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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壽石歷史의 背景과 세갈래 흐름
우리 수석역사의 전통과 배경을 중심으로 고찰해 볼 때 돌을 애석하게 된 흐름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그 흐름을 요약하면
① 중국의 괴석을 주체로 영향을 받은 山水石 애석풍류
②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배석신앙에 따른 자생적인 애석 열기
③ 불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애석풍토
첫 번째 우리의 문화는 중국의 문화권 속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여 오는 동안 우리 나름대로의 환경에 적응되는 고유한 영역을 키워왔다. 그러한 중에 중국의 괴석을 누리는 기풍이 우리에게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주로 태호석(太湖石), 영벽석(靈璧石)을 흠모하는 가운데 산수석을 누리는 심오한 경지가 중국의 완석에 그 전통의 근간을 두게 되었다.
500년전 기록인 인제(仁齊)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서두에 중국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
“삐죽한 봉우리는 가파롭고 험하며, 낭떠러지와 깊은 구렁을 이루었는데, 은은히 구름과 우뢰를 품고 있는 듯한 모양을 가졌다.” 라는 산수석에 대한 묘사는 중국의 고전 기록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으며, 그러한 표현은 중국의 서책을 배우는 사이에 익힌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고궁인 비원 내 낙선제의 어느 우람한 정석(庭石)을 살펴보면 한 쪽에 ‘입옥비운(立玉飛雲)’이란 글이 자그마하게 새겨져 있다. 이 글의 뜻은 ‘구슬처럼 고귀하게 우뚝 솟아난 봉우리 위로 구름이 걸쳐 흘러간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는 역시 중국의 맥을 이어받은 산수석의 의미를 단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완석을 주로 인용한 글이 우리의 고전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특히 미원장 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애석담들을 널리 인용한 경우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기풍이 정립되어 왔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제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화로 비슷한 분 가운데에 돌을 갖다놓으면 물기를 봉우리 위까지 능히 끌어올린다. 그리하여 더운 낮에도 마르지 않으며 이끼가 싱그럽게 알알이 생기를 띄운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나라 옛날의 독특한 애석기풍을 세웠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그런 돌을 ‘香石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보배’라 설파한 바를 염두에 둔다면 오늘날 처럼 돌에 물을 뿜어주지 않더라도 분 바닥에 고인 물을 저절로 빨아올리는 돌에 최상의 가치를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완석 기풍은 아직 중국의 고전에서는 발견된 바가 없다.
수반에 앉힌 산수석의 감상은 물을 뿜어주고 나서 바라보는데에 그 극치가 나타난다. 물기를 머금은 수석은 그 색깔이 선명하게 돋아나오고 치밀한 질감과 윤택함도 살아나와 감상하는 맛이 훌륭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날의 취향은 한국만의 창의적인 애석기풍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석은 오랜 세월 사이에 養石이 되어야 참다워진다.
수석에서의 양석이란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키우기 위한 것과 같으며, 우리의 덕성을 기르기 위한 養德에 비유할 수 있다. 돌은 본래 생명이 없지만 수석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정신으로 완상하고자 하는 것이 양석이다.
이러한 양석에 대해서도 인제 강희안은 이미 설파하고 있었다. 저절로 물기를 빨아올린 돌에 이끼가 싱그럽게 알알이 생겨나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양석인 것이다. 이끼가 생겨남으로 경년(經年) 변화에 의해 저절로 스며 나오는 고색(古色)의 유현한 느낌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500년 전에 지적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나라에서 토속적으로 자생한 애석의 색다른 기풍은 배석신앙(拜石信仰)에 의한 발흥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기고(奇古)하고 신비한 돌 앞에 엎드려 부귀를 염원하고 가문의 번영을 기구하는 등의 소원을 비는 의식이 우리 민족에게 강한 양상으로 나타나 있다고 본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마을 근처의 어떤 바위에 대한 신비성을 이야기하며 두려워하기도 하는 원시적인 배석신앙의 뿌리가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이렇듯 배석신앙은 돌과 바위와의 친화력을 갖게 하여 진귀한 돌이라면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기풍이 일반 서민들 가운데에 퍼지게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커다란 바위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 누각과 같은 다락집 형상을 갖춘 돌, 인체와 닮은 돌 등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은 모두 신령한 것으로 받들며 숭배하였다.
신앙적(샤머니즘)으로 돌과 생활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면서 어느덧 어떤 바위에 대한 신기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찬사도 보내는 과정에서 완석의 정서가 생겨난 것이다.
그 한 예로 민화에서 괴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애석의 정취가 상류사회에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서민층의 저변까지 폭넓게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애석이 자연발생적인 현상임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돌을 애완했던 자취가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치는 사이에 도교의 노장사상이 혼입되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어느 종교이든 낯선 고장에 정착하려면 그 풍토 환경에 영합하기 마련이어서 저절로 노장적인 자연애가 강하게 나타나는 불교의 성격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러기에 괴석과 같은 자연미에의 상찬이 승려들에 의해 굳혀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당(唐)에 가서 화엄경을 배워온 신라의 승려 승전법사(勝詮法師)가 80개의 돌을 관속으로 삼아 그 돌들을 향해 불경을 개강했던 것은 우선 ‘돌’이라는 자연을 아꼈기 때문이다.
충무 앞바다의 통영군 욕지면 영화도에는 400년 전에 연화도인(蓮花道人)이 모셔놓은 ‘둥근 돌’이 있다.
이 역시 자연이라고 하는 돌을 애착하였다는 한 예가 된다. 이 전래석인 ‘둥근 돌’은 불교적인 의미를 다분히 품고 있는데 이런 종류의 돌은 오늘날의 승려들도 좋아하여 사찰에서 자주 발견되는 돌이다. ‘둥근 돌’은 모가 없이 완만하고, 어떤 사물의 번거로운 형상이 없어 오직 평안함만을 풍겨주고 있다.
세상에는 ‘완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둥근 것에서 찾으려 한다.
둥근 것은 ‘완전’의 표상이다. ‘둥근 돌’을 바라보노라면 무아의 경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무무경(無無境)의 선(禪)으로 몰입된다. 또한 대우주를 보는 넓고 너그러운 감개에 젖는다.
자연과의 친화에 의하여 승려들이 예부터 둥근 돌을 비롯한 괴석을 좋아했던 기풍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이 선(禪)과 각(覺)의 대상으로 완상하는 기풍이 대중의 마음속에도 자리 잡혀가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자연애의 기풍은 여느 민족과는 달리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 비록 인공을 가했더라도 그 흔적이 감춰진 순수 자연의 본래 상태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들 과거의 애석 풍토가 중국의 태호석, 영벽석 등을 중심으로 미원장 등의 산수석 예찬이 주종을 이뤄 영향을 받아왔음은 사실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의 환경과 풍토에 맞는 우리다운 애석기풍이 특색 있게 나타나 있음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장차 현대 수석의 방향도 이에 맞추어 발전시켜야 함은 당연하다.
그 이후 우리나라에 전래된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3년)에 중국으로부터 축산법(築山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추측이지만 이때부터가 우리 선인들이 정원을 석가산으로 자연축경을 꾸미면서 돌에 대한 매력과 흥미를 느껴 수석수집 취미가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다음 고려로 내려와서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많은 풍류를 보고 목화씨를 담뱃대에 숨겨 온 문익점(文益漸)(1329~1398) 선생이 애석하였는바 그 실증으로 경남 산청군에 소재하고 있는 선생의 사당(祠堂)에는 지금도 많은 괴석(怪石)과 기석(奇石)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저명한 문인들과 승려들에 의하여 애완되어 왔다. 홍만선(洪万選)(1664~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수석의 이끼를 배양하는 방법과 석창포와 돌의 산지를 소개했다.
김영황(金永晃)의 친필로 된 <예석기(禮石記)>에 수석의 첨경 그리고 수석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발견되었다. 김영황(金永晃)은 분성(盆城) 사람으로 자는 주향(周鄕), 호는 단계(丹溪)이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문하생이었다.
단계는 시서화에 능했고 가야금을 잘 타는 풍류인 이었다. 단계는 애석하게도 30세에 요절하였다 하니 어찌 그리 수명이 짧았는지 아쉽기만 하다. 단계의 글씨에서 추사가 애석해했던 자취가 뚜렷이 남아있다.
단계는 ‘해석연산(海石硯山)’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 돌은 옛날에 궁중에서 진기하게 소장했던 유래석(由來石) 이었던 것이다. 이 돌이 당계의 손에서 흘러나온 것이라 기록하고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김교각(지장보살), 다산, 완당, 초의대사 뿐만 아니라 문인묵객에서 궁중에 이르기까지 애석했던 자취가 남아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당시 우리나라의 각계각층의 선비들이 그리고 더 아득한 선인들도 애석하여 왔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茶山 정약용(丁鏞)(1762~1863)이 말년에 강진으로 귀양 가서 스스로 탐석한 돌을 완석하였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돌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과 행적이 남아있다.
추사(秋史)가 쓴 <천하괴석(天下怪石)>, <수석노태지관(壽石老笞池?)>, <산수석(山水石)> 등 천하명필이 지금도 탁본이나 사본 그리고 서각으로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 얼마 후 강추금(姜秋琴)이 선인들의 전통을 이어 문방오우(文房五友)로서 돌을 애완하면서 ‘30년에 걸쳐 괴석을 모으니 책상머리에 무수한 명산들이 우뚝 솟았구나.’라고 하며 감격하였다.
옛 선비들이 무아의 경지에서 세월이 담긴 돌 하나를 문갑 위에 놓고 태초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바라보는 풍류는 신선의 경지까지 이끌어 주었으며 이 기품을 사랑하여 문방(文房)의 제 오우五友)이자 제오군자(第五君子)로서 애석해 왔던 것이다.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오우가(五友歌)>에서 읊었듯이 이 수석(水石)과 송죽(松竹) 그리고 달의 다섯 친구면 지금도 만족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일본고사에 의하면 수석이 우리나라부터 이웃나라 일본으로 전래된 것은 백제시대의 근륵(勤勒)이란 승려가 일본 수이꼬천황(推古天皇) 20년(612년) 영산석(靈山石)을 일본조정에 헌납한 것이 일본 수석의 효시라고 한다.
