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섭의 이메시스 : 풍경의 인류학, 혹은 인류학적 회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을 졸업하였다.개인전 25회, 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99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 초대 서울미술대전(시립미술관), France국제미술전(파리.그랑팔레), 한국현대미술 현재와 미래전(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광화문 국제아트페스티발(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 참가하였다. 상형전 회장,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광화문 아트포럼 회장, 상형전 고문, (사)한국미술협회 고문,(사)한국전업미술가협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그림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심지어 그것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보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런데 보지 않고 어떻게 회화를 조우한다는 말인가?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영상을 떠올려야 가능할까? 그러면 어떤 소리가 들려올까? 이러한 의문들과 함께 신종섭의 회화를 보게 되었다. 1960년부터 2009년까지의 화업을 그는 『산의 소리』라는 명제로 정리했다. 2011년 전시에서는 어떤 변화를 모색하면서 ‘자연의 소리’라고 명명했었다. 2017년 10월에 있을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그는 그 두 명제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산과 자연이라는 구분이 더 이상 불필요하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소리라는 어휘는 지속되고 있는데 이 지점이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어떤 암시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언어는 필수적이다. 그것이 어떤 형식을 구사하는 경우에도 예외적이지 않다. 그래서 소리는 그 수단으로서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른바 말을 건넨다는 의미이다. 그림이 말을 걸어오면 우리는 들어야 한다. 일종의 복종이다. 내어맡기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신뢰의 단계가 필요한데 그 정도가 안주 높아야 가능하다. 무장 해제된 마음의 상태에서 만나는,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을 때 오히려 언어도단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그림의 말을 듣고 응답하려고 노력을 시도해 보는게 예의일 것 같다.
형상에 대한 언급이 그 출발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척 봐도 산을 그렸다고 판단하는 것이 틀린 상황은 아니다. 첫인상이 지속되기는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 이루어지는 아미지의 구축은 전혀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 현상이 육체적인지 관념적인지 알기는 어렵다. 오히려 심상의 움직임에 대한 반응으로 창출된 영역으로 파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산으로 여겨지는 형상이 시지각에 파악됨으로써 쾌락과 함께 어떤 사유에로 이끄는 체험을 하게 하는가? 선의 흐름이 그런 선입견을 유도하는 것일까? 동아시아 회화미학에서 강력하게 자리 잡은 ‘산수’의 이데올로기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공동체의 전통 혹은 에토스와 연관되는 사항이다. 존재로서 자연이 형태화된 상황에서도 고향처럼 그리는 실향민의 그리움 같기도 하다.
산수화에서 산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이미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회화로서 추상미술이나 개념미술과는 맥락을 같이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가 신종섭이 산을 선택해서 그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미술대학 시절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수화 김환기의 제자였다. 모던 페인팅에 대한 추구에서 이른바 구상 계열에로 전회한데 대하여 당시의 풍토를 들어 설명했다. 작가로서 근대성에 대한 회화적 모색과 상충되는 이른바 생활환경 말이다. 전통적 미의식과 병존하는 절충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감각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자신의 회화 세계를 밀고 나간다. 오히려 익힌 것들을 끊임없이 사용한다. 과잉에 의한 모험이나 허망한 실험보다는 동아시아 미학의 절제를 수행한다. 그리고 점점 장식성의 배제와 단순성에 대한 지향을 보여준다. 기어코는 산속으로 사람이 들어갔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경지이다. 이것은 인공과 자연의 조합으로서 인간에 대한 자연의 요청을 수용하는 자세로서 그동안 비껴나 있던 관념성을 드러낸다. 상징성을 가진 사물들로 자신의 의도를 조직하고 제시하는 방식은 이전에 무리스럽지 않게 이미 보여줬지만 이제는 전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훨씬 구축적이며 강력하다.
