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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이 ‘더위조심하세요’인 요즘, 하나의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샘물 조정해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한 소행주는 공동텃밭이 옆에 위치해있어, 불어오는 맑은 공기가 피크닉을 온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소행주의 옥상에서 나눈 공동육아에서 시작한 활동이 점차 마을활동으로 확대되어 이제는 서로의 비빌언덕이 되어주겠다는 조정해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소개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2014년, 엄마들끼리 아이들 가정보육을 하는 품앗이육아 활동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마을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탐색하며 살고 있는 배꼽친구 활동가 조정해입니다.
함께 크는 배꼽친구로 공동육아 활동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제일 처음은 둘째가 두 돌 무렵 때쯤 됐을 때였던 것 같아요. 보통 그 정도 되면 이제 엄마들이 기관에 보내려고 하는데 기관 보내지 않고 가정보육을 하면서 아이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어요. 그러던 중 인터넷 카페에 어떤 분이 품앗이육아 같이 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글을 올리신 거예요. 그래서 그거 보고 ‘나랑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그때 같이 모여서 10가구 정도가 함께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집에서 혼자하기 힘든 밀가루 놀이 등을 하다가 점점 아이들이 크면서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야외활동을 했었어요. 산으로 도시락을 싸갖고 다녔는데 추운 겨울날 다 식어빠진 밥을 먹어도 함께 있을 때 되게 행복했어요.
그렇게 함께 활동을 하다가 공동육아라는 사업을 알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어린이집을 직접 만들려고 준비를 했었어요. 한 달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모여서 공동육아에 관련된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고, 어린이집을 위한 절차들을 서로 역할 나눠서 준비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마을도 알게 되었고 마을에서 하는 강의들이 있으면 참여해서 평소에 듣지 못했던 마을에 관련된 이슈나 소식들을 알 수 있었어요.
근데 강의를 참여할 때 아이들도 데리고 갔어야 했었어요. 거의 두 돌 전후인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아이들을 챙기느라 힘이 들었어요. 강의를 듣고 싶은데 아이도 챙겨야하고, 아이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폐가 될까봐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저희가 강의 주최하시는 분에게 ‘아이들을 돌봐주는 돌봄 선생님이 계셨으면 좋겠다.’라고 요청을 했고 그래서 그 이후에 마을에서 강의 있을 때 아이돌봄 선생님이 생겼어요.
이렇게 마을에서 계속 함께 하다보니까 처음엔 내 아이한테만 집중되었던 관심이 점점 내가 살고 있는 주변과 우리 지역의 이슈, 우리 사회의 문제로까지 확장이 되더라구요. 처음에 되게 소소하게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판이 커졌어요.(웃음)
처음에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굉장히 많이 했을 것 같아요.
네. 배꼽친구 협동조합도 만들고, 다른 지역에 공동육아 어린이집 사례를 알게 되면서 성미산 마을에 탐방도 갔어요. 그곳을 보면서 ‘우리도 나중에 저렇게 모여 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거주하고 계신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이하 소행주)도 공동육아 어린이집과 관련이 있다면서요.
2014년 11월 정도였어요. 그때 2015년 1월 정도에 저희한테 소행주라는 공동체 주택을 만드는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중랑구에 공동육아 어린이집과 공동체 주택을 만들 건데 같이 진행해 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었어요.
제안 오기 한 달 전쯤에 저희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해보려고 어느 아파트 1층을 알아보고 있던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그때 마침 소행주에서 그 연락이 와서 어떻게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제안이 오냐고 막 들떠 있었어요. 이곳에서 우리가 꿈꾸던 그런 공동체 활동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주택이 아직 정해진 바가 많지 않고 법적인 문제 같은 것도 걸려서 원래는 2016년 4월쯤에는 입주를 하는 거였는데 예정보다 1년 정도의 시간이 비게 되었어요. 허가 나는 데만 해도 시간이 한참 걸리면서 사람들이 막 지쳐 갔었죠.
그러는 중, ‘여기에 들어갈 어린이집은 만든다고 했는데 그동안의 기간이 이제 비니까 그러면 그동안에 잠시 동안 우리가 활동할 공간을 찾자.’ 해서 망우동에 그냥 한 13평 정도쯤의 일반 다세대 주택 1층을 하나 구했어요. 그래서 그곳을 공동육아 나눔터라고 하면서 저희가 애들이랑 같이 모여서 활동을 했어요.