그리고 조선조에 이르러서 애석의 값진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는 인제(仁齊) 강희안(姜希顔)(1417~1464)의 <양화록(養花錄)>은 지금부터 약 5백 년 전의 기록임에도 괴석에 대한 감상과 연출기법 등을 상세히 적어 놓은 보배로운 책이다.
‘괴석은 곧 굳은 덕을 지니고 있으며 참으로 이것은 군자의 벗이 됨이 마땅하다.’라는 괴석 예찬도 아끼지 않았으며 세조 때의 서화가로 훌륭한 괴석도(怪石圖)도 많이 그렸다. 그의 「양화소록(養花小錄)」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장식했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숨어있는 듯한 국화와 높은 품격을 지닌 매화와 더불어 난초의 상서롭게 풍기는 향기 등 여러 종품(種品)은 제각기 풍류와 운치를 떨치고 있다.
그리고 창포(菖蒲)는 홀로 세속에 초연하여 고상함을 나타내는 차가운 지조가 있으며, 괴석으로 군자의 벗이 됨에 마땅하다. 항상 같이 하여 눈에 담고 마음으로 본받을 것으로서 모두 버릴 수 없는 감히 미치지 못할 고상한 형식이다. 그들이 지닌 바가 나의 덕이 되는 것이므로 정신적으로 유익하고 도움이 됨이 어찌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그 뜻이 어찌 넓고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다. 널다란 집에 보드라운 융단을 깔고 비취 구슬을 몸에 차고 피리를 불며 노래를 부르는 따위에만 마음과 눈이 어두워지는 행실은 충분히 엄준한 징벌을 받을 만하다.”
또한 우리의 옛 동양화에서 선조들이 남긴 허다한 괴석도(怪石圖)는 선비의 애석 자취를 넉넉히 반영해주고 있으며, 분(盆)에 올려놓은 괴석을 방안에 배치한 고화(古畵)도 발견되고 있다. 또 서민층에 널리 퍼져있던 민화 속에서도 애석하여온 자취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이 돌의 운치를 귀히 여겨 아끼고 사랑한 격조 높은 피가 오늘날 우리들 몸속에서도 흐르는가 보다. 지금도 고궁에 가면 품위 있고 기품 있는 기석(奇石), 괴석(怪石)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창경궁(昌慶宮), 장서각(藏書閣) 앞, 창덕궁(昌德宮) 낙선제정당(樂善齊正堂) 뒤와 장락문(長樂門) 앞 등엔 돌 화분에 세워진 기석(奇石)들이 옛 사람들의 얼을 간직한 채 묵묵히 예스러움을 말해주고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 돌의 산지와 연대 그리고 유래 등을 기록한 문헌이 없어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궁중에서도 돌을 사랑해 주었다는 것으로 흐뭇함을 금치 못한다.
‘돌의 맛, 그것도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다고 할 수 없다.’라고 시인 조지훈은 못을 박기도 하였다.
추상석(抽象石)에 심취한 시인 박두진은 스스로 탐석한 돌에서 시상을 얻어 쓴 <수석열전(水石列傳)>이라는 돌 시집을 펴놓았다. 돌은 선비들의 애완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백성들이 길흉을 점지해주는 영험한 암석으로 숭배하기도 하고 때로는 건축재로서, 석공예품으로서 다양하게 항상 우리 인간과 함께 인간의 곁에서 공존하였다.
선인의 슬기가 가득한 <채근담(菜根潭)>에서 말하기를,“풍취를 얻는다는 것은 많음에 있지 않다. 작은 못, 작은 돌 하나에도 고요한 산수의 경관이 담긴다. 빼어난 경치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오막살이 초가에도 시원한 바람, 밝은 달이 있다.”
라고 했듯이 아주 작은 것에서 크고 풍요로운 것을 얻는 풍류가 곧 축경미의 극치로서 수석 취미의 보람을 갖게 한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수석 취미를 조용히 소문 없이 애완하면서 끈기 있게 계승하며 누려왔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이제 우리도 우리 고유의 수석미를 찾아내야겠다. 우리 민족성과 맞는 한국적인 향토의 구수한 흙냄새와 자연미의 추구가 시급하게 이루어져야겠다.
中國의 賢首國師에게 불법을 배운‘勝詮法師’ 80여개의 돌을 향해 불법을 강연
신라의 승려 승전은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현수국사의 講席에서 불법을 배웠다. 사물을 보는 것이 슬기롭고 뛰어났던 그는 현수의 불법을 받아 연구하며 생각을 쌓아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 그 묘함이 심오했다.
현수에게 배울 만큼 배우고 스스로도 만족한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이를 알아차린 현수가 승전을 불렀다. “옛다.” 현수가 무릎 꿇고 합장을 하고 있는 승전 앞에 두루마기 몇 개를 던졌다. 놀란 승전이 까닭을 물었다. “뭡니까?”
그들은 서로를 헤아려 가고 오는 말이 항상 짧았다. 세치 혀로 하루종일 풀어내는 말에도 줄거리가 없는 세속의 말과는 달랐다. 필요한 말들도 최소화시켜 말했다. 그러므로 그 말의 짧기가 논두렁을 후다닥 지나가는 노루꼬리만했다.
“의상에게 전하라.” 승전은 한번 더 놀랐다.
‘신라에 돌아가고자 하는 발설을 한 적이 없건만……’
사람이 갈 것인가 올 것인가,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 정도는 웬만한 밥그릇 수로도 쉽게 알 수 있는 것. 그동안 그와 나눈 法談 좌석에서 얻은 감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승전은 이런 신라행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인연이 되면 다시 오겠습니다.”
“가고 옴이 어디 있겠는가. 가면 오고 또 오면 가는 것, 만남도 떠남도 그렇지 않겠는가.”
승전은 장삼자락을 한속으로 추스르며 삼배를 올렸다. 가고 옴이, 떠나고 만남이 그렇다마는 승전의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最古) 사서(史書)인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이 1285년에 지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승전법사(勝詮法師)는 돌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불경(화엄경)을 논의하고 강연했다고 하니 그 곳은 갈항사(葛項寺: 경북 금릉군 남면 금오산 서쪽에 있던 절)이다. 그 돌 80여개는 지금까지 강사(綱司)가 전하고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점이 있다.
돌해골을 써서 절을 창건한 다음 80여개의 돌들을 관속으로 삼아 불경을 개강했던 갈항사가 금오산 근처에 있었음을 명심한다면, 금오산이 근년에 수석산지로 각광을 받았던 곳임을 비추어 볼 때 금오산의 색채 영롱하고 형태 기이한 돌들을 탐석 해다가 애완하여 왔음을 집작할 수 있다.
80여개의 가지가지 형상을 지닌 돌들에서 온갖 세인들의 속태(俗態)와 기행(奇行)을 엿보고, 또 만상의 움직임을 헤아려 보면서 거기에 불심의 각(覺)을 심어보려 했는가…… 시건방진 주위의 인간들에게는 불경을 말할 건덕지가 없었기에 돌한테나 일러두어야지…… 했던가.
아니 돌을 깨우쳐줄 정도의 법력이 있을 때에 비로소 세속을 향하여 설법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돌을 깨우쳐주는 신력의 경지에 이를 때 이윽고 자아를 깨닫는 것이라고 집념했는지도 모른다.
신라의 고승 승전이 돌을 거느렸던 철학적 세계는 너무 심오하여 그 깊은 곳을 이해하기가 까마득하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이다. 애석은 취미로부터 시작하여 생에의 탐색으로 연결되어 나중에 어느 경우에는 돌무리들을 향하여 불경을 논의하고 강연하는 승전법사의 경지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으리라 하는 바를 잠시 숙고하게 된다.
승전법사처럼 돌이 자기의 인생과 종교와 철학과 직결될 때에 돌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것으로, 귀히 신령스럽게 여겨지게 된다. 승전법사는 신라의 승려로, 당나라 형수에게 배운 화엄경을 692년 귀국하여 의상에게 전했다.
三峯 鄭道傳의 石亭記 考察
鄭道傳의 일대기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개국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공신 역할을 한 정도전은 고려 말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군사, 외교, 역사, 행정, 전리 등에 걸쳐 뛰어난 일가견을 가지고 조선 건국을 주도했다.
봉화(奉化)가 본관인 그는 字를 宗之, 호를 三峯이라 하였으며,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의 학문적인 영향은 이색 李穡(1328~1396)과 崔兵副로부터 받았으며, 특히 이색의 문하생인 정몽주(1337~1392), 이숭인 등과 교우하였다.
1362(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忠州司錄 등을 지냈다.
1366(공민왕 15)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자 고향 영주에 내려가 학문에 힘썼다.
1370(공민왕 19) 성균관 博士가 되어 이색, 정몽주 등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1383(우왕 9) 함주로 이성계(1335~1408)를 찾아가 막료가 되었다.
삼봉 정도전이 젊어서 나주로 귀양을 가던 도중 길목에 있는 천안 군수에게 들렀던 바 그 군수 방에 수석이 놓인 것을 보고 그 뜻을 궁리하였다. 해독하기를 청렴결백한 공무수행 자세는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돌을 늘 보면서 생김새의 기묘함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돌의 확고한 절개를 본받기 위해서 수석을 갖다 놓고 있음을 삼봉을 깨달았다. 그리고 시를 지어 그를 찬양한 바 있다.
石亭記 원문해설
申 공 昌父는 절개가 특출한 인물이다. 그 사람의 절개 지킴이 확고하여 남이 꺾을 수가 없었다. 일찍이 고려왕조에 벼슬하여 그 직위가 높았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남의 부당한 주장에 굽히지 않아 집권세력의 미움을 받아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시골 고향으로 돌아왔다.
애석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어 먼 곳에 나가서 괴이한 돌을 탐석하여 번번이 집으로 가져왔다.
큰 돌은 수레에 실었고, 그보다 작은 돌은 우마의 등에 실었다. 또 그보다 작은 돌은 하인으로 하여금 지게에 지우고 아주 작은 돌은 본인이 직접 겨드랑이에 끼고 왔다. 이상한 돌이라면 모은 힘을 다하여 남겨놓지 않고 집으로 다 가져왔다.
