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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한량
 
 
 
카페 게시글
전통 활과 화살 스크랩 22.활. 활의 또 다른 변형 ‘쇠뇌’ / 우리나라의 전통무기
알로하 추천 0 조회 63 15.12.10 09: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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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Vinci "Design for a Giant Crossbow" (1485)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고안한 석궁

 

 

우리나라의 전통무기

 

22. 활

 

활의 또 다른 변형 ‘쇠뇌’

 

쇠뇌란 활과 비슷하지만 손과 팔 힘이 아니라 기계적 힘으로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다. 서양에서 10세기 전후 석궁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이 무기는 동양에서는 쇠뇌라는 이름으로 기원전부터 꾸준히 사용되어 온 무기이다. 쉽게 말해 쇠뇌란 기계적 장치를 이용하는 활이라 보면 된다. 서양의 석궁과 유사하나 서양의 석궁은 쇠뇌보다는 그 의미가 훨씬 좁다. 석궁은 쇠뇌라는 큰 범주에 속하는 일부일 뿐이다.

 

쇠뇌는 기본적으로 나무와 철로 만들었고 화살을 장전하고 명중률을 보장하는 홈과 활, 그리고 시위를 풀어주는 방아쇠 등으로 구성된다. 가장 큰 특징은 쏘기 전 미리 시위를 당겨 놓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조준과 발사가 가능했다는 점과 활과 달리 사용자의 팔 힘에 상관없이 일정한 강도로 발사되는 점이다.

특히 활은 익히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만 쇠뇌는 단기간에 훈련이 가능하여, 단기간의 훈련과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60m에서 300m 거리 내의 표적에 화살을 명중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훈련되지 않은 병사가 사용하기에는 쇠뇌가 활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다만 한발 쏘고 난 뒤에 재장전과 발사까지 이르는 시간이 오래 걸려 발사 속도가 활보다 훨씬 느리다.

 

Battle of Cr?cy . 크레시전투 기록화에 나타난 석궁수. 당시 프랑스군 대열 속에는 제노바인 석궁수가 6천명이나 있었다.

 

Crossbowmen at the Battle of Crecy, 1346.

 

Varlet or Squire carrying a Halberd with a thick Blade; and Archer, in Fighting Dress, drawing the String of his Crossbow with a double-handled Winch.

 

 

로빈 후드와 윌리엄 텔이 사용한 서양 석궁

 

쇠뇌가 동양에서 사용된 것은 중국의 전국시대부터이고, 한나라 때부터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서구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 전승이 끊겼다가 중세 이후 이탈리아에서 다시 대대적으로 유행하기도 하여 갑옷을 뚫는 석궁의 위력으로 인해 석궁이 활을 대체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실제 로빈 후드나 윌리엄 텔은 일반적인 활이 아닌 석궁을 쓰는 자로 묘사되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서양에서의 석궁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사용된 노포(弩砲)를 축소 개량한 것으로 4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서양에서 석궁을 의미하는 ‘crossbow’ 라는 명칭은 형태가 십자가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개발 초기에는 빈약한 사거리 때문에 다소 활용이 떨어졌지만 11세기 초에서 15세기

말까지 중세 유럽에서 폭넓게 사용됐다. 당시 유럽에서 사용된 석궁은 사거리가 250m에 달하고, 갑옷을 관통할 정도로 위력이 있었으며, 강력한 살상력을 지녔다.

 

신사협정 또는 신사협약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서로 상대편을 믿고 맺는 사적인 비밀협정 또는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아니하는 비공식적인 국제협정을 뜻하는데, 1949년 체결된 제네바협약이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990년 중세 교회가 남부 프랑스에서 시행한 ‘신의 휴전 협정’ 이야말로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신사협
정으로 불린다. 이 협정 내용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바로 석궁의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살상무기 사용을 금지한 최초의 규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궁은 점차 그 활용도가 커졌다.

