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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인들에게는 서로의 동질감을 표현 해주는 고유한 정감을 담고 있다. 그러면 '신자(信者)' 라는 말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가? 바로 '믿는 사람'이란 뜻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것들 교회에 관한 것들, 또 성사들과 계명
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들을 모두 믿는가? 신앙의 내용들 중에는 우리 인간이성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 과연 그럴까?'하고 의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 인간이 아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물론 수십 세기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발견과 연구들을 통해 엄청난 지식을 쌓아온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서 아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제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광대한 자연의 신비에 비하면 실로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미소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별 불편없이 살아가고 있다. 해는 늘 떠서 지고, 사시사철은 일정하게 반복되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보이는 자연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무심코 믿고 사는 것이 많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 특히 하느님에 관해서 모두 알아야만 믿겠다고 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인간이 이런 태도를 고집한다면 결코 하느님을 믿을 수 없게 돨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갓난 아이가 엄마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난 다음에야 엄마를 믿고, 젖을 받아 먹겠다고 우기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믿음은 결코 지식이 아니다. 믿음은 은총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지, 내가 모든 것을 알고난 후 선택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믿음에 관한한 우리들은 아직 갓난애기이다.
갓난애기가 무조건 어머니를 신뢰하듯이 우리들도 무조건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그분이 주는 것을 받아 먹으면 우리들의 믿음은 쑥쑥 자라날 것이다. 이렇게 믿음은 우선 하느님이 여러분에게 주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점을 명심하우리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을 키워주는 분이 시기도 하시다. 그러나 물론 우리들의 협조도 필요하다. 아무리 하느님이 '믿음'이라고 하는 맛있는 젖을 우리들에게 먹이려고 해도 우리들이 그것을 받아 먹으려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열심히 하느님이 주시는 '믿음의 젖'을 빨아 먹어야 한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믿음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심을 체험하고 있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분께 보답을 드려야 하겠다. 하느님 보살핌에 보답하는 길은 바로 하느님의 시각으로 일상사를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돈, 명예, 권력, 성공, 성(性)에다 믿음을 주어서는 안되겠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너무도 흔히 돈을 믿는다. 하느님 힘과 돈의 힘을 비교할 때 우리는 너무 쉽게 돈의 힘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하느님 이고 믿음이고 다 잊어버리기가 쉽다. 명예, 권력, 성(性)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이래서는 안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일상에서는 하느님과 상관없이 지내
다가 교회에 와서만 하느님을 찾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고, 하느님을 속이는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믿음을 항구하게 하느님께 두어야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 '하느님께서 어떤 쪽을 원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이런 때 어떻게 행동하셨을까?'하는 점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한다 . 그러면 우리들의 믿음은 날로 자라날 것이다.
려는 많은 욕구들을 느끼게 된다. 또 어떤 때는 깊은 회의에 빠져 '하느님은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속은 것 아니냐'하는 불신에 시달리기도 한다. 특히 엄청난 불의의 고통을 당하게 될 때 그렇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신앙의 시련'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시련이 닥쳐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벌써 닥쳐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련을 통해 우리는 더 성숙하게 되고 더 온전해진다. 삶을 한번 돌아보자. 작든 크든 분명 시련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련들을 딛고 일어섰을 때 훨씬 더 굳세어지고 성숙 해지고 폭이 넓어졌을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시련이 닥쳐왔을 때,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이겨내면 신앙은 더욱 굳세어지고 완전해진다.
그러면 시련을 이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믿음을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여러가지 기도가 있다.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고, 아침 ·저녁기도, 또 성체조배 등등. 그리고 특히 시련 중에는 '하느님 도와 주십시오' 하는 화살 기도를 자주 바치는 것이 좋다. 이런 기도와 더불어 굳건한 신앙을 가진 분들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신부님이나 수녀님 또는 그밖에 가까이 있는 훌륭한 신자분들께 자기가 겪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어떻게하면 이 신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그러면 분명히 시련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공부를 계속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성서 공부를 한다든지, 미진했던 부분의 교리 공부를 다시 한다든지, 또는 교회 에서 나오는 여러 신학서적이나 영성서적을 읽는다든지 하는 것도 신앙의 시련을 이겨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기도와 상담과 공부를 통해 신앙의 시련을 극복해 나갈 때 우리들 은 더욱 신앙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도록 촉구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지금부터 우리들의 믿음을 이웃에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나는 천주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자랑스레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맞갖은 생활태도를 보여 주어야 한다. 기도하는 모습,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모습, 자선을 베푸는 모습, 이웃의 허물을 참고 이해하는 모습,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을 실천 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사랑의 생활 부분에서 더 자세히 말씀 드리겠다. 아무튼 우리들의 믿음은 우리들의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들은 참다운 믿음의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믿음의 생활에서 생겨
난다. 우우리의 믿음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리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느님 나라가 이땅에 왔지만 그 완성은 마지막 날에나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이 있는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업도 잘하고, 정치도 잘하고, 인격도 훌륭하고, 가정적이고, 학식도 풍부하고, 동정심도 많고, 헌신적이면서도 겸손하고 등등의 조건들을 모두 갖춘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 없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여러가지 조건들 중에서 한 두가지 정도는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또 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늘 '왜 이정도 밖에 안될까? 좀 더 나을 수는 없을까?'하는 불만을 가지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바로 이러한 불만들이 언젠가는 해소되리라는 것이다. 또 하나, 가장 결정적인 인간의 약점은 언제고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죽음이야말로 늘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죽음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리스도인들도 물론 죽는다. 그러나 신자들의 죽음과 비신자들의 죽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 신자들은 비신자들과는 달리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은 새 생명으로 나아가는 문이요, 하느님을 뵙게 되는 영광의 순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믿음이 굳셀수록 더 강하게 나타 난다.
