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단락 하나님의 역사(7:1-13)
Ⅰ. 장인(匠人)의 장식(7:1-9上)
A. 과거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함(7:1-5)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1절에서 성령은 또다시 제삼자의 어조를 빌려 앞의 질문에 대답하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제삼자가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성령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분이 맨 먼저 말한 것은 그녀의 발이다.
"왕의 딸아"(다른 번역). 이것은 그녀의 출신이 존귀하고 그녀도 왕가의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임을 말한다. 성경에서 '신발'은 분명히 '평안의 복음'을 의미한다(엡 6:15). 이제 중시하는 것은 일을 위한 준비이므로, 먼저 그녀의 신발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 전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이다. '구슬 꿰미'는 '보배'로 번역할 수 있다. '넓적다리'는 서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뜻은, 그녀의 그 서는 능력은 완전히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넓적다리가 보배같이 되려면, 우리의 다리는 야곱처럼 환도뼈의 힘줄이 끊겨야 한다(창 32:25). 일의 능력은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그러므로 공교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2절의 '배꼽'과 '배'('허리'는 원문에서 '복부'이다)는 그녀의 내면을 가리켜 한 말이다. 만일 '포도주'가 주 예수님의 피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한 단의 밀'은 반드시 주 예수님의 살을 가리킨다. 우리는 진실로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신 사람들이다. '섞은 포도주'의 뜻은 성령이 주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백합화로 두른 밀단'의 뜻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 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3절의 '두 유방'. 여기서는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의 뜻은 그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자라고 전진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가 어떠한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먹이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의 믿음과 사랑이 곧 우리가 다른 사람을 먹이는 분량과 능력이다.
4절의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는 이전과 다르다. 이전에는 다윗의 망대였다(4:4). 이제는 하나님의 처리를 받았으므로 상아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범사에 다 피동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하나님을 위할 때는 견고하기가 망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망대는 상아로서 기꺼이 자신이 고난 받고 죽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눈은 … 못 같고'는 이전의 비둘기의 눈과 차이가 있다. 못의 물은 빛이 없는 우물물 같지 않으며, 계속 유동하는 샘물과 같지도 않다. 못은 빛을 향하며, 동시에 고요하고 멈춰져 있다. 눈이 못 같다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며, 불순물이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고요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헤스본'이란 글자의 뜻은 '총명'이며, '바드랍빔'이란 글자의 뜻은 '많은 여인들'이다.
'코'는 이전에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냄새 맡는 감각은 성숙되어야 비로소 생기기 때문이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귀가 열리고 눈이 밝은 사람은 적지 않으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를 가진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이러한 감각은 결코 들은 말이나 본 일에 따른 것이 아니며, 일종의 내적인 기능이다. 이러한 감각은 말과 지각을 초월한 것으로 향기와 악취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일종의 영적인 직감으로,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능히 알게 한다. 이유나 추론에 따른 것이 아닌, 아주 자연스러우며 아주 정확한 내적인 느낌이 당신으로 영적인 일을 알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코는 악취가 무엇인지 냄새를 맡아서 알 수 있다. 많은 교리에 대해 당신은 그것들의 잘못을 말할 수 없으며, 많은 사람에게서 그의 단점을 찾을 수는 없으나, 당신은 그들이 그곳에 있는 것이 틀렸다는 내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여기의 '코'이다.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탑(塔)'. 이것은 그것의 높고 예리함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납작코의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다.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줏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5절). '갈멜산'은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서 능력을 나타낸 곳이다. 그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위해 싸웠으며, 동시에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도 얻었다(왕상 18:20-46). 머리가 갈멜산 같다는 것은 마음에 품은 모든 생각이 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머리털'은 여전히 헌신의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능력은 왕을 안에 감금해 놓을 수 있다. 이 뜻은 믿는 이가 주님 앞에서 능력을 얻으면 주님으로, 그녀의 지배를 받게 할 수 있으며, 주님으로 그녀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초보적인 체험 가운데 있을 때에는 이러한 것을 체험할 수 없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아직 이러한 능력을 그녀에게 위임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참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구원을 받았을 때, 또한 헌신과 순복의 능력이 완전히 주님만을 위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또한 이렇게 주님의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충만하여 그녀의 머리카락조차 자주색으로 변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왕을 감금할 만한 능력을 그녀에게 주신다. 사실 왕은 결코 그녀의 감금을 받지 않으시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비록 왕을 감금할지라도 그것은 그분 자신의 뜻을 이루고 그분 자신의 약속을 이루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항상 왕에게, "당신의 계획을 이루소서. 당신의 말씀에 따라 행하시기를 구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좌의 권위를 행사하는지를 배워서 안다.