 

이후 1066년 정복왕 윌리엄 대공의 군대가 사용한 것을 현대 석궁의 원형으로 보며 십자군 전쟁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인 사자왕 리처드 1세는 석궁을 보급하고 체계적으로 전쟁에 사용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1199년 4월 프랑스 리모주에서 벌어진 공성전 도중 석궁을 맞고 전사했다. 본격적인 석궁부대는 12세기경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1346년 크레시 전투에 투입된 제노바인 용병들은 뛰어난 석궁 사격 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따라서 12세기 로마 교황이었던 포프 이노센트 2세도 석궁이 잔인한 무기라고 생각해 “기독교인 간의 전투에서 석궁 사용을 금지하라” 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중국을 능가한 삼국의 쇠뇌 제작기술

 

우리 나라에서 고대 쇠뇌 유물은 평양 일대의 낙랑 유적에서만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평양시 사동구역 이현리 목곽묘를 비롯하여 낙랑구역 정백동 1호묘, 37호묘, 206호묘 등에서 여러 개의 쇠뇌가 나왔고, 자강도 전천군 운송리 유적에서도 한 틀의 쇠뇌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쇠뇌유물이 많이 나온 것은 이 시기에 쇠뇌가 광범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물을 토대로 당시의 쇠뇌를 복원해보면, 전체 길이 67.8cm, 활의 지름 69.cm로 쇠뇌의 발사장치는 높은 가공정밀도를 가지며 동작원리가 기구학적으로 교묘하다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그 쇠뇌가 중국제인지 한국제인지 여부가 불확실하지만, 고조선의 유물이라고 한다면 세계적으로도 이른 시기에 고조선 사람들이 쇠뇌와 같은 정밀한 철제무기를 만들었고, 특히 구상 설계기술과 함께 기계 가공 제작기술도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편 2004년 4월 경북 영천시 고경면의 한 포도밭에서 기원 전후의 쇠뇌 부품인 노기(弩機)가 발견돼 우리 나라의 고대국가에서도 쇠뇌를 제작했음이 더욱 분명해졌다. 당시 목곽묘에서 출토된 청동 노기는 현재까지 한강 이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형태나 보존 상태가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것보다 양호하였다.

 

이후 실물 유물은 희귀하지만 삼국시대에도 쇠뇌를 흔히 사용했음을 문헌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김부식의‘삼국사기’에는 558년 신라의 신득이라는 인물이 쇠뇌와 포(砲)를 만들어 성 위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신라 쇠뇌 기술자인 구진천에 관한 설화는신라의쇠뇌기술이 원조격인중국을 능가했음을 잘보여준다

 

 

"겨울,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고,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인 사찬 구진천을 데리고 갔다.

당 황제가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였다. 만든 후에 화살을 쏘아보니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보(1.26㎞)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는“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자는 사신을 보내 목재를 요구하였고, 곧바로 대내마 복한을 보내 목재를 바쳤다.

황제는 즉시 쇠뇌를 개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개조한 후에 쏘아보니 60보 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그 이유를 물었다. 구진천은“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목재가 바다를 건너올 때 습기가 배어들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라고 대답 하였다.

천자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중죄를 준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재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

(삼국사기권6,‘ 신라본기’문무왕9년조)."

 

 

이 기록을 보면 신라에서 제작한 쇠뇌의 성능과 신라의 활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그리고 노사라고 하여 쇠뇌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다는 것까지 알 수 있다. 특히 쇠뇌 제작기술을 밖으로 유출시키는 것은 굉장한 기밀이었고, 당나라 또한 이를 얻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철기시대의 쇠뇌의 발사장치인 노기(경북대박물관 소장품)

 

철기시대의 노기(육군박물관 소장품)

 

삼국시대의 쇠뇌의 발사장치인 노기(북한 발굴품)

 

삼국시대 성곽전의 주요 무기, 쇠뇌

 