모난 바탕의 돌, 창끝 모양으로 뾰족한 봉우리가 있는 돌, 평평하고 넓적한 돌, 종횡으로 엇갈린 선이 단정하게 겹으로 쳐진 것, 淸秀한 모습이 군자의 덕 있는 얼굴 모양의 돌…… 이런 모양 말고도 기괴한 것은 산림의 雲霧 속에 은거하는 선비 모습의 돌은 입을 벌리고 바른 말 하는 형용이고, 공경하고 삼가는 몸짓의 돌은 충신이 조정에서 정치적인 이해를 논란하는 형용이다.
그 밖에도 가파른 언덕 위에서 범과 표범이 성난 표정으로 겨누는 형용, 뛰고 오르고 떨어지고 하여 양떼가 장난하는 형용, 옹기종기 밀집하여 머리와 꼬리를 맞대어 노는 송사리떼의 형용, 이런 돌들을 문장력이 모자라 다 적기가 어렵다.
申公은 이런 돌들을 집에다 모아 놓고 정자를 석정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날마다 이 돌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노니는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고, 가을 달밤에는 달빛이 더욱 밝아지도록 해준다. 화초에게는 더욱 아름다워지도록 해주고 서리와 흰 눈이 더욱 희게 보이는 것은 모두 돌이 경치와 서로 어울려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사람들은 신공이 돌을 좋아하는 행동만 알고 어떤 생각으로 돌을 즐기고 있는지 깊은 뜻은 모르고 있다. 주역에 이르기를 ‘절개를 돌보다 더 굳게 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貞吉함이 온다.’ 하였다. 신공의 절개 지킴이 확연하여 꺾이지를 않고 권력집단에 굴복하지 않으니 이것이 돌보다 더 굳은 절개가 아니겠는가.
그는 온당하지 않는 집단에 항거하여 곧장 시골 고향으로 물러났으니 어찌 장래에 貞吉함이 없을 것인가. 도가의 사상으로 자연과 자신을 혼연일체하고 있으니 의외의 불측한 화는 입지 않고 있다. 이것이 貞吉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신공이 돌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까닭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문장화할만하다고 생각하여 적었다.
淸虛 西山大師의 愛石詩와 水晶石
서산대사(1520~1604)
호는 청허. 자는 현응(玄應). 속성은 최. 안주 사람이다. 묘향산에 오래 있었으므로 서산대사라 부른다. 30세에 선과에 급제하여 양종판사(兩宗判事)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에 몽진함에 찾아뵙고 팔도 십육종 도총섭(八道十六宗 都摠攝)에 임명되어 의승병 5,000명을 모아 호국하였다.
저서는 <선가귀감>, <삼가귀감>, <청허당집>, <제산단의문> 등 다수가 있다. 서산대사의 애석시 출전은 <청허당집(淸虛堂集)>이다.
윤상사의 옛집을 지나다가
그때는 노래와 춤 어우러 흥겨웠는데 지금은 쓸쓸한 절간 같네
누대에는 예대로 솔바람 시원하며 뜰 둘레 나무에선 새들 지저귀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섰던 괴석들 뒹굴어 잠에 빠지니 푸른 이끼 벗하여 탐스럽게 덮었네.
해설: 상사(上舍)는 성균관에 입학한 진사(進士)의 별칭임으로 소장한 애석인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전에 윤 상사와 인연을 맺은 바 있어 임진왜란 중에 잠깐 틈을 내어 윤 상사의 안부를 알고자 그의 옛집을 찾았으나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폐허가 된 쓸쓸한 광경을 보고 느낀 바를 서정적으로 읊었다.
특히 결구의 “뜰에 입석으로 연출되었던 괴석도 뒹굴어 엎어져 푸른 이끼에 묻혀 있더라.” 라는 구절은 가슴을 시리게 한다.
전남 해남에 위치한 대흥사(大興寺)에는 서산대사가 항시 애완하던 유물인 수정석 2개가 보존되어 있다. 서산대사가 입적(入寂)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남쪽(한듬)에 가서 수도(修道)하라. 그 곳은 三災不入地요, 萬年不破地요, 종통귀의(宗統歸依)할 곳이라’ 하였으므로 제자들이 스승의 유품을 현 대흥사에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수정석만은 하사받은 것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서산대사가 어떠한 연유로 수정석을 얻게 되었는지 알려진 것이 없고 출가 당시부터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구전만이 전해질 뿐, 그 외에 그 수정에 얽힌 설화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산대사는 마음이 산란하고 안정이 되지 않을 때에 두 알의 수정석을 손에 쥐고 비비면서 정신을 통일시켜 맑게 하고, 또한 오랜 참선의 자세에서 혈액순환을 돕는데 이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그 수정석을 볼 것 같으면 오랜 세월 매만졌던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맑은 백수정(白水晶)이다. 서산대사는 1520년에 출생하여 85세에 입적하였다.
서산대사가 항시 손에 쥐고 있었다는 수정석
金時習의 壽石詩
堅假山
내 이렇게 늙도록
세상에 내세울 공로 하나도 없고
좌절의 그날 그 아픔 달게 삼키며
산수 좋은 자연에 와 묻혔더니
어느새 병들고 허리 구부러졌구나.
아, 비뚤어진 나라 바로 세우고자
충성의 의지 얼마나 갈고 다듬었는데
끝내 제구실 못하고 쓰러지려 하는구나.
허나, 절묘한 ‘수석’ 한 점 앞에 놓고
크나큰 산천을 연상하면서 나의 변함없는 절개를 굳게굳게 다짐하리라.
김시습은 절개와 불굴의 사상을 수석의 경지 속에서 하나로 귀일시킨 위대한 수석인이었다. 위의 절묘한 시에서 참다운 수석 정신을 배워야겠다. 본관이 강릉인 김시습은 조선왕조 초엽인 세종 17년(1435)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字는 열경이고 호는 梅月堂이며 불교에 귀의하면서 지은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김시습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천재성이 발견되어 신동이니 귀재니 하여 여러 사람들의 주목과 기대를 모았고, 갖가지 특이한 일화들을 남기고 있다.
그가 3살 때에 어른들이 대청에서 맷돌에다 보리를 가는 광경을 보고 시 한수를 지었다고 한다. 마루가 쿠르릉 울리는 소리하며, 보리알이 타져서 노랗게 부서져 몽실몽실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리얼하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한 점에서 경탄이 절로 솟는 바 그 시는 이러하다.
無雨雷聲何處動
비는 오지도 않는데 구르릉 구르릉 천둥소리는 어디서 나는 것일까?
黃雲片片四方分
누런 뭉게구름이 조각조각 부스러지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구나.
이만하면 과연 얼마나 빼어난 문재로 타고났는지를 알만하다. 후에 세종도 이 소문을 듣고 천하의 신동이라는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고 하여 그는 왕 앞에 불려갔는데 그 때의 김시습의 나이 5살이었다. 세종도 김시습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각별히 총애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김시습이 성년도 되기 전인 15살 때에 승하하여 그의 뒷날의 후견자가 되지 못하였다.
또 김시습은 15살 되던 해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 불운이 겹쳤다. 어머니가 타계하자 그는 시골에 있는 외가에 가 얹혀살게 되었다. 하지만 채 3년이 못되어 외숙모가 또 별세하는 바람에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본가에서 살게 되었다. 이런 역경 속에 나이가 차 집안에서 서둘러 장가를 보내게 되었는데 그 당시 훈련원 도정(都正)의 딸 남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의 결혼은 순탄치 못하였다.
그는 집안에 활기가 없고 침울 속에 싸여 지내는 분위기가 답답하기도 하여 얼마 뒤에 집을 떠나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왕세자로 있던 문종이 즉위했는데 문종은 의외로 단명하여 재위 3년 남짓 왕을 하다가 또 세상을 떠났다. 임금 자리가 이렇게 빨리 비자 다시 어린 왕세자가 왕위를 이었는데 이 분이 단종이다. 어린 신왕을 보필하는 충신으로 김종서와 황보인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국왕자리가 세 번 바뀌고 어린 조카가 임금이 되자 그만 왕위가 탐난 수양대군은 왕위를 찬탈했다.
김종서, 황보인 등을 참살하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로 압송하여 궁에서 축출한 후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었다. 계유정란이라 일컫는 대반역이 이것이다.
허수아비 임금이 된 단종은 수양의 횡포와 등살에 견디다 못하여 왕위를 숙부한테 넘겨주었다. 이렇게 왕위를 빼앗아 세조가 된 수양은 단종을 노산군으로 낮추어 강봉해서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조정의 참변이라든가 세조의 부당한 폭력행위에 대한 소식은 김시습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중흥사에도 그때그때 날아들었음은 물론이다. 세조의 횡포를 전해들은 김시습은 통분하여 책을 불살라버리고 삭발하여 중이 되었다.
법호를 설잠으로 지은 그는 이때부터 일편단심의 충성심과 곧은 절개를 지키며 타락한 정치를 저주하는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설잠이라는 뜻은 새하얗게 눈 덮인 높고 높은 멧부리라는 의미로 자신의 굽힘 없고 고고한 절의를 상징한 법호라고 볼 수 있다.
단종이 유배당한지 10개월 뒤 단종을 복위시켜 세계의 질서와 법통을 바로잡자는 충신들의 거사음모가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발각되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세조에게 잡히어 갖은 고문 끝에 죽고 단종마저 참살당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김시습은 더욱 통분하여 이 산자 저 암자를 어두운 마음으로 다니며 비뚤어진 나라 정사를 한탄하였다. 그렇게 방랑하면서도 천부의 문재를 타고난 그는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등을 저술하였고 그 책들의 후지도 계속하여 썼다.
그의 재능과 탁월한 인품을 아는 조정에서도 여러 차례 그를 불러다 중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다만 효령대군의 요청만은 거절할 수 없어서 불경을 한글로 풀어 번역하는 일을 잠시 거들어주었다.
그리고나서 여전히 방랑과 저술을 병행하며 돌아다녔는데 1465년에 이르러 그는 경주 남산에 ‘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金鰲神話(금오신화)>를 지었다.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폭넓게 포용한 그의 사상은 당대에는 매우 앞선 것이었다. 그의 탁월한 문장력 때문에 세조는 그를 여러 차례 불렀으나 그는 끝까지 단호하게 거절했다. 경주 금오산실에서 7년 정도를 지내는 동안 김시습은 대작 <금오신화> 외에도 <산거백영> 같은 값진 저서를 썼다. 그러다가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성동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산거백영 후지>를 저술하였다.
