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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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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활과 화살 스크랩 23. 조선시대의 쇠뇌. / 우리나라의 전통무기
알로하 추천 0 조회 123 15.12.10 09: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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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무기

 

23. 조선시대의 쇠뇌

 

명중률 뛰어난 기계식 활 ‘쇠뇌’

 

쇠뇌는 한마디로 지지대를 갖춘 기계식 활이다. 전통적인 활에 받침목을 댐으로써 안정도를 증대시킨 후, 당겨진 시위를 걸쇠에 걸어 놓고 목표물을 조준한 다음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화살을 추진시키는 무기이다. 전통적인 활에서 화살이 추진돼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씩을 끊어 구분시킨 것이다.

발사되는 화살의 수효 면에서는 쇠뇌가 활의 1/6(활이 분당 6발을 쏘는데 비해 쇠뇌는 한발밖에 쏘지 못함)에 불과하나, 활을 쏠 때 요구되는 강한 힘의 지속상태가 쇠뇌에서는 기계적으로 작용하여 명중률에서 대단히 높은 수치를 보인다. 더피의 ‘무기와 전쟁의 혁명’ 에 의하면 전통 활의 치명도 수치가 21임에 비해 쇠뇌는 33의
수치를 보인다.

 

활보다 발사속도 느리지만 정확성 뛰어나

 

전통적인 활에 비해 쇠뇌가 지닌 이점은 정확성이며, 동시에 활보다 더욱 무거운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점이다. 다만 분당 발사속도는 활보다 느렸다. 이러한 쇠뇌가 활과 함께 공존했던 이유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였기 때문이다.

쇠뇌의 장점은 첫째, 훈련이나 숙련 없이도 운용이 가능했다. 둘째는 엄폐된 시설에서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이다. 엄폐된 시설의 구멍을 통해 언제라도 사격이 가능한 것이 쇠뇌다. 활과 달리 비교적 노출이 없는 상태에서 성벽의 공간에서 전투가 가능한 것이다. 셋째는 짧은 거리에서 최고도의 정확도를 자랑한다는 점이다.

15세기 서구에서 사용된 일반 군사용 쇠뇌는 45도 각도로 화살을 발사할 때 약 380~390m의 사거리를 가졌으며, 직선으로 발사될 때의 거리는 60~70m 정도였다.

 

따라서 쇠뇌의 운용은 보병이나 전차나 기병집단과 상대할 경우, 구릉 혹은 험한 지형을 확보하고, 강노와 장병기를 전면에 배치한 다음 단병기를 휴대한 자와 소노(小弩)는 바로 그 뒤에 포진시키고, 부대의 후미에도 강노를 위치시켜 후방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또한 보병이 기병과 싸울 때, 먼저 장창을 지닌 부대가 맨 앞에
위치하여 함부로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다음은 강궁을 가진 부대, 그 다음은 강노를 지닌 부대가 무릎 꿇고 대기하게 하여 강노를 함께 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쇠뇌는 추격병에 대한 기습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성주지역에 침입한 일본군과 전투시에 강노수들을 매복시켜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강점으로 인해 쇠뇌는 고대로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수질노, 수질구궁노 등 다양한 종류의 쇠뇌가 제작되었으며, 특히 정노반이라는 쇠뇌 전문부대를 운용하는 등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쇠뇌는 점차 쇠뇌의 사용이 뜸해 지고 조선조에 와서는 쇠뇌를 만드는 기술조차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다.
1431년(세종 13)에 쇠뇌를 시험 제작할 때에는 궁중에 있던 도자기에 그려진 쇠뇌의 그림을 참고해야 할 정도로 쇠뇌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1450년에 집현전의 부교리 양성지는 고려시대부터 쇠뇌의 사용제도가 우리 나라에서 끊겼다고 했고, 그가 세조 때에 중국을 다녀와서는 명나라에서도 쇠뇌가 호랑이 사냥에만 사용되고 있다고 보고하는 데서도 익히 알 수 있다.