삼국시대의 전쟁 양상을 살펴보면 주로 산성을 두고 공방전을 펼치는 공?수성전이 성행하였다. 특히 중국의 수?당과 같은 대군을 맞아 싸울 때에는 청야수성전술을 펼쳤다. 이렇듯 수성전을 중심으로 전쟁이 진행되었던 까닭에 그에 따른 무기 역시 발달하였다. 그 대표적인 무기로는 투석기인 포,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화살을 발사하는 노, 성벽을 오르는 적을 제어하기 위한 장병기인 양지창?갈고리창?대형철겸, 성벽 주변에 뿌리거나 묻어 적의 말을 통제하기 위한 마름쇠 등이 있었다.

 

실제 백제의 최후의 도성이었던 부소산성에서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여러 유물이 출토되어 7세기 중엽 백제의 수성용 무기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문지에서 대형철겸 14점, 갈고리창 10점, 삼지갈고리 1점, 양지창 4점, 대형철촉 20여 점 등이 덩어리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양지창은 성을 오르
는 적의 손을 공격하는 무기로, 갈고리창은 성벽을 오르는 적을 걸어 당기는 무기로, 대형철겸은 성벽을 오르는 적을 걸어 베는 무기로, 대형철모는 성벽상단에 접근한 적을 찌르기 위한 무기로, 삼지갈고리는 성벽 아래의 적을 걸어 올리는 무기이며, 대형철촉은 대형의 상노에 사용되었던 노촉이었다.

 

이를 토대로 백제와 나당연합군의 전투장면을 상상해 보자.

우선 백제군은 백강을 무사히 건너, 부소산성의 100m 지점까지 진격했던 적군에 대해서는 노포로 포석과 대형철촉을 집중 발사하여 저지하였을 것이다. 그런 1차 포격선을 뚫고 성벽 가까이에 접근한 적에 대하여는 장궁을 이용하여 2차 공격을 하였으리라 생각되며 적군이 거의 성벽에 도달하였을 때에는 활과 함께 돌을 던지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적군의 기마병들은 성벽 가장자리에 뿌려져 있거나 묻혀있던 철질려에 의해 공격력이 상실되거나 저지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또 신라에는 공수성 전문부대인 사설당이 있었는데, 이 부대에는 쇠뇌를 쏘는 부대인 노당, 성을 공격할 때 쓰는 긴 사다리 부대인 운제당, 성벽을 공격하는 부대인 충당, 돌을 발사하는 투석기를 다루는 투석부대인 석투당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 부대의 설치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58년(진흥왕 19)에 나마(奈麻) 신득으
로 하여금 포와 노를 만들어 국원소경에 설치하였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의거할 때, 적어도 6세기 중엽에는 노당과 석투당이 창설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가 국운을 건 전쟁을 수 차례 치렀던 7세기 중엽에는 공성용 무기를 다루는 운제당과 충당 역시 설치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러한 성곽전투 전문부대는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지만, 고구려의 경우에는 5세기 전반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덕흥리 벽화고분의 전실 남벽 행렬도에도 쇠뇌가 나오고 있다.
이 행렬도의 앞부분에는 북과 각을 울리는 고취악대가 나가며 그 뒤에는 쇠뇌를 지고 나가는 말탄 사람이 있는데 그 곁에“계현령이 쇠뇌를 들어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쇠뇌가 주요 전투무기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백암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쇠뇌 화살에 맞아 당나라 장
수 이사마가 피를 흘리자 당 태종이 이를 빨아주었다는 ‘자치통감’ 의 기록과 고구려가 수나라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중국의 쇠뇌 제작기술자를 매수하여 병기를 수리하였다는 ‘구당서’ 의 기록 등은 고구려에도 쇠뇌를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부대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삼국시대의 쇠뇌는 목재 부분은 없어지고 발사틀인 노기만이 여러 점 발굴되어 전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복원한 쇠뇌가 전쟁기념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구려의 쇠뇌에서 사용된 화살촉