B. 주님이 개입하여 말씀하심(7:6-9상)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 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6절에서는 이제 주님이 개입하여 말씀하신다. 성령의 말함은 그분의 뜻과 완전히 상합하므로, 주님은 앞 문장을 자신이 말씀한 것처럼 계속 이어서 말씀하실 수 있다. 그분이 성령의 말을 5절까지 들으셨을 때, 그분은 참다 못하여 개입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녀들이 말한 여자에 대해 직접 입을 여셨다. 이것은 하나의 개입된 환호의 찬미이다.
과거에는 어떤 성장과 전진도 없고, 어떤 완전함도 없으며, 어떤 성숙도 없으므로, 신장(身長)을 말하지 못했다(7절). 이제 성인이 되었으므로 신장을 말한다. '종려나무'는 높고 곧으며, 성경에서 원래 주님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종려나무 같다는 것은 그녀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신장의 충만한 데까지 자랐다는 뜻이다(엡 4:13). 비록 가지와 잎에는 열대의 태양이 내려 쪼이지만 종려나무의 뿌리는 생수의 근원을 접촉하므로 여전히 이상 없이 자란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설사 사막에서 큰 시험을 받더라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영향받지 않고 자랄 수 있다.
"네 두 유방은 주렁주렁 달린 포도 같고"(다른 번역). 이것은 또한 그녀의 분량이 다른 사람을 위해 커진 것을 말한다. '유방'은 사랑을 위한 표시일 뿐 아니라 원래 젖을 먹이기 위한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사랑의 표시가 다른 사람을 먹이는 것보다 강하다. 그러나 성숙할 때 다른 사람을 먹이는 방면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여기는 먹이는 방면을 주의하므로, 주렁주렁 달린 포도 같으며, 사람을 공급하여 먹일 수 있으며, 사람을 배부르게 할 수 있다.
8절부터 9절 전반부, "내가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이 뜻은 주님이 믿는 이의 신장에 따라 그녀를 꼭 껴안으신다는 것 같다. 그분은 믿는 이와 교통하려 하신다. 이제 믿는 이가 주님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 것 같을 때, 그분이 믿는 이를 추구하시려는 것 같다. 이같은 몸의 생활이 있고 이같은 지체의 생활(가지의 생활)이 있으므로, 마치 주님은 믿는 이를 부러워하지 않으실 수 없으며, 믿는 이와 왕래하지 않으실 수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초기의 "내가 그분의 그늘 아래서"(2:3)와 얼마나 다른지!
주님은 여기서 그분의 마음이 특별히 만족한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첫째는 그녀의 다른 사람을 먹이는 분량이다. 그분의 말은 하나의 축복이며, 이 분량이 여전히 넓혀지기를 희망하신다. 둘째는 그녀의 직감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직감의 작용이 아니라 이 직감의 과거의 접촉으로 인하여 그녀의 몸에 남아 있는 향기가 어떠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코가 맡은 냄새가 불수감(佛手柑)의 향기였다면, 불수감을 먹어 보았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불수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안다. 그리스도를 먹어 본 사람은 그녀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네 입은 최상의 포도주 같은 것이니라". 이 뜻은 그녀가 내세의 권능을 미리 맛보았다는 것이다(히 6:5). 왜냐하면 최상의 포도주는 틀림없이 천년왕국 안의 포도주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2:10, 마 26:29). 이 뜻은 그녀가 주님에게 이러한 기쁨의 입맛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Ⅱ. 주님과 동역함(7:9하-13)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주님이 9절 후반부를 말씀하실 때에 이르러서 여자는 주님과 완전히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주님의 뒤를 이어서 이 포도주가 미끄럽게 그녀의 사랑하는 자 안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녀와 사랑하는 자가 미리 이 복을 맛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먹는 사람은 그들 두 사람뿐이 아니며, 많은 잠자는 사람들도 먹는다. 여기와 5장 2절의 '잠자다'는 모두 나쁜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여기의 잠자는 것은 어조를 볼 때 전혀 거기에 나쁜 뜻이 없다. 또한 이 잠자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사랑하는 자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이 잠은 자신을 향하여 잠자는 것으로, 자신의 느낌을 잃고 하나님만을 향하여 사는 것을 가리킨다.
