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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했기때문이다.
그런데 나이 많은 선배 두분이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식기세척을 담당하기로 했다.
밥은 전기 밥솥에 앉혔다.
그리고 전기 쿠커(cooker)로 국물을 끓였다.
반찬은 양파와 고추장, 한국에서 가지고간 밑반찬 몇개가 전부다.
이것이 부족하면 누룽지를 밥솥에 넣고 물을 부어 끓였다.
여기에 라면이 있으면 성찬이었다.
자그레브대성당
자그레브(Zagreb) 시는 인구 80만의 작은 도시다.
중세시대 건축물을 관람할 수 있고 동유럽 고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자그레브(Zagreb)시 여행은 중앙역 광장에서 부터 시작하면 다양하게 구경할 수 있다고 말을 들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때문에 현지인에게 수시로 물어서 중앙역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숙박한 호스텔 63에서 자그레브 중앙역 광장과 반 요셉 옐라치크(Ban Josip jelacic) 광장 까지는 넉넉잡아 40분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작은 도시 이기때문에 도보로 여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자그레브 대성당
발칸반도 서쪽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 크로아티아는 우리에게 축구를 제외하면 그리 알려져 있지 않는 국가다.
오랜 세월동안 사회주의 국가체제로 남아있었기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원 이었던 크로아티아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는 이유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작은 나라가 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꼭 한 번 방문해보고싶은 국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개발이 늦은 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휴식처로 공감을 받고있기때문이다.
내가 다녀왔던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이나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는 세계적인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IT황제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수시로 이곳을 방문하여 활기를 충전시키고 있기때문이다.
이것에 비해 자그레브(Zagreb)는 사람들에게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성모 마리아 상
내륙에 위치하고 개발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현재는 이곳에서도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개발의 붐을 타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6개 공화국 중에서 선두 주자는 크로아티아(Croatia)다.
지금까지 개발이 늦은 요인은 민족적, 종교적 갈등때문이었다.
그 외도 6개 공확국 간 경제적 빈부의격차도 한 몫 했다.
크로아티아(Croatia)는 중부유럽의 교통의 요지다.
때문에 동과 서를 연결하는 여행자의 기착지로 알려져 있다.
자그레브(Zagreb)는 동서양의 가교라 할 수 있다.
반 요셉 옐라치크(Ban Josip jelacic) 동상
러시아를 횡단해서 런던까지 이어지는 오리엔탈 익스프레스(express)가 자그레브를 통과하여 이스탄불과 베오그라드를 거쳐 빈(비엔나)과 연결된다.
러시아에서 런던을 거쳐 자그레브, 이스탄불, 베오그라드, 비엔나 까지 이동은 짧은 거리라 할 수 있다.중국 한나라 상인들은 비단과 차를 팔기위해 사막을 횡단하여 초원 길과 비단길, 바다길을 개척했다.
그 길은 장안에서 로마까지 이르른다.
아라비아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모로코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프리카·아라비아·인도를 거쳐 원나라 베이징까지 들어갔다.
이 거리는 자그마치 12만 km나 된다.
또한 이탈리아 마르코폴로(Marco Polo)도 동방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중국 원나라에서 17년 동안 거주하다가 해로를 통해 본국으로 귀국했다.
반 요셉 옐라치크(Ban Josip jelacic) 동상
그의 체험담을 기록한 기행문이 동방 견문록이다.
동방 견문록은 유럽에서 일약 베스트셀러가되었다.
이 책은 동방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콜럼버스도 이에 자극받았다.
인간의 상상력은 국경을 무너뜨렸다.
체제로 인간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자그레브(Zagreb)시 한가운데를 사바 강이 흐르고 있다.
한강 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았지만 자그레브 시민들의 젖줄이다.
크로아티아(Croatia)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탈퇴했다.
체제 보다는 의식주 해결이 선결 문제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연방 탈퇴의 댓가는 혹독했다.
의리를 배반 했다고 유고슬라비아가 침략했기때문이다.
전쟁은 처절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재산과 인명의 손실이 컸다.
그러나 문화재와 아름다운 자연을 지켜 냈다
어찌보면 한국전쟁을 겪은 대한민국 과도 비슷했다.
과거의 상흔을 도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자그레브(Zagreb)는 그라덱(Gradec)과 캅톨(Kaptol)이라고 부르는 두 개의 언덕이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자그레브(Zagreb)는 세 지역으로 나뉜다.