 

유영기가 복원한 고구려 화살로 맨 아래 화살이 쇠뇌 화살(영집궁시박물관 소장품)

 

 

삼국시대의 쇠뇌(전쟁기념관 소장품)

 

유영기가 복원한 고려시대 쇠뇌 화살(영집궁시박물관 소장품)

 

 

고려의 쇠뇌 전문부대 ‘정노군’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쇠뇌는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고려시대의 쇠뇌는 삼국시대의 그것보다 다양하고 성능이 좋은 쇠뇌가 개발?운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쇠뇌에 대한 관심은 다름 아닌 국방정책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고려 2군 6위 이외에 정노라는 쇠뇌 운용 부대가 있었다. 국방상 주요 지역인 북계에는 쇠뇌
부대를 배치하여 운용하였으며, 연습결과에 따라 직을 높여주는 우대책을 시행하였다.

 

목종 때에는 군기감에 노통장이라는 쇠뇌 제작 장인이 있어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쇠뇌를 제작?보급하였다. 1104년(숙종9) 2월에 여진을 정벌하기 위하여 윤 관의 건의로 설치된 별무반에 정노군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도 쇠뇌의 제작이 계속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예종이 쇠뇌를 보유한 정예부대인 정노반을 사열했다는 기록이나 묘청의 난 당시 상장군 이녹천이 지휘하는 토벌군이 반란군의 쇠뇌부대에 전멸 당했다는‘고려사’의 기록에서 고려시대의 쇠뇌 사용 실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성을 방어하는 무기로 쇠뇌를 매우 중시했다. 그 이유는 쇠뇌가 활에 비하여 수성작전과 매복작전에 운용하기에 편리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쇠뇌는 큰 동작 없이 좁은 공간에서 시위를 노기에 걸기만 하면 상대를 쏠 수 있는 무기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몸을 은폐?엄폐시킨 가운데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사 김 부 열전’에는 “훈련된 기병이 평원에서 적을 만나 칼날을 부딪치고 화살을 쏘아 단번에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북방 기마민족의 장점이면서 중국의 단점입니다. 성곽에 올라 강로 진영을 굳게 하고 지키면서 상대가 쇠퇴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중국의 장점이면서 기마민족의 장점입니다.

마땅히 장점을 취하여……이는 지금의 우리 형세로는 적절한 것이니 반드시 경성 및 모든 주진으로 하여금 성을 높게 수축하고 못을 깊게 하여, 강노?독화살?돌?화전을 비축하도록 하고……”라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사는 쇠뇌가 수성작전에 얼마나 유효한지를 보여주는데, 수성전을 위해서는 성을 높게 수축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강노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 1135년(인종 13) 묘청의 난 때에는 상장군 이녹천이 이끄는 군사가 쇠뇌를 소지하고 매복하는 부대에 의해 궤멸 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쇠뇌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는 여진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강궁군이라든가 정노군을 비롯한 특수부대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따라서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무예와 강궁술을 비롯한 쇠뇌 부대의 전술적 활용을 통해서 여진의 기병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려 했던 것이다. 보병이 기병과 싸울 때는 장창을 지닌 부대를 맨 앞에 위치시키
고, 다음은 강궁을 가진 부대, 그 다음은 강노를 지닌 부대가 무릎을 꿇고 대기하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유세현이 복원한 고려시대 팔우노와 팔우노 발사장면(영집궁시박물관 소장품)

 

 

병기기술자 박원작이 개발한 수질구궁노

 

고려시대에는 쇠뇌의 이런 전술적 이점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쇠뇌가 개발되었다. ‘고려사’에는 1032년(덕종 1년) 3월 상사봉어라는 직함을 가진 박원작이 수질노와 팔우노라 불리는 특수한 쇠뇌를 개발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박원작은 이후 1037년(덕종 6년)에는 수질구궁노를 개발했다.