망우동에서 활동하면서 소행주에 공동체주택을 지으려면 저희가 일반적인 모임이 아니고 어떤 법적인 지위를 가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부랴부랴 막 협동조합 관련 강의를 들었어요. 아이돌보는 것도 병행해야하는 터라 저희 멤버들 반을 나눠서 반은 애들 돌봄하고 반은 교육 들으러 가고 그렇게 한 구성이었어요. 집에 애들 한 열 몇 명이 모여가지고 엄마들이랑 같이 돌 안 된 아기부터 한 여섯 일곱 살 애들까지 다 같이 돌보고, 이렇게 까지 하면서 협동조합 관련 교육 이수하고,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망우동 공동육아 나눔터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곳이 망우산하고 되게 가깝고 바로 옆이 놀이터여서 좋았어요. 거의 일주일에 고정적으로 서 너번은 만났던 것 같아요. 게다가 운영진들은 더 자주 만나니까 정말 한 달 스케줄이 빽빽했어요. 그걸 보고 남편들이 도대체 뭐 하고 다니냐고 그러면서도 대신에 이렇게 애들이랑 같이 활동하고 막 이것저것 바쁘니까, 저는 그 활동하면서 남편하고 사이가 되게 좋았었어요. 마주치지 않아서. 그래서 공동 육아가 가정의 평화를 가져왔다. 라고 생각해요.(웃음)
그리고 제가 공동육아 활동하기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다들 가정적인 그런 남편들이 많았어요. 여유시간이 있을 때마다 애들이랑 같이 함께 아빠가 놀아주는데 저희는 남편이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못해줘서 같이 모였을 때마다 조금 위축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근데 공동육아 활동하니까 저랑 비슷한 엄마들이 많은 거예요. 그러다보니 남편 없이도 우리끼리 아이들과 충분히 즐겁고, 우리끼리 서로 더 끈끈하게 이어져서 즐거웠던 것 같아요.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서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 같아요.
네, 그렇게 활동이 넓어지는 중간에 내부에서 갈등이 있기도 했었어요. ‘우리가 원래 우리 애들 잘 키우자고 시작한 건데 왜 자꾸 또 다른 일들이 더 많아지는 거지.’, ‘이렇게 하면 나는 너무 힘들 것 같아.’ 그런 얘기가 나오기도 했어요. 그런데 또 돌이켜보면 이게 결국은 이런 마을의 문제나 내 주변에 이런 게 결국은 나의 삶, 내 아이랑도 연관돼있기 때문에 이런 거를 모른 채 지나갈 수 없고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 안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거든요. 그래서 내 아이하고 하는 활동만 하고 싶다 하시는 분들은 결국 그런 활동에 맞는 곳으로 가신 거죠. 그래서 지금은 마을과 같이 연대하고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거의 대다수가 되었어요.
초기에는 저희 안에서도 이제 새로 서로 모여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면서 가치관을 만들어갔고, 그 과정 안에서 서로 생각들이 많이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 그런 부분들을 맞춰 가면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이런저런 일들을 함께하면서 기억에 남는 활동도 많을 것 같아요.
저희가 이렇게 끈끈해질 수 있었던 게 같이 육아를 하면서 생기는 동지애 같은 것도 있겠지만 모임 시작한 첫 해애 갔던 엄마들과 아이들이 함께 갔던 여행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아빠 없이 여행을 가본 게 전부 다 처음이었어요. 돌쟁이서부터 한 네다섯 살 그 정도 되는 애들까지 있었어요. 애들이 잘 놀 줄 알았는데 낯선 곳이니까 막 밤 되니까 애들 막 찡찡거리면서 너무 힘들다고 중간에 집에 가신 분도 있었어요. 그때 전부 다 지옥을 경험했다 그랬거든요. 근데 그 이후에 ‘너무 힘들었는데 또 가고 싶어’ 그 얘기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힘든 와중에서도 애들을 조금 재워놓고 엄마들끼리 얘기를 나누면서 조금 더 서로에 대해서 얘기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면서 더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모임에 소속감이 생겨 더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고정적으로 저희 1년에 한 두 세 번 정도는 여행을 가게 됐어요. 그렇게 여행 가니까 제일 수혜를 받은 게 아빠들이었죠. 아빠들은 완전한 자기만의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니까 이제 아빠들이 또 여행 언제 가냐고 물어보고.(웃음)
그리고 2015년도에 망우동의 그 공간에서 활동을 했었을 때였어요. 그때 저희가 서울시 공동육아 활성화 지원 사업으로 사업계획과 활동계획을 열심히 짰었어요. 사업비도 받아서 하니 퀄리티도 좋아져서 ‘사람들이 몰려들면 어쩌지, 이 공간이 너무 좁은데 선착순으로 모집해야하나’하는 고민도 했었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사업 시작 땡 했는데 메르스가 터진 거에요. 거의 한 달 정도 모임을 쉬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조금 잠잠해졌을 때, 다시 시작했는데 그때가 7, 8월이었어요. 그 공간을 구할 당시에 곧 소행주에 입주할 거라 1년 밖에 있지 않을거니까 에어컨 설치하지 않았었어요. 근데 그 공간에 어른이랑 애들이랑 스무 명 가까이 북적북적하니 애들도 너무 힘들었죠. 그래서 애들이 막 울고 막 그러고 있는 와중에 집 주인이 건물 청소하러 왔다가 애들이 울고 있는 그 현장을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나가달라고 그러기도 했어요. 근데 그 공간 구하는 것도 되게 힘들었어서 정말 죄송하다 저희 조심하겠다고 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그때 생각해낸 방법이 근처 물놀이터를 돌아다니는 것이었어요. 그때 중랑구에는 없었는데 별내나 구리 쪽에는 물놀이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만의 방법으로 여름에 일주일에 한두 번은 물놀이터를 다니게 된 거예요.
