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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2011.12.11. 21:36)
김홍전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사람>
···(전략)···
고린도전서 2장 14,15절과 3장 1절에서 3절에서 생각했지만 거기서는 사람을 분류하되 하나님 말씀과 관계를 기준으로 세 가지로 갈라놓았습니다. 2장 14절에는 ‘프슈키코스’, 즉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사람의 생명에만 속한 사람이라는 뜻의 말입니다. 그리고 프튜마티코스, ‘하나님 성신에 속해 있는 사람’, 혹은 ‘신령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저도 아닌 사람이 또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습니다. 분명히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함을 받아서 새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모든 마련과 준비를 다해 주셨는데도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서 자연인, 혹은 인간 생명에 속한 사람으로서 생활을 계속하면서 분쟁하고 시기하고 서로 나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젖이나 먹는 어린아기와 같은 자로서 남의 부담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사르키코스’라는 말로 썼는데 육신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언제든지 새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옛사람으로 생활하면서 사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날마다 새사람에 의지하느냐, 아니면 옛사람에 그냥 주저앉아 사느냐 둘 중 하나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의 생활을 하는 시간도 있으나 부지불식간에 옛사람으로 다시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옛날로 돌아가서 시험을 많이 받게 됩니다.
시험이라고 할 때 꼭 마귀가 쫓아와서 시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내 자신으로 인해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암매해 하나님 말씀의 도리는 잘 모르면서 종교상 형식만 좇고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옛사람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큰 능력이 분명히 자기를 지배하지 않을 때에는 자연인 생활의 길로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 지어 주신 사실은 완연한 새 것으로서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런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렇게 우리에게 그리스도적인 생명, 즉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에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생명인 것을 드러내는 것인데, 우리는 인격적인 발휘를 통해 생명의 구체적인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짐승의 생명이라든지 식물의 생명과 같은 비인격적인 생명이 아니라 사람 생명과 같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사람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생명이 인격적인 발휘를 하기 위해서 작용하는 기능을 성경에서는 ‘영혼’이라는 말로 표시합니다. 혹은 ‘영혼의 기능’이라는 말로도 쓰는데, 이 영혼의 기능들을 통해서 이지적인, 혹은 정서적인, 혹은 의지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특성 있는 발휘를 확실하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인격을 형성하는 세 가지 요소인 것을 잘 아시겠지만, 그렇게 이지적이고 정서적이고 의지적인 것들이 조화 있게 발휘될 때 하나의 인격적인 능력의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도 한 인격자이시고 천사도 인격자이고 사람도 인격자입니다. 비록 생명을 가졌더라도 동물을 인격자라고 보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그 곳에 들어가서 그에 상당한 인격을 구체적으로 표시하려는 생명의 능력의 약동이 있을 때 비로소 외면적으로도 중생한 사람으로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생명이 비로소 생명인 것을 드러내되 그의 영혼의 기능이 활동해 발휘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엄격히 구분할 때 중생에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심어 주신 부분이 있고, 다음에는 그 사람 속에서 그 생명이 충분히 인간성을 발휘하는 신생(新生)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임플랜테이션(implantation)이라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거기서 나오는 뉴 버스(new birth)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면 그의 기본적인 성향이 확실해지는데 그 방향은 지금까지 인간적으로 자기를 추구하고 이 세상으로 흘러가던 것이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자꾸 하나님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지배적인 성향, 거버닝 디스퍼지션(governing disposition)이라고 합니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 성향을 가지고 일보를 디디는 그 장면까지를 신학적으로 중생이라는 제목으로 다룹니다. 신학적으로 어떻게 다뤘든지 이것이 역사적인 개혁교회가 늘 주장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김홍전 [그리스도 안의 유아] 172쪽~175쪽.
* 배경색은 제가 칠했습니다. 주 나그네 목사님께서 봄길 목사님 <범주 나누기를 통한 중생 고찰: 개념 정립을 위한 정리> 댓글란에서 소개하신 부분으로, 주 나그네 목사님께서 소개하신 문장은 원래 강설을 녹취한 문장입니다. 그리고 제가 배경색을 그은 부분은 녹취한 문장을 교정한 문장입니다.
덧글 4개
산본 2011/12/11 21:44
implantation이 영적수태이고 new birth는 신생 이로군요.
와, 놀라운데요? 너무나 감사한 자료입니다. 김홍전 박사가 이 부분을 통해 그 누구보다도 연속적 중생관을 가장 뚜렷하게 말하고 있는듯 싶군요.
사계 2011/12/11 22:03
제가 피터 마스터스 <연속적인 중생론>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상태라서 산본 님 댓글에 적극 동의할 수는 없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연속적인 중생론>을 주장하는 {양무리 마을}에서 김홍전 목사님 ‘육신의 속한 자’에 대한 오해로 ‘김홍전 목사 구원론은 후크마의 구원론으로 교정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음을 봤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산본 2011/12/11 22:03
육적 그리스도인에 대한 논의는 중생과는 별개로 다루어져야 할 듯 싶습니다.^^
마스터스의 연속적 중생관은 마스터스의 책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가 올린 게시물을 통해 연속적 중생관이 주장하는것이 무엇인지 윤곽은 잡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어찌됐든 위 자료를 읽고는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김홍전 박사님은 역시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보내주신 거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이십니다.
사계 2011/12/11 22:12
산본 님 글이나 토론을 보면, 솔직히 소름이 끼칩니다. ^^ 치밀성 때문입니다. 귀한 은사를 가지셨습니다. 이 귀한 은사가 한국 교회에 귀하게 쓰이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