단순한 형상의 반복은 지속성을 상징한다. 산과 인간이 서로 스며든 상태가 반드시 어떤 조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산의 소리가 메아리로 한정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각 개체들에 대한 존중으로는 여겨질 수 있다. 혼자 소리치고 심통 부리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는 제스처들이 모인 장면들이다. 관계들은 대개 무리하지 않고 수용하는 입장에서 유지하게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화면은 파격보다는 점잖은 포즈를 취해왔다. 자신과 사회 그리고 감상자에 대한 배려이다. 이러한 바람은 동시대 회화에서 잊혀지거나 무시되기 쉬운 미덕이다. 예의바름이 흥미롭지 않은 대상이 되면서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해졌다. 그러한 모색만큼이나 조형 의식에 대한 옹호 또한 보호되어야 한다.
산이 산을 버릴 수 있을까? 인간을 받아들이면 산은 산이 아닐까? 오히려 산이 인간으로 내려온 것은 아닐까? 형상으로서 산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상징으로서 산의 이미지를 벗고 반복과 지속이라는 관념성으로 ‘신종섭의 소리’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이가 나더라도 끊임없이 곁에서 관계를 지속하다보면 닮는다! 이것은 이상한 미메시스이다. 인간이 세계와 맺는 특수하고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미학적으로 모방이라는 의미로 한정하지 않고 인류학적 차원으로 확대한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주체가 주변 세계와 관계하는 속에서 발생하는 접촉은 다른 발생을 낳는데 그것은 모방이라는 행위의 특징이다. 이것은 세계와의 감각적인 신체적 접촉에서 구축이 이룩된다는 의미로 이러한 행동은 구체적인 인지과정을 거치기 전에 일어난다. 어쩌면 그가 지속해온 미학적 태도의 견지가 인류학적 차원으로 전위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좀 길지만 군터 게바우어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신종섭에게 아주 적절하고 유효해 보인다. “미메시스는 모방된 것이 예술가의 행위에 이미 나타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맞지 않다. 오히려 예술가가 모범(즉 대상)속에서 이 모범이 그때까지 인식할 수 없던 방식으로 이미 지니고 있던 일정한 특성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미메시스틑 모범에서 독특한 특징들을 발견하는 예술가의 행위로서, 예술가는 이 특징들을 자신의 작품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미메시스가 모방된 것을 비로서 현상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미메시스가 진실이다 혹은 허위다라고 말할 수 없다. 미메시스는 진실과 허위 사이의 인식론적 구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메시스틑 세계 속에 이미 현전하는 것을 단순히 따라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까닭에 모방하는 작품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허위인지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메시스틑 행위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상당부분 실턴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메시스는 이론이나 이론적 직관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의 구분 이전에 존재한다.”
스스로가 찾아낸 이미지의 미메시스는 형상이라기보다는 심상에 가깝지 않을까? 신종섭은 그럼에도 어떤 신화로의 퇴행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관념에 의한 합리성의 강요에 나서지도 않는다. 여전히 절제와 균형의 화면을 운영할 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면서 동시에 타인이 된다. 화가로서 화면을 구성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도 화면의 일부로서 이중적 사용을 통해 구성되어진다. 그러한 스며들기는 어떤 애매모호라기보다는 관계에 대한 이해 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장소이다. 화면에서 이룩한 방식을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경우에 적용해 사용할 줄 알게 된다. 무장 해제된 마음의 상태에서 만나는,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을 때 오히려 언어도단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그림의 말을 듣고 응답하려고 노력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신체이미지를 다른 신체의 이미지로, 즉 다른 사람의 신체이미지로 만들 능력이 생겼다. 이러한 일반화의 과정에서 이해의 포용력이 자신과 타자를 감싸 안게 된다. 이렇게 이룩되는 공동체는 아마도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최초의 대상이고 일종의 기초적인
미메시스일 것이다. 구상적인 세계에서 산이 나중에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지니는 이미지가 되는 것은 분명히 우연이 아니다. 작가가 평생을 모색하며 스스로에 대하여 만든 이 표현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글- 김병수 미술평론가
계시와 탐미 사이의 ‘산(山) 그리기’
신종섭 화백은 1985년부터 산(山)을 그려왔다. ‘산의 고리’를 듣기 위해 전국의 산을 돌았다. 각각의 특성들을 수집하고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작가는 오히려 그것들을 넘어서는 원형으로서의 산을 추구한다. 신종섭의 조형적 직관은 복수의 산들에서의 그것의 내부에서 그긋들을 관류해 흐르는 하나의 산을 본다. 그가 복수의 ‘산들(mountains)’을 그리더라도, 그것들은 언제나 ‘하나의 산(the mountain)으로 귀결한다.
