하신 여러분께 축하를 드리며 문운이 더욱 빛나기를 빕니다.
- 심사위원: 문인수, 허영자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작가세계) ■
구석들 1
최윤정
벽돌이 되지
구석이 모여
지붕이 되고
담벼락이 되지
물길 건너가다
죽은 새들이 되기도
물들어가곤 하지
회색에서 붉은색으로
*
구석은 구름처럼 생각이 많고
죽은 새의 뼈를 불면 무슨 소리가 날까
불붙지 못한 구석들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곰팡이꽃이 눈처럼 쏟아진다
*
죽은 새의 환영이 창틀마다 끼여있다
놓칠 것도 던질 것도 없는 계절
물방울들 무겁게 떠 있고
걸음 멈춘 창틀이 간간이 늑골을 삐걱인다
꿈틀거리며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구석마다 몰려 있던 구름들
등 곧추세우고
햇살에 흩어지는 먼지 사이
바람의 혈관이 붉게 부풀어 오른다
안부를 묻고 멀어지는 구름의 발자국처럼
*
여긴 여전히 빙벽
춥고 미끄럽다
다리가 퉁퉁 부은 바람은
무릎에 손을 짚고 참았던 숨 몰아쉰다
각각의 빙벽은 춥지만
둥글게 모이면 따뜻하지
손가락을 오므린다
무얼 담지?
-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 최윤정 시인
- 1969년 대구 출생
- 영남대 수학교육과 졸업
《 심사평 》
150편이 넘는 응모작 중 예심 과정을 거쳐 심강우, 안은숙, 이유천, 최윤정, 한율 등 다섯 사람의 작품을 고른 후 다시 집중적인 검토를 하여 최종적으로 두 사람의 작품으로 압축을 하였다. 안은숙과 최윤정의 작품을 놓고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였다. 두 사람의 작품이 모두 뛰어난 감성과 노련한 기량을 내장하고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지만, 한 사람을 당선시킨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안은숙의 작품은 내용이 다양하고 상상력의 폭도 넓었다. 물의 심상에서 뼈와 종이 같은 광물 이미지까지 다채로운 감각이 시상을 드러내는 방향에 맞추어 적절히 안배된 점이라든가, 점력, 전도, 경추, 흉담 등 한자어를 적절히 활용하여 의미의 밀도를 높이려 한 점 등은 오랜 습작의 내공을 충분히 모여주었다. 자신의 생활 체험을 밀도 있는 언어로 재구성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런데 어느 지점은 모호하거나 관념적인 언술이 보였고 생의 단면을 가볍게 스케치하는 관조적 성향이 드러나기도 했다. 세상의 외관을 충실히 관찰하기는 하지만 생의 문제를 안고 고민한 자취가 드러나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쉬웠다.
최윤정의 시는 어떤 경우 다소 서술적인 문맥이 보이기는 하지만, 생의 내벽과 부딪친 자아의 상처가 있고, 탈출과 돌진의 시도가 무위로 끝난 다음 갖게 되는 침묵의 망설임이 있고, 시간의 흐름 속에 삶 전체를 통찰하려는 구도적 진정성이 있다. 그리고 많은 후보작들이 그렇게 떨쳐버리려 애를 쓴 서정성을 시의 윤기로 활용하는 내면의 저력이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점에서 최윤정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아쉽게 탈락한 후보자들에게 더 좋은 기회가 열리기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황학주, 이숭원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문학동네) ■
도그빌
구현우
꿈에서 주운 개를 꿈 밖에서 키운다. 내가 먹는 밥을 먹인다. 내가 아는 곳으로 데려간다.
발코니로 간 나의 개는 밑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태연히 빨아들인다.
그게 발코니의 냄새인 줄 안다.
한강으로 간 나의 개는 낯선 두 아이가 공 하나로 웃고 우는 장면을 지켜본다.
그게 가족인 줄 안다.
세탁소로 간 나의 개는 모피코트를 벗어놓고 나온 여자를 따라간다.
그게 마음인 줄 안다.
현관 앞에 멈춘
나의 개는
문을 열어두어도 안에서 불러봐도 꼼짝없이 앉아 있다.
주인과
타인이
그게 그건 줄 안다.
언제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나는
나의 개가 있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린다.
이전인지 이후인지 모르겠지만
꿈에서 만난 개를 꿈에서 방치한다. 오줌을 뿌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아직 뜻이 없는 낱말처럼 들린다.
꿈 밖에서 나는 혼자 이인분의 요리를 먹는다.
익숙하고도 익숙해지지 않는 도시를 걷다가
나의 개를 닮은 개와
나의 개를 하나도 안 닮은 개와
개도 아닌데 개로 불리는 남녀노소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본다.
도시는 한꺼번에 어두워지고
내가 없는데 내 방에 불이 들어온다.
