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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학』이 주목하는 이 계절의 시인 / 대담 임애월 편집주간
무한 긍정 에너지 속의 눈물자국
강 정 화 시인
- 기해년 우수 무렵
한강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어느 빌딩 하늘공원에서
강정화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선생님의 따스한 미소에서 활기찬 무한 긍정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
임애월 : 강정화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하늘공원에서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어 분위기가 더 멋이 있네요.(웃음)
강정화 : 네. 반갑습니다. 이곳은 저도 처음인데요, 도심에서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정말 분위기가 멋진 곳입니다. 인터뷰 덕분에 이렇게 좋은 곳을 알게 되었네요.(웃음)
임애월 : 내려다보이는 한강변이 참 아름다운데 강 건너 편 한눈에 들어오는 탑이 롯데월드 타워인가요? 아무튼 한강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서 시원한 느낌입니다.
강정화 : 저기 보이는 건물이 롯데월드 타워가 맞습니다. 123층이고 555미터의 높이를 자랑한다는 제2롯데월드 타워라고들 하네요. 여기 앉아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건물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마음도 탁 트이는 것 같네요. 다 인터뷰를 요청해주신 임 주간님 덕분입니다.(웃음)
임애월 : 남쪽 지방에는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지난겨울 어떻게 지내셨는지 근황 좀 알려주세요. 아참, 한국문협 선거가 있어서 바쁘셨겠네요.
강정화 : 오늘 아침 인터넷 뉴스를 보니 여수 오동도에는 벌써 동백이 활짝 피었다 합니다. 지난겨울이요…? 엄청나게 바빴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겠지요? 정신적으로도 분주했고, 그것만큼이나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바빴던 것 같아요. 작은 규모든, 큰 규모든 선거라고 하는 것은, 어떤 선거든지 간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같아요. 원래도 ‘의리의 강정화’라고 할 만큼 참석해야 할 곳은 열심히 다니는 편이지만, 지난겨울은 특히 그야말로 발에 땀이 나게 다녔던 것 같아요. 시작을 안했으면 모르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어야지 않겠냐는 심정이었거든요.
임애월 : 무슨 일이든, 어떤 문제든 적극적으로 추진하거나 해결하려는 의지가 늘 돋보이시는데, 선거기간 동안 힘드신 건 당연하셨을 테고... 그래도 좋은 기억도 있으셨겠지요?
강정화 : 힘들고 고단하기는 했지만, 언제 또 내가 그렇게 화사하게 꾸미고(웃음) 여기저기 열정적으로 다닐 기회가 오겠어요? 선거기간동안 많은 문인들을 만나고, 정말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어요. 선거의 결과와 상관없이 너무 멋진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임애월 : 늦었지만 한국문협 시분과 회장으로 취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강정화 : 감사합니다. 그것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표 차이로 당선되어서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좋은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되고 긴장이 됩니다. 우리 한국문협 시분과 회원이 7천 500명이 넘는데, 그 많은 회원들의 기대치를 생각하면 임기 동안 정말 잘 해야겠다는 마음에 긴장이 됩니다. 게다가 문협이 생기고 처음으로 이번 27대에 와서 첫 여성 시분과 회장이 되었잖아요. 거기에서 오는 부담도 만만치가 않네요. 너무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평균 이상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입니다.
임애월 : 네, 그런 면도 있으시겠네요.
순서상 좀 급해 보이긴 합니다만(웃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시분과 회장으로서 앞으로의 포부도 한 말씀해 주세요.
강정화 :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한국문협에서 시분과가 차지하는 인원이 전체의 반을 넘습니다. 그렇다보니, 그 많은 회원들이 어떻게 하면 다 함께 갈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시분과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지면할애와 같은 문제가 특히 난제 중에 난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월간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시분과에만 지면을 대폭 할애할 수만도 없는 일이고, 또 일 년 동안 고르게 작품을 싣는다 해도 지면이 한정이 되어 있다 보니 사실상 애로사항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그동안 소외됐던 사람들에게 발표의 기회를 주는 것이 맞는 일인데, 제 임기동안 열심히 지면을 고르게 할애한다 해도 일 년에 겨우 몇 백편의 작품만 실을 수 있으니 그것이 가장 큰 고충이라 하겠지요.
임애월 : 회원들의 작품 게재 관련 문제는 늘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지요.
강정화 : 그렇지만, 시분과만의 사화집을 발간한다든지 해서 이 부분을 보완해 나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정신적이나 경제적인 여타의 문제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우리의 시로서, 문학으로서 포옹하고 안아줄 수 있는 기회를 자꾸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이 《리슐리외 또는 모략》(Richelieu; Or the Conspiracy)에서 말했듯이,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책상에 앉아 글만 쓰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힘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작가들이 우리 사회를 밝고 희망차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작가정신이 아니겠냐는 생각입니다. 좋고 아름다운 것만 노래 할 것이 아니라, 이런 사회의 어둡고 힘든 부분들을 잘 조명하여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역할을 문학이, 특히 시가 담당할 수 있게 참여의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고 싶습니다.
임애월 : 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떤 협회든 당선이 되고나면 그 자리가 주는 위치를 누리는데 급급한 분들도 계시던데... 우리 사회의 어둡고 힘든 곳에 희망을 주도록 작가 입장에서 노력하시겠다는 그 말씀이 정말 든든합니다.