우리의 희망은 좀 더 크고 원대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희망을 피조물에 둘 것이 아니라, 그 피조물을 우리에게 선사하신 창조주 하느님께 두어야 한다.
이런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세상에 사시는 동안 줄곧 아버지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셨고, 아버지 만을 바라보며 사셨다. 그분은 수난을 당하시기 직전에 자신의 삶을 이렇게 아버지께 보고하셨다.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하라고 맡겨 주신 일을 끝내어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다. 그러하오니, 아버지, 제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하소서'
(요한 17,4-5). 이 말씀은 그분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일에만 신경을 쓰셨고, 따라서 이제는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는 강한 희망을 보여 주고 있다. 과연 그분의 희망대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분을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고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삼으셨다. 이렇게 예수님의 희망은 모두 이루어졌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희망을 가지고 살자. 그러면 우리도 죽음이 닥쳤을 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책임지고 우리에게 이 일을 이루어 주신다고 다짐하셨다. 당신의 이익에 현혹되지 말고 과연 무엇이 하느님께 나를 데려가 줄 것인지를 생각하자. 돈도, 명예도, 권력도, 학식도 우리를 하느님께 데려다 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런 것들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영원히 남을 것에 신경을 쓰자. 영원히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동안 베푸는 친절, 자비, 선행 등과 같은 사랑의 행위들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사랑의 생활에서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아무튼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야겠다.
하느님의 이 자비로움이 우리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좋다고 하는 보증수표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둔다면, 우리는 마땅히 우리를 하느님 으로부터 떼어 놓는 죄를 경멸하고 이를 피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부단히 죄를 피하려고 노력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죄 까지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는 분명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혹 자신이나 세상이 더 나아지는 것 같지 않더라도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말자. 그럴 때 오히려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나와 이 세상을 완성시켜 주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갖자.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생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그루 과일나무에 비유할 때, 믿음의 생활이 그 뿌리에
해당하고, 희망의 생활이 그 줄기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사랑의 생활은 바로 그 열매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사랑의 생활이 없다고 한다면 그사람의 믿음이나 희망의 생활은 헛것이 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꼽으셨다. 또한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을 유언으로 남기셨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여러분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내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4,34- 35). 그렇다. 사랑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알아보는 표지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면 무엇이 사랑의 생활인가?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1고린 13장의 내용을 가지고 살펴보자.
적선할 때, 직장에서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할 때, 집 안에서 식구들을 위해 살림을 해야 할 때, 사랑의 지향을 가지고 하자. 친구나 친척, 또는 이웃이나 직장 동료들이 딱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기도하며 힘자라는데 까지 도와야 한다. 부당한 대우나 모욕을 당했을 때에도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일상의 순간들을 사랑의 지향으로 채울 때 우리는 사랑의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불의에 대항하고 진리를 추구하도록 노력하자. 그리하여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낼 줄 아는 경지에 이르도록 하자.
한편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기준들 보다도 더 분명한 기준을 주셨다. 그분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 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옷을 주는 것', '병든 사람과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보는 것' 등이 사랑을 베푸는 것이며 구원의 결정적인 가늠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한 기준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분명히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게 되거나 알게 된다. 이 때 우리가 이들을 외면하면 사랑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고, 이들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도움을 주게되면 사랑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부단히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뜻이다. 사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은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 하다. 오직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 은총을 얻으려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을 닮을 수 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을 해 내셨다. 그분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루가 23,34) 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이렇게 친히 당신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셨다. 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때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물론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완성되려면 반드시 이 어려운 고지를 극복 해야만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하면서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한다. 체험이 있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을 때, 사실은 자기 자신이 편치 않다. 심한 경우에는 큰 병을 얻는 수도 있다. 그러다가 그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면 다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병도 낫게 된다. 이렇게 용서는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구원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 우리를 못 살게 구는 사람들, 우리에게 모욕을 준 사람들 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믿음, 희망, 사랑의 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향주삼덕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생활의 극치를 우리는 성모님과 예수님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가지시기 전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여종 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루가 1,38) 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시고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라고 하셨다. 이 두 말씀은 모두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여하한 어려움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우리 역시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겠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작정했다면 마땅히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바로 이웃의 뜻에서 알아볼 수 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들, 내 직장 동료들, 내 친척들, 내 친구들의 뜻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 주장, 내 욕심, 내 뜻을 버리고 그들의 뜻에 귀 기울여 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된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어려운 일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부활에, 영생에 이르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주여, 당신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읍니까?], 성바오로 출판사, 1986, 270-280 ; 434-465.
2. 로울러 외, 오경환 역, [그리스도의 가르침], 성바오로 출판사, 1980(2), 316-336.
3. 님베겐 대학교 고등교리교육학원, 대건신학대학 전망편집부 역, [가톨릭 신앙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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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가톨릭대학 1988년 부제반, [예비자 교리 교안집], 가톨릭대학 신학부, 1988, 271-275.
12. 슬라이드 : 착한 사마리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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