당시 이를 본 덕종이“매우 신기하고 교묘하기 그지없다”고 찬탄하며“추가 제작해 각지 요충지에 비치하라”고 하였다. 이후에도 박원작은 천균노라는 특수한 쇠뇌를 제작했다.

 

팔우노(八牛弩)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중국의 삼궁팔우상자노와 유사한 무기인 것 같다. 중국의 팔우상자노는 발사시 소 여덟 마리의 힘이 필요할 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기계식 쇠뇌였다. 팔우노의 형태와 구조원리, 성능은 1040~44년 사이에 중국에서 편찬된‘무경총요’와 1456년에 편찬된‘무경절요’에 소개되어 있다.

 

먼저 팔우노는 여덟 마리의 소로 시위를 당겨야 만큼 강한 활틀을 지니고 있다. 활틀은 하나가 아닌 셋으로서 앞에 두 개, 뒤에 한개로서 뒤의 것은 앞의 두 개와 줄로 연결시켜 역방향이지만 탄성의 방향을 앞으로 주게 한다. 이로써 최대 100여 발에 이르는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적의 중병기를 부수기 위해서 거대한 화살을 여러 개 날릴 수도 있으며 100여 발에 이르는 작고 가벼운 화살들을 통 속에 넣어 한꺼번에 날린다. 시위가 워낙 강해 방아나 줄을 잡아당겨서는 쏠 수 없고 짧은 방망이로 방아틀 쇠 부분을 쳐서 쏜다. 통에 있던 화살이 허공에서 일제히 산개하듯 날아가다가 비 오듯이 쏟아지게 되는데 오늘날의 융단폭격과 비슷해서 살상범위가 매우 넓다. 팔우노의 또 다른 장점은 힘이 좋아 곡사형이 아닌 거의 직선형으로 화살을 날릴 수 있기 때문에 정확성이 뛰어나고 돌에도 깊이 박힌다는 것이다. 거대한 화살을 적의 성벽에 발사해 계단처럼 만들 때도 사용된다.

 

천균노의 천균은 고대의 무게 단위로, 현대 도량형으론 약 18톤에 해당하기 때문에 천균노란 그만한 무게를 가진 노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학자들은 천균노를 매우 무겁고 강력한 성능을 갖춘 거대한 기계식 쇠뇌의 일종으로 짐작하고 있다.

 

수질구궁노의 경우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실체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팔우노와 유사한 거대한 쇠뇌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홉 개의 쇠뇌를 연결하여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연노의 일종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수질노를 횡으로 3개, 층으로 3개를 쌓아 9개의 다연발 시스템을 갖춘 뒤 층마다 시위를
당기는 기계를 하나로 연결하여 커다란 기계장치로 동시에 시위를 감아 매기게 장착한다.

이처럼 다연발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다발형보다 더 어려운 기술인데 격발장치는 끈으로서 쇠뇌의 사수가 하나씩 당겨 연발식, 한꺼번에 당겨 다발식 등 전술상황에 따른 운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의 쇠뇌 중에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은 없으나 국가무형 문화재 궁시장인 유영기와 전수자 유세현이 추정 복원한 팔우노가 경기도 파주시 영집궁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쇠뇌는 기계적 장치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활과는 달리 장거리 공격과 다연발 공격이 가능했다. 화약이 아닌 활시위를 이용하고 총알이 아닌 화살을 발사하지만 오늘날의 기관총처럼 동시에 다수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중량감 있는 무기였던 것이다. 무겁고 큰 화살, 더러는 창까지 멀리까지 날릴 수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돌도, 탄환도 날릴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널리 사용된 쇠뇌는 주로 성곽전에서 성채를 공격하거나 수비할 때 사용되었다. 또한 힘이 좋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갑주에 강하고 다른 병기를 부수는 데도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활을 다루는 궁수와는 별도로 노수와 노사라는 별도의 직역이 설정될 정도로 무기체계 상의 독립된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실용적인 혁신과 개발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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