- 2014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구현우 시인
- 1989년 서울 출생
-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 시집 <나의 9월은 너의 3월>
《 심사평 》
시는 무언의 발화점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디론가 번져나가는 말의 무늬, 차원을 가늠할 수 없는 말의 건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건축물을 완성하고 나면 발화점은 단지 하나의 흰 점, 하나의 침묵으로 존재할 뿐, 그것을 알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간혹 시인에게 이 시의 영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하고 묻게 된다. 한 편의 시의 영감은 한 편의 시의 타자이다. 시인은 그 타자를 품고 질문하고 답하려 하고 울고 웃으며 감각과 행위의 집을 짓는다. 그렇기에 시의 영감은 시라는 한 편의 세계 가운데 시의 말들이 품고 도는 소용돌이의 텅 빈 중심이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읽고 난 뒤에 발화의 근원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렇지만 기호학적 분석이 아니더라도 한 편의 시의 형식을 더듬는 과정 속에서, 그 진행의 말과 이미지들의 축조 속에서 시의 발화점이 어렴풋하게나라마로 짐작되는 경우도 많다. 신인상을 심사하면서 불 꺼진 뒤의 소방관처럼 발화점을 발견하려 애써보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라도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아니면 정서적으로라도 지금 이 시간의 우리가 숨쉬는 이곳이라는 발화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예심을 진행할 때도 그랬고, 본심을 진행할 때도 그랬다. 시들이 뿌리 없는 무늬만의 세계를 세공하는 느낌, 기존의 비교적 젊은, 평단의 관심을 끄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작법을 답습하는 느낌이 농후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말해보아도 한 사람의 시인은 하나의 각별한 시선의 발명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는데 그 시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엔 시에 구축된 세계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다
구현우 씨의 도그빌 외 네 편은 시차적 관점을 품은 시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각 시들의 화자는 자신들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달리 보이는 대상을 먼저 탐구한다. 동일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시적 주체가 어디에 대상을 두느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현상을 문제삼는 시인의 태도를 반영한다. 이것은 다시 시인이 꿈속과 꿈 밖이라는 공간에 개를 둠으로써 두 장소의 차이를 드러내려 한 것을 넘어서서 그 공간들의 간극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나아간다. 실재와 이미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을 넘어서서 실재에도 이미지에도 실체를 실체답게 하는 데 부족한 무엇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그 둘의 간극에서 오히려 둘을 다 품거나 둘 다 품지 않은 실체, 어쩌면 사라짐이라는 현상을 껴안고 하나가 아닌 둘이 된 시적 주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 문장에 가면 대상이 아닌 시적 주체마저 위치 이동되는 자리가 마련된다. 다른 응모작들에서도 이런 시선은 그대로 유지되는데 환상과 현실, 연속과 단속, 시차의 늪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우화 가족이 되는 것과 가족이 되지 않는 것 그림자와 목격자 사람과 동물과 인간의 경계의 분리도 표면을 뒤집어 이면을 표면과 이면의 간극을 보려는 시인의 의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 간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봄으로써 첫 번째 봄을 넘어서서 하나이면서 둘인 시적 주체를 반성하는 자리 그에 따른 비애가 있다 또한 대립되는 언어들을 반복 사용해 착각을 유도함으로써 시를 시적 변증법 안에 위치시키려는 시 장르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두 편은 질문이 시적 형상화보다 선행하는 느낌이 있었고, 설명적이고 구체화되지 않은 서걱거리는 표현들이 있었다. 비교적 단순하지만 자신만의 방법적 성찰과 시적 장소를 발견하려 한 도그빌 외 네 편을 당선작으로 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간결함이 과해서 생긴 부작용이 아닌가 싶다. 간결해지면서 오히려 풍부해져야 한다. 그런데 간결해지면서 부족해지고 있었다. 중요한 말과 중요하지 않은 말을 적절하게 섞어 쓰면서 시에 바람이 잘 통하게 만든 다른 작품들이 더 재미있다. 어색한 문장들이 이 응모자의 음악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시 전체는 오리무중일 수 있어도 문장 각각은 정확해야 한다. 쓴 사람의 의도를 초과해서 탄생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역동적인 이미지와 서사가 천진함과 과감함을 오가는 목소리에 실려 전달된다. 그런데 이 역동성은 완결성과는 배치되는 미덕일까. 구조에 대한 배려가 좀더 치밀했으면 어땠을까. 당선작이 당선작인 이유는 그 단점이 다른 응모자의 단점들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장점이 다른 응모자의 장점들보다 강해서다. 그러니 당선작에 대해서만큼은 장점을 말하자. 그것은 서사적 논리성이라 명명해보면 어떨까. 시를 두고 서사와 논리 운운했으니 두 번 실수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시에도 자주 서사가 담기는데 서사가 있다면 논리도 있어야 한다. 시가 논리적이라는 말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해석된다는 뜻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을 받아낼 구조가 튼튼히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열쇠가 딸깍 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세 편을 각각 자기소외, 미련, 고독에 대한 서사로 해석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이런 열쇠 구멍은 우연한 영감의 산물이 아니라 성실한 수련의 결과일 것이다. 당선은 그 결과의 결과다.
구 씨의 응모작은 관찰력, 구성력, 사유의 깊이와 유연함, 문장력 등 두루 신뢰할 만했다. 도시생활자 즉 현대인의 자기정체성이 교란되는 장면을 건조한 그래서 진정성이 더 살아나는 문체로 살려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환기가 사치처럼 여겨지는 시절에 나와 도시생활자 일반을 개라는 진부한 이미지와 연결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도그빌에서 개라는 메타포가 일으키는 공명의 크기는 작지 않다. 겨울 산장에 갇힌 실종자들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본능 이상의 것도 흡입력이 있었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이야기 솜씨가 보기 좋았다. 제인 제이콥스, 앙리 르페브르, 데이비드 하비, 에드워드 렐프 등 현대 도시문제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한 학자들의 책을 권유하고 싶다.
