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배경과 목회 이야기
* 한 사람을 아는데에는 그 사람의 출신 학교를 넘어서는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만난 하나님의 이야기를 간략히 풀어 쓰려고 합니다. 제 인생에 의미와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 사건들 그리고 목회 이야기 입니다.
제 1장 첫번째 기도 응답
제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 한 것은 5살 이었습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사건은 초등학교 입학 바로 전 한번은 집으로 어머님 친구 분이 찾아왔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친구 어머님께 기다리라 하고, 어머니를 찾으러 2층 상가 건물에 월세를 얻어 예배를 드리던 개척교회로 어머니를 찾으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어머니를 찾으러 갔다가 교회 문이 닫혀있었던 것을 보고 굳게 닫힌 교회 문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냥 돌아서 집에 가려다가 그 닫힌 교회 문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 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 어머니 친구 분이 집에 와있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가 먼저 집에 와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집에 돌아 갔더니 정말 어머니가 와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 기도의 응답은 저의 생애 첫 기도 응답이었고, 정말 충격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학창 시절에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교회로 찾아가 문이 닫혀 있으면 창을 뜯고서라도 들어가 강대상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버릇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 2장 병아리를 제물로 드린 사건
초등학교 어린 시절 유난히 병아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 병아리를 사와 기르기 시작했습니다.(그 당시 병아리 값 50원) 병아리는 금세 자랐고, 어느새 닭이 되어 있었습니다. 병아리를 너무 사랑해서 병아리에 대해서 연구하였고, 소년 중앙이라는 책을 통해 병아리와 뽀뽀 하는 방법을 배워 하교 후 병아리에게 '뽀뽀'라고 외치면 병아리가 나에게 달려와 '뽀뽀'를 하곤 했습니다. 이 병아리와 평생을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출석하던 신광 장로교회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하던 터라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이북 출신의 목사님이 어린 저에게 누렇게 뜬 얼굴로 설교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런 목사님께 저의 어머님은 제가 기른 닭을 가져다 드리자고 제게 물어 보셨습니다. 하교 후 제일 먼저 뽀뽀하던 그 닭을 말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수심이 가득했는지 밤잠을 설쳤지만 그 다음날 목사님께 제가 사랑하는 닭을 갖다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안수 기도 받았던 기도 내용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최승목, 하나님께서 평생을 굶지 않게 하시고....” 그래서 그런지 지금껏 한 번도 심각하게 굶은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다 자란 닭을 묶어서 끌고 갔는데, 강아지처럼 저를 얼마나 잘 따라오는지, 당시엔 닭도 강아지 같이 훈련이 가능하고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동안 기른 정에 닭과 헤어진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팠고, 더군다나 사랑으로 보살핀 닭이 죽는다는 것에 너무 가슴이 아파 그 닭을 노끈으로 묶어 목사님에게 가져다 드리는 동안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으로 가슴 아팠지만 그때의 선택은 저의 인생의 여러 선택 중 정말 아름다운 선택 중 하나였습니다.
그 한 마리의 닭이 나중에 이민 생활 가운데 85,000 마리의 축복으로 85,000배의 축복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제 3장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한 설교
개척교회를 다녀서 교회학교가 없었습니다. 어른 예배를 함께 드려서 당시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고 앉아 있었습니다. 다만, 어린 나이에 나는 절대로 어렵게 설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게 기억에 납니다.
