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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Anscombe 의 사회학 이야기] 첫번째 : 개관
[Ms. Anscombe 의 사회학 이야기] 두번째 : 탄생 - 쌍둥이 혁명
[Ms. Anscombe 의 사회학 이야기] 두번째 : 탄생 - 과학으로 거듭나다
앞선 글에서는 사회학이 등장하던 시기를 역사적 배경, 사상적 배경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경제적 체제로 인한 변화 속에서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사회학의 등장 배경이었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을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믿음,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배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대를 지배하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에 사회학이 갖는 독창성이 있음을 덧붙였습니다.
사회학사를 공부하다 보면 피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번에 짧게 언급했던 세 사람, 칼 맑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켕입니다. 흔히들 오귀스트 콩트를 사회학의 시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사회학을 제대로 된 학문으로 만든 데에는 이 세 사람의 기여도가 가장 컸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콩트의 경우엔 3단계 법칙이네, 사회동학이네 정학이네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없고, 다만 역사적인 의의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사회학은 사회를 움직이는 법칙들을 파악한다는 기본적인 방법론적 입장만 알아두고 넘어가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선호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만, 일단 스펙으로보나, 인지도로 보나 1순위인 칼 맑스씨를 먼저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맑스와 과학, 그리고 유물론
일단은 맑스 또한 과학을 매우 강조한다는 점을 적어두고 시작합시다. 일반적으로 맑스는 근대를 뛰어넘은 사상가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만, 이 점에서 맑스는 대단히 근대적입니다. 그가 과학을 바라보는 방식 또한 그렇죠.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을 인식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콩트적인 사고에서 그리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이 점은 맑스 또한 계몽주의의 후손임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맑스하면 ‘사회주의자’라는 인식이 강하고, 열혈 운동가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만, 실제 그는 대단히 정교한 이론가였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이론을 세우는데에만 몰두했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만. 그는 자신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부르며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즉, 공상적 사회주의)와 구분하고 싶어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연과학의 성공에 고무되어 있었는데, 사회과학을 자연과학과 같은 과학으로 보자는 주장은 그의 사후에 엥겔스에 의해 강조되기도 합니다. 사회과학을 자연과학과 같은 과학으로 만들고자 한 시도들을 저는 ‘실증주의’(positivism)라 부를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제대로 다뤄보도록 합시다. 여하간 맑스 또한 실증주의적인 틀에서는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맑스 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유물론인데요. 흔히들 유물론은 관념론과의 비교를 통해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그림은 보통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우매한 질문으로 넘어가곤 하는데요. 그래서 유물론자들은 정신을 무시하는 ‘물질 만능주의자’로 여겨지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유물론과 관념론의 싸움은 무엇이 더 중요한가, 좋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더 근본적인가의 문제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두뇌가 없다면 생각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두뇌가 생각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폐가 없다면 숨을 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폐가 숨을 쉰다’고 하지 않습니다. 두뇌와 폐의 존재는 생각하고 숨을 쉬기 위한 생물학적 조건이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결코 아니죠.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삶의 목적이 먹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맑스는 ‘우선은’ 먹어야 산다는 걸 강조했다는 점에서 유물론자입니다.
맑스가 유물론을 채택하는 건 그가 실증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봤을 때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실증주의자들은 사회에 우리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법칙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즉, 정신, 관념)와는 무관하죠. 자연과학자들이 현상을 우리의 관념과 무관하게 특정한 법칙에 따라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맑스는 인간 사회에 이를 적용하고자 합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맑스의 유물론에 대해 그리 반감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그의 유물론이 논쟁이 되는 건 차라리 당시의 과학이 지금만큼 전문화되지 못했고, 과학에 대한 개념들이 세련되지 못해서였을 뿐이라고 봅니다. 맑스는 헤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철학의 관념론적 성향에 반감을 느끼고 유물론을 전개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유물론은 늘 관념론과의 대결 속에서 등장합니다만, 이를 맑스가 갖는 실증주의적 경향으로 보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훨씬 간단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헤겔 철학이라는 지극히 난해한 부분을 pass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자, 맑스에게서 유물론이라는 딱지를 떼어 버립시다. 인간 사회에 과학의 원리를 적용시키고 싶어했다는 게 맑스의 마음이었음을 기억해 두시고.
2. 맑스와 사회학 : 의식과 존재의 구속성
여하간 이 글은 사회학에 대한 글이니 왜 사회학에서 맑스가 다루어지는가에 대해 논의하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맑스가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너무도 방대합니다. 철학, 경제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미학 등등. 맑스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유 ‘방식’으로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맑스적’, ‘맑스주의적’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쓰이는 걸 보면 말이죠. 그런데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은 과연 ‘맑스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쓰는 것일까요? 단지 멋을 부리기 위해 그런 말을 쓰는 것은 글의 이해를 해칠 뿐이죠. 그렇다면 과연 맑스적인게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맑스가 사회학자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일단 맑스가 사회학자라는 것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사회주의는 그의 논리의 목적이 아니라, 논리의 결과입니다. 맑스의 논리의 핵심을 관통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정치적인 이념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가 우리의 의식과 존재가 갖는 사회 구속성을 간파했다는 데 있습니다.
근대 철학 분야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 인식론과 존재론입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라도 좋습니다. 여하간 의식과 존재라는 측면에서 맑스가 어떠한 수정을 가하는지 살펴보죠.