중세도시의 건축물이 가득한 올드 타운(Old Town)과 크로아티아 경제 중심지임을 실감할 수 있는 상업지구, 그리고 고층건물이 늘어서고 있는 신도시가 그것이다.
중앙역 광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서울역 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건물도 우중충하고 사람들의 가슴도 식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삶이 고단해 보였다.
우리가 해방 이후에 잠깐 볼 수 있었던 전차노선이 이곳에서는 거미줄처럼 얼키고설켜있었다.
1960년대 서울역 거리를 연상하게 했다.
지금까지 여행에서 찾아볼 수없었던 과거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가슴을 뒤흔들었다.
내가 찾고자 했던 역사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때문이다.
역사적 건물이 눈에 띄었다.
역 광장과 역사가 그랬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활동하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캡슐속에서 갓 공개된 장면과 같았다.
사람들은 역사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하고 있는 듯 무심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의 삶이 본래 그렇다.
삶이란 인내다.
열차도 마찬가지다.
인내하며 기다려야한다.
탑승시간은 예측할 수 없다.
도착지까지 몇시간 몇분이 소요될 지도 예상할 수 없다.
사람들의 표정은 정지되어있다.
시계가 정지된 것처럼 인간의 삶도 정지된 듯 했다.
열차 이용은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은 찡그리거나 불평한 사람은 없었다.
이것이 사회주의 망령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능동 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망령을 떨어뜨리지 못한 사람도 눈에 띄었다.
역 광장은 사람들로 폭주했다.
출근시간 이라서 그런 것 같다.
역 주변의 편의시설과 부대 시설도 우리나라 어느 역사와 마찬가지다.
열차 이용은 어디를 가나 불편하다.
이곳도 비슷했다.
중앙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이곳은 훨씬 편의 시설이 많았다.
중앙역 광장에 크로아티아 국부 토미슬라브(Tomislav ) 왕의 동상이 있었다.
토미슬라브(Tomislav )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가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크로아티아를 건설하고 왕이 되었는지도 알 수도 없다.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자료가 없다.
단지 19세기에 활동한 크로아티아의 사학자 이자 정치가였던 프라뇨 라츠키가 최초의 크로아티아 왕은 토미슬라브(Tomislav )라고 주장한데서 크로아티아 역사에 등장 하게 되었다.
또 헝가리와 불가리아의 공격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 했다고 믿고있다.
중앙역 주변을 관람하고 자그레브(Zagreb) 시에서 가장 번화한 반 요셉 옐라치크(Ban Josip jelacic) 광장으로 이동했다.
자그레브(Zagreb) 시는 약간 어두운 분위기를 띄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지속된 체제때문 일 것이다.
사람들 또한 능동적 이라기보다는 달관한 철학자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때문에 은둔의 나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반 요셉 옐라치크(Ban Josip jelacic) 광장은 새로 조성된 계획도시로 깨끗하고 청결했다.
사람들은 활기가 넘쳤다.
특히 관광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고있었는데 일렬로 서서 이동하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정겨운 광경이다.
자그레브(Zagreb)의 심장은 반 요셉 옐라치크(Ban Josip jelacic) 광장이다.
자그레브 시민들의 미팅 장소이고 문화재가 이곳에 집중되어있다.
많은 자그레브 시민들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모두가 검소하고 소박했다.
예의가 바르며 친절했다.
반 요셉 옐라치크(Ban Josip jelacic) 광장에서 우회전했다.
자그레브 대성당(Zagreb’s Cathedrale)으로 이동하기위해서다.
대성당 첨탑을 바라보면서 언덕배기로 이동했다.
대성당 정면에 도착했다.
대성당은 약간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가 눈을 치켜 뜨며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령에 압도된 기분이었다.
나도 몰래 성령과 성부, 성자의 이름으로 성호를 그었다.
인간의 위대한 업적을 바라보고 있다.
얼추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에 있는 성 슈테판 성당 과도 비슷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곳 성당을 사람들은 성 슈테판 대 성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로마제국 2대 황제 티베리우스 때 시리아 총독 이었던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다.
유대사회를 혼란하게 했다는 이유때문이다.
성모 마리아는 아들의 시신에 한송이 장미꽃을 올려놓았다.
세상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던 예수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했기때문이다.
가톨릭교도 박해로 점철 되었던 기독교 역사가 전환점을 찍고있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포했다.
이제 기독교가 세계인의 종교로 각인받게 되었다.
이곳은 자그레브(Zagreb)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105m 높이의 2개 첨탑이 하늘로 치솟아있기때문이다.