10절에서 이제 그녀가 주의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소유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이미 자신을 위해 독점하는 것을 제해 버렸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 같은데 만일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그것도 원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오늘 주의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얻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그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했으며, 이것 한 가지로 그녀의 마음은 이미 충분히 만족했다. 이전에 혈기로 붙잡던 것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초기에 그녀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다는 것은 부차적인 생각에 불과했다. 그 뒤에 비록 생각의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그녀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그녀의 체험이 충분히 깊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그녀에게 속하였다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참으로 영적인 추구에 있어서 많은 때에 '자아'도 이와 같이 역사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도 뜻밖에 '자신'을 위한 여지를 남겨 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현재의 문제는 나의 기쁨이 아닌 그분의 연모(戀慕)하심이다. 나는 내가 여기에 사는 것이 그분의 연모함이 되는 것임을 안다. 내가 여기에 사는 목적은 연모할 만한 사람이 되어 연모하는 사람에 의해 연모되는 것뿐이다. 현재의 문제는 결코 내 느낌이 어떠한가가 아니며, 나의 득실도 아니며, 나의 일도 아니다. 현재의 문제는, 나는 그분의 것이며 그분의 연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족하다.
한 믿는 이가 이러한 단계에 이를 때, 또 '자아'가 끝없는 처리를 거친 후에, 그녀는 이제 주님과 동역할 수 있다. 그녀는 이제 이같이 주님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개시할 수 있다. 비록 겉으로 볼 때에는 그녀가 시작한 것 같으나, 사실은 그녀 안에 거하시는 주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연합이 이같이 완전하므로 그녀의 행동은 항상 의지하는 것으로 변했다. 이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11절). 이제는 그녀의 단독적인 행동이 아니고 주님 혼자의 행동도 아니며 '당신과 나'의 연합의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계속 볼 수 있는 것은 일에 있어서의 교통이다. 이제 그녀가 자신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동시에 그녀는 모든 좁고 작은 것들로부터 해방된다. 그녀가 이제 주의하는 것은 결코 나의 집회, 나의 일, 나의 교회, 나의 단체가 아니다. 그녀가 주의하는 것은 들 곧 세상이다. 그녀는 이제 세상을 초월하는 안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안목도 가지고 있다. 이제 그녀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도 흥미를 갖고 있다. 그녀에게는 소위 '자신'의 일이 없으며 사역의 '구역'도 없다. 모든 주님의 일이 곧 그녀의 일의 '범위'이다. 이제 모든 문제는 다 들의 문제이다.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동네'는 복수이다). 그녀는 이제 주님처럼 나그네의 성질을 지닌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집이 아니고 일종의 기거하는 곳인데, 이러한 기거하는 곳은 일정하지 않으며, 다만 동네에서 동네로 전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곳에서 길 잃은 양이나 상처 받은 사람을 찾으며 주님을 따른다. 주님과 동역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안목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마땅히 기거하는 성질과 실제를 항상 지켜야 한다.
