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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8강
말씀/ 마가복음 5:21-43
요절/ 마가복음 5:3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윤선사모는 과실을 맺는 나무를 키우고 싶은 마음으로 왕매실나무를 샀습니다. ‘생명 있는 것을 괜히 데려와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극구 반대했는데..., 물론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본문 말씀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내어 현관 화분에 옮겨 심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키워주시길 기도합니다. 식물만 키우기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사람의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사건들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대로 변함없이 예수님을 의지함으로써 강건하고 생명력 충만한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을 떠나 다시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자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21) 이때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회당장은 지역 사회의 유지입니다. 회당 예배를 주관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두루마리를 보관했으며, 동네의 소소한 분쟁을 재판했습니다. 그러한 지역 유지 야이로가 체면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는 것입니다. 야이로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굽히지 않는 자존심 강한 사나이였는데, 어린 딸의 질병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용하다는 의사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젓고, 12살 가장 꽃다운 나이에 죽음으로 끌려가는 어린 딸의 고통은 야이로를 예수님에게 달려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타는 듯한 마음으로 간구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딸 바보 아빠라면 야이로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딸을 살릴 수 있다면, 사회적 지위나 자존심, 사람들의 시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형식과 위선으로 폼을 잡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응하시지만, 겸손과 심정으로 나오는 자들에게는 약하십니다. 예수님이 종을 위해 간청했던 백부장의 집에 기꺼이 심방 가신 것처럼, 딸 바보 야이로와 함께 기꺼이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한가지 사건이 발생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12년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남몰래 접근한 것이었습니다. 왜 야이로처럼 정식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지 않은 것입습니까!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면, 그 의자와 키보드와 마우스를 다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정식으로 나오는 것을 꺼려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야이로 같은 아빠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런 믿음 있고 심정 있는 아빠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현재 서 있는 위체서 예수님에게 나아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믿고 나아온 것입니다.
그녀의 스토리가 어떻게 됩니까!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더 중하여졌던 차에” 희철 목자는 비슷한 증세로 오는 환자들을 100% 완치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거기에는 희철 목자 같은 명의가 없었습니다. 의사들은 혈루증 여자에게 희망을 심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이제 우리 병원에 왔으니 고생 끝입니다. 비용이 조금 비싼 것 빼고는 모두 만족할 것입니다.” 날마다 피 뽑고 초음파 하고 약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안심하라던 의사들의 말도 점점 바뀌었습니다. “당신같은 특이 체질은 처음 봅니다” 그렇게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다보니 그나마 있던 재산마저 치료비로 다 날리고 말았습니다. 마가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치료가 아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질병이 치료되지 않으면 몸만 낫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데미지를 받기 때문입니다. 반복하여 실패하다보면 운명주의와 패배주의가 자리잡습니다. ‘나는 병을 달고 살아야 할 팔자인가보다. 나의 이번생은 망했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마음, 매사를 삐딱하게 보고 불신하기 쉬워집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왔을 때, 실패에 길들여진 마음이었다면 냉소적으로 반응하기 쉬웠습니다. “내가 소문 듣고 찾아갔다가 망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냐, 이번에는 낚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7,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녀의 액션은 야이로에 비하면 너무 소극적입니다. 옷에 손댈 것이 아니라 예수님 손을 머리에 얹어 특별 안수를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옷자락을 만지고 사라지는 약한 액션으로는 은혜받기를 기대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액션은 작았으나 믿음은 컸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어떻게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와서 옷깃을 만져도 구원받을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는데, 예수님을 만난 지금부터 새 일이 시작될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이를 볼 때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100% 영접했습니다. 말씀으로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 거라사 광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지붕을 뚫고 침상채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고쳐주신 이야기가 자기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믿음은 자기로부터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나의 액션에서 가능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에서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죄사함의 축복이 그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다. 나는 주홍빛 색깔처럼 지워지지 않을 수많은 허물과 죄악을 가졌으나 주님의 긍휼과 자비는 끝이 없기에 죄사함 받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신실하지 않고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주님은 신실하시고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시기에 섭리의 손길로 이끌어가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인이 보여준 액션은 지극히 작았지만, 여인안에 있는 믿음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빛이 났습니다.