수석승처(壽石勝處)로 폭포가 내려 떨어지고 바위와 숲과 초옥이 하나의 자연 속에 동화된 아름다운 곳에 묻혀 살며 농사도 짓고 글도 쓴 성동에서의 8년이 그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수석시 <堅假山(견가산)>도 성동에서 그의 말기에 지은 시로 알려지고 있다.
이 시에서도 그의 불굴의 충절과 고결한 기개를 흠씬 접할 수 있어 감명 깊다. 병들고 허리 꼬부라졌으나 뜻을 굽히지 않는 ‘石心’의 경지가 함축되어 있다. 김시습의 말년 무렵 달관한 인생철학을 돌과 이야기하면서 서릿빛 같은 마음의 외침을 한 자 한 자 아로새긴 글이 이 시가 아닌가 싶다.
김시습은 1483년에 서울 성동을 등지고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그런지 10년 뒤 충청도 홍산에 있을 때 병들어 그곳 무량사에서 59살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1493년의 일이었다.
김시습의 사상과 문장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엄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깨끗하고 곧은 절개로 인하여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김시습은 절개와 불굴의 사상을 돌의 경지 속에서 하나로 귀일시킨 위대한 수석인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수석인들을 일깨우는 참다운 수석정신을 여기서 배울 수 있다.
원경(遠卿) 김현택(金玄澤)의 소화석(小華石) 유래
소화석은 봉우리가 세 개 솟은 산모양의 돌이다. 소장자 김현택의 자는 원경이며 본관은 광주이다. 그의 아버지는 호조판서를 지낸 김진귀이다.
김현택의 행장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진암선생이 보낸 편지 내용으로 보아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선비임을 알 수가 있을 뿐이다.
소화석은 삼봉형의 산수경석
소화석에 대하여 진암 이천보는 그가 쓴 「소화석기(小華石記)」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소화석은 봉우리가 세 개 솟은 산 모양의 돌로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을 닮은 모양이다. 주봉인 中峯은 우뚝 솟아있으면서도 바로 서 있지 않고 약간 고개를 돌린 듯이 변화를 주고 있으면서 좌우에 측봉(側峯)을 거느리고 있다.
돌의 색깔은 청흑색이며 석질은 매우 강하여 마치 무쇠와 같이 견고하다. 더구나 주봉의 중심부분에 동굴이 휑하게 뚫려 있다. 크기는 한 자 정도라 분에 앉혀놓고 물을 뿜어주면 돌이 물을 빨아올려 마치 이슬이 맺힌 것 같다.”
소화석은 비록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는 없으나 애석인이라면 위 기록만으로도 그 형상이 머리에 떠오르는 삼봉형의 수석이다. 그 위에 중봉에 투(透)까지 갖추었으니 현대 애석인이 갈구하는 이상적인 경석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석질과 색상까지 훌륭하니 참으로 일국의 재상이 애완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이 훌륭한 소화석도 주인이 죽고 나자 직손이 아닌 다른 여러 사람의 손에 전전하면서 결국 사라졌다. 지금은 진암의 소화석기만 남아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애석의 방법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행이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현대 애석인이라면 소화석은 수반에 금모래를 깔아 앉혀 물을 뿌리며 애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약 250년 전의 김현택 선인은 산수경의 실감을 높이고자 실낱같은 뿌리의 소나무를 붙여 물 뿌려 주며 맺힌 이슬을 보며 때묻어 가는 마음을 세심하며 자신을 연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암선생이 쓴 「소화석기(小華石記)」
이 수석은 봉우리가 세 개인데 중봉이 우뚝하게 솟아 있는 빼어난 돌로 좌우에는 각 한 개의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돌의 색깔은 검푸른 색이며 석질은 견고하여 무쇠와 같이 단단하다.
돌 중심부에는 구멍이 휑하게 뚫려 있으며 자기분에 앉혀 놓고 물을 주면 물기를 정상까지 빨아 올려 마치 이슬이 맺힌 듯 하다.
중봉 밑에는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흙이라고는 없는데도 뿌리가 붙어있으며 언제나 싱싱하여 말라죽지 않고 살아있다.
이 수석은 옛날 영의정을 지낸 김유 공이 소장했던 돌이나 영의정이 죽게 되자 기백년 동안 소장자는 여러 번 바뀌어 지금은 나의 친구인 김원경(김현택의 字)의 소유물이 되어 있다. 원경은 이 돌을 몹시 사랑하여 책상에 올려놓고 이름을 소화석이라 지었다. 이 돌은 봉우리가 세 개 있는 것이 화악산(삼각산의 별칭)을 닮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돌은 영의정의 집에 있었던 돌로 방형의 연못가에서 언제나 아름다운 꽃나무에 에워싸여 있으면서 당시의 특별한 볼거리로 사랑받던 돌이었다.
김원경은 시골에 사는 가난한 선비로 다른 애완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오로지 이 돌만을 도자기 분에 앉혀 놓고 있다가 책을 읽는 틈틈이 조용히 이 돌을 감상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수석도 주인을 만나기에 따라서 신세가 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였으니 사람의 신세도 이와같지 않은가.”
김유 영의정은 조선조가 한창 중흥할 때 임금이 아끼던 신하로 그는 심지 깊게 간직한 뜻을 마침내 이루게 되자 희첩(姬妾)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그의 집 문전에는 방문객들로 꽉 차게 되었는데 대개 그들은 이 원정의 경치를 관상하면서 즐거워하고 심지를 빼앗긴 것이니 이는 지극히 부귀를 누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석 한 개도 그 원정의 구경거리 속의 일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영의정은 그 수석의 기묘함을 반드시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가령 생김새의 기묘함을 알았다 하더라도 마음 깊이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원경은 타고난 성품이 기이한 것을 좋아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귀중품은 그의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고,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리는 물건을 취하여 즐겼다. 그가 이 돌을 사랑하는 것도 참으로 그에게는 당연한 처사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를 보건대 수석이 소장자를 잘 만났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옛날에 얻었던 영화를 지금은 다 잃고 있는 것이다.
본래부터 물건이 태어나면 번영이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은 필부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임금의 총애를 지극히 받다가도 언제인가는 능욕을 당하게 되어 잃게 되는 것이 하늘이 준 이치이다. 하물며 영의정의 사랑을 받았던 물건일지라도 주인과의 만남에 대하여 각론할 따름이다. “아! 이런 영고성쇠가 비단 이 소화석에만 있었던 일이겠는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애석시
<산거사시음(山居四時吟)>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문양석(紋樣石)을 즐기며 애석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퇴계의 애석사상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충분하게 이해가 될 줄 믿는다.
명종초 1548년 10월 단양(丹陽)군수에서 풍기(豊基)군수로 부임할 때의 일이다. 평소에 애석했던 장석(掌石) 손바닥만한 돌만 지니고 말 한 마리에 선생의 소지품을 싣고 떠나셨다는 일화에서 청렴결백과 더불어 애석한 선생의 고매한 인품을 접할 수가 있는 것이다.
퇴계가 태어난 집인 노송정이 도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온혜리에 있다.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며 거처하던 도산서원
1458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임 시에 산수가 빼어나기로 이름난 이곳에 사는 즐거움을 적은 시 몇 편을 음미한다.
<山居四時吟>
안개 걷힌 春山 비단결처럼 밝고
진기한 새들은 온갖 소리로 지저귄다.
산사에는 요사이 찾는 손님 없고
푸른 草物은 뜰 안에 마음껏 자랐네.
석양의 붉은빛 시냇물과 산을 흔들고
바람은 자고 구름은 한가한데 새들이 돌아온다.
홀로앉아 깊은 회포 누구와 이야기하리
바위언덕 고요하고 물은 졸졸 흐른다.
<말을 타고 가며>
아침에 맑은 시냇물소리 들으며 나가고
저녁에 靑山의 그림자 보고 돌아온다.
아침저녁 山水中에 놀고 있으며
산은 푸른 병풍 물은, 맑은 거울같네
바라건데 산에서는 구름속의 학이 되고
물에서는 파도위의 갈매기가 되고 싶다.
알지 못하겠구나 고을살이하는 나의 일이 잘못될지
억지로 웃으며 丹丘에서 놀고 있다고 변명할까
<구변(口邊)>에 사는 즐거움을 읊은 오언시>
땅을 靑霞(푸른 노을) 바깥에 사서
깊은 골짜기 옆에 거처를 옮겼네
깊이 탐닉하노니 오직 수석뿐이요
크게 감상하니 오직 소나무뿐일세
퇴계 이황과 반타(盤石)
제자 김부륜의 글에 의하면 선생은 도산 땅을 얻고 난 뒤 아직 서원이 낙성되기도 전에 늘 “산수가 뛰어나고 맑아서 내 마음에 꼭 든다.”고 하셨다.
또 제자 이덕흥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은 신유년(1561년) 4월 16일 형의 아들 교, 손자 안도 그리고 이덕흥과 그의 아들 굉중을 데리고 밤에 배를 띄워 탁영담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윽고 반타석에 배를 댔다가 역탄에서 배를 푼 다음 술이 서너 번 돌자 선생은 옷깃을 바로하고 단정히 앉아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외우셨다고 한다. 이날 밤 선생이 지으신 시는 이러하다.
물과 달이 푸르러 밤기운도 맑은데
조각배에 바람 불어 맑은 강을 건너네.
항아리 기울여 은잔을 비우고
삿대는 물결 갈라 구슬방울을 이끄네.
채석강의 미친짓이 뜻을 얻음이 아니러니
별똥별 스쳐감이 참으로 사랑스러워라
인생 백년 그 뒤를 뉘 알리오만
다시금 어느 누가 바른 소리를 이으리.
안동 도산서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낙강 한가운데에는 등을 구부린 형태의 바위가 하나가 반쯤 물에 잠겨 있다. 그것이 바로 반타석이다. ‘반타’란 ‘편편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크기는 두어 평 남짓 될까? 진회색 색상에 거친 곳이 한군데도 없이 말끔히 물씻김이 되어 있고 반들반들하다.
기록에 의하면 큰물일 때면 물 속에 잠겼다가 물이 빠진 후에야 모습을 나타낸다고 했다. 퇴계 선생도 그의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누런 탁류 도도할 때는 형체조차 안뵈다가 물결이 잔잔하면 다시 그 모습을 그러내는구나. 어여뻐라 천고의 반타석이여 하고많은 충격 속에서 끄떡도 아니하네.