(탈락자들에게)
굳이 첨언한다면 상상력의 스케일이 보다 확대되었으면 한다. 자신감을 가지고 수렴-구심력에서 확산-원심력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시길. 마무리를 짓지 않은 것 같고 애매모호했으며 밀고 나아가다 만 느낌이 들고 이미지가 명료하되 의미가 희박했다. 응모작의 완성도가 들쭉날쭉해 보였다는 것이다. 주제와 대상에 대해 깊이 있게 천착하는 자세를 갖춘다면 습작기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읽는 재미를 넘어서는 의미를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시 대상을 떠올릴 수 없는 지시어로 이루어지는 시가 가능할 것이다. 현실의 반영이나 재현을 거부하는 시, 하지만 한계는 있다. 시의 주체와 대상 행위 등을 지나치게 자의식적으로 연결시킨 나머지 시가 혼란스러운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시기 바란다. 압축 생략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시길 나열 병치하지 말고 하나의 중심에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해 보인다.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와소금) ■
물푸레나무 그늘
심상숙
오색딱따구리 새끼가 첫 비행을 한다
어미 새가 나무주위를 빙빙 돌며 날개를 대차게 친다
발달장애로 키가 너무 큰 아들은 영문 모르는 새소리를 내며 아버지를 따른다
키 한 벌 눕힐만한 너울거리는 간격,
아버지 발에 아들의 그림자가 허드레로 출렁인다
연못에는 노란붓꽃이
앞서 핀 꽃을 따라 다투어 피어난다
물푸레나무 그늘 아래
두 팔을 젓는 아버지와 아들
통나무벤치를 사이에 둔 채 서로 마주보며
허리를 돌리며 고개를 젖히며 몸을 열고 있다
꿀꺽꿀꺽 물푸레 그늘을 삼키는 소리 들린다
뒤로 고개 젖힌 아들의 벌어진 입속에 초록이 환히 차오른다
후두둑
소나기 쏟아진다
커다란 물푸레나무 아래 고등어 한 손처럼
더 크고 실한 아들이 조그만 아버지를 덥석 품는다
- 2014년 <시와소금> 신인상 당선작
■ 심상숙 시인
- 1949년 충북 괴산 출생
- 단국대 교육대학원 졸업.
- 서울교육대 교육대학원 졸업
- 서울시 초등교원 퇴직
- 2014년 <시와소금> 신인상
- 2018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심사평 》
* 묘사와 진술, 소통을 위한 첫걸음
올 상반기 본지 신인문학상 공모에는 많은 분이 작품을 보내주셨다. 그만큼 오늘을 살아내는 일의 고달픔과 그것을 견뎌내는 한 방법으로 시를 짓고 그 열정으로 응모했으리라 여겨진다. 멀리 캐나다에서부터 열다섯 소년까지 지역이나 연령층에 구애 없이 정말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이는 본지 신인문학상에 대한 권위와 함께 앞으로의 기대를 가늠하게 했다.
많은 작품 가운데서 심사기준으로 삼은 것이 시의 기본을 제대로 갖추고 있느냐와 시의 소통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최종심 작품을 선별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시린의 「압해상회」 외 7편, 김풀의 「비둘기에 관한 가벼운 시선」 외 9편, 강정아의「사막에서는」 외 4편, 심상숙의 「물푸레나무 그늘」 외 4편, 남연우의 「자전거 타는 여자」 외 29편, 최광리의 「명태에 대한 명상」 외 4편, 이순선의 「조식」 외 9편 등 일곱 분의 작품 72편이었다.
선자들은 오늘의 시대에 걸맞는 신인으로서의 패기와 활달한 언어구사, 주제의 확산, 낯선 세계를 기대하였으나 대부분작품들이 서정을 노래하고는 있으나 너무 낡은 그릇에 담겨있거나, 혹은 알 수 없는 장황한 진술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뚜렷하지 않는 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못내 아쉬웠다.
몇 번이고 심사자들이 돌려가며 최종으로 추려낸 것이 「압해상회」 외 7편, 「비둘기에 관한 가벼운 시선」 외 9편, 「물푸레나무 그늘」 외 4편, 「자전거 타는 여자」 외 29편이었다.
