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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6
창세기 2:18-25
둘이 한 몸
본문에 대해 우리는 전통적으로 결혼에 대해 좋은 교훈, 아담이 지은 이름이 오늘날까지 불리며 아담의 갈비뼈 수는 하나가 적다는 등 웃지 못할 이야기도 많이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 성경에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었다는 말씀이 많이 왜곡되어 이해되었다. 그래서 ‘남존여비’(男尊女卑)나 ‘여필종부’(女必從夫)가 성경적인 것처럼 말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이 어떤 문맥 속에 있는가? 우리는 지난 강론에서 선악의 나무와 생명 나무가 하나로 존재하고 그 생명을 담아 놓으셨다는 것을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에 이어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안타까워 여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셔서 아담이 외롭지 않도록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그런 말씀을 갑자기 하시겠는가?
그러면 돕는 배필을 흙으로 만드시면 되는 것이지 굳이 아담을 잠들게 하여 갈빗대로 만드시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한 이 말씀과 연결하여 갑자기 이름을 짓는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전통적 해석에 매여 있으면 이런 연결된 본문들을 한 문맥 안에서 도무지 이해될 수 없고 또한 제대로 된 해석이 될 수 없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책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한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18절). 우리 성경에 “혼자”(히, 바드)라고 번역하였는데 ‘분리, 부분, 홀로’라는 뜻이다. 즉 ‘분리된 상태의 단독으로’라는 의미이다.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할 때 ‘토브’에 부정사 ‘로’를 붙여 ‘로 토브’라고 표현하였다. 즉 분리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16-17절에서 선악 나무와 생명 나무를 말씀한 것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 나무 안에 생명을 담아 주셨고 그 생명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다. 그렇다면 생명 나무와 분리 되어 떨어져 있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선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선악 나무를 통해 생명 나무와 하나 된 것을 보여주시기를 원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시겠다는 뜻이 된다. 생명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떨어져 분리된 상태 그것이 죽음이고 멸망이다(요 15:5-6).
우리 성경에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하여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돕는”(히, 에제르)이란 군사적 지원과 관련된 용어로 ‘원조하다, 구원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구원과 관련된 용어이다. “배필”이란 히브리어로 ‘네게드’인데 ‘나가드’(말하다, 알리다, 폭로하다)에서 유래한 말로 ‘~의 앞에, 맞은편에, 맞서서, 짝’이라는 뜻이다. 신명기 4:13에 보면 ‘나가드’라는 단어를 우리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반포하시고”라고 번역하였다. 계시의 말씀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여기서 “돕는 배필”이란 ‘앞(맞은 편)에서 계시를 나타내주는 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단어를 여성형으로 쓰지 않고 남성형으로 표현하여 남성 단수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1:27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씀을 단순히 남녀의 창조가 아니라 ‘남자인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자를 창조하신 이유를 말씀하신 내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아담(진짜 사람)이 구원을 이루는 일에 앞에서 계시의 말씀을 나타내주는 역할을 하는 짝을 지으시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돕는 배필”을 남성 단수로 쓰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19절). “이끌어 가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보’라는 단어인데 기본적으로 ‘들어가다, 나가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쓰인 본문을 보면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라는 말씀에서 “들어와”라는 말이다.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동침하라고 했을 때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창 16:2)라고 한 표현과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창 7:7)라고 말씀하여 방주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어 ‘보’라는 말은 단순히 ‘들어간다’라는 그 이상의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구원이 이루어지든 멸망이 이루어지든 ‘하나가 된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 성경에 “그에게로”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엘 하아담’이라는 말인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아담 안으로’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아담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뜻이다.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라고 하였는데 짐승과 새를 흙으로 지었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 아니라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양식으로 삼지 않는 존재(네페쉬 하야)를 지칭한 것이다.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라는 말씀은 아담이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지었고 지금까지 아담이 부른 그 이름대로 우리가 부른다는 뜻이 아니다. “부르는”(히, 카라)이라는 말은 ‘선포한다’라는 뜻이다. 즉 아담이 짐승, 생물들에게 이름을 선포하였다는 뜻이다.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아담 안으로 짐승들을 이끄시니 아담이 그 이름들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 존재 의미를 규정한다는 뜻이다. 결국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짐승, 생물(네페쉬 하야)들은 아담 안으로 들어와야 그 존재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뜻이다(사 43:5-7).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 14:1)
아담 안에서 이름이 붙여진다는 것은 곧 이 땅에 구원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 이름이 주어지는 완성이라고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내고 있다. 십사만 사천은 구원받은 교회요 성도이고 그들에게 주어진 이름이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다. 다른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와 하나 된 이름이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0절).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하였는데 번역하는 과정에서 빠뜨린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마차’라는 단어로 ‘발견할 수 없었다’라는 뜻이다. 즉 동물에게서는 그 이름을 완성할 짝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짐승, 동물들을 아담 안으로 이끌어 아담의 이름이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는데 그것으로는 언약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담이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21-22절)라고 말씀한다. 성경에서 잠들었다는 표현은 죽었다는 표현과 교차하여 사용한다(참고 시 76:5-6).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라는 표현은 아담의 죽음을 말씀한 것이다. “갈빗대”란 히브리어로 ‘첼라’인데 기본적으로는 ‘갈빗대, 옆구리, 측면’이라는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31 그가 또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었으니 곧 성막 이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32 성막 저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뒤 곧 서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며(출 36:31-32)
성막의 다른 쪽 면(기둥)이 첼라이다. 그뿐 아니라 ‘언약궤의 측면’(출 25:12), ‘성소의 벽, 지성소의 벽에 연결된 골방’(왕상 6:5, 겔 41:6-7)을 표현한 말이다. 즉 성막(성전)의 경계벽, 기둥, 울타리를 의미한다. 즉 아담을 에덴이라는 성전의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거기에 여자, 즉 하나님의 자기 백성인 교회를 세상과의 경계로 세워 하나님 왕국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래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십자가라는 기둥을 통해 온전히 성취된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살로 대신 채우시고”라는 말씀은 “살”(히, 바사르)은 24절에서 “몸”이라는 단어와 같은 것이다. “채우시고”(히, 사가르)는 ‘닫다, 잠그다, 넘겨주다’라는 뜻이다. 즉 아담과 한 몸으로 만드신 것,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복음을 의미한다. 성전이라는 하나님 왕국의 울타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복음으로 온전히 채워져서 넘겨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주신 그 언약을 본 아담은 이렇게 고백한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3절). 즉 ‘나와 같은 한 몸이구나!’라는 선언이다. “남자”(히, 이쉬)에게서 나왔기에 “여자”(히, 이솨)라고 칭하였다.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만 한 몸으로서 온전히 하나님과 화목된 것을 나타낸다. 선악 나무와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만이 하나님과의 화목이다(엡 3:12-18).
그래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4절)라고 말씀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히브리어 ‘아자브’는 버려진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즉 남자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마 27:46) 이 땅에 오심으로 죽음을 통해 여자가 나오듯이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신부가 탄생되는 그것이 바로 교회의 비밀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고후 11:2)
“중매함이로다”라고 하였는데 헬라어 ‘하르모조’는 ‘결혼으로 결합하다’라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죄성을 고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열심이 온전히 드러난 현장이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5절).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은 아담과 그 아내가 하나 되었다는 뜻이다. 서로 너는 너,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계시를 드러내게 된 상태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육의 몸을 벗은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복음으로 선포하였다.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0-11)
(2022092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