朝鮮中期에 愛石한 최립(崔?)의 怪石詩
<怪石>
바다에 잠겨있던 수석, 누가 건져 바쳤는데 이 돌의 조각솜씨 귀신이 만든 작품일세.
석분(石盆) 앞에 옥사(玉砂) 깔고 궁궐 뜰에 놓았으니
은대(銀臺) 책상에서도 쭈뼛한 봉우리 상대할 수 있더라.
이끼 끼인 깊숙한 동굴에선 안개구름 일고
빗물이 축축하면 물기는 정상까지 오른다네.
아! 여기는 선인(仙人)의 관청이라 공무(公務)는 밝고
성긴 밭 틈으로 상쾌한 기분 오래도록 누리게 되더라.
최입의 호는 간이(簡易) , 字는 입지(立之)이며, 본관은 개성이다. 1555년 16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여러 지방의 수령을 지내고 1577년에는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이 되어 명에 다녀왔다. 1581년에는 황해도 재녕군수로 나가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림을 입게 되자 구제하고, 다시 질정관이 되어 명에 다녀왔다. 1606년에는 중추부동지사(종2품), 1607년 강릉부사에 이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사직한 뒤에는 평양에서 은거하다 생을 마쳤다.
공의 문장실력은 뛰어나서 시험만 치르면 장원을 할 정도라 임진왜란의 위급한 정세 하에서 명에 구원을 요청하는 외교문서 작성은 언제나 공의 몫이었다.
석가산시(石)假山詩)
간이공은 명의 사신으로 여러 번 갔다. 임진왜란 전에 두 번, 왜란 중에 두 번 다녀왔다. 그만큼 명 조정의 중신들과 외교를 성사시킬 인물이기 때문에 네 번이나 뽑힌 것이다.
최입 선생이 돌에 대하여 지은 애석시 중에 세 번째 지은 이 석가산시는 선생이 두 번째 명에 갈 때인 1581년(선조 14년)의 사행(使行)에서 지은 시이다. 북경 외곽의 한 마을에 있는 성국공(成國公) 주응정(朱應禎)의 별장에 머무르며 석가산을 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석가산시를 차운하다.
초년의 주씨 별장 경관 아름답지 않았으나 풍류 즐긴 호사가 주인, 전국에서 기묘한 돌 모아 천태산의 기이한 형태로 탄생시켰는데
태호(太湖)에서 나는 괴석들 골라 모았더라.
바위 속, 굴 길은 사람이 돌 수 있고
깊숙한 동굴 들어가면 넓은 방이 나온다.
이십년 세월은 주인을 세 번 바꾸었으나
크게 자란 솔과 삼나무는 그 역사를 증명하네.
성국공 주응정의 별장은 본래 다른 사람의 소유로 꾸밈이 아름답지 않았으나 세 번째 주인이 된 주응정은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중국 각지의 괴석을 모아 커다란 석가산 정워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천태산을 모방했다. 특히 중국 남쪽 지방의 태호산의 동굴형상석을 배치하였는데 그 구멍이 어찌나 큰지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수석사랑을 읊은 고산 윤선도의 <五友歌>
윤선도의 부용정원
완도군 보길면 부용리 완도 항에서 서남쪽으로 12km 떨어진 보길도에 부용동 정원이 있다.
고산 윤선도가 수차례 귀향살이는 한 이후에 은둔생활을 결심하고 이 섬에 들어와 일생을 마친 곳으로 이곳에서 <오우가>,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의 자연을 노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낙서재’, ‘통천석실’, ‘세연정’ 등의 정자를 짓고 정원을 일구며 신선처럼 살았다. 부용정원은 호남지방에서는 제일 큰 정원으로 지방문화재 3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고산이 다도를 즐기며 앉았던 차바위
내버디 몃치나?니 水石과 松竹이라
東山에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다?밧긔 또 더?야 무엇?리
구룸빗치 조타?나 검기를 ?로?다.
?람소리 ?다?나 그칠적이 하노매라
죠고도 그츨뉘업기느? 물뿐인가 ?노라.
고즌 므스일로 퓌며서 쉬이디고
플은 어이?야 프르? ? 누르?니
아마도 변티아닐? 바희뿐인가 ?노라.
더우면 곶퓌고 치우면 닙디거?
솔아 너? 얻디 눈서리? 모??다.
九泉의 불희고 ?줄을 글로 ?야 아노라.
나모도 아닌거시 플도 아닌거시
곳기? 뉘기시며 속은 어이 뷔연?다
뎌러코 四時에 프르니 그를 됴하 ?노라.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에 있는 <오우가(五友歌)>로 그의 자연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자연이 시적 대상이 되어 있는 <오우가>는 물과 돌 그리고 소나무와 대나무 거기에다 달이 지닌 미덕을 노래함으로써 자연적 사물들의 모습과 인간의 도덕성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이 시조는 자연에 속하는 대상들의 본질적 속성과 도덕적 의미부여를 통해 그 실체에 더욱 깊이 있는 접근을 가능케 하였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시조작가로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까지도 이름을 널리 떨친 위인이다.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시조시인의 한 사람으로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다.
윤선도는 11세 때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1616년(광해군 8년)이이첨의 난과 박승종, 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 기장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후에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그 후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년) 봉림, 인평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 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반대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그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상을 등질 결심으로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의 경치에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 해 풀려났다. 이후 윤선도는 다시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詩, 歌, 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보길도에 묻혀 살았다. 그리고 해남 현산면의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에 묻혀 지냈다.
「山林?濟」의 저자 洪萬選의 완석
「山林?濟」의 저자 홍만선은 풍산을 貫으로 하고 字는 士中 이고 호는 유암(流巖)이라 했다. 조선조 중기의 인물로 1664년에 출생하여 1715년(숙종 41년)에 52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관직은 장락원정(掌樂院正)에 이르렀을 뿐이나 「山林?濟」의 일부는 역사적으로 끼친 공이 크다. 조선 시대의 박물지(博物誌)로서는 최고봉이라 하겠다. 천생의 고매한 식견은 물론 치세와 제민(濟民) 등에 관한 논술은 유일무이하다.
「山林?濟」를 보면 성생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山林?濟」의 제 4편 <양화(養花)> 항목의 완석에서 약 300년 전에 우리 선인들의 애석 풍조가 자못 고도의 수준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완석을 통하여 노후에 유일한 반려로 지내온 우리 조상들의 애석취미를 엿볼 수 있다.
선생의 완석론에 의하면 당대의 수석 취미계에 있어서 돌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모래를 넣어서 분에 수분이 자연스럽게 위의 봉까지 올라가도록 시도한 인위적인 착상도 異聞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밑면을 절단하는 층의 인사들에 비하면 오히려 그 정신면에 있어서 옛 선인들의 소박한 행위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인위적인 행위에 대해 선생은 비속한 짓이라 하였고 매우 비판적인 입장에서 애석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사실은 돌을 다루어 수반을 제작하여 괴석을 안치하고 물을 넣어 감상한 점이다. 현대에 있어서 우리 애석인들이 수반석에 물을 분무하여 산수경승(山水景勝)을 감상하는 일련의 취향과 일치한다. 이 정서는 물에 젖은 돌의 아름다운 색조와 신선한 감각에 의하여 서서히 위로부터 아래로 마르기 시작한 풍정의 자연미를 만끽하는데 있다.
이 묘경에 몰입하는 순간에서는 자아란 의식을 초월하는 대자연의 포용 속에 돌입하게 된다. 물이 작용하는 돌의 묘한 변화에서, 動과 靜의 조화에서 수석미의 극치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기에 이미 우리의 옛 선인들은 애석 감정에 있어서 깊은 묘경에 통달한 관점에서 새삼 외경을 금치 못한다.
또한 선생의 글은 조선조 중엽에서도 당시의 애석취미계에 있어서 문인 묵객들 사이에서 완석 풍조가 고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양석에 관한 <死石>이란 어휘라든지 이끼를 배양하는데 있어서 馬糞(말똥)을 이용하는 방법 등은 우리 水石後人들에게 경이에 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완석의 산지와 양석
중국에서는 거의 호수나 바다에서 돌을 발견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완상하는 괴석은 모두 산에서 채석한다. 송도(개성)에서 남쪽으로 20여리에 경천사(敬天寺)가 있다. 이 절로부터 북쪽으로 3마장 내지 4마장 사이의 그 일대가 괴석의 산지이다. 돌의 색은 청벽(靑?)이며 은은하여 마치우레가 요란하게 치는 듯한 형태의 괴석이 산출된다.
이 돌은 수반에 물을 넣어 안치하고 보면 자연히 이 돌이 물을 흡수하여 능히 돌의 윗부분에 이르러 그 물기가 마르지 않는다. 이끼의 형태가 마치 심수향(深水香)을 닮았다.
그러므로 이 돌을 이름 하여 심향석이라 부른다. 진실로 천하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신계현에서 산출하는 괴석은 석리가 대단히 치밀한 까닭에 수분이 위까지 흡수되지 못한다. 안산군에서 출토되는 괴석은 황적색으로 土色이 많다.
수락산에서 산출되는 괴석은 그 질이 견고하면서도 이 돌은 산봉우리까지 물을 흡수한다. 그 색질은 창흑(蒼黑)하며 석질은 매우 단단하다. 단양에서 산출되는 괴석은 물기를 잘 받으며 봉까지 이르게 되지만 황적으로 토색이 많다.
돌에 많은 구멍을 내어 무리하게 모래를 넣으면 석리가 단절되어 물기를 흡수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끼를 억지로 붙이면 자연히 마르고 죽게 된다. 또 이와 같은 상태로 오래 가면 괴석도 망가지게 된다. 이 같은 행위는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는 가장 졸렬한 행위이다.
石品이 매우 아름다운 일품은 양석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끼가 피부에 생기며 새파랗게 이끼가 나오게 되니 실로 형용할 수 없는 절묘한 자연의 소치라 하겠다. 한겨울에는 볕을 쬐게 하고 옹기에 넣어서 돌을 보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요즘은 돌을 이용한 수반을 제작해서 괴석을 그 수반에 안착한 다음 물을 사용하여 완상하고 있다. 햇볕이 뜨거운 날이나 혹한에서는 괴석을 방치하게 되어 손상시킬 수가 있다. 아무리 석품이 우수할지라도 그 성질이 변하기 때문에 대체로 수분을 흡수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어 하품이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돌을 ‘死石’이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상태의 돌을 원래의 것으로 회복하려면 습기가 많은 땅에 묻거나 沼池에 투입하면 해를 거듭할수록 좋아진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석을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다.