이 중, 「압해상회」 외 7편을 응모한 분은 세련된 진술과 적확한 언어를 구사하고는 있으나 응모한 작품이 대부분 소품이고 이미지를 통한 시의 형상화가 조금 부족하다는 점이, 「자전거 타는 여자」 외 29편을 많은 시편을 응모한 분은 시의 구조와 진술은 어느 정도 성공하고는 있어서 새로운 서정시의 지평을 열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당선의 반열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 김풀, 심상숙 두 분을 놓고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에 고민하게 되었다. 두 분 모두 일장일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물푸레나무 그늘」 외 4편을 응모한 심상숙은 나이에 비해 시가 무척이나 싱싱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주제가 미약하다는 점이, 「비둘기에 관한 가벼운 시선」 외 9편을 응모한 김풀은 시의 여백과 주제가 선명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진술 일변도여서 시의 격조가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선자들은 어느 한 분만을 낙선시키기도 어려웠다. 그러면서 당선이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또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보완한다면 제 나름의 시를 쓸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두 분을 당선시키기로 하였다. 이제부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한국시단에 큰 별이 되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이영춘, 임동윤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와소금) ■
비둘기에 관한 가벼운 시선
김풀
나는 그를 눈여겨보았다
자기 영혼을 위안하려
한 발짝마다 붉은 발등에 머리를 조아려
스스로 축복해야 했는지
겨울 광장을 쪼아 둥그렇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빵을 뜯어 던져주며 보내는 오후
중심을 벗어난 나를 중심으로
절반의 균형을 팽팽히 잡아 주는 그가
평범한 새가 아닌 것을 나는 믿는다
그를 눈여겨보는 일이란
세상의 가장자리를 돌며
시간의 부스러기를 쪼아 먹어야 했던
내게 스스로 위안을 주는 일이다
더 이상 던져줄 빵 조각이 없자
그는 어디론가 날아갔다
광장의 절반이 가벼워졌으나 곧 어두워졌다
가로등 불빛 파닥이는 작은 원 안에서
팽창을 잃은 찌그러진 내 안에서
나는 그를 다시 기다린다
- 2014년 <시와소금> 신인상 당선작
■ 김풀 시인
- 서울 출생
-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심사평 》
* 묘사와 진술, 소통을 위한 첫걸음
올 상반기 본지 신인문학상 공모에는 많은 분이 작품을 보내주셨다. 그만큼 오늘을 살아내는 일의 고달픔과 그것을 견뎌내는 한 방법으로 시를 짓고 그 열정으로 응모했으리라 여겨진다. 멀리 캐나다에서부터 열다섯 소년까지 지역이나 연령층에 구애 없이 정말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이는 본지 신인문학상에 대한 권위와 함께 앞으로의 기대를 가늠하게 했다.
많은 작품 가운데서 심사기준으로 삼은 것이 시의 기본을 제대로 갖추고 있느냐와 시의 소통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최종심 작품을 선별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시린의 「압해상회」 외 7편, 김풀의 「비둘기에 관한 가벼운 시선」 외 9편, 강정아의「사막에서는」 외 4편, 심상숙의 「물푸레나무 그늘」 외 4편, 남연우의 「자전거 타는 여자」 외 29편, 최광리의 「명태에 대한 명상」 외 4편, 이순선의 「조식」 외 9편 등 일곱 분의 작품 72편이었다.
선자들은 오늘의 시대에 걸맞는 신인으로서의 패기와 활달한 언어구사, 주제의 확산, 낯선 세계를 기대하였으나 대부분작품들이 서정을 노래하고는 있으나 너무 낡은 그릇에 담겨있거나, 혹은 알 수 없는 장황한 진술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뚜렷하지 않는 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못내 아쉬웠다.
몇 번이고 심사자들이 돌려가며 최종으로 추려낸 것이 「압해상회」 외 7편, 「비둘기에 관한 가벼운 시선」 외 9편, 「물푸레나무 그늘」 외 4편, 「자전거 타는 여자」 외 29편이었다.
이 중, 「압해상회」 외 7편을 응모한 분은 세련된 진술과 적확한 언어를 구사하고는 있으나 응모한 작품이 대부분 소품이고 이미지를 통한 시의 형상화가 조금 부족하다는 점이, 「자전거 타는 여자」 외 29편을 많은 시편을 응모한 분은 시의 구조와 진술은 어느 정도 성공하고는 있어서 새로운 서정시의 지평을 열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당선의 반열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 김풀, 심상숙 두 분을 놓고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에 고민하게 되었다. 두 분 모두 일장일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물푸레나무 그늘」 외 4편을 응모한 심상숙은 나이에 비해 시가 무척이나 싱싱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주제가 미약하다는 점이, 「비둘기에 관한 가벼운 시선」 외 9편을 응모한 김풀은 시의 여백과 주제가 선명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진술 일변도여서 시의 격조가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선자들은 어느 한 분만을 낙선시키기도 어려웠다. 그러면서 당선이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또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보완한다면 제 나름의 시를 쓸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두 분을 당선시키기로 하였다. 이제부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한국시단에 큰 별이 되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이영춘, 임동윤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인수첩) ■
십이월
조미희
산동네를 잘라 색종이를 만들었다
가장 화려한 십이월의 누더기가 천장에서 달이 되어 흔들렸다
세 개의 계절은 늘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겨울에서 오래도록 연체되었다
숫자들의 악랄한 소진 법,
챙긴 것들이 없다고
앙상한 숲의 간격들을 내보이지만
겨울은 챙기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계절
잡목 숲은 오감을 잃은
나목들이 피부로만 숨을 쉬었다
십이월은 나무들만 추운 게 아니다
입김의 계절은 아주 조금씩 무너지지만
영하의 빗방울은 헐벗은 고드름을 선물했다
그것은 투명하다
속이 비어 있는 것처럼
푹신한 눈이 겨울에는 맞다
숲이 버리고 간 목소리를 주워 밤이면 바람의 흉내를 냈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이 흐느꼈다
함께 흐느낀다는 건 따뜻한 이불 같다
목도리가 알알이 빛나고 있다
일에서 십이까지의 숫자들을 꽁꽁 묶고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겨울까지 돈 벌러 온
계절 직종의 위장술
주머니는 다 어디 갔는지
아무리 뒤져도 일밖에 없는 계절이다
공기는 수요와 공급처럼 약삭빠르게 자리를 바꾼다
최저 임금 상승만큼 살짝 올라가는
1월의 기온을 기다린다
- 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 조미희 시인
- 서울 출생
- 시집 <자칭씨의 오지 입문기>
《 심사평 》
* 새로 발음하고 새로 뜻을 새기며
- 심사위원: 문혜원, 최현식, 김병호
《시인수첩》은 시인들이 문예지별로 무리를 짓고 벽을 세우는 것을 경계하며, 오로지 다양한 개성을 지닌 시인들에게 폭넓은 발표 지면을 제공하는 것을 잡지의 역할이라 여기고 있다. 더불어 《시인수첩》이 시 전문 계간지로서 무엇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몫과 사명은, 개성적 미학과 참신한 가능성을 갖춘 능력 있는 신인을 발굴, 육성하여 우리 시문학의 뿌리를 튼실히 하고 그 열매를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고 믿고 있다.
