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삶은 끝나다
붓다께서는 우루벨라(Uruvela) 마을의 네란자라(Neranjara, 尼連禪河) 강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는 성도에 관한 여러 경전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동일합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약간 다른 점도 있습니다. 붓다의 성도와 관련하여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항마(降魔)의 이야기는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항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경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아함의 <라마경(羅摩經)>과 이에 해당하는 팔리어로 씌어진 <아리야빠리예사나 숫따(Ariyapariyesana Sutta, 聖求經)>에서는 항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오직 깨달음만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석존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의 곁을 떠나 마가다(Magadha)국을 편력하던 중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Senanigama, 將軍村)로 갔습니다. 그곳은 수행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석존은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수행정진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자리를 깔고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출가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자기의 몸이 '태어난다'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이 태어난다는 것에 불행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태어남을 초월한 최상의 평안, 즉 열반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몸이 '늙는다'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병에 걸린다'는 자연의 법칙, '죽는다'는 자연의 법칙, '근심한다'는 자연의 법칙, '더러워진다'는 자연의 법칙, 이와 같은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그러한 존재 속에 불행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초월한 최상의 평안, 즉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때의 경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하여 내게 지견(智見)이 생겼다. 나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애이고 이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을 한역 <라마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생(生)은 이미 다하고, 청정한 수행은 이루어져, 소작(所作)도 모두 가려졌네. 다시 유(有)를 받지 않으며, 진여(眞如)를 알았다."
즉 과거로부터 무수한 생애를 두고 정진 노력한 결과가 성숙해서 여기 최고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므로 이제는 더 이상 생사윤회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온 생사의 유전은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맑고 깨끗한 수행은 완성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해놓았으며 또다시 생사를 되풀이함이 없이 최고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팔리문이나 한역 중아함 <라마경>에는 보리수 아래 앉기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 즉 마을 처녀의 공양, 강에서의 목욕, 길상초의 보시를 받은 일, 그리고 보리수의 일 같은 것은 전혀 적혀 있지 않습니다. 또한 마라 빠삐만(Mara papiman)에 대해서도 한마디 비치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일본의 불교학자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라마경>은 원래 부처님이 제자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수행시절의 체험을 말한 것을 기록한 경전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제자들의 수행에 직접 관계가 깊은 사항에 대한 설명에 주력하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밖에 통용될 수 없는 항마나 성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간단히 보살은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와서 경치가 아름다운 언덕진 숲속에 앉아 좌선,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 더러움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한 결과 그런 것들의 본질을 깨닫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만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가지 사건 특히 마라와의 싸움 같은 것은 전기 작가의 창작이라거나 후세 사람이 첨가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학자가 지금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불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도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라마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불타와 불전/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