성전 앞은 황금빛 ‘성모 마리아’ 상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갓 하강한 천사처럼 보였다.
하늘을 구름 한점 없었다.
그 아래서 ‘성모 마리아’ 가 미소를 짓고 있다.
관광객들은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대성당은 자그레브(Zagreb)를 상징하고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도착하여 감명받았던 황홀 감이 여기서도 느껴졌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자신이 간절히 소망하면 뜻이 성취된다는 말이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현실이 절망 적이고 허무 하다고 판단했기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일상은 매우 가톨릭 적이다.
성인식이나 혼사문제도 신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사람들이 성당으로 들어가고 있다.
햇살속에서 ‘성모 마리아’ 상을 지켜보고 있었던 나도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 어두운 가운데 성전의 내부를 살피고 있다.
제단 앞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신부의 강론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13세기 무렵에 그려진 프레스코 화가 성전 안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가운데 대리석 제단이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모두가 중세시대 때 제작된 유물이다.
반 요셉 옐라치크(Ban Josip jelacic) 광장으로 이동했다.
이 광장은 자동차 접근 불가다.
전차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보하며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반짝 시장인 돌라치시장으로 이동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 안은 인간의 삶이 녹아 나고 있었다.
인심이 후하고 인간미가 넘쳤다.
아드리아해(Adria)의 햇살을 머금고 자란 향긋한 과일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인심이 후한 상인은 지나가는 나에게 무화과 한개를 주었다.
무화과는 말린 것이었다.
말린 것이 얼마나 맛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손에 쥐고 있다가 이동하면서 먹었다.
먹어보니 맛이 일품이었다.
진작에 맛을 알았더라면 조금 살 것을 후회가 되었다.
중세시대 복장을 한 상인과 수도사 복장을 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대장간도 눈에 띄었다.
장인은 연철을 단련 하며 농기구를 만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식칼은 명품이었다.
시골의 정겨운 풍경을 감상할 수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그 풍경이 우리나라 5일시장을 연상하게 했다.
이곳의 대표적인 특산품은 자수와 라벤더 용품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신선한 과일도 맛을 당기게 했다.
가격은 저렴하고 인간냄새를 맡을 수 있어 즐거웠다.
시장삼매경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는데 가까이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공은 한국인 이었다.
자신은 한국인 교민이라고 했다.
자그레브 시 전경
현지인과 결혼해서 가이드 일을 하고 있으며 고국이 그리워 외로움을 겪고 있었다.
여인은 성격이 활달하고 능동적 이었다.
그리고 인품도 천사같았다.
여인은 나를 따르라고 했다.
시장을 안내하기시작했다.
물건값을 흥정 하기도 했다.
우리를 위해서다.
여행은 점점 흥미진진 해지고 묘미가 더해갔다.
여러 곳을 돌아 보았느냐고 묻더니 우리를 시장 북쪽 길로 안내했다.
오르막 길을 걷다가 다시 내리막 길을 걸었다.
마법의 문을 지나자 이색적인 풍경이 전개되었다.
이 곳은 트칼치체바 거리다.
트칼치체바 거리는 레스토랑과 카페, 각종 상점이 즐비했다.
이곳에 핫(Hot) 피플(People) 족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가 카바(Kava)를 마시고 있었다.
카바(Kava)는 진한 에스프레소와 비슷하다고 했다.
자그레브 구시가지로 이동했다.
고르니그라드 동네를 지나고 있다.
지그레브대성당
자그레브 구시가지 전체가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캅톨(Kaptol)과 그라데츠(Gradec) 언덕 사이는 예전에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개울이 훗날 도로가 되었다.
그 도로가 트칼치체바 거리다.
다시 돌의 문(Stone Gate)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성모 마리아 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모 마리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성 마르크 성당으로 이동했다.
성 마르크 성당 (St. Mark Church)은 그라데츠(Gradec) 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자그레브(Zagreb)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이다.
성 마르크 성당의 지붕은 빨강, 파랑, 흰색의 체크 무늬로 장식되어있었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자아내고 있다.
성 마르크 성당 (St. Mark Church)은 크로아티아가 자랑하는 문화재다.
자그레브(Zagreb)를 대표하는 건물 중의 하나로 지붕의 왼쪽에는 크로아티아 문장이, 오른쪽에는 자그레브 시 문장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 내부에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Ivan Meštrović)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화려한 벽화와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성 마르크 성당 (St. Mark Church)을 재건하는 데에만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고딕 후기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건물을 완성하기위해서다.