 

중국병사의 쇠뇌 사용장면

 

 

조선전기 전술체제 변화로 쇠뇌 쇠퇴

 

삼국 시대,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쇠뇌는 계속 사용되기는 했으나 활에 비해 소홀히 취급돼 군대에서 비중 있는 무기로 운용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가끔 쇠뇌와 관련된 기사가 등장하지만 어느 기록에도 군에서 쇠뇌를 대량 운용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왜 조선 시대에 쇠뇌가 소홀히 취급됐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 전기의 방어전략과 전술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조선 전기 방어전략의 기본 방향은 두만강 유역과 압록강 유역의 영토 개척과 이를 확보하기 위한 진취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만주 일대의 여진이 200여 종족으로 분열된 상태였기에 조선의 군사력으로도 제압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세종대에는 민생 안정을 통한 재정 확보로 사민정책과 행성 축조를 통해서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후 문종대에는 국내 정세의 불안, 민심의 동요, 경제력의 위축등에 따라 방위 전략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서부 몽골 지방의 오이라트가 세력을 확장해 대규모 군사의 침입 가능성이 높아진 현실 속에서 새로운 관방론(關防論)의 수립이 요구되었고, 종래의 행성론은 장성이나 행성을 축조하는 데 막대한 인력이 소요되었으며, 대규모의 적을 방비하는 데도 부적절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새로운 방위 전략은 주?군의 위치에 읍성을 쌓아 내지의 요충을 중점적으로 방어하는 체제로 형성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의 전술체제는 진법, 즉 오위진법이었다. 오위진법은 개인의 전투 역량보다는 전투 대형에 의존하였다. 군사들의 무기체계는 주로 궁시, 화기 등 이른바 ‘장병기’ 였다. 군사들은 궁시와 화기로 무장한 기병과 보병 두 부류로 나뉘어 음양오행에 근거하여 짜인 진법에 따라 대형을 갖추었다.

 

특히 조선의 방위 전술론은 공격형이 아니라 방어론 중심이었다. 이 방어론은 기본적으로 성곽을 중심으로 한 전술로 장병 무기인 궁술과 화포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당시 조선이 보유한 군사 기술 중에서 여진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화포와 편전이었다. 여진은 화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실정이었기에 화기가 여진 격퇴에 절대적으로 유효하였다. 또 편전의 위력은 통아(筒兒)를 통해서 발사되는 관통력에 있었다. 그러므로 관통력의 증진을 위해서 통아가 아니라 화포의 힘으로 발사하게 된다면 유효 사거리와 관통력은 훨씬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선은 화약무기와 활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쏟았으나 다른 무기의 개발과 운용은 등한시하였다.

 

결국 1433년(세종 15)에 개발된‘일발다전법’을 비롯한 대대적인 화기 개량이 있었고,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났다. 반면 쇠뇌는 활이나 화기의 발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강무도. 조선 초기 군사훈련을 위해 강무를 시행하는 장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품)

 

진주대첩 기록화(전쟁기념관 소장품)

 

미국에서 공개된 거북선도에 나타난 수노기 사용장면

 

‘노해’의 녹로노 그림(육군박물관 소장품)

 

수노기(전쟁기념관 소장품)

 

 

성종, 중종 때 새로운 쇠뇌 제작

 

조선 전기에는 화약무기의 발달과 활에 대한 애착심이 컸던 이유에서 쇠뇌에 대해서는 전투무기로 크게 활용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관계 법령에 ‘화약무기류는 민간인 소유를 절대적으로 금지시킨 반면 노에 대해서는 민간인의 소유를 금지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쇠뇌가 당시에 중요
한 전투무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쇠뇌가 다시 사용된 것은 성종, 중종 때의 일이다. 성종 6년에는 새로운 체제의 쇠뇌를 제작하여 시험했고, 성종 26년에는 국왕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에게 새로 창안된 쇠뇌의 견본을 보내면서 이를 제작하여 시험하도록 했다. 그 당시 개발된 쇠뇌는 중종 5년에 제포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는데 사용되었고, 그 성과에 만족한 중종은 재위 15년과 16년에 직제학 서 후로 하여금 100근의 강노와 극적궁, 120근짜리 노궁 등을 만들게 했다. 또 1583년(선조 16년)에 여진족 5천여 기병이 방원보에 침범하자 만호 최 호가 강한 쇠뇌를 이용하여 격퇴시켰다.

 

임진왜란 때에도 진주성 전투 등에서 쇠뇌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1592년(선조 25년) 11월, 유성룡이 선조에게 적정을 보고하는 글에서 “듣건대 경상좌병사 박 진은 여러 곳의 적진을 쳐부술 때 연노와 진천뢰를 사용하였는 바 적은 이것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라고 하여 쇠뇌의 실전에서의 전술적 효과가 크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쇠뇌는 계속해서 전투무기로 이용되고 진천뢰와 더불어 살상효과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의병들이 매복전에서 쇠뇌를 많이 활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한동안 화기의 발달로 인해 쇠뇌의 사용이 주춤했지만 조총의 등장으로 인해 조선군의 전반적인 활쏘기 기술이 저하되자 별다른 훈련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쇠뇌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715년(숙종 41년)에는 도제조 이이명의 건의로 삼군문에서 각각 수백 좌의 쇠뇌를 만들어 북한산성에 비치했으며, 1725년(영조 1년)에는 장흥의 김성대가 변방에 쇠뇌 1천여 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영조 연간에는‘노해’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는 쇠뇌의 제작방법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었다.