종합 문예지였던 《문학수첩》부터 시 전문 계간지로 새롭게 출발한 《시인수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소설가로는 이장욱, 조정현, 윤성호, 남한, 서유미, 주영선 등이 있으며, 시인으로는 신혜정, 안승범, 이진희, 이병일, 황수아, 박소란, 배수연, 오성인, 석미화, 이병철, 평론가는 강정구, 정주아 등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우리 문학사의 한 자리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제 몫을 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안목과 역할에 대한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절감한다.
지난해에 비해 올해는 응모자 수가 다소 줄었다. 사회·정치적으로 숨 가쁘게 보낸 한 해였기 때문에 격변의 이슈들 사이에서 시의 자리가 위축되었다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여전히 시가 우리 시대의 위로가 되고 깃발이 되고, 나침반이 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응모자 수는 줄었으나 응모작의 질적 밀도나 수준이 예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음이 이에 대한 방증이 될 수 있겠다.
본심에 오른 이들은 김재희, 김태우, 신윤서, 신희진, 이교전, 조미희, 조긍, 한형석, 한휼 등 아홉 명이었고, 심사의 최종심에서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치열한 각축을 벌인 것은 김재희, 한휼 씨의 작품들이었다.
먼저 김재희 씨의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사물을 바라보는 예각의 시선과 그것을 안정적인 문장으로 잘 다듬어내는 솜씨에 동의를 모았다. 그러나 시 전반의 사유들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과연 시인이 이러한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한휼 씨의 경우, 거침없이 뻗어가는 사고와 문장이 돋보였다. 그러나 안에 담긴 서사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국한되어 있고, 그 내용도 통속적이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비유와 묘사는 상식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응모한 몇몇 작품은 빼어난 수준이었으나 함께 응모한 작품을 전체적으로 볼 때 당선자로 선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직 《시인수첩》에서는 평론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심사까지 몇몇의 응모자가 있긴 하였으나 심사위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우리의 시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우수한 작품뿐만이 아니라 이를 텍스트 삼아 연구하고 비평하며 시의 가치를 부여하는 평론가의 몫이다. 이에 《시인수첩》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역량 있는 신인 평론가를 기다리며, 적극 지원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다음 기회에는 예비 평론가들의 더 많은 응원과 도전을 기대한다.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된 두 시인에게 격려와 축하의 말을 전한다. 지금의 작은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 발음하고 새로 뜻을 새겨 오로지 자신만의 시를 세워나가길 응원한다.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인수첩) ■
딱지왕
김태우
놀이터를 내주고 골목대장 칭호를 얻었다 동네 개미들이 신발 바닥으로 모였다 운동화 구멍에 발톱이 걸렸다 발가락이 개미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발톱을 구하려 아이들이 개미를 밟았다 엄지발가락을 덮은 하늘이 붉었다
손에 든 딱지로 아이들을 물리쳤다 놀이터 모래가 흐늘거렸고, 마을 어귀에 부딪힌 비명은 방향을 잊었다 개미 무리를 밟고, 아이들을 뒤쫓는 목소리가 다가왔다 굵은 표정이 딱지를 뒤집었다 골목대장 호칭이 그네를 타고 하늘로 흩어졌다 젖은 운동화만 주인을 찾았다
아이들이 두꺼운 목소리로 딱지를 접었다 딱지왕은 옷장에 걸린 빨간 종이를 접었다 애송이가 개미를 넘겼다 빨간딱지가 뒤집은 어린비명이 놀이터와 멀어졌다 거친 그림자가 빨간딱지를 찢었다 신발에 붙은 개미가 사라졌다
빨간딱지가 앉은 장독대가 사라졌다 아이들 입에서 골목대장도 실종됐다 개미만 운동화 구멍에서 발견됐다 아이들이 놀이터를 멀리했다 빨간딱지는 홀로 떨었다 빨간딱지로 가득 한 운동화 주인집이 낯선 애송이의 놀이터가 됐다 더 이상 빨간딱지 주인은 딱지왕이 아니었다
- 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 심사평 》
* 새로 발음하고 새로 뜻을 새기며
- 심사위원: 문혜원, 최현식, 김병호
《시인수첩》은 시인들이 문예지별로 무리를 짓고 벽을 세우는 것을 경계하며, 오로지 다양한 개성을 지닌 시인들에게 폭넓은 발표 지면을 제공하는 것을 잡지의 역할이라 여기고 있다. 더불어 《시인수첩》이 시 전문 계간지로서 무엇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몫과 사명은, 개성적 미학과 참신한 가능성을 갖춘 능력 있는 신인을 발굴, 육성하여 우리 시문학의 뿌리를 튼실히 하고 그 열매를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고 믿고 있다.