그것들의 형(形)과 색(色)은 마치 속세를 덜 듯, 미시적 세부를 털어내고 원형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그 원형은 놀랍게도 <자연의 소리-관계>(2015)에서 보듯 인간의 모습과 겹친다. 신종섭의 세계에서 산은 인간이고 인간은 산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신종섭이 산들의 형태를 탐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산들은 분명 그에게 미적 탐미의 대상이다. 작가는 산의 형태를 변형하고 추상화한다. 부드러운 산세를 더 부드럽게 하거나 치솟은 봉우리를 더욱 치솟게 하면서 그 모성과 부성을 음미한다. 색을 덜어내기도 추가하기도 하면서 그 산의 생기와 활력을 조율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산은 말한다. 이번에 잠잠히 들어야 하는 쪽은 사람이다. 이번에는 산이 말하고 사람은 들어야 한다. 대상화되고, 객관관되어야 하는 쪽은 오히려 사람이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모든 인생사”가 산에 새겨져 있음을 작가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산은 그 앞에서 스스로를 자신의 삶을 반추하도록 하는 거울이다.
그러니 산을 핑계 삼아 인간의 소음을 반복하려 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산으로 말하도록 입을 닫은 채 말이다. 이 때 산은 더는 탐미와 모색의 대상이 아니다. 영겁의 시간을 머금은 그것이 어떻게 단지 형태요 색채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렇게 감상되어서도 안 되고 묘사될 수도 없다. 신종섭의 산 그림은 이러한 사유와 결부되어 있다. 산은 재현되지 않는다. 재현되는 것은 오히려 재현하는 이다. 이것이 산의 존재적 신비요 은혜다. 예컨대 산세를 부드럽거나 격하게 산세를 휘감아 도는 바람의 묘사를 시도해 보라. 그것은 어느 덧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들어야 할 계시로 다가옴을 알 수 있다. 신종섭이 산 그림이 독창적이라 할 때 그 의미는 이중적인 것이 되는 것이 이런 의미에서다. 그것은 산의 그림인 동시에 산을 그리는 이를 그린 그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심상용 /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신종섭은 산의 웅장한 자태에 매료되어 이의 기운과 역사성, 그리고 형식적 접근 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책과 빛, 형태와 물질을 탐색해 왔다. <산의 소리>라고 명몀된 이 연작들은 격정적인 색면에 매몰된 듯하다가도 여전히 스스로 형태론적 위상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킨다. 강렬한 색면 위에서 다시금 물감의 편린들이 드러나고 화면 안에서 각기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점유하던 유형 ·무형의 형태들은 색채의 파고에 휩싸이면서 강한 생명성을 띠며 일체화 된다.(···)
그는 자연의 대상이 갖는 형상성을 염두에 두면서 물감 자체의 변주와 유 ·무형의 형태가 갖는 서로간의 긴장관계에 주목한다.
캔버스의 선택에서부터 작품의 마무리에 이르는 그의 작업과정은 지난한 노고와 반복적인 작업, 그리고회환과 희열이 서로 교차하는 긴장과 이완의 상충점이 된다. 물론 이 점은 대부분의 화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종섭의 경우 이미 구상 작업으로 그림을 시작했고, 이에 만흥ㄴ 애착을 떨궈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더이상 형상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보다는 형태의 차원뿐아니라 정신과 조형,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의 이중적인 차원까지 포괄하는 시각에 접근함으로써, 회화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신종섭의 산과 자연」 中에서
미술평론가 이경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