 

 

유물을 토대로 재현된 수노기(영집궁시박물관 소장품)

 

궐장노 쏘는 장면

 

‘훈국신조기계도설’을 발간한 신헌(申櫶 ) 초상

 

 

변진영의 무기 제작 교범 ‘노해’

 

‘노해’는 쇠뇌를 만들고 운용하는 전술을 해설한 병서인데 갑산도호부사를 역임한 변진영이 저술하였다. 쇠뇌의 제작 기술이 점차 실전되어 가고 있고, 군사적 활용도 미미하던 시절에 쇠뇌의 부활을 주장하며 개인 차원에서 저술한 무기 제작 교범이라고 볼 수 있다. 1727년에 최초로 간행되었으나,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과 육군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자는 그의 친구인 이세환의 교정본으로서 1729년에 간행된 것이다.

‘노해’는 18장 밖에 안되는 소책자인데 겉표지를 제외한 본문은 33쪽이고, 그 중 제작법을 그림으로 설명하기 위한 도면이 11쪽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변진영은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순절한 변응정의 증손으로 거제현감(숙종 29, 1703), 통우후(숙종 33, 1707), 부호군(숙종 36, 1710), 거제부사(숙종 37, 1711), 전주영장(숙종 40, 1714), 갑산부사(숙종 41, 1715), 곡산부사(숙종 44, 1718), 부호군(숙종 46, 1720) 등을 역임하였다.

 

변진영은 각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당시의 무기 체계를 비판하고 배우기 어려운 각궁 대신 노약자도 손쉽게 익힐 수 있는 쇠뇌를 제작하여 널리 보급하자는 의도에서 쇠뇌 제작 기술과 전술적인 운용법을 개발하였고 그 결과를 이 책자에서 도해를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쇠뇌 제작방법에서는 쇠뇌에 사용되는 활과 쇠뇌의 몸통에 해당하는 노기와 방아틀, 시위를 당기기 위한 도르레인 녹로를 만들고 사용하는 방법을 도면과 아울러 설명하고 있다. 또 쇠뇌의 전술적 운용방법으로 쇠뇌를 연결하여 설치하는 연노법과 이를 매복 설치하여 활용하는 방법을 역점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성곽을 방어할 때 운용하는 법과 수전에서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덧붙이고, 마지막에는 쇠뇌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편제와 용병법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그는 갑산부사로 재직하면서 쇠뇌 30여기를 제작해서 요해처에서 시험했는데 화살의 힘이 매우 빨라 견고한 갑옷도 뚫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쇠뇌 개발 노력은 당시 어사로 파견되었던 최상리가 높이 평가하였다. 이후 그의 주장은 조정에 채택되어 한성의 5군문, 전국 각 도의 병영과 수영 등지에서 각각 쇠뇌 수
만 기를 제작해서 유사시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이후 함경감사 윤헌주는 ‘노해’ 를 다시 출간하여 각 진영에서 교습하게 하였다. 좌의정 이이명 등도 그의 저작을 조정의 주관 하에 출판하여 배포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당시에‘노해’가 매우 긍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도로가 험하고 산악 지대가 많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환경에 부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쇠뇌 관련 현존하는 유일한 전문 병서라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훈국신조기계도설’의 수노기 그림(육군박물관 소장품)

 

조선전역해전도에 나타난 수노기(일본 아오키 화랑 소장품)

 

수노기를 시험 발사하는 장면(영집궁시박물관 소장품)

 

‘훈국신조기계도설’의 궐장노 그림(육군박물관 소장품)

 

유영기가 복원한 궐장노(영집궁시박물관 소장품)

 

 

연발식 쇠뇌 ‘수노기’ 와 전통적 쇠뇌 ‘궐장노’

 