문제를 이렇게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전환시키셨네요.
네, 그리고 물놀이터를 다니면서 애들과 놀다보니 물놀이터의 문제점 같은 것도 보이게 되었어요. 환경 문제 등으로 오래 된 재질의 그런 바닥들이 괜찮을까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고 하면서 지역에 의견을 보태었어요. 이렇게 우리가 여기저기 다녀보면서 마을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조금이나마 환경이 개선되는 데에 우리가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 싶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또 다른 활동으로 놀이터 축제를 했었어요. 처음에 했을 때는 그냥 ‘어른들이 주도로 애들한테 놀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마을에서 남녀노소 다 같이 한데 어우러지는 그런 행사가 있었으면 좋겠다.’해서 놀이터 축제를 기획했어요. 놀이터에서 축제에서는 간식거리들을 돈으로 주고 사는 게 아니라 놀이를 해야지 받은 쿠폰으로 간식을 구매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한 번 하고나니 다음에는 아이들이 직접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해보고 싶다 해서 참여했던 초중고 학생들이 부스 만드는 거나 진행도 같이 해서 놀이터 축제도 1년에 두 번 정도는 고정적으로 했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이제 코로나 때문에 못 하고 있는 게 아쉽네요.
그때 놀이터 축제에서 만난 친구들이 중고등학생 아이들도 많았는데, 저는 그 전까지만 해도 중고등학생들 지나가는 아이들 조금 약간 위축되고 막 그랬거든요. 그런데 놀이터 축제로 학생들하고 자주 마주치고 그 아이들하고 얘기 나눠보고 나니 걔네들도 좀 몸집만 컸던 것 뿐이지 그냥 동네 아이들인 거예요. 그래서 좀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너그러워졌다고 해야 될까요.(웃음)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니 놀이터 축제에 같이 참여했었던 송곡고등학교 남학생들이 학교 체육관에서 마을에서 공동육아 활동을 하는 엄마들을 위해서 행사를 기획해줬었어요. 그 친구들이 ‘엄마들은 그냥 오셔서 그냥 구경만 하세요, 아이들하고는 저희가 놀아줄게요.’ 했었어요. 그때 너무 마음이 감사했어요. 본인들도 힘들었을텐데 계속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같이 협동해서 할 수 있는 활동들, 그리고 엄마들을 위해서 한 편에 음료랑 다과를 준비해서 ‘이 아이들이 정말 자기들이 누군가에게 받았던 배려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하는구나, 이래서 마을에서 선순환이 이루어지는구나.’ 싶더라고요.
그리고 저희가 첫 해부터 계속 텃밭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애들한테 생태적 감수성을 길러주고 직접 기르는 그런 수확의 기쁨도 애들한테 느껴보게 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생각해 보니까 오히려 저희가 얻는 게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마트 가서 포장되고 그런 거 사보기만 했지 직접 길러보는 경험들이 다들 별로 없었고, 김장도 처음 해보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첫 해에는 저희가 농사지은 작물로 김장을 했어요. 그때 처음 김치 이렇게 먹어본 친구가 그전에 안 먹었다가 그날 이후로 김치를 잘 먹게 되고, 텃밭에서 감자를 수확했는데 감자 싫어하는 아이가 이 감자는 너무 맛있어 하며 더 먹기기도 하게 되더라고요. 텃밭으로 아이들도 변화하지만 부모들도 기존의 소비적인 문화에서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그런 걸 재미를 느껴보기도 하는 것 같아요.
텃밭을 하면서 제가 매일 아침 단톡방에 오늘 고추는 이만큼 자랐고 토마토는 이렇게 됐고 하면서 올려주는 걸 보고 샘모닝(별칭이 샘물이에요)이라고 얘기해주기도 하고, 제가 그렇게 올리는 걸 보고 또 다른 분이 캘리그라피로 작물들 사진과 간단한 시 구절을 올려주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또 얼마 지나니까 어떤 분이 그 텃밭에 오고 가는 우리 멤버들 사진을 가끔씩 이렇게 올려주면 그걸 또 인물화를 그려서 올려주었어요. 그래서 텃밭이라는 하나의 매체로 여러 가지 활동이 이어지고 우리 안에서 자기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느꼈어요.