교회학교가 있지 않았지만, 목사님 손녀 딸 2명, 그리고 저와 제 동생 이렇게 4명을 데리고 목사님 따님이 성경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대 예배가 끝나고 오후에 우리 4명을 두고 성경을 가르치셨는데, 가끔씩 직장 때문에 주일에 교회를 빠지면 저는 그 때 목사님 손녀 딸 2명(초등학교 1학년과 유아원)과 제 동생 이렇게 3명을 앉혀 놓고 성경을 가르쳤던 기억이 납니다. 개척교회 다니면서 저에게 유익했던 2가지 중 한 가지는 어른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설교에서 눈높이 설교와 쉬운 언어의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려서 부터 경험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당시에 고급 헬라어가 아니라 시장 언어인 코이네라는 대중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영향력 있는 글과 언어는 고급언어가 아니라 대중적인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매우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저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체육이나 예술은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영어도 조기교육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조기 교육이 없는지 어려서 부터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어려서 부터 성경 교사 교육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 내 도브스 랜딩 크리스천 사립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매일 예배 드리며 말씀을 가르칠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 4장 밤 10시까지한 성경공부
집안이 어려워져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수유리에서 공항동 이모집으로 잠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공항동에 있는 교회를 약 1년간 다녔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큰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정식 교회학교 교사에게 성경공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교회 대표로 초등부 성경시험 대표로 나가게 되어 학교수업 후 매일 교회에 가서 밤늦게까지(집에 오면 밤 10시쯤 되었음.)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 때의 성경 암송 실력이 지금의 성경 암송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 5장 수줍던 학생에서 웅변대회 최우수 학생으로 수상 받기 까지
초등학교 6학년 다시 수유초등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내성적이고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하지 못했었습니다. 선생님에게 말을 건네지도 못했고 여학생이나 나보다 키가 많이 큰 애들한테도 말을 잘 전하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용기를 주려고 웅변대회 나가도록 담임선생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당시 후보로 나온 학생들은 대부분 웅변학원 출신들 이었습니다. 저는 웅변학원은 다니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원고를 써주시고 제가 연설한 것을 녹음기에 녹음해서 듣고 또 듣고, 완전히 외워서 이야기 식으로 연설을 이어 나갔습니다.
대회에서 모두가 소리를 높이 질렀지만 저는 차분히 '효'에 대해서 청개구리 이야기를 하면서 나중에 후회 하지 말고 지금 효도하자고 대화 하듯이 간절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연사 ..... 강력히 주장합니다.” 소리를 외쳤지만, 저는 웅변학원 근처에도 가보지도 못했기에 연사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냥 우리 삶에 있는 이야기, 그리고 내 이야기 외워서 상상하며 나누었는데, 또 슬프기도 해서 울먹 이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습니다.
사실 순위권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전교생 조회 시간에 제가 전교 1등으로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아! 나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생각한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의 그 사건은 평생 저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거나, 이야기 하는 데에 용기를 주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제 6장 20일 금식기도와 성령 체험
중학교 때 의정부로 이사를 하게 되고, 의정부에서 감리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감리교 목회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부흥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무당 중에 강신무와 학습무가 있는데, 공부해서 무당 되는 학습무도 있지만 귀신임 임해서 무당이 돼서 사람들의 과거를 귀신같이 맞추는 용한 강신무도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라 생각했습니다. 공부해서 목사도 될 수 있지만, 이왕이면 성령 받아 능력 있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왕이면 능력 있는 목사가 되자 라는 마음으로 당시 교회 교육 전도사님과 강원도 홍천에 응답산 기도원이라는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10일간 금식 기도하고, 또, 이어서 10일간 미음을 먹으며 다시 기도해서 20일간 기도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당시 7일째 성경을 읽다가 방언을 하게 되고, 하루 종일 기도하다가 성경이 열리는 경험을 하고, 신비한 영적인 세계와 능력을 경험하고 내려왔습니다. 당시에 원장 선생님께서 “최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면 학생부가 부흥하고, 기도를 하면 기도 하는 대로 다 응답 될 것입니다.” 라는 축복의 예언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제가 맡았던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교육부에서 가장 큰 부서가 되었습니다.
제 7장 신유의 체험
10일간의 금식 기도, 또 다시 미음과 함께한 10일간의 기도 후에, 당시 집에 친 할아버지가 위암 말기에 오셔서 음식도 못 드시고, 매일 드러누워 계시면서 헛것을 보시고 다리는 구부러져서 굳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맡고 있던 교육부가 부흥하고 있던 터라 저는 할아버지도 기도하면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먼저 할아버지의 구부러져 굳어져 있는 다리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굳어져 있는 이 다리는 펴져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지어다.” 큰 소리로 선포 기도를 했습니다. 이제 다리가 펴져서 일어 나시겠지? 생각하며 눈을 떴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 난 것입니다. 분명히 산 기도에서 무언가 모르는 강력한 체험도 하고, 기도하면 다 응답 된다고 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에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 째, 기도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구나. 둘 째, 교회에서 기도 안하고 집에서 하길 정말 잘 했다. 교회에서 했으면 이게 무슨 망신 일 뻔 했는가?’