괴석에 석창포를 배양하는 법은 최근에 괴석에 이끼를 붙이거나 잡초를 심어서 관상하고 있다. 석창포는 창포와 같으나 괴석토에 심어서 즐길 수 있는 종류는 잎이 아주 짧고 가는 것을 사용해야 한다.
초봄에 뿌리가 가는 것을 채취하여 잔뿌리를 끊고 괴석 아래에 놓고 수반에 잔돌을 깔고 난 다음 샘물을 주어야 한다.
단, 냄새가 나는 물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물을 매일 갈아주면 뿌리를 내고 살게 된다. 뿌리에 물을 자주 뿌려 주면 잎이 짧고 수려하게 된다.
연기를 매우 싫어한다는 점도 유의하여야 한다. 매연에 오염되면 죽게 되므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수반을 이용하여 괴석을 놓고 창포를 석봉 사이에 심어 아침마다 물을 주면 무성하게 된다.
석창포가 힘이 없어 보이고 잎이 누렇게 변하면 쥐가 배뇨한 것이니 이것을 다시 물에 씻어 냉수에 담가 놓으면 소생하게 된다. 또한 잎을 자주 끊어줄수록 가는 잎이 나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끼를 돌에 심는 방법은 수초를 말똥에 섞어 바르고 습기가 많은 곳에 두면 곧 이끼가 나오게 된다.
정다산(丁茶山)의 축경과 석창포(石菖蒲)
다산초당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신유교란(辛酉敎難)에 관련되어 1801년 전북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1818년 그의 나이 58세 때에 강진 유배지에서 풀려 나왔다.
인생의 가장 전성기 때에 거의 20년에 가까운 기나긴 세월 동안 그의 불우한 생애를 몸담고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대표작을 저술하였던 강진에 다산(茶山)의 애석(愛石)에 대한 자취가 남아있다.
다산(茶山)이 유배되었던 곳은 강진군 강진(康津)군 도암(道巖)면 귤동이다. 해남읍(海南邑)에서 동쪽으로 개나리까지 25리, 여기서 15리를 더 들어가면 고요한 규동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 초가 마을을 벗어나 수림이 우거진 산길을 타고 600m 쯤 추어오르면 후미진 평지에 다산(茶山) 초당(草堂)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나지막한 동산은 마을에서 ‘서당까끔’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본래의 산 이름은 ‘다산(茶山)’이다. 지금도 이 산속에는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차나무로 가득했던 이 산을 ‘다산(茶山)’이라 이름 붙였음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 산 북녘에는 만덕산(萬德山)이 높직이 솟아 있다. 만덕산(萬德山) 아래의 동산이 ‘다산(茶山)’이고 이 다산(茶山) 기슭의 마을이 귤동인 것이다.
이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다산(茶山) 초당(草堂)은 본래는 초옥(草屋)이었는데 정약용(丁若鏞)이 그 초옥(草屋)에 들어서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당시의 마을 사람들이 처음엔 그를 서우다산(書友茶山)이라 부른 것을 연유로 하여 나중에는 자신의 호(號)로 굳어졌다고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친필 저작인 <사경첩(四景帖)>이 있는데 이것은 기거하던 초당(草堂)을 중심으로 한 주변 경개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연지(蓮池)를 만들고 거기에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하기 위하여 물굽이 치는 바닷가에서 괴석(怪石)을 모아다가 산봉(山峰)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초당의 작은 뜰에 축경(縮景)을 조성하려는 의욕으로, 머나먼 곳에 종자(從者) 6~7 명을 데리고 조수의 농간을 부리는 파도를 무릅쓰고 사람마다 수십 점의 괴석을 모아 배에 싣고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탐석(探石)인 것이다.
당시 맹수들이 넘나드는 산간에서 벗어나 멀리 떨어진 풍랑 심한 바다를 찾아서 돌 수십 점을 배에 싣고 돌아온 탐석(探石)이야말로 다산이 열띤 애석가(愛石家)임을 상상케 한다.
옛날 다산(茶山)이 거처했을 때의 유적이 잘 보전되어 있는 것이 있다. <사경첩(四景帖)>에 ‘차를 달일 작은 아궁이가 초당 앞에 있다.’라고 했듯이 ‘청석(靑石)을 갈아 평탄하게 하고 적자(赤字)를 새기니...’라고 한 비석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솔방울을 주워 다가 불을 지펴 샘물을 떠다가 차를 끓이면서 스스로 신선이 되기를 배우리라 했다.
그리고 ‘약천(藥泉)’이라는 샘터가 있는데 ‘옥정(玉井)에 흙 티가 없고 다만 모래알만 긁히며 한 주박을 뜨면 시원하기가 안개 마시는 듯 하다.’ 하면서 그것으로 차를 끓였다. 처음에는 바위틈에서 물줄을 이어 찾아 샘터를 손수 조성하였는데, 그 주변 풍치가 아름다웠음이 역시 <사경첩(四景帖)>에 기록되어 있다. ‘약천(藥泉)’은 서북 모퉁이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 그 샘터는 원형을 찾은 듯 하다.
또 다산(茶山)의 서쪽 돌병풍이 창연한데 거기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겼다는 기록처럼 그 자체(字體)가 지금도 잘 남아있다.
그리고 미원장(米元章)이 돌에 절하였다는 일과 도연명(陶淵明)의 성주석(醒酒石)을 상기한 <사경첩(四景帖)>의 기록으로써 옛 선인들의 애석했던 자취를 진작에 살폈음을 보아, 그 먼 바다에까지 나아가 탐석할 수 있었던 일은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다산(茶山)은 수풀이 울창한 산간 속의 작은 초당(草堂)에 18년 동안 거처하면서 좁은 터전에다 연지(蓮池)와 석가산(石假山)과 폭포경(瀑布景)과 다정(茶庭)의 한 형태도 꾸미며, 축경(縮景)의 미를 조성하고 열렬히 애석(愛石)하였던 풍모를 그려볼 때, 그는 무척이나 자연애(自然愛)에 심취하면서 불우한 세월을 보낸 것이다.
“물굽이 치는 바닷가에서 괴석을 모아다가 산봉(山峰)을 이루어 놓으니, 본디의 참다운 산악 모습을 그대로 살려 커다란 산 모양을 꾸민 듯 하다. 드높이 비탈지고 기교하게 고요한 세 층의 탑을 조성했으며, 그 깊은 골짜기의 휑한 곳에다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엉키고 교묘한 자태는 봉황새가 춤추는 듯한 모양 같으며, 뾰족한 곳에 아롱진 문채는 죽순(竹筍)이 솟은 모양이다.
그리고 또 산속의 샘물을 끌어다가 둥글게 연못을 만들어 놓고서 그 물속에 푸른 산 그림자(괴석의 그림자)가 첩첩 쌓인 것을 고요하게 바라본다.
내가 처음 다산(茶山)에 오고 나서 그 이듬해에 문거(文擧)라는 친구와 함께 이 못이 있는 정자에서 신부(新婦)터까지 걸음을 재촉해 다달아, 다시 바위에 바닷물이 철석거리는 농어낚시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오는 사람은 6~7명 이었다. 조수가 훌쳐간 너른 곳에 교묘하고 기괴한 돌이 많으니, 사람마다 수십 덩어리씩 주워서 배에 싣고 돌아와 마침내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했다.”
丁 石 - 다산 정약용
죽각(竹閣) 서편 바위가 병풍 같으니
부용성 꽃 주인은 벌써 정씨에게
돌아 왔네.
학이 날아와 그림자 지듯
이끼무늬 푸르고
기러기 발톱 흔적처럼 글자는 이끼 속에 뚜렷하다.
미로(米老)처럼 바위를 경배하니 외물(外物)을 천시한 증거요
도잠(陶潛)처럼 바위에 취했으니 제 몸 잊은 것을 알리라.
부암(傅巖)과 우혈(禹穴)도 흔적조차 없어졌는데
무엇하러 구구하게 또 명(銘)을 새기리오.
완당(阮堂) 「山水石」탁본(拓本)과 초상
정조(正祖)와「태호석기(太湖記)」
조선의 제 22대 왕으로 1752년(영조 28년)에 태어난 영조의 손자이다.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 11세 때 아버지가 참화를 당하고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1755년(영조 51년)에 대리 청정(聽政)하였다. 다음해에 즉위하여 25년간 재위하다 1800년 승하하였다.
정조는 선왕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탕평정치(蕩平政治)를 하여 왕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치에 뜻이 없어 홍국영에게 정치를 맡기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왕실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두어 국내의 학자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토론케 하고 서적을 간행했다.
「태호석기(太湖石記)」는 <춘저록(春邸錄)> 권 4에 있는 바 서인(序引) 4편(팔가백선인(八家百選引) 등)과 記 3편(<소요정기(逍遙亭記))>, <영취정기(映翠亭記)>, <태호석기(太湖石記)>) 등으로 되어 있다.
역문(譯文)
동정호의 서쪽에서 산출되는 돌을 태호석이라 일컫는다. 질은 매우 단단하며 색은 짙은 푸른색이다. 규장옥처럼 진한 윤기가 난다.
형은 할퀴어 뾰족한 것이 험한 봉우리 같고 벌레가 등을 구부리고 있는 것 같이 둥근 연봉을 이루고,
괴상한 것은 동물이 웅크리고 걸터앉아 있고,
쫑긋한 것은 사람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서 있고,
검은 기름칠을 하여 자수정처럼 색채가 현란하니,
모두가 기괴하고 이상한 유형이다.
눈덮인 잘밤의 계곡에는 연기구름 휘감고 누대에 걸친 잔교의 형태가 너무나 정교하게 똑떨어진 것이 순전히 자연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이라 하더라도 그 절묘함을 다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다.
미원장은 애석인으로서 이와 같은 돌을 보자마자 엎드려 ‘석장(石丈)’이라 불렀으며, 속세를 초월한 풍류시이자 서화가로서 당의 시성 잡안의 杜氏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도 매우 부지런을 떨어 구한바 갑오년 봄에 고궁의 정원에서 얻었다. 뜨거운 물을 끓여 목욕을 시키고 물을 말려서 창가에 놓았다. 약탕관, 향사발, 주문왕의 솥에 만든 화로에 담아서 움직이지 않개 나란히 벌려 세웠다. 그 돌의 크기는 주먹만하나 천 길의 큰 바위로서 빼어난 산악경을 나타내고 있다.