종합 문예지였던 《문학수첩》부터 시 전문 계간지로 새롭게 출발한 《시인수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소설가로는 이장욱, 조정현, 윤성호, 남한, 서유미, 주영선 등이 있으며, 시인으로는 신혜정, 안승범, 이진희, 이병일, 황수아, 박소란, 배수연, 오성인, 석미화, 이병철, 평론가는 강정구, 정주아 등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우리 문학사의 한 자리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제 몫을 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안목과 역할에 대한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절감한다.
지난해에 비해 올해는 응모자 수가 다소 줄었다. 사회·정치적으로 숨 가쁘게 보낸 한 해였기 때문에 격변의 이슈들 사이에서 시의 자리가 위축되었다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여전히 시가 우리 시대의 위로가 되고 깃발이 되고, 나침반이 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응모자 수는 줄었으나 응모작의 질적 밀도나 수준이 예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음이 이에 대한 방증이 될 수 있겠다.
본심에 오른 이들은 김재희, 김태우, 신윤서, 신희진, 이교전, 조미희, 조긍, 한형석, 한휼 등 아홉 명이었고, 심사의 최종심에서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치열한 각축을 벌인 것은 김재희, 한휼 씨의 작품들이었다.
먼저 김재희 씨의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사물을 바라보는 예각의 시선과 그것을 안정적인 문장으로 잘 다듬어내는 솜씨에 동의를 모았다. 그러나 시 전반의 사유들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과연 시인이 이러한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한휼 씨의 경우, 거침없이 뻗어가는 사고와 문장이 돋보였다. 그러나 안에 담긴 서사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국한되어 있고, 그 내용도 통속적이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비유와 묘사는 상식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응모한 몇몇 작품은 빼어난 수준이었으나 함께 응모한 작품을 전체적으로 볼 때 당선자로 선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직 《시인수첩》에서는 평론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심사까지 몇몇의 응모자가 있긴 하였으나 심사위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우리의 시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우수한 작품뿐만이 아니라 이를 텍스트 삼아 연구하고 비평하며 시의 가치를 부여하는 평론가의 몫이다. 이에 《시인수첩》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역량 있는 신인 평론가를 기다리며, 적극 지원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다음 기회에는 예비 평론가들의 더 많은 응원과 도전을 기대한다.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된 두 시인에게 격려와 축하의 말을 전한다. 지금의 작은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 발음하고 새로 뜻을 새겨 오로지 자신만의 시를 세워나가길 응원한다.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작) ■
마른 잠
최 원
천년 묵은 뱀은 팔다리가 생기고 귀가 자라고
사람처럼 말도 한다는데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목줄기에 차곡차곡 빛이 쌓인다
한 손에 잡고 있는 푸른 술병
항온동물로서 여름 햇살을 온전히 받으며
생의 일부가 삭제되는 중이다
뱀은 밟는 것이 아니다
뱀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뱀은 발을 구르고 주문을 외우며 몰아내야 하는
멸시의 동물이 아니다
뱀은 그냥 뱀이어서 살다 보면 돌돌 말릴 일도 있으므로
머리와 꼬리가 맞닿은 잠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잠의 머리맡에서
한낮이 발효되는 것이다
한때 우리에게는 궁극이라 불리는
아름답게 독기 서린 꼬리가 있었고
태양의 밀어를 해석하는 귀가 있었고
나무의 그림자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부드럽게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늙은 유두 같은 꼬리를 물고
꾸는 꿈은 무르다
쉽게 부스러지는 꿈의 밖에서
오후의 느린 햇살이 어깨를 누른다
누구에게나 일몰이 올 것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인파 속으로 흘러드는 그의 뒤에서
하루가 짧은 얼굴을 풀어 놓는다
- 2015년 <시작> 신인상 당선작
■ 최원 시인
- 1974년 충남 안면도 출생
- 서일대 문예창작과 졸업
- 시집 <미영이> 외
《 심사평 》
이번 2015년도 제13회 시작신인상 시 부문에 응모한 신인들과 시편들은 모두 140명, 990편이었다. 투고된 몇몇 시편들은 한국시의 변화된 지형과 예술적 짜임을 다시금 절감케 하는 흐뭇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응모작들은 기실 단 한 편만으로도 자격 미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만큼 투박하고 조악한 수준을 보여 주었다. 우리 심사 위원들은 990편의 작품들을 서로 돌려 읽으면서, 당선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인 토론을 벌여야 할 응모작들을 어렵지 않게 선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집중적으로 토론을 벌인 신인들은 다섯 명이었고, 몇 차례의 재독 과정을 통해 두 신인의 당선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임희정의 응모작들은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이미지 조각술이 눈길을 끌었다. 일종의 알레고리적 이야기 구조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법의 차원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일상적 차원의 개연성을 멀찌감치 벗어나, 귀기와 전율스런 육체의 이미지들을 예술적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 미학적 용기의 차원에서도 후한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저 세련된 이미지 조각술과 미학적 용기를 감싸 쥘 수 있는 그만의 예술적 사유와 일관성의 구도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심사 위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김미소의 응모작들은 이국적이고 독특한 소재 활용이 돋보였다. 인도 등지의 힌두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제식을 소재로 삼은 「목을 펴는 사람」이라든지, 디지털 문화에 따른 전자 쓰레기를 제제로 삼아 현대 문명 비판을 시도한 <쓰레기 섬 창조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또한 육체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감각의 구체적 질감과 기억의 문제를 결부시킨 <길 위에서>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시작의 고뇌를 알레고리 구조를 활용하여 형상화한 <지면 없는 추락>이나 인간의 죽음의 과정을 추적한 <영정 앞에서> 같은 작품들은 이 신인의 시작법과 전체적인 시풍이 자연스럽게 엇물리지 않는 문제점을 노출시켰고, 언어의 숙련도와 예술적 세공술의 차원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불균형한 모습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또한 제 기술적 장점들을 온전히 자신의 예술적 프레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유의 깊이와 구성력의 차원에서 적지 않은 약점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시편들 전체를 마치 숨결처럼 제 몸에 들러붙게 만들 수 있는 예술적 직관력과 구성력의 확보를 주문하고 싶다.