그냥 포기하고 믿음 없는 할아버지께서 예수라도 믿으시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할아버지 앞에서 날마다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2달여가 지난 후, 할아버지가 갑자기 큰 소리를 외치며 일어서게 된 것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나는 우리 할아버지가 다리가 펴지고, 병이 낫기를 구했는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할아버지가 다리가 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이 들어가기를 원하셨던 것 이었습니다. 믿음이 들어가니, 치유도 일어나고, 믿음이 들어가니 먼저 영적인 구원이 오고 기쁨이 오고 병도 치유되어 진 것입니다. 이 것을 통해서 정말 큰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환자의 환부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넘어 환자의 믿음과 구원을 보신 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수 없는 신유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 8장 군인 교회를 담임하면서
군대에서 교회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두들겨 맞았었습니다. 매주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는 장병이 1107야공단 130대대에 저 혼자였습니다. 당시 군목이 없어서, 그 교회에 담임을 하게 되었고, 1996년 강릉 무장 공비 사건이 하필이면 주일날 일어났습니다. 당시 전 부대원 수색 작업을 하러 가는 날, 예배 드리고 가야 한다고 해서, 부대에서 명령 불복종으로 수색 작업 이후에 남한산성에 갈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제 인생이 전과자가 되고, 빨간 줄이 가는 줄 알고 낙담 하였지만, 당일 이후 40kg 군장 매고 일주일간 일과시간 연병장 도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군부대에서 정말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전 부대에 종교 점오를 요청을 공문발송해서 승인 받아 매주 목요일은 점오 대신 인원파악 후 예배를 드리게 하고, 일주일에 3회 근무자들 사랑의 차 돌리기를 하고, 민간 교회와 협연해서, 횡성 감리교회, 횡성 성결교회와 연결하여서 매주 주일 저녁 외부 찬양단이 와서 찬양 저녁 예배를 신설하고, 민간인 100개 교회에 군인 소식지 "짬밥“지를 발행하여서, 충현 교회, 충신 교회, 여의도 순복음 교회, 임마누엘 교회 등등 여러 교회들로부터 장병들을 위한 문서, 설교 테이프, 책자들을 기증받았었습니다.
제 9장 쓰레기장 폭발 사건을 경험하고
군대에서 일등병에 1107야공단 130대대 일삼공 군인 교회 담임 군종이 되고, 당시 군종 참모 목사님이 계시지 않아서 내가 그 교회를 담임하고 목회를 하게 되었었다. 교회 올라간다고 매일 구타당하고, 심지어는 군 간부조차 우리 교회에 불상과 마리아상을 들여와서 함께 예배드리겠다고 하신 것이다. 너무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어서 1군 사령부 군종참모 중령에게 연락을 해서 종교 탄압 탄원서를 올리겠다고 하였더니 우리 중대 고참들을 단체로 기합을 줘서 나는 더욱 괴롭힘을 당하고, 나는 아예 교회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계속 사역을 보냈다. 한날은 소각장 사역에 보내서 빨리 청소를 하고 교회에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하나님의 전이 마리아상과 부처상을 들여놓는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펑펑 울면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큰 굉음과 함께 “놀라지 마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쓰레기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내려온 사이에 쓰게기 소각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참 멍하게 서있는데 나를 그렇게 핍박하던 보급관과 한 고참이 뛰어 오더니 “너의 하나님이 살아 있기는 살아 있나 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잠시 기도 하러 올라간 사이에 소각장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폭발해 버린 것이다. 만약 그때 기도하러 올라가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저 세상에 갔을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길래, 시멘트로 만들어진 소각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이상하게 그때 이후로 우리 보급관이 교회에 불상과 마리아상을 갖다 놓겠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제 10장 군인 교회 담임이 되기 까지