존재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근대적인 인간은 그 자체로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하는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출발점인 개인주의이지요. 근대의 탄생은 ‘개인주의의 탄생’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로크의 사회 계약론이나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모두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맑스는 이 점에서 근대적인 출발점과 궤를 달리합니다. 그는 인간은 그 자체로 인간인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인간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윤열은 이윤열이다. 특정한 맥락에서만 그는 프로게이머가 된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러한 생각을 해내기가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맑스는 어떤 한 인간은 특정 맥락 속에서 ‘어떠한 존재로 규정’된다는 점을 인식했습니다. 그 점에서 본다면 사람들은 그냥 자유로운 게 아니라 어떤 틀에서 자유롭습니다. 어떤 틀에서는 자유롭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요. 즉, 자유로움은 특정한 틀, 구체적으로 사회 제도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로써 맑스는 어떤 한 인간의 위치를 분석함에 있어 그를 둘러싼 사회제도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회과학적인 주장을 전개했다고 할 수 있죠.
의식의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맑스는 의식의 존재 구속성을 강조했습니다. 의식은 결코 나 혼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체적으로 관념을 만들어내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회 속에서 특정한 이념, 언어 틀을 학습하고, 이해 관계에 따라서 특정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 맑스의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바는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 조건들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맑스는 사람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이념들을 ‘이데올로기’라 부르고,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만드는 조건들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이후 사회학의 한 갈래로 발전하여 ‘지식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죠.
두 측면에서 맑스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건 사회관계, 사회제도입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조건’들이 중요하다는 거죠.
하지만 이러한 맑스의 주장이 역사상 처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상황 속에서 인간이 된다는 주장은 공동체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죠. 공동체주의자들, 특히 근대적 개인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은 집합적 존재의 중요성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정체성이라는 것도 이러한 집합에 속함으로써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죠. 그 점을 본다면 맑스의 주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맑스가 이들과 갈라서는 지점은 그가 근대 과학의 적극적인 세계 개입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계몽주의의 개인주의적 출발점은 거부했지만, 이성에 대한 믿음은 받아들였죠. 공동체주의자들은 주어진 집합, 환경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맑스는 그 환경 또한 인간적인 것임을 파악해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제도의 규칙을 알아낸다면 이를 개선할 수도 있다고 보았죠. 이 점이 맑스를 체제 유지를 꿈꾸는 보수주의자가 아닌 체제 변혁을 꿈꾸는 급진주의자로 만듭니다. 맑스는 그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우리는 지금껏 세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죠.
그는 이처럼 계몽주의의 낙관론을 받아들이지만, 그들의 개인주의적 출발점은 기각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는 개인들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비로소 ‘개인이 된다’고 보았죠. 맑스는 계몽주의자들이 인간이 태어나면서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한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사회 제도에 의해 주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예컨대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특정한 정치 제도에 의해 자유라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이명박이라는 노예가 있다고 합시다.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이명박은 ‘노예’입니다. 노예 아닌 이명박은 아무 것도 아니죠. 오로지 노예가 됨으로써 이명박은 존재 의의를 갖습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개인주의에 따르면, 이명박은 ‘이명박’입니다. 그는 노예가 아니라 이명박이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맑스는 이들과 다릅니다. 이명박은 노예로 태어난 게 아니라 노예 제도 속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본래적으로 그가 이명박인 것도 아니죠. 오히려 그는 노예라는 공동체주의자들의 말이 진실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은 이명박이 노예로 태어났다고 말함으로써 노예제도라는, 그를 노예로 만드는 실질적인 장치가 존재함을 감추고 있죠. 맑스는 이 점을 부각시켜, 이명박이 노예 제도 하에서는 노예이지만, 노예 제도를 벗어난다면 노예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자들은 단지 이명박이 노예가 아니라고 말할 뿐, 어떻게 해서 노예가 아닌지(현실에서는 분명히 노예인데도)는 말하지 못합니다.
3. 결정론과 자율성 사이에서
이제 결정론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만약에 맑스가 강조하는 사회적 조건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들이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 있을까요? 보통 이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데, 초간단하게 살펴봅시다.
맑스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이 우리들의 사고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하부구조라고 부르는 것이 이러한 조건들을 뜻합니다. 구체적으로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구성되는데, 이건 나중에 살펴보고, 그냥 일단 ‘경제적인 거’라고 이해하고 넘어갑시다.
사회에는 먹고 사는 문제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죠. 철학, 종교, 교육, 정치 같은 것들 말이죠. 맑스는 이러한 관념적인 요소들을 상부구조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특정한 이념을 생산하고 학습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죠.
맑스는 개인의 의식이 그를 둘러싼 조건들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았습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사회의 의식(이데올로기)도 그를 둘러싼 조건들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았죠.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입니다. 즉,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관계가 하부구조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고 볼 것인지,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조응한다고 볼 것인지에 따라 해석이 엇갈립니다. 완전히 결정된다고 보는 사람들은 경제 결정론에 속하게 되죠. 맑스 사후, 엥겔스와 경제적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었는데, 이에 반발한 사람들은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대해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네오 맑시즘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입장은 맑스의 사상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의식의 중요성을 끄집어내죠. 루카치, 그람시, 비판이론 등이 그러한 사고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입장이 대두된 배경에는 뒤늦게 발견된 맑스의 초기 저작이 자리하고 있죠.
각설하고, 결정론의 문제는 맑스주의 자체보다는 맑스에 대한 해석과 더 연관된 부분이므로 이 정도로 넘어갑시다. 취향에 따라 맑스를 골라 주문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죠.
오늘은 이 쯤 합시다. 다음에는 네오 맑시즘의 탄생을 일궈낸 맑스의 초기 입장에서 나타난 소외론,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역사 유물론, 맑스와 도덕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맑스와 사회학의 관계가 주제인지라 세세한 부분들은 pass 해 버린 감이 있습니다만, 뭐 더 얘기하고 싶으신 분들은 댓글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이번 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맑스는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을 간파했고, 이 점에서 사회학자이다’, 이것 되겠습니다.
출처 : www.pgr21.com
글쓴이 : Ms. Anscom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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