박민서의 응모작들은 이른바 몸의 세계를 제 예술적 상상력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편들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장점들을 고스란히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끈적거리는 질감으로 휘감겨 오는 점액질의 상상력을 형상화하는 이미지 조각술이나, 비유법의 정통적인 기술과 방법론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숙련도의 차원에서 후한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응모한 몇몇 작품들은 조악한 수준의 발상과 사유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이후 보다 많은 예술적 연마의 과정이 요청된다는 것이 심사 위원들의 공통된 의견과 시각이었다. 단편적인 시적 기법과 부분적인 세공술의 숙련도를 넘어서, 한 편의 시 작품 전체를 일관된 예술적 짜임새로 갈무리할 수 있는 구성력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곧 각각의 시편들과 그것들 사이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시어의 음영과 예술적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안목과 상상력과 구성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차성환의 응모작들은 우리 일상의 세부를 밀착 인화할 수 있는 섬세한 관찰력의 차원에서 심사 위원들 대다수를 충족시켰다고 하겠다. 특히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의 세부들을 집요하게 소묘하면서 그 뒷면의 침묵의 공간에서 어떤 감성의 음영을 소리 없이 환기시킬 수 있는 기술적 숙련도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물론 응모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예술적 세공의 완성도와 마름질의 밀도의 차원에서 의심스런 부분을 노출시켰기에, 당선 여부를 두고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집중적인 토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심사 위원들은 저 관찰력의 집요함과 언어들 사이로 휘감긴 끈덕진 질감의 내면성을 신뢰하기로 했고, 결국 당선자의 한 사람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보다 빼어난 시편들을 지속적으로 산출해 낼 수 있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최원의 시편들은 오랜 시적 수련을 거친 자만이 빚어낼 수 있는 정제된 언어의 밀도 높은 짜임새와 더불어, 상이한 여러 소재들을 제 몸의 리듬감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예술적 일관성의 구도를 충실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심사 위원들 모두에게서 공통된 호평이 이어졌다. 특히 응모작들 모두가 빠짐없이 고른 수준과 예술적 세공의 밀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당선을 염두에 둔 토의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일상의 차원에서 매번 벌어지는 착시와 오인과 왜곡의 현상들을 진득하게 가라앉은 낮은 음색으로 소묘한 <앵두나무 맞은편>이나, 일상 세계의 소소한 인연들이 시간의 깊이를 가로지르며 일구어 내는 저 운명과 우연의 현란한 엇갈림을 밀착 인화의 기법으로 그려 낸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는 이 신인의 만만찮은 재능과 수련의 과정을 충실하게 예증해 준다. 또한 우리 삶 곳곳에 깃든 저 황폐한 진실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잔인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모두 어렵지 않게 만장일치로 당선을 결정했다.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한다. 한국시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대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김춘식 유성호 이형권 홍용희 이현승 임지연 이찬
■ 역대문예지신인상당선작(시작) ■
붉은 방
차성환
트럭에 실린 토마토가 가파른 비탈을 오른다
개들은 혓바닥을 토해 내며 뒤를 쫓고
트로트에 맞춰 들썩이는 토마토
토마토가 왔어요 맛 좋고 싱싱한 토마토
확성기에 들어간 토마토가 온 동네를 구르며 깨우다
부서진 담벼락 앞에 멈춘다
포클레인이 커다란 아가리를 쳐들고 있다
집과 집이 바짝 맞닿은 크레바스의 깊은 골목에서
아이들은 곰팡이 핀 얼굴로 기어 나오고
아줌마들이 넝쿨 같은 손가락을 뻗는다
한 손 한 손 건네받은 토마토를
가슴팍에 묻어 조금씩 베어 문다
아이들은 토마토 힘줄을 물고 빨고
개들은 바닥에 터진 토마토를 할짝거린다
이곳에는 누구나 다 기울어져 산다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기댄 판자촌
깨진 유리창 너머,
아직 철거되지 않은 생이 붉은 방을 켜고
채 익지 않은 밤을 기다린다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토마토
그림자를 널어놓은 빨랫줄 위로
발갛게 무른 달이 떠오르고 있다
- 2015년 <시작> 시인상 당선작
《 심사평 》
이번 2015년도 제13회 시작신인상 시 부문에 응모한 신인들과 시편들은 모두 140명, 990편이었다. 투고된 몇몇 시편들은 한국시의 변화된 지형과 예술적 짜임을 다시금 절감케 하는 흐뭇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응모작들은 기실 단 한 편만으로도 자격 미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만큼 투박하고 조악한 수준을 보여 주었다. 우리 심사 위원들은 990편의 작품들을 서로 돌려 읽으면서, 당선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인 토론을 벌여야 할 응모작들을 어렵지 않게 선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집중적으로 토론을 벌인 신인들은 다섯 명이었고, 몇 차례의 재독 과정을 통해 두 신인의 당선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임희정의 응모작들은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이미지 조각술이 눈길을 끌었다. 