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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는 신앙인(2244.2024.4.7)
빌 2:17-18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주 삼남연회가 구미제일교회에서 있어서 은혜롭게 잘 마치고 왔습니다. 함께 가신 연회 대표들 고생하셨습니다. 옆 교회 세분도 의리를 지키겠다고 지방회에도 나오고 연회도 그 시간에 오셔서 감사했습니다. 연회대표로 가 보시니 해야할 일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오셨는지요. 금년에는 전도하는 일에 주력을 다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섬김을 보면서 아름다운 섬김이라는 것도 느껴보았습니다. 그 성도들이 하나같이 주의일이라고 각 부서에서 섬기는데 열심히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기쁘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섬기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도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한가닥씩 하시고, 일당 백 하는 것처럼 섬기고 있으니 기쁘고 기쁨니다. 여러분도 앞으로도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항상 기뻐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겨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섬기다보면 피곤할 수도 있지만 마음은 기쁨니다.
명절때에는 온 식구들이 함께 모여서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고 윷놀이를 하면서 기뻐하고 기뻐하다가도 술 한잔 들어간 사람이 있으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서 싸우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고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난다고 합니다. 가족끼리도 기쁘지 않고 원망과 질투가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은 그런분이 하나도 없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옆사람과 인사합시다---교회일 하니 나는 기쁜데 --너두 기쁘지--
거룩한 주일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 집에서 다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니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행2:43-47절‘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예수믿고 구원 받았으니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기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기쁨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수많은 문제가 닥쳐오는데, 항상 기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항상 걱정하며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늘 걱정 속에 파묻혀 있으면 너무 불행합니다. 항상 슬퍼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항상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웃으며 삽시다. 병들고 괴로운 인생이라도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에게 꼭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기쁘게 사는 사람은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사는 사람은 매력이 있습니다. 그동안 상주감리교회에 감사 권사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안 계셔서 참 속상하기도 합니다. 그져 만나기만 하면 이래도 저래도 감사하셨는데 아름다운 천국에서 감사하며 사는 모습을 상상 해 보고 그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저도 기쁘고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감사감사도 할 수 있지만 살다가 보면 여러 가지 감사하지 못할 일도 생기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낙심 할 때도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히10:35절‘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했습니다.
‘낙심’이란 뜻은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시27:14절‘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42:11절‘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실망과 낙심이 찾아오면 자꾸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했는데 왜 내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을까? 왜 어려운 일이 생길까? 왜 어려운일만 생길까? 왜 마지막 고비에서 자꾸걸려 넘어질까? 왜 예상치 않은 일들이 생길까? 이런 일들이 생길 때에 불평하거나 짜증내거나 격분해서도 안됩니다. 차분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시34:18-19절‘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항상 기뻐함으로 주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 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다툼과 허영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원망과 시비도 있었습니다. 빌2:3절‘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 되기 위해서, 그들 모두는 겸손한 마음을 품고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그들이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겸손을 단계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셨고, 더 나아가서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욱 자기를 낮추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지극히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기를 바랐습니다.
빌립보서 전체에서 ‘기뻐하라’가 18번 나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아시지만 바울사도가 이렇게 ‘기뻐하라’는 것은 옥중에서 한 말입니다. 이 역경 중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이유가 뭘까요? 사도바울이 믿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 원리를 내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심령 속에 어떻게 기쁨과 감사함으로 넘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은 막10:45절인데‘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빌2:6절‘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되심을 내려놓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기에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자의 종으로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기 위해서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지금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에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는데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지중해를 건너 마게도냐 지역에 가서 최초로 세운 교회로서 이것이 유럽을 복음화시키는 관문이 된 교회로 사도바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회입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사도바울이 로마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투옥이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헌금을 모아, 그 교회 목회자로 있었던 에바브로디도를 로마로 보내어 사도의 옥바라지를 하게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가 정성을 다하여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심한 병으로 쓰러집니다. 사도바울은 그로 인해 큰 걱정을 하며 기도하였는데 다행히 병이 점점 호전이 되면서 완전히 회복이 되었고 사도바울은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내면서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것이 빌립보서입니다.