본래 저는 1996년 1월 18일 논산 훈련소에서 기초 훈련을 받고, 다시 한번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졌었습니다. 이렇게 마음껏 교회에 갈 수 있는 것이 축복인지 몰랐었습니다. 눈치 보면서 교회를 가기 시작해서 그게 시작이었고, 자대 배치 받고 나서는 거의 1년 반을 매일 맞으면서 교회를 올라갔었습니다. 논산 훈련소에서 2달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고 강원도 홍천에 제일 야전수송교육단에서 수송병과로 운전병으로 다시 2달간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4개월 후 강원도 원주 1군 사령부 직할 1107 야전공병단 예하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130대대 독립 대대 본부 중대로 배치를 받고 운전병과로 대기하고 있었으나, 자대 자치 신체 검사에서 혈압이 60으로 나와 1호차 예정이었던 제가 갑자기 행정실에서 무한 대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추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실제로 저혈압도 조금 있긴 했지만 혈압계가 망가진 혈압계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참 기가 막힙니다. 행정실에서 무한 대기 하다가 행정실 보급관님으로부터 자대 배치 날짜를 물어보고, 연대 대기 일자를 물어보시는데, 일자와 시간까지 정확히 보고하자 똘똘하다고 바로 행정병으로 보직을 변경해 버렸다. 행정 교육을 받아가 주일에 교회를 간다고 하니, 행정병은 사무실을 지켜야 해서, 교회를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무슨일이 있어도 교회는 가야 된다고 해서 몇주만에 행정병에서 보직 해임 당하고, 내무반 무한 대기를 하다가, 군부대에서 동물들을 키우기로 해서, 동물농장 관리병이 되었다. 토끼, 오리, 닭을 키우는데, 토끼는 풀과 아카시아 잎을 따다가 주고, 오리는 군인들이 먹다 남긴 잔반을 가져다 주고, 닭은 사료를 먹였다. 그리고 동물농장 청소를 하고, 열심히 일하고 남는 시간 교회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성경책을 2-3장씩 찢어서 건빵 주머니에 넣고 내려와서 그것을 읽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부대 검열관이 부대에 방문해서 부대내 동물들을 보고, 부대가 동물원이냐고, 다 없애라고 명령하여서 하룻밤 사이에 모든 장병들이 다 잡아 먹고 다시 보직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가게 된 곳이 통신병과 였다. 이미 부대 내에 주일날 유일하게 교회에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유일한 사병으로 꼴통으로 소문이 나서, 주일날을 비번으로 해주긴 했는데, 대신에 의도적으로 토요일 당직 철야 업무를 주었다. 밤을 꼴딱 새고, 교회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그것까지도 너무 감사했는데, 통신병 중에 휴가를 가게 되면 꼼짝 없이 주일날 근무를 서지 않을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이곳을 나오게 해달라고 정말 간절히 기도했고, 우연한 기회에 그곳을 나와 교회만 전적으로 담임하게 다시 보직이 변경 되었다. 당시 우리 부대에 영남대학교 신학과, 성결대학교 신학과 2명의 신학생이 있었는데, 나는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내가 그 부대에 교회를 담임하게 되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단지 그때는 신학생들조차도 주일에 교회에 올라 올수 없을때가 많았다. 부대내 꼴통 고문관으로 찍힌 나외에 한주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올라오는 자는 한명도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교회를 담임하게 되어 수 많은 설교를 준비할 수가 없어서, 당시 민간인 교회 100여곳에 편지를 써서 미디어 선교부에서 설교 테이프들을 보내 주었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임마누엘 교회, 충현 교회, 충신 교회, 소망 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설교 테이프를 보내 주어서 박조준 목사님, 김국도 목사님, 곽선희 목사님등의 설교를 완전히 외워서 매주 전하고, 교회 일만 할 수가 없어서 우리 부대내 방송국을 만들어서 정훈병과 일을 겸해서 하게 되었다. 군대에서 만난 하나님은 정말 파란 만장한 내 삶속에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들을 갖게 하셨다. 제 실제 생일이 11월 7일인데, 1107 야공단 숫자와 같은것을 근무하게 된것을 20년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저의 교회 7대 담임 군종이었고, 그 교회를 건축한 3대 군종 이견수 목사님과 지금도 가끔 교제하며 지냅니다.