일종의 알레고리적 이야기 구조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법의 차원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일상적 차원의 개연성을 멀찌감치 벗어나, 귀기와 전율스런 육체의 이미지들을 예술적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 미학적 용기의 차원에서도 후한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저 세련된 이미지 조각술과 미학적 용기를 감싸 쥘 수 있는 그만의 예술적 사유와 일관성의 구도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심사 위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김미소의 응모작들은 이국적이고 독특한 소재 활용이 돋보였다. 인도 등지의 힌두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제식을 소재로 삼은 「목을 펴는 사람」이라든지, 디지털 문화에 따른 전자 쓰레기를 제제로 삼아 현대 문명 비판을 시도한 <쓰레기 섬 창조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또한 육체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감각의 구체적 질감과 기억의 문제를 결부시킨 <길 위에서>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시작의 고뇌를 알레고리 구조를 활용하여 형상화한 <지면 없는 추락>이나 인간의 죽음의 과정을 추적한 <영정 앞에서> 같은 작품들은 이 신인의 시작법과 전체적인 시풍이 자연스럽게 엇물리지 않는 문제점을 노출시켰고, 언어의 숙련도와 예술적 세공술의 차원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불균형한 모습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또한 제 기술적 장점들을 온전히 자신의 예술적 프레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유의 깊이와 구성력의 차원에서 적지 않은 약점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시편들 전체를 마치 숨결처럼 제 몸에 들러붙게 만들 수 있는 예술적 직관력과 구성력의 확보를 주문하고 싶다.
박민서의 응모작들은 이른바 몸의 세계를 제 예술적 상상력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편들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장점들을 고스란히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끈적거리는 질감으로 휘감겨 오는 점액질의 상상력을 형상화하는 이미지 조각술이나, 비유법의 정통적인 기술과 방법론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숙련도의 차원에서 후한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응모한 몇몇 작품들은 조악한 수준의 발상과 사유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이후 보다 많은 예술적 연마의 과정이 요청된다는 것이 심사 위원들의 공통된 의견과 시각이었다. 단편적인 시적 기법과 부분적인 세공술의 숙련도를 넘어서, 한 편의 시 작품 전체를 일관된 예술적 짜임새로 갈무리할 수 있는 구성력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곧 각각의 시편들과 그것들 사이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시어의 음영과 예술적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안목과 상상력과 구성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차성환의 응모작들은 우리 일상의 세부를 밀착 인화할 수 있는 섬세한 관찰력의 차원에서 심사 위원들 대다수를 충족시켰다고 하겠다. 특히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의 세부들을 집요하게 소묘하면서 그 뒷면의 침묵의 공간에서 어떤 감성의 음영을 소리 없이 환기시킬 수 있는 기술적 숙련도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물론 응모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예술적 세공의 완성도와 마름질의 밀도의 차원에서 의심스런 부분을 노출시켰기에, 당선 여부를 두고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집중적인 토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심사 위원들은 저 관찰력의 집요함과 언어들 사이로 휘감긴 끈덕진 질감의 내면성을 신뢰하기로 했고, 결국 당선자의 한 사람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보다 빼어난 시편들을 지속적으로 산출해 낼 수 있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최원의 시편들은 오랜 시적 수련을 거친 자만이 빚어낼 수 있는 정제된 언어의 밀도 높은 짜임새와 더불어, 상이한 여러 소재들을 제 몸의 리듬감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예술적 일관성의 구도를 충실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심사 위원들 모두에게서 공통된 호평이 이어졌다. 특히 응모작들 모두가 빠짐없이 고른 수준과 예술적 세공의 밀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당선을 염두에 둔 토의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일상의 차원에서 매번 벌어지는 착시와 오인과 왜곡의 현상들을 진득하게 가라앉은 낮은 음색으로 소묘한 <앵두나무 맞은편>이나, 일상 세계의 소소한 인연들이 시간의 깊이를 가로지르며 일구어 내는 저 운명과 우연의 현란한 엇갈림을 밀착 인화의 기법으로 그려 낸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는 이 신인의 만만찮은 재능과 수련의 과정을 충실하게 예증해 준다. 또한 우리 삶 곳곳에 깃든 저 황폐한 진실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잔인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모두 어렵지 않게 만장일치로 당선을 결정했다.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한다. 한국시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대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김춘식 유성호 이형권 홍용희 이현승 임지연 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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