돌은 천지의 정기로 만들어졌으니 기가 돌을 낳는 것은 사람의 근락이 화하여 손톰, 발톱, 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옛 선인들의 애석편을 보면 우 임금에게 異石을 공물한 것이 있고 좌씨는 태호석에 대하여 글을 지었다. 또 천하에 큰 괴석은 큰집의 정원에 꾸며놓는 것이 좋고 작은 돌은 책상 위에 꾸며놓고 보는 것이 좋다. 혹은 물을 채워 水景으로 보고 혹은 山景으로 보는 것이 좋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智者는 물을 좋아한다 하셨다. 인자와 지자가 좋아하는 돌을 정원에서 얻었는데 집채만큼 웅장하게 큰 것이 태호석과 같다.
이 돌을 나의 처소에 가져다 놓았으니 어찌 풍류시인 묵객으로써 완호(玩好)하지 아니하리오!
색채석의 아름다움을 시로 엮은 신위(申緯)의 애석시
- 신위(1769~1785) 선생은 조선 정조? 순조 때의 문신으로 詩? 書? 畵에 뛰어난 애석인 이었다. 44세 때 주청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 색채석을 운반할 때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시를 지었다.
여행길 험악하나 자하(紫霞)는 웃으며
어명 받든 만리사행(萬里使行)에서 수석을 탐석했다.
탐석은 수레바퀴와 말발굽 사이에서 했는데
큰 옥덩어리 주스면 색깔 이쁜 천에 포장한다.
창해의 물가에서 폭풍과 파도에 부스러져
옥석되어 도깨비불에도 색채 발하며
칠가령의 석벽면 이끼는 벗겨져 있고
고죽사당(孤竹祠堂) 아래 물은 맑아 밑바닥까지 투명하네.
작은 돌은 능금만하고 큰 것은 손바닥만하며
무거운 것은 한 근, 더 가벼운 것도 있다네.
한 차에 돌 가득 실어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마차 주인은 돌이고 나는 그의 손일세
풀숲 수렁 뻘구멍에서 오랜 세월 굴러다니며
유수에 용 노니는 것 응당 보았으리라.
존귀한 것 아닌데 石丈하며 군자들 귀중히 여김에
나도 안개 낀 산천에서 습득해 공양하고 있지.
휘장 친 마차 안에 푸른색 비취색 아우르니
작은 봉우리도 구지산을 대하는 듯 하여라.
성은을 그르친다고 비웃지 마라, 신선을 태웠다네.
미인승차 사양함은 어진이의 규범일세.
객원 중에 그림 솜씨 좋은 이수민 선비 있어
장시 지어 수석운반도(壽石運搬圖) 그리기를 청탁하니
붓을 잡고 열심히 그려 놓고
산수 속에 선생까지 첨사(添寫)하였네.
미남궁은 돌에 미쳐 엎드려 절하였고
양차공은 좋은 돌 만나면 낚아채 갔다지.
이러한 이야기는 우스갯거리라 나도 알고
깊은 산골 불문하고 사두마차를 달린다네.
명나라 때 제화문 앞 상가에는
온갖 만물 구름처럼 쌓여 있는데
진나라 비석, 한나라 보석과 골동품들
남방 나라의 보물 상아조각품으로 찼지만
이 서생 안목이 어리석게도 낮아
우리나라에서 가져 갈 화물상자 텅 비워 놓았지.
뒷날 이 재석도(載石圖)표구하여 판다면
영롱(玲瓏)하게 빛나서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으리라.
조선 24대 헌종(憲宗)의 해석연산석(海石硏山石)
헌종은 조선조의 24대 임금으로 연경당을 짓고 살면서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다가 돌아가신 익종의 아들이다. 아버지 익종은 정식 임금은 되지 못했지만 세자시절 순종의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4년 동안이나 대리청정을 한 공로로 후일 헌종 자신이 아버지를 익종으로 추서하고 추모하였다.
헌종의 출생은 애석의 분위기가 충만한 연경당에서이다. 당시 정가(政街) 주변의 애석계를 살펴보면 옥수 조면호가 저작한 「예석기(禮石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순조의 장인이며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스승이었던 김조순은 당대 애석계의 대부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원이 좋기로 유명한 옥호정(玉壺亭)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는 후대 자손들까지도 왕비로 입궐시켜 영화를 누렸던 안동 김씨 집안을 세도가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김조근의 딸로 하여금 헌종비를 삼게 하고 김문근의 딸로 하여금 철종비로 삼게 하였다.
김씨가의 당시 ‘根’자 항렬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수석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과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가 있다. 1812년 익종의 세자책봉 주청사의 일행으로 청에 가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능하에서 탐석해왔다는 자하 신위도 있다.
또한 동강 이수민, 예석기를 쓴 옥수 조면호, 난 그림의 대가인 대원군 이하응, 신미양요 때 평양감사와 우의정을 지낸 헌재 박규수도 있다. 이러한 분들이 모두 당대 권좌와 풍류계의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익종과 조비 사이에서 태어난 헌종은 아버지 익종을 세 살 때 여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여덟 살에 승하하시게 되자 헌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어머니가 있었지만 정사는 할머니(순조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어린 헌종은 몇 년을 기다려 장가를 들게 되었다.
세 차례에 걸친 간택에서 김조근의 딸이 왕비가 되었으나 6년만에 사별하였다. 후에 헌종은 낙선된 여인 중에 있었던 김 여인을 좋아하여 후궁으로 맞아들여 보금자리를 위해 낙선제를 짓게 되었다.
헌종은 낙선제에 정성을 다하여 仙景을 만들고 사랑하는 여인과 정념의 불꽃을 태우다 승하하니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이다. 낙선제 생활 2년 만에 후손도 없이 23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
헌종이 애완했던 해석연산석
헌종의 유품 가운데 해석연산이라는 조그만 수석이 한 점 있다. 이 돌은 관리물품에도 들어 있지 않았으며 어떻게 관리할지를 몰라 당시 규장각 담당 오규일이 시골집으로 반출하여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후에 옥수 조면호가 이 돌을 보게 되었고 욕심이 발동하여 추사 선생이 그린 묵란도와 바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석연산석은 옥수 조면호의 소장석이 됨과 동시에 예석기의 제 1석이 되었다.
헌종은 이 돌 말고도 또 하나의 돌이 있었는데 빙소(憑?: 순 임금 장사 때 나타났다는 새 이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을 통해 추축해보면 해석연산은 바닷돌로 물고임 산경석이며, 빙소석은 산지를 알 수 없지만 새를 닮은 물형석으로 짐작이 된다.
낙선제 마당에 있는 괴석
「禮石記」의 저자 조면호(趙冕鎬)의 壽石詩
- 조면호(1803~1887) : 호 옥방(玉房), 옥수(玉垂), 태당(台堂) -
책 넣는 진열장을 마련하여 그 위에 소형의 산경수석을 분의 물 가운데에 앉혔던바 밑자리가 불안함으로 모래를 깔았더니 안정되었기에 이를 시의 제목으로 삼는다.
자그마한 산새가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았고
빼어난 모양은 부용(芙蓉)을 닮았네.
이어진 재 옆에는 봉우리 우뚝하고
으슥한 골짜기에 만 길의 구멍이 파였네
분수(盆水)는 영주도의 바닷물 같으니
수석과 꾸밈새가 맞아 떨어지네.
지축 같이 끄떡 않음은 모래를 깔은 공덕이고
강건함은 큰 거북 등판 같네.
좁쌀 같이 작음 속에 세계가 간직되었으니
광막한 표현을 무엇에 비유할까
큰 것을 작게 축소하는 일은
신선들만이 마음대로 한다 했네
나도 본디부터 仙人이 되고자 하였으니
쪽배타고 영주도에 불로초 캐러 갈까.
韓末의 우국지사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의 애석
창강 김택영(1850~1927)은 한말의 우국지사이자 애석인이다. 1850년 10월 15일 경기도 개성부 동부 자남산 남지사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림 호는 창강이며 본관은 화개로 1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 초시 삼부에 합격하였다. 1895년에는 석기관으로 승진하여 내각기록국 사적과장으로 일했다.
을사보호조약(1905)으로 일본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차관정치를 하게 되었다. 창강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 감이 암담하여 후일의 독립투쟁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그는 망명지인 중국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오직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하여 많은 韓國史書를 발간했다. 그리고 조국에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선배와 친구들의 문집을 많이 발간했다. 그러다가 1927년 한 많고 고달픈 생애를 망명지 중국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의 친구들도 많은 글을 지어 애도하였다.
고달픈 망명지에서 갖은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우국지사인 매천의 문집을 발간하여 그와 매천을 높이 우러르게 하였다. 그 발간 연도가 나라를 빼앗긴 바로 다음해인 1911년 이었기 때문이다.
창강 선생이 수석을 사랑하면서 지은 글은 모두 네 편이 있는데 그 문체를 유형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명체(銘體) 2편, 설체(說體) q편, 시 1편이다. 글 속에는 선생의 애석정신이 심오하게 스며 있어 현대 수석인들이 깊이 음미할 훌륭한 사료라 하겠다.
용두바위를 이 지방 사람들은 채석강이라 부르는데 지금의 전북 부안군 변산면의 서해안이다. 이 곳에는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뿌리는 바다로 비스듬히 뻗었고 모양은 말이 고개를 쳐들고 앞발을 치켜든 형상을 하고 있다. 바위에 올라서면 북, 서, 남 삼면의 해변에 암석이 서너 마장 깔려 있다. 여기서 오색의 무늬돌이 산출되는데 색깔을 고루 갖추고 있으나 그 모양을 따서 이름을 개별적으로 다 지을 수 없어서 시를 2편 적으며 내력을 적었다. 아래의 시는 그 2편중 하나이다.
나 옛날 총석정을 찾았을 때
시퍼런 바닷물에 발 적시며
삼면을 바라보면 하늘은 까마득히 푸르고
육각 돌기둥은 기묘하고 불가사의하며
동해에서 뜨는 해 수면위의 기둥을 비추고
기이한 석품이 금강산에 이어졌더라.