제 11장 1998년 필리핀 선교지에서 만난 하나님
제대를 하고 나서 다시금 교회 일에 최선을 다하기 시작하면서, 의정부 연합 청년회에 가입하여 저의 교회를 외부적으로 알리고, 청년부를 새롭게 조직하고 청년들이 부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필리핀에 단기 선교를 두 달간 가게 되었습니다. 첫 해외여행은 나로 하여금 불안하기도 하고 들뜨게 하였습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정도 가면 바기오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 선교사님 댁에서 숙식을 해결하였습니다. 성결교 선교사님이셨던 그분은 참 영적이셨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식사하고 성경보고 12시까지 기도를 하셨습니다. 전 1시간 하기도 벅차 했었는데, 이분은 매일 빠짐없이 하루에 4시간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인생에 처음으로 매일 4시간씩 기도를 하면서 영적인 많은 체험들을 하는 귀한 시간들 이었습니다. 오후에는 근교 대학교에서 청강을 하고 밤에는 그 지역 공원에 가서 전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1998년 필리핀에서의 3달가량의 선교가 내 인생에 영적인 세계로 더 깊게 들어가는 시간들 이었고, 선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들 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학교 학생 지도, 지역 교회 부흥회, 미전도 종족 전도, 교회 개척 및 설립 등을 함께 하였고, 그 이후로 해마다 선교지를 다니며 선교사님들과 선교단체와 협력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2013년 선교사님을 저의 교회에서 초청하여 저의 집에서 한 달간 안식월을 갖게 하고 저의 교회에서 후원하였습니다.
제 12장 토론토 불꽃 교회 부교역자로 이민 목회 시작
감리교 신학대학원을 다니다가 2001년에 휴학을 하고, 토론토에 무작정 갔습니다. 이민 목회를 눈으로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갔습니다. 분당지역에 있는 불꽃교회(전용재 감독회장)에서 토론토에 토론토 불꽃 감리교회를 세우고 당시 부 목사님 이셨던 공성훈 목사님을 그곳에 파송 했습니다. 그 분과 함께 토론토 불꽃 교회를 섬기면서 이민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을 배우고,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목회를 하였습니다. 평일에는 일식당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토론토 엠마누엘 칼리지에서 청강을 하고 주말에는 토론토 불꽃 감리교회를 섬기면서 이민 목회를 배웠습니다.
제 13장 광림교회 부교역자
토론토에서 사역을 마치고 신학대학원 졸업을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광림교회에 부임 하였습니다. 교육부 고등 2부를 맡으면서 교육부를 맡아서 목회를 하면서 목회의 시스템화를 배웠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분당에 있는 광림교회 지성전인 광림 남 교회에서 기획을 맡아 청년부 교육부를 총괄하였습니다. 광림교회에서 기획, 행정, 조직과 무엇보다도 생명 건 목회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새벽 별 보고 출근해서 새벽 별 보고 퇴근하면서 제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목회 현장 이었고, 많은 열매를 맺는 시간들 이었습니다.
제 14장 미국 이민과 개척
저의 아내는 미국에서 성장한 이민 1.5세입니다. 한국 YBM 영어 강사로 나왔다가 만나서 광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200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 주에 저의 처가 댁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광림교회에서 이루었던 부흥이 곧 오리라 생각하며 그 다음날부터 전도를 나가려 했는데, 사방 천지가 논밭 뿐인 아주 시골 이었고, 미국문화가 한국과는 너무 다른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한 부부와 저의 가정 이렇게 가정교회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부활절에 기적적으로 미국 교회를 청소를 해 주는 조건으로 무료로 빌려 쓰게 되었습니다. 당시 6가정이 첫 입당을 해서 정식으로 교회에서 예배 드리게 된 것입니다.
메릴랜드 하늘문 교회2004.12.12 ~ 2005.3.23 (마지막 가정예배 사진, 2가정으로 시작해서 6가정으로)
2005.03.28 부활절 첫 예배(가정집에서 교회로 옮긴 후 첫 예배를 드렸다, 16명)
제 15장 개척교회에서 일어난 기적들
개척교회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고 하는데 정말 기적들이 참 많이 일어났습니다. 미국 교회 목사님이 고난주간 특별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성 금요일 새벽예배 때, 설교 끝나고 한국말로 “십자가 앞에 내 모든 죄 사라져”라고 말하며, 허리 수술로 잘 걷지 못하던 분이 갑자기 뛰던 일도 있었습니다. 새벽예배 때 설교를 하는데 당일 제가 한 한국말 설교가 영어로 들렸다며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일 기억에 남는 사건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차에 기름 넣을 돈도 없을 때, 교회에서 울며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어떤 관광객이 우리 교회를 지나가다 문을 두드리고 저에게 목회 활동비로 쓰시라고 돈을 주고 갔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16장 찾아가는 목회
성도가 정말 지독히도 늘지 않았습니다. 개척 목회 20명을 넘지 못할 때, 저의 지역에서 30-40분 거리 캠브리지라는 도시에 하얏트 호텔에 한국인 청년들이 일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3주 동안 찾아가 만나고, 그곳 청년들을 매주 데리러 가서 함께 예배 드리고, 밥 해서 함께 나누고, 한국 학교를 통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이민 오는 분들이 한 분 한 분 계셔서, 영주권 수속, 학교 수속, 모든 행정적인 일들을 도우면서 교회가 차츰 안정적이고, 사람들이 한 분 두 분 천천히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롭게 장로님도 세우고, 개척 4년 만에 교단 기준 자립교회가 되었습니다.