조선후기의 영?정조대에 이르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쇠뇌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다. 군사 훈련이 부실해지는 등 국가의 안보체제가 와해되는 상황에서 간단한 훈련으로 사용법을 습득할 수 있는 쇠뇌의 중요성이 다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무사들이 익혀야 할 여덟 가지 필수 무예 중 하나로 쇠뇌 사용법을 꼽으면서 무과시험 과목에 쇠뇌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비록 대량으로 사용되지는 못했지만 조선시대 쇠뇌 중에는 특징적인 것이 많다. 조선후기에 쓰인 무기 관련 서적인‘훈국신조기계도설’을 보면 탄창을 이용하여 여러 발의 화살을 연속해서 발사할 수 있는 수노기가 등장한다. ‘만기요람’에 정리된 각 군현의 무기 비축현황을 살펴보면 당시에 수노궁이란 이름으로 주요 방어지역에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노기는 연노의 일종으로 조선후기에 훈련대장 신헌에 의해 제작되어 사용된 쇠뇌이다. 연노에는 방아쇠를 당기는 간단한 동작 하나로 적에게 한꺼번에 계속해서 화살을 퍼부을 수 있는 연발식과 여러 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다발식이 있다. 수노기는 연발식 쇠뇌의 일종이다.

 

수노기는 기존에 있던 쇠뇌의 발사장치를 개량하여 장전 및 발사가 용이하도록 하였다. 특히 적게는 3발에서 10발까지 연속발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쇠뇌의 최대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발사속도를 증대시킨 것이 특징이다. 즉, 전갑이라는 통을 쇠뇌틀 위에 얹어놓고 그 속에 10발 정도의 화살을 넣어 발사 때마다 화살이 자동적으로 떨어져 장전되게 된다. 이후 고현기(쇠뇌의 손잡이로 노상과 전갑을 이어줌)를 전방으로 밀었다 당기면 화살이 발사되게 하였다. 이 때 전갑은 상광하협(上廣下狹)으로 되어 떨어지는 곳의 폭을 화살의 직경보다 약간 넓게 하여 화살이 시위에 잘 걸리도록하였다.

 

다시 정리하면 수노는 전갑이라 불리는 화살 상자를 장착하고 있다. 전갑 속에는 화살 10발 정도를 한꺼번에 넣어 손잡이를 앞뒤로 당기면 자동으로 발사된다. 별도의 장전과정 없이 연발 사격이 가능하므로 수노는 다른 쇠뇌와 달리 발사 속도가 빠른 것이 특징이다. 특히 손으로 손잡이를 앞뒤로 당기는 것만으로 발사되기 때문에 여자도 쏠 수 있는 쇠뇌라는 의미에서 부인노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수노는 자동 장전을 위해 화살 끝에 깃이 없다. 때문에 화살이 균형을 잡기가 힘들어 사거리가 짧고 명중률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현재 수노기는 몇점이 있는데, 일부는 쇠뇌 틀만 있고, 일부는 활만 전해오고 있다. 현존하는 수노기의 전체 길이는 101~105cm 이다. 이를 토대로 무형문화재 궁시장 유영기가 이를 복원 재현하기도 하였다.

 

한편‘훈국신조기계도설’에는 궐장노도 소개되어 있는데, 궐장노는 발로 활을 밟고 시위를 건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쇠뇌로 가장 일반적인 쇠뇌 형태이다. ‘훈국신조기계도설’에 소개된 궐장노는 중국 전국시대의 고전적인 쇠뇌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무비지’ 의 궐장노는 여러 개의 나무를 겹쳐서 활채를 만든 반면 조선의 궐장노는 활채가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궐장노의 구조를 보면 긴 나무로 만든 활틀의 앞부분에는 활 하나를 끼울 수 있는 홈이 있고, 그 아래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다. 활틀 뒷부분에는 당겨진 시위를 걸어놓았다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고안된 금속제 발기처가 달려 있다.

 

궐장노에 사용되는 화살은 장전과 편전인데, 이 둘 모두 발사되는 동안 노상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 화살촉을 송곳 모양으로 만들었다. 궐장노의 크기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으며 사용하는 이의 힘과 용도에 따라서 크기와 재질을 달리했다.

 

기계식 활인 쇠뇌는 발사원리나 성능면에서 궁시와는 또 다른 특성을 띤 무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쇠뇌가 궁시에 비해 크게 활용되지 못한 점은 조선시대의 방어전략과 전술운용, 무과시행 등과 관련이 있다. 무(武)의 문화 형성에 따라 궁시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쇠뇌의 은밀성
과 정확성은 전술적으로 매복이나 저격용으로 그 활용도가 높아 조선에서는 북방 야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적의 주요 접근로에 배치하여 많은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그 특성을 살려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방어를 위해 파견된 어재연 부대가 지닌 무기 중에는 수노궁 30개가 들어 있음을 볼 때 큰 비중은 아니었으나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글 | 박재광 _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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