그날 밤은 유난히도 청명하여
솟아오르는 명월 바라보며 경관을 즐겼다네.
남쪽에 유람 와서 변산반도 동녘을 바라보니
경치라고는 파도소리 뿐이고
한 마리 용이 바다로 뛰어드는데
머리를 청천에 쳐들었다.
파도에 씹히고 삼키기만 하였는데
무쇠가 닳은 듯이 매끄럽게 갈렸으며
발을 들여놓으니 이무기가 꿈틀거리는 듯
나는 정신을 잃었으나 기분은 황홀하고
처음에는 육신을 기쁘게 만들더니
육신은 다시금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더라.
앞을 보니 중국 산둥반도가 나타나고
옆을 보니 남지나 땅은 물에 가라앉았네.
아! 여기는 무늬돌이 풍부하여
예전부터 선굴(仙窟)이라 불러왔다.
온갖 물체의 모양을 닮았으되 각기 다르며
갖은 색깔 뽐내며 자랑하더라.
처음에는 별로 상식 없이 하나 둘 줍다가
세심하게 찾을수록 상세히 식별하겠네.
편편하지 않은 돌은 무늬그림이 옆면에 펼쳐 있고
우뚝 솟은 산모양은 입석체로 그려졌다.
어떤 돌은 새가 날개를 펼쳐 나는 듯 하고
또 한개는 짐승이 날쌔게 뛰는 동작일세.
어떤 것은 비단옷에 고운 수를 놓은 듯 하며
한 돌은 비석에 글씨를 조각한 것 같고
기양의 석고상은 한쪽이 떨어져 나갔으며
깊숙한 굴속에는 용의 정기가 서렸다.
어떤 그림은 금잠충(金蠶蟲)이 흩어져 꿈틀거리며
어떤 것은 병아리가 익살스런 동작으로 뛰는 것 같고
앞에 있는 돌을 캐보니 두 사람이 끌어갈만하나
뒤에 있는 돌을 파보니 짊어질 수가 없네.
지방 사람들은 보통 돌로 보지만
시골 선비로서는 감탄하여 말문이 막히고
아침 밀물 때는 달빛이 을씨년스럽더니
저녁 썰물 때는 바람이 세차게 일어난다.
밀물과 썰물이 계속 반복하여
정갈하게 다듬어지느라 쉴새 없도다.
송나라에서는 서울에 꽃과 수석을 줄줄이 실어 날랐는데
그 가운데 佳品은 수석이 제일이었고
날마다 운반함에 사고도 뭉치로 나니
용왕신이 슬퍼하여 기쁨이라곤 없더라.
나 손을 들어 총석정에 읍을 하곤
형상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것이 장엄하도다.
태초에 하늘과 땅으로 갈라질 때 수석도 같이 났으니
신의 창조물이라 자랑거리로선 이 보다 더하랴?
채석강
부안군 변산면 변산반도의 최서단의 포구인 격포 오른쪽에 돌출한 바위산이다. 중국의 시성 이태백이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다 강물에 뜬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강물에 빠져 숨졌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모양이 흡사하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이곳은 선캄브리아대 화강암과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하고 중생대의 백악기에 퇴적한 해석단애로 된 절벽이다. 모양이 만여권의 서책을 쌓아놓은 듯 하고 물속으로 오색 보석을 깔아 놓은 듯 영롱하다.
남농(南農) 허건(許楗)의 생애와 愛石
운림산방 전경
한국 현대 수석 발전의 선구자인 허건(1908~1987) 선생은 동양화가로 널리 이름을 알린 분이다. 호는 남농으로 소치 허련의 손자이고 미산 허형의 아들로 진도에서 태어났다. 진도에서 생활 터전을 목포로 옮긴 후 목포 상업전수학원을 수료했고, 1925년 소련미술전람회 최고상을 수상했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서 선전출품을 본격화했으며 1943년까지 줄곧 입선했다. 1944년 <목포일우>로 선전 총독상을 수상했다. 1955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로 위촉되었고, 그 후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83년 예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초기에는 아버지 미산의 영향을 받아 전통산수? 고사인물? 화조영모? 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으며 42년경에는 필선위주의 묘법에서 벗어나 점묘화를 그리기도 했다. <목포일우>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그 후 남농 선생은 필선위주의 화법으로 돌아와 <금강산 만폭동>, <서귀소견>과 같은 실경산수를 그렸다.
남농 선생은 소치, 마산보다 더 활발한 수석문화를 영위했다. 이에는 물론 두 선조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로 확인되었다. 남농 선생의 수석사랑은 그가 기증한 수석을 중심으로 지어진 목포 향토문화관에서 알 수 있다. 향토문화관은 남농수석관으로도 불리며 이 수석전시관에는 소치, 미산, 남농 3대에 걸쳐 탐석한 수석이 전시되어 있다. 그 수가 1800여 점이나 된다고 하니 그들의 수석에 대한 열정도 짐작이 간다.
남농 선생은 그 어떤 인사보다 수석인을 먼저 만나주었고 수석인과의 친분도 두터웠다고 한다. 남농 선생은 수석이라는 매개로 많은 수석인들과 교류를 나누었다는 것은 수석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남농 선생과 친분이 있는 원로 수석인들은 ‘남농 선생은 다정다감하고 수석인이라면 마다않고 언제나 만나고, 또 그림을 선물하시곤 했지.’라고 회상한다. 남농 수석관 개장 당시 아끼던 소장석을 보내 수석관을 빛낸 원로 수석인도 있다고 하니 남농 선생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남농 선생이 아끼던 수석들이 목포 남농수석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1879점의 수석이 350여 점씩 매달 교체 전시되고 있다. 또한 운림산방 3대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정원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정원석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찾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여기 전시된 수석을 보면 하나하나 석명이 적혀 있는데 대부분은 남농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그 석명들을 열거하면 오작교, 고인돌, 천국의 계단, 독립문, 꿈꾸는 토끼, 창세기 이전, 자화상 등 특이한 이름이 많다. 이 석명들만 보아도 남농 선생의 수석에 대한 애착을 짐작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자화상이라는 석명의 돌은 남농 선생이 살아생전에 침대 머리맡에 두고 늘 손으로 쓰다듬으며 아끼던 수석이라고 한다. 이 수석은 남농 선생과 그 모습이 흡사해 그렇게 아꼈다고 한다.
돌을 愛石한 혜산 박두진(朴斗鎭) 시인
- 청록파 시인으로 수석시만 5백여 편을 남기다 -
박두진 선생은 수석을 읊은 연작시 「수석열전」을 1972년 8월부터 발표하기 시작하여 많은 수석시를 잇달아 썼다. 혜산의 후기시는 거의 수석에 관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속수석열전」, 「수석연가」등 수석시집을 3권이나 펴내기도 했다.
혜산은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며 23세 때인 1939년 「문장」지를 통해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산을 배경으로 한 시를 많이 썼던 혜산 선생은 수석시를 쓰면서부터 약간의 변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시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며 혜산의 시세계를 연구하는 새로운 자료가 되고 있다.
박두진 시의 독특한 점은 ‘자연의 의식에서 보여주는 생명적 이미지, 시의 활력을 불어넣는 능동적 상상력, 한국어가 갖는 소리의 다양성과 리듬에 대한 효과, 시를 시대나 종교 윤리와 동일한 것으로 꿰뚫는 시정신의 다면적 추구’에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평이다.
그가 수석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연세대학에 재직 중 소공동 상공회의소 전시회에서 산수경석을 보고 호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수석을 하게 된 것은 70년도에 제자인 김춘석이 돌밭에 가보자고 해서 처음 간 곳이 단양이었다.
수석 차원이 아니라도 어렸을 때부터 돌을 좋아했던 그는 그날부터 돌에 완전히 매료되어 1년간은 돌만 했다. 그러다 수석이 시간놀음이고 경비가 꽤 든다는 회의도 잠깐 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돌이 가진 깊은 의미를 생각하고 시의 소재로 어떨까 생각하다가 71년부터 돌에 관한 시를 썼다.
초기부터 추상석을 즐기게 된 그는 “그때까지 그런 특이한 시의 소재를 한번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 후 지금까지 한번도 수석시를 거른 적이 없다. 만약 돌이 가진 조건을 외적으로만 보거나 수석에 대한 시를 쓰지 못했으면 수석의 깊은 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말하기를 “돌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를 신비한 색채? 형태? 질감 등을 통해 상징성을 무한히 제시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처럼 그의 눈에 비치는 돌의 존재는 무제로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돌에서 천체, 우주, 생명, 도덕을 꺼낼 수 있다. 그가 <가을절벽>이라는 시에서의 소재는 단양산 밤색 돌이다. 그는 이 돌의 밤색 절벽 속을 보고 가을 절벽을 생각했으며 거기서 인류 전체의 숙명적인 불행을 노래했다. 그 나름대로 가장 힘들여 쓴 시라고 한다. 그의 「수석열전」맨 처음의 시는 <天台山 上臺>이다.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할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아
하도 홀로 어느 날에 심심하시어
하늘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내 당신 홀로
노시시던 자리.
돌의 노래
돌이어라. 나는
여기 절정(絶頂)
바다가 바라뵈는 꼭대기에
앉아
종일(終日)을 잠잠하는
돌이어라.
밀어 올려다 밀어 올려다
나만 혼자 이 꼭대기에 앉아 있게 하고
언제였을까
바다는
저리 멀리 저리 멀리
달아나 버려
손 흔들어 손 흔들어
불러도 다시 안 올 푸른 물이기
다만 나는
귀 쫑겨 파도 소릴
아쉬워 할 뿐.
문으로만 먼 파돌
어루만진다.
오 돌.
어느 때나 푸른 새로
날아 오르랴
먼 위로 아득히 짙은 푸르름
온 몸 속속들이
하늘이 와 스미면
푸른 새로 파닥어려
날아 오르랴.
밤이면 달과 별
낮이면 햇볕
바람 비 부딪히고, 흰 눈
펄 펄 내려
철 따라 이는 것에 피가 잠기고
스며드는 빛깔들
아롱지는 빛깔들에
혼이 곱는다.
어느 땐들 맑은 날만
있었으랴만, 오
여기 절정
바다가 바라뵈는 꼭대기에 앉아
하늘 먹고 햇볕 먹고
먼 그 언제
푸른 새로 날고 지고
기다려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