작년에 멤버 중에 넷째를 임신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임신한 와중에도 텃밭에 대한 공부를 꼭 하고 싶었다고 텃밭 관련 자격증에 새로 도전도 했어요. 그리고 그 분의 베이비 샤워도 텃밭에서 해줬어요. 축하한다고 아이들이 풀꽃을 근처에서 꺾어 와서 풀꽃다발 만들어서 전달해 주고 엄마들은 롤링페이퍼로 임신 축하한다. 메시지 써서 그분한테 전해주고 그랬어요. 그날 너무 덥긴했지만 정말 평화로웠어요.
그렇게 마을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하니까 든든하고, 중랑구에 더 오래 살고 싶다 그런 생각도 생기는 것 같아요. 그 전까지만 해도 엄마들은 교육 때문에 ‘초등 4학년 되면 광진구나 노원구로 가야 돼.’ 그런 얘기들 되게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중랑구 안에서 하고 싶은 활동들도 많이 늘어나고 중랑구 안에서 역할들이 많이 생기기게 된 것 같아요. 공동육아로 시작한 마을활동으로 어떤 분은 마을지원센터에서, 어떤 분은 마을지원활동가로, 또 어떤 분은 생태활동가로 활동했어요. 이렇게 마을에서 놀았더니 마을에서 직업이 생기고 저희는 집도 생겼어요. 이전까지 상상도 못 했을 일들을 마을에 와서는 많이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힘들 때나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급할 때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지만 그만큼 나하고 가까이 지내고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족이 생긴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현재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함께하지 못하였지만 ‘우리 나중에 늙어서 요양원을 같이 만들어보자.’하고 꿈을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힘이 되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사람의 힘이 제일 크다고 느껴요. 배꼽친구 멤버들은 누군가 어떤 활동을 한다고 할 때 ‘아니야 그거 잘 생각해 봐. 현실적으로 안 되는 거야’라고 얘기하지 않아요. ‘너 그거 잘 할 거야.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힘내 언제든지 도움 필요하면 얘기해.’라고 해주죠. 지지와 응원을 가까운 사람들한테 받았을 때 더 큰 힘이 나잖아요. 그리고 내 능력을 좀 인정받는 거 같고, 내가 뭘 하고 싶을 때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저희들도 활동하다 보면 생각했던 바와 다르게 가는 경우들도 많았어요. 그래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이렇게 해서 결국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이만큼 노력한 거는 되게 의미 있었어’라고 같이 얘기할 수 있는 것, 그러면 또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마을 활동 할 수 있는 힘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해요. 작년에 코로나로 저희 가족이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 나갈 수 없어서 힘들었는데 배꼽친구 멤버들이 반찬과 간식, 아이들 놀이할 장난감까지 수시로 집 앞에 전해주고 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정말 가슴이 뭉클했어요. 남편도 감동받았더라고요.
인복이 굉장히 좋으신 것 같아요. 혹시 이런 활동을 하시면서 이것만큼은 지키겠다 하는 기준같은 게 있으신가요?
함께 한다는 것, 공동체를 위해서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해요.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공동체를 위해서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 같아요. 공동체를 위해서 했을 때가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하기도 해요. 내 개인의 욕심을 위해서 하다 보면 나에 대한 비난, 좌절감 등 여러 가지 불편한 상황들이 생기기도 하는데, 공동체를 위해서 한다고 하면 ‘공동체를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잘 안 될 수도 있지, 그래도 우리가 같이 공동체를 위해서 한 거니까 다음에 또 다른 기회 있을 때 도전해보자’라고 조금 내려놓고 할 수 있는 편안함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아요.
긴 시간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마을에서 만날 분들에게 한 마디 해주시겠어요?
마을에서는 내가 손 내밀면 누군가는 나의 손을 잡아줄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 전에 마을활동을 하기 전에는 그냥 누군가와 관계 맺는 게 정말 좀 주저하게 되기도 했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 만나게 됐었고 그 사람들한테도 정말 깊은 내 얘기까지 들어내는 거는 조금 약간 불편함이 있었어요. 왠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나의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그런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마을활동하면서는 ‘나의 부족한 면을 보여도 저 사람이 나는 이해해 줄 거 같다.’ 라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 같아요.
누구라도 자기한테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함께할 힘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마을에서 첫 발을 내딛는 누군가에게 제 능력 안에서 비빌 언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내가 당신의 비빌 언덕이 되어드릴게요.’ 라고 말해드리고 싶어요.
누구라도 자기한테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함께할 힘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마을에서 첫 발을 내딛는 누군가에게 제 능력 안에서 비빌 언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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