사바 강이 바라보이는 언덕으로 이동했다.
언덕은 사진촬영 명소로 소문나 있었다.
자그레브(Zagreb) 시가 한 눈에 바라보이고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곳을 관람하고 현지 여자 가이드와 함께 돌라치 시장으로 돌아왔다.
가이드는 여기서 헤어지자고 했다.
고마워서 50유로를 손에 쥐어주려고 했으나 한사코 거절했다.
“고국사람들을 만남으로 인해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라며 “오히려 제가 고맙지오”.라고 말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다.
천사와 헤어짐이 아쉬웠다.
그러나 일정을 위해 돌아서야 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Ostir’s Holiday Home으로 이동했다.
동료가 분실한 가방이 거기에 있었기때문이다.
그것도 큰 가방을 숙소에 놔두고 크로아티아로 이동했다.
나중에야 가방의 소재를 파악한 동료는 안절부절했다.
그래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Zagreb)까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Ostir’s Holiday Home으로 이동해했다.
주인은 헛간 에다 가방을 잘 보관해두겠다고 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Ostir’s Holiday Home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 시간대였다.
숙소는 아무도 없었다.
헛간에 가서 가방을 찾았다.
다시 슬로베니아 제2의 도시 마리보르(Maribor)로 이동했다.
마리보르(Maribor)로 이동하기위해 E57번 고속도로 진입했다.
도로는 소통이 원활했다.
주변은 한가하고 평화로왔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음산해지기시작했다.
마음도 울적해지기시작했다.
드라바 강이 나타났다.
강가에 중세 도시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마리보르(Maribor)의 명소인 메인 광장으로 이동했다.
메인 광장 근처에 있는 프란체스코 교회가 마리보르(Maribor)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볼거리다.
그리고 비나(Vinag) 와인은 유럽 최고의 맛과 향을 지니고 있다.
비나(Vinag) 와인저장고로 가서 와인을 마시며 취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일정이 빼곡 했다.
비나(Vinag) 와인 저장 고 방문을 포기했다.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드라바 강 주변에 위치한 호스텔 M이다.
마리보르(Maribor) 대성당과 프란체스코 교회, 고딕 식 궁전에서 가까운 거리다.
'호스텔 M'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시로 이동했다.
슬로베니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로 통행료가 일부 남아있었다.
그래서 모험을 시도했다.
고속도로로 진입하지 않고 일반국도를 선택했다.
볼거리를 찾아보기위해서다.
고속도로로 진입 했다면 한 시간이면 헝가리 구경을 통과 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거의 세시간 동안을 일반국도에서 헤매고 말았다.
길을 잃었기때문이다.
헝가리로 진입하는 고속도로를 찾을 수 없었다.
도로가 끊기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후진하여 고속도로를 찾았다.
고속도로를 찾을 수 없었다.
모험을 했다가 오히려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우왕좌왕하다가 마트를 찾았다.
헝가리로 입경하는 고속도로를 알아보기위해서다.
주민이 헝가리로 이동할 수 있는 고속도로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않았다.
방황하다가 E65번 도로로 진입하여 부다페스트 시로 이동할 수 있는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시간은 12: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시원스럽게 뚫려있었다.
여기서 부다페스트 시까지 200km 가 약간 넘었다.
고속도로는 편도 2차선으로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AE65번 고속도로에서 E71번 고속도로로 전환했다.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발라톤(Balaton) 호수다.
바다처럼 보였다.
발라톤(Balaton) 호수는 중부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로 알려져있다.
헝가리 사람들은 ‘헝가리의 바다’라고 일컫는다.
북 서쪽에 사적 지가 있고 고원이 솟아 있으며, 여러 곳에서 낭떠러지를 볼 수 있다.
이슈트반 국왕과 기젤라 왕비 동상이 있는 베스프렘과 타플차 동굴호수가 주변에 있다.
계속 E71번 고속도로를 따라 북상하고 있다.
사오포크를 지나자 세케수페헤르바르라는 지명이 보였다.
이러한 속도라면 한 시간이면 부다페스트에 도착할 수있을 것 같다.
오늘 아침에 슬로베니아는 비가 내렸다.
제법 굻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어서 여행에 지장을 주지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헝가리에 도착하니 하늘이 개기시작했다.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엘레나 아파트먼트(Elena Apartment)다.
엘레나 아파트먼트(Elena Apartment)는 메디치 극장 바로 앞이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