12절에서 이제 그녀가 주의하는 것은 결코 자기의 포도원이 아니요 포도원들이다(여기의 포도원은 복수임). 이제, 그녀도 포도원들을 주의할 수 있다. 믿는 이가 일을 시작할 때, 그녀는 반드시 포도원들에 대한 유혹을 떨쳐 버리고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한 믿는 이가 자신에서 해방되어 나왔을 때, 비록 하나님이 특별히 위임하신 것이 조금 있고 하나님께 그것에 대해 특별히 책임져야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해방되어 포도원들을 주의해야 한다. 이제 주님의 일이 그녀의 일이며, 이전에 그녀의 일이 주님의 일이었던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무릇 주님을 위한 모든 것이 다 그녀의 관심사이다. 나는 그녀가 개인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사람들을 견고케 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자신의 포도원을 지킬 줄 아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른 아침'(원문 참조)은 우리에게 그녀의 근면함을 보여 준다. 주님의 일에 있어서 이른 아침의 일이 적지 않다. 게으름은 영원히 주님께 속한 생활의 성질이 아니다. 반대로 영적인 사람만이 비로소 근면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활동은 혈기로부터 나온 것이나 또 어떤 종류의 피동적임은 옛 창조로부터 나온 것이다. 육체의 살아 있음은 하나의 극단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거절해야 하지만, 어떤 종류의 피동적임은 게으름의 별명으로서 참으로 옛 창조로부터 나온 또 하나의 극단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게으름과 근면은 다 시간을 그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구속하라는 것이 사도의 명령이다(엡 5:16, 골 4:5).
그녀와 주님이 포도원에 내려온 것은 "포도가 움이 돋아 꽃이 피었는지 석류 꽃술이 피었는지"를 보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주님과 함께 생명의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며, 함께 그곳에서 주의하는 것은 열매가 있으리라는 소망이다. 이제 그녀는 이미 자신에서 해방되었으므로 모든 믿는 이의 일이 다 그녀의 관심사이다. 아주 어린 믿는 이에게서 생명의 증거가 조금이라도 나타난다든가 혹은 결실의 소망이 보이면, 그녀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본다. 현재의 문제는 결코 이러한 사람을 누가 인도하는가가 아니며, 또한 그들이 우리 집회에 속한 사람인가의 여부도 아니며, 다만 그들이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이다. 일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이런 종류의 교통은 생명에서 주님과 완전히 연합된 후에 있다.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거기서'는 어디서인가? 곧 들 안에서, 동네 안에서, 포도원 안에서, 즉 주님의 일 안에서이다. 주님의 일 안에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겠다'는 것은 당신의 일 안에서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나타내겠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기묘한가! 과거에는 일이 항상 그녀로 마음이 나뉘게 했다. 돌보아야 할 일이 많으므로 주님의 발 앞에서의 교통을 잃었다. 어린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일은 그녀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주님과 거리가 생겼다고 느끼게 하는데, 이것은 다 불완전한 연합의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서 그녀의 체험은 이미 완전한 단계에 들어갔으므로, 그녀는 능히 주님과 주님의 일을 연합시키고, 세상 사람과 주님을 연합시키며, 형제와 주님을 연합시킬 수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녀는 주님이 일하시는 곳에서 주님을 향하여 그녀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 이제 그녀는 비로소 그녀의 일을 그녀의 주님을 향한 사랑의 표시로 삼을 수 있다. 이제 그녀는 일을 한 후에 자기가 어떤 일에서 주님의 어떠함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자책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13절). 합환채는 사랑을 상징하는 식물로(창 30:14-16) 부부 사이의 연합을 나타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이 이러한 단계에 이를 때 합환채는 향기를 토할 것이다.
"우리의 문 앞에는". 이것은 아주 편리한 곳을 말한다. 비록 그녀는 동네마다 여행하지만, 이것은 결코 열매를 찾으러 멀리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 앞'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배해 주시는 곳으로서 열매가 있는 곳이다.
이제 그녀가 주의하는 것은 똑같은 열매만이 아니라 각종 열매이다. 그녀가 아직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에는 그녀가 인정하는 종류의 현상이 아직 어떤 사람에게서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녀는 아마도 결코 이 사람이 열매 맺었다고 시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아름다운 실과는 한 가지만이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을 안다. 새것이 있고 낡은 것도 있다. 그녀는 이제 각양의 사람이 결실하는 열매가 각양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이제 각종의 사람들이 영접하는 주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고, 그들이 얻은 새 창조도 하나이지만, 그들은 오히려 한 종류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참으로 빛이 결실케 한 열매는 모든 양선과 공의와 성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수확은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일의 결과는 본래 자기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 안에서 우리가 주님과 동역했지만, 영광은 오히려 주님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