이 서신의 내용을 보면 온통 기쁨의 표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길지 않는 서신 속에, 기뻐하고 기뻐하라. 또 기쁨등의 표현이 무려 16번이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순교의 피를 쏟아 부어도 기뻐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행복한 사역자의 모습입니까? 그러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나라 사역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마땅히 행복한 사역자로 살면서 기뻐하고 기뻐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내가 믿음의 제물로 드려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 되어야 했습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권면이 있었고,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사랑이 있었으며, 성령님의 교제가 있었고, 또한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긍휼과 자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어로 일등급 조건절은 우리말의 ‘만일’보다는 ‘때문에’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17절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리기 때문에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여기에 나오는 제물과 전제는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나오는 용어들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제물이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모든 삶을 제물처럼 하나님께 예배로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의 성도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12:1절‘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단순히 일정한 장소에서 어떤 형식을 갖춘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바로 예배, 곧 살아있는 예배일 수 있으며, 그 예배의 산 제물로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때문에 의식을 갖춘 예배와 삶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잘 아는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께 왜 받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그가 악한 행위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배가 온갖 거룩한 형식과 마음을 드릴지라도 삶이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내 삶을 하나님께 산 제사,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거룩함을 말하고 영적인 예배를 강조하지만 또한 내 삶의 거룩한 모습 역시 영적인 예배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나오기 전에 꼭 내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깨끗한 심령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또 삶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마치 구약 시대 제사를 드릴 때 희생의 제사, 곧 피를 뿌리고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것처럼 그렇게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의 믿음의 제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섬김’으로 번역된 ‘레이투르기아’는 원래 ‘자신의 희생이 수반된 공적인 봉사’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되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란 단어가 영어로 worship 혹은 service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향한 섬김, 헌신, 제사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진정한 섬김은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섬김의 시작은 예배생활의 회복입니다. 무슨 직분을 가졌든 예배생활을 소홀히 하는 분은 죄송하지만 상주감리교회의 섬기는이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분들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바로 상주감리교회 명품 직분자다, 명품 섬기는자다라는 마음과 생각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내가 예배생활을 바로 하지 않으면서 안됩니다. 진정한 섬김의 시작은 바로 예배생활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나의 몸, 마음, 시간, 생각 모든 것을 주께 드리는 헌신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때마다 내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앞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며 섬김입니다.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섬김이 상주감리교회 성도인 저와 여러분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믿음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헌신의 삶을 ‘믿음의 제물과 봉사’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들의 삶에 드러난 헌신적인 행위와 삶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음의 제물로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예배속에 진정한 섬김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제가 담임목사로서 부탁드립니다. 예배생활을 회복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영적인 은혜가 회복되어야 우리의 삶도 영적 예배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2.섬김위에 드려지는 기쁨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처럼, 우리는 짐승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단번에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갑니다. 아무튼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를 이해하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삼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서 번제로 불태워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소제를 그 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번제물과 소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이 때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것을 가리켜 전제라고 칭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제는 제사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때의 전제가 바울의 순교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동사 ‘전제로 드리다’의 시제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의 현재 사역을 하나님께 드리는 전제로 표현했습니다.
사실 빌1:19 말씀과 같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간구대로 이번에는 자신이 순교하지 않고 살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빌2:24 말씀과 같이, 바울은 그가 석방된 후에는 속히 빌립보로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의 전제는 장래에 있을 바울의 순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때의 전제는 바울의 현재 사역, 곧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달음질과 그의 수고를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울의 의도는 분명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섬김, 곧 그들의 사역을 ‘제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중심은 번제물이나 소제물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제물 위에 살짝 부어드리는 ‘전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사역보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역을 더 크게, 더 귀하게, 더 낫게 여겼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이 앞서 말씀한 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들인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낫게 여겼던 것입니다.
본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 사회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또한 믿은 후에 나아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빌1:28 말씀과 같이, 그들 주변에는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헌신과 섬김의 삶 위에 자신이 마치 전제로 드려진다 해도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이라 말합니다. 전제는 포도주, 술, 기름 등을 제단에 부어서 드리는 제사의 한 형태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구약에 나오는 5대 제사를 잘 알고 있지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입니다. 이 제사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전제는 번제나 소제없이 드려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그들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곧 그들의 헌신과 섬김의 삶을 보면서, 그들의 헌신과 섬김의 삶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자신은 전제처럼 부어져서 태워질지라도, 죽음을 맞을지라도, 순교할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복음과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그 일을 위해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11:31에서 언급한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성전에 세운 시리아의 왕,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B.C.170년경에 시리아의 안디오크스 에피파네스가 유대 종교를 말살해 버리고 완전히 헬라화를 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8만명의 유대 사람들을 죽이고 10만 명은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우상을 세워 놓고 강제로 숭배를 하게 했으며 돼지고기를 가지고 성전을 더럽혔고 성전을 창녀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신앙 때문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특히 유명한 사건 하나는 한 가정의 일곱 형제를 붙잡아서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라고 했는데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하나씩 차례로 학살을 당했습니다. 장남은 전차 바퀴에 결박을 하여 돌려서 죽이고 차남은 쇠못 장갑으로 가죽을 벗겨서 죽였으며 셋째는 능지 처참을 했고, 넷째는 혀를 자르고 다섯째는 산 채로 돌방아로 찧어서 죽이고 여섯째는 시뻘겋게 단 쇠꼬챙이로 창자를 찔러서 태워 죽였으며 일곱째는 불가마에다 볶아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일곱째는 여섯 형제에 대한 그 고문과 학살을 수시간 동안 보면서도 결코 그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킨 순교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흘러 신약의 순교의 피가 흐르고 전도자들의 순교의 피가 흐른 것입니다.