2008년 최승목 목사 안수 및 장로 임직 축하 예배
제 17장 팜스프링스 한인 감리교회 부임과 성전 건축
2009년 팜스프링스 교회로 새롭게 부임하였습니다. 부임한 첫 주에 아이들 포함해서 19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작은 교회였지만, 하나님께 목회 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하며 3가지를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1. 교회가 안정적인 부흥할 때 까지 휴가를 가지 않고, 월요일도 쉬지 않고 전도하겠습니다.
2. 교회가 자체 성전을 가질 때 까지 어떤 좋은 조건에 임지가 있어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3. 선교 중심적인 교회와 교육 중심적인 교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오자마자 교회가 어렵지만 교육부 부터 신설하고, 교역자를 뽑자고 기획위원회에 이야기를 해서 필리핀계 교육 목사를 한명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국학교를 강화하고, 처음으로 VBS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들이 계속 부흥하고,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거의 2달에 한번 씩 함께 선교지를 방문하고 함께 예배 드리고 노방전도하고 선교주민들과 함께 체육대회도 하고, 바비큐 파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13년 멕시코 한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8년간 뼈대만 세워 놓은 교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건축을 할 수 있도록 자재를 사주기로 하고, 그 교회 필요한 자재를 구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에 그 교회가 성전을 다 짓고 20여명 모이던 교회가 100여명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교인들과 교회 버스를 타고 축하해 주러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날 미국 한 교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빌려 쓰고 있는 미국교회에서 나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교회 건물을 구입 하라는 것입니다. 3.3에이커(3,800여평)에 건물 두 개를 가지고 있는 교회인데 하나님이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 할 수 있도록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30여분 거리에 지 성전을 세워서 두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내 도브스 랜딩 사립학교가 있으며 매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의 조기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왜 여러 학원은 있는데 신앙을 위한 학원은 없는가? 왜 상업고등학교, 공업고등학교, 예술 고등학교는 있는데 신학 고등학교는 없는가? 생각했었습니다. 이 곳에서 아이들이 함께 기독교 신앙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가장 많이 접촉하는 것이 미디어입니다. 그래서 미디어 방송으로 미주 지역을 복음화 하고 있습니다. 저의 지역에서 다민족 성시화 대회를 개최했고, 목회자 세미나를 현재까지 3회가 열렸습니다. 계속해서 목회자를 섬기는 사역도 함께 병행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돕는 교회, 목회자들을 섬기는 교회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이제 이 지역사회를 섬기는 목회, 다민족을 섬기는 목회, 교육목회,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는 목회를 하는데에 저의 목회를 맞추려고 합니다.
마치면서.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이 10 가지를 경험하게하신 것이 저에게 큰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1. 광림교회라는 큰 교회에서 교회의 조직과 행정 기획을 배우게 하신 것.
2. 개척교회를 경험하게 하신 것.
3. 부흥을 경험하게 하신 것.
4. 성전 건축을 경험하게 하신 것.
5. 지 성전을 하게 하신 것.
6. 기독교 사립학교를 하게 하신 것.
7. 방송 설교를 하게 하신 것.
8. 안식월을 통해 한국교회 28개 교회를 보고 교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것.
9. 다민족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가 한민족을 넘어 섬기게 하신 것.
10. 목회자 세미나를 통해 목회자를 돕는 교회, 교회들을 섬기는 교회, 선교사들을 돕는 교회를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 한 번 더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대 부흥을 꿈꾸고 있습니다. 요즘은 “글로컬리즘”이라는 단어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로컬리즘과 글로벌리즘은 지역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만도 아니고 땅 끝만도 아니고 둘은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한 지역의 지대한 영향이 전국과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미국의 작은 휴양지인 팜스프링스의 대 부흥 사건과 기적의 이야기가 이민 교회들과 한국의 교회 그리고 미주 지역 여러 민족들의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