29절을 보면, 여자는 믿음으로 혈루증을 고침받고 조용히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운데 돌이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광풍이 몰아쳐도 꿀잠을 주무시던 예수님이었는데, 믿음의 터치에는 예민하십니다. 제자들이 그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해 짜증을 냅니다.(31) “예수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고 있는데, 도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끝까지 여인을 찾습니다.(32) “어디 있지? 누구야!”, 그러자 여자가 더 이상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숨기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자백합니다.(33) 예수님은 허락없이 만졌다며, 소심하다며 책망하지 않습니다.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여자를 딸아, 자녀로 불러주십니다. 망가진 병자가 아니라 정말 사랑스런 존재입니다. ‘내 능력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믿음이 여자를 구원하였다’, 정말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칭찬하십니다. 수없이 반복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갖는데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패가 무서운 것은 과거로 끝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실패했으니 지금도 실패할 것이고 앞으로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끌고 옵니다. 반복하여 실패하다 보면 그런 생각은 확신으로 자리잡고 체질로 확신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입니다. 몇 번의 실패, 몇 번의 상처에 갇혀 무엇을 해도 자신감을 상실하고 위축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끔찍한 사건 사고나 반복되는 실패나 좌절을 만나면, 그런 기억들은 우리안에 트라우마 같은 것들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없을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빅터 프랭클이란 분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인대요. 그는 “삶에서 트라우마를 피할 수 없지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했습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좌우된다.” 이런 자극이 오면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습니다.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죄수로 내려갔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자극을 생각하면, 분노와 복수로 반응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가정의 구원을 이루는 역사로 반응했습니다. 그와 같이 혈루증 여인은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와 힘을 가진 여인입니다. 실패의 기억에 갇히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점에서 여인의 믿음은 불굴의 도전이었고 꺾이지 않는 희망이었습니다. 여인의 겉사람은 오랜 질병으로 시들었겠지만, 여인의 속사람만큼은 누구보다 빛났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혈루증 여인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나음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혈루증 여인만큼 믿음에 대해 온전히 드러낸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정수는 이런 것이다. 이것이 온전한 믿음이다’
우리시대 청년들에게서 외적 자극에 너무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몇 번 실패와 몇 번의 상처에 주저앉아 자포자기하는 것을 정확한 판단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환경적으로 보면, 어느 때보다 정보가 빠르고 외부의 시선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포세대, 오포세대라는 별명이 낯설지 않습니다. 어느 세대보다 능력 많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세대보다 불안과 절망의 정서가 깊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믿음이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 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경험과 계산 너머에 계시고, 사람의 실패를 뒤집고 섭리로 만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두려움을 바꾸어 승리의 간증거리가 되게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세상이 주는 압박이 무거울수록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거기에서부터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혈루증 여자로 인해 많은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슬픈 소식이 날라왔습니다. “회당장이여,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 붙들고 괴롭게 하지 마세요” 아빠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회당장의 자존심도 포기하고 사람들의 수근거림도 극복하고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걸었는데, 딸아이도 잃고 자존심도 잃고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딸아이 없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두렵고, 그런 세상을 견디어낼 자신이 없는 모습이 두려웠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한순간에 야이로의 영혼을 압도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움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는 초청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두려움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정탐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두려움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거인족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습니다. 하나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가나안땅으로 인도한 건가요? 모세는 왜 우리를 꼬드겨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가!” 야이로가 두려움에 빠지면 그리 완악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고쳐줄 능력이 없으니까 혈루증 여자를 핑계로 시간을 끈 거지요! 왜 처음부터 힘들다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두려움을 놔두면 불평과 원망이 찾아오고 완악함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예수님은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공간적인 표현보다 내적 자세에 대한 표현입니다. 원어로 ‘παρακούω,파라쿠오’라고 합니다. ‘건성으로 듣다, 흘려듣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고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귀담아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로운 이야기는 가볍게 흘려듣고 부정적인 이야기는 귀를 쫑깃 세우고 듣는 경향을 가집니다. 목자생활하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시험에 들어 실족하는 사람들을 몇몇 보았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그냥 웃자는 마음으로 내뱉은 이야기였는데, 그것을 심각하게 듣고 의심과 불신의 세계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점에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심각한 이야기를 흘려들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이 됩니다. 두려움을 갖게 하는 이야기, 믿음을 갖는데 방해되는 이야기들을 흘려버리는 것이 유익합니다.
예수님은 대신 믿음에 집중하셨습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믿기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변함없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팠을 때에도 신뢰하고 나아온 것처럼, 아이가 죽었을 때에도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혈루증 여인의 나은 것처럼 즉각적인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처럼 더 심한 위기의 과정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곧바로 문제해결을 받고, 어떤 사람은 더욱 악화되는 상황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믿기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능력자이며 어떤 질병이나 귀신도 쫓아낼 수 있는 치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뼈아픈 고난으로 망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보약이 되어 우리 삶을 새롭게 하는 반전으로 돌아오는 것을 때마다 체험합니다. 어떻게 딸이 죽어버렸는데도 믿기만 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문제이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에서 말씀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이전에도 믿고 지금도 믿고 앞으로도 믿는, 믿기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세계를 드러내십니다.
어떤 형제가 본문을 공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가지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어둠을 두려워하여 어둠을 피해가는 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여 실패하지 않는 길, 계산되지 않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불확실한 것을 피해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길은 빛을 사모하여 빛으로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비전을 보고 섭리를 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방향을 찾으려는 점에서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르네요.” 우리는 세상을 많이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으며, 부흥의 길 또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분석은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데 중요합니다. 하지만 분석이 탁월하더라도 그 출발이 두려움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세상을 크게 생각하고 내게 있는 것을 작은 것으로 생각하며 출발했다면, 그 분석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심을 크게 생각하고, 거기에서 가능성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서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운데 있는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크게 보고 비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거대함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찮게 보고 있으나마나한 죽은 자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비전과 희망을 담아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름으로 시작하신 것처럼, 한 사람에 대한 무한 가능성을 붙들고 동역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부활의 능력, 생명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가보니, 떠드는 소리와 울며 심히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38) 죽음이 쏘는 절망을 잊으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러자 그들은 은혜받기는커녕 비웃었습니다.(40) “선지자인줄 알았더니 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도 구분하지 못하는 그런 인간이었구먼”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다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과 아이의 부모, 그리고 세 제자만 남았습니다. 권능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영적 분위기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삐딱하고 냉소적인 분위기 혹은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한 분위기에서는 권능의 역사를 이루지 않습니다. 한마음으로 믿는 영적 환경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만든 후,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4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러자 열두 살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습니다.(42)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두려움에 짓눌리기보다 예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안에 변함없이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