또한 우리 한국 교회에도 카톨릭과 개신교의 많은 순교의 피가 이조 시대와 일제 시대와 공산치하에서 흐르고 흘러서 우리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함부로 지나쳐 버려서는 안됩니다. 누구도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게 진실한 사람들이 자기와 단 한번만의 생명을 제물로 바친 것뿐만이 아니고 자기를 치는 매 순간순간을 통해 진실되게 증언해 준 진리입니다. 이 생명의 복음을 우리는 조심스럽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의 피를 생각하며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들도 그들처럼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 이것을 후대에게 전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마10:28절‘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과 결코 바꿀 수 없는 진리, 복음입니다. 생명과 결코 바꿀 수 없는 진리,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죄인들을 위하여, 불순종하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우리는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혹 전제로 드려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적인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결코 복음에서, 진리에서 멀어진 삶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순교적인 각오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이므로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는 순교자적인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3.예수안에서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빌2:18절‘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이와 같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앞 절에서 바울은 그에게 기쁨이 있음과 아울러 그에게 기쁨이 있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그런 후에 ‘이와 같이’하면서 바울은 그의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자기와 같은 태도를 가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바울은 겸손을 실천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들도 겸손을 실천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제로 드려짐을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들도 자신들이 제물로 드려짐을 기뻐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들도 자기와 함께 기뻐하기를 바랐습니다. 18절‘너희도 기뻐하고’ 바울은 먼저 자신이 기뻐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런 후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본을 보이고서 말을 할 때, 그 말은 설득력이 있는 법입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전제로 드려짐을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작은 제물로 드려짐으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이로써 그는 기뻐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오히려 그들도 바울이 보여준 태도와 같이 자신들이 제물로 드려짐을 기뻐해야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큰 제물로 드려지기 때문에 그만큼 그들의 기쁨은 더 커야만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 몸을 제물로 드려서 예배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8절 끝부분에 ‘나와 함께 기뻐하라’바울은 앞 절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어 두 개를 사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라는 단어와 ‘기뻐하라’는 단어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함께’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 되지를 못하고, 그들에게는 다툼과 허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기뻐하라’는 단어를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서로 간에 원망과 시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지체들입니다. 우리도 이 두 단어 곧 ‘함께’와 ‘기뻐하라’는 말씀을 늘 명심하기 바랍니다. 먼저 내가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런 후에는 남에게도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걱정하며 사는 시간보다는 기뻐하며 사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쁨이란 기계에 기름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생활에 기쁨이 있으면 모든 것이 아주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기쁨이 있는 시간은 빨리 지나갑니다. 걱정하는 시간은 길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 안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15:10-11절‘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영적인 기쁨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기쁨, 성령 충만한 기쁨, 은혜받는 기쁨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살다 보면, 슬픔도 찾아오고, 기쁨도 찾아옵니다. 세상만사에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수많은 시련과 위기와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4:4절‘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걱정과 불안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걱정과 근심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내게는 조금도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건강만 나빠질 뿐입니다. 차장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꽃들만 보아도 기쁩니다. 숙소에서 넘실거리는 파도만 바라보아도 기쁩니다. 창문을 열고 산 속 시원한 바람만 쐬어도 기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기쁩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기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여 주시니 기쁩니다. 예수님이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하여 주실 것이니 기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도 함께 기뻐하십시다. 다윗은 시32:11절‘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외쳤습니다. 예수님으로 우리 함께 기뻐하십시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이 드리는 제물과 섬김 위에 전제로 부어지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기뻐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또 한 측면에서 보면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기뻐하고 기뻐한다 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조연의 역할을 결코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기뻐한다 합니다. 얼마나 큰 그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섬김의 은혜를 아십니까? 섬김의 은혜는 섬김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섬기다가 전제가 되어 없어진다할 지라도 그것으로 감사합니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나의 행복이 최고다’라고 외치지만 희생의 기쁨, 섬김의 은혜, 섬김의 기쁨,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하고 오늘 지금 당장의 유익만을 구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섬김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하는 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드리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섬김이 영광이라고 믿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은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섬김이 진짜 내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믿습니까? 세상 끝날 까지 사도바울처럼 내가 교회의 섬김위에 전제로 드려서 불타 없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외치며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