포항이 고향이시잖아요. 어릴 때는 어떤 소녀였을까 상상해 봤어요. 지금 느껴지는 분위기로 봤을 때 굉장히 활동적이었을 것 같은데 맞나요?
강정화 : 잘 보셨어요.(웃음) 키도 가장 작았고, 나이도 젤 연소로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렇지만, 늘 모범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유교적인 엄한 조부모님과 아버님의 교육 때문이기도 했지만, 천성적으로 주위의 사람들과 잘 지내려는 친화력을 타고나지 않았나 싶어요.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터는 어린 마음에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밝고 명랑하게 행동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아요. 가급적이면, 어른들께도 “네 알겠습니다.”, “네 제가 해보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하려고 했었고, 그러다보니 그런 사고나 행동이 생활화되어버린 것 같아요.
임애월 : 어린 나이인데 정말 대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네요.
강정화 : 어머니의 부재가 남들에게 주는 선입견을 떨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누구에게든 칭찬을 받으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했고, 그러다보니 늘 모범생의 이미지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습니다. 지금의 활동적이고 뭐든지 열심히 하려는 이미지는 유년에 형성된 그런 사고가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임애월 :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으셨으니, 어린 시절이라 상실감이 더욱 더 크셨을 것 같습니다만...
강정화 : 말도 못할 만큼… 굉장했지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저는 그때는 그것이 영영 이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더 크면 언젠가는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늘 그런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상여가 나가는 데도 슬퍼하기는커녕 엄마가 어디 멀리 나들이를 가서 좀 오래 있다 오시려니 했거든요. 철이 덜 들기도 했지만, 너무 천진난만했던 것이지요.
임애월 : 에고~ 가슴이 그냥 찡해집니다. 어린 시절 삶의 방향성은, 부모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입니다.
강정화 : 그 이후, 철이 들면서 느꼈던 극도의 외로움과 슬픔은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기회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 말도 못할 만큼의 상실감이 저를 더 좋은 아이, 착한 아이가 되도록 이끌어준 셈이니까요. 내가 좋은 아이, 착한 아이가 되어야 엄마와 멋진 해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 만남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슬픔을 이겨내고 그 상실감을 주위의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밝고 명랑하게 대하는 것으로 극복해나갔던 것 같아요. 다시 말해 일찍 철이 들었다고 봐야겠지요.
내가 사는 곳은
새들이 찾아드는 벼논도 아니고
꿩들이 푸득이는 콩밭도 아니, 문둥이가 사는 보리밭이다.
기를 펴지 못한 시커먼 모가지
눈치로 뿌리내린 난장이들
단란한 초록의 행렬
후렴조차 외지 못한 불거진 눈망울
땅만 보고 기웃거리는 신세
청보리 밭둑에 이는 바람 보고
키들키들 웃었던 철없는 날
속도 겉도 타버린
의붓자식처럼
죽어 마땅한 풀
검은 생명을 푸르게 간직한다.
- 「깜부기」 全文
임애월 : 이 「깜부기」라는 작품 속에서 보이네요. 굳이 꺼내어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유년시절의 열등의식 같은 것이 내면에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마저 푸르게 간직하려고 하는 씩씩한 극복의지가 사실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강정화 : 네…, 보리가 겨울 찬바람을 이겨내고 보리를 맺듯이 저 역시도 보리마냥 힘들고 외로웠던 유년기를 지나며 더 단단해지고, 더 야물어졌던, 이를테면 스스로에 대한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라고 보아도 좋겠지요. 저렇게 비유를 하며 시를 쓰느라 썼는데도 독자들이 훤히 다 읽어낸다는 사실이 참 경이롭지요.(웃음)
임애월 : 등단 무렵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선생님께서는 1984년도에 『시문학』으로 등단하셨는데, 당시 배경이나 문단에 나오게 된 동기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궁금합니다.
강정화 : 초등학교 4학년 때 일기를 쓰고서는 담임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일이, 지금까지 손에서 펜을 놓지 못하고 작가라고 불리게 된 맨 처음의 동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 해 봄이었어요. 여느 농가에서처럼 우리 집에서도 닭을 몇 마리 키웠는데, 달걀이 부화가 되고 병아리가 태어났어요. 그러더니 금세 닭으로 자라서 달걀을 낳았어요. 그런데 그것을 내다 팔아 제게 용돈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는 ‘아, 계란이 부화되고 닭으로 커서 알을 낳으면 용돈이 되는 구나.’ 하고 생각을 했고, 그 사실이 너무 신기해서 매일매일 일기장에 열심히 일기를 썼던 것인데...... 학급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게 되었던 것이지요.
임애월 : 어릴 때, 선생님께 들었던 칭찬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했다는 말씀을 하신 어떤 분이 계셨어요.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인데 오죽이나 좋으셨을까.(웃음)
강정화 : 그래서 그 이후부터 각종 글짓기 대회에 나가게 되었고요. 예전에는 각종 단체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이 굉장히 많았어요.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도 백일장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아, 아이들 셋을 데리고 여기저기 백일장에 얼굴을 내밀었지요.(웃음)
임애월 : 아하, 그때도 역시 뭐든 적극적이셨습니다.(웃음)
강정화 : 여담이지만, 그 당시는 백일장에 나가면 무료로 핫도그를 하나씩 주는데, 우리 아이들도 잘 먹었지요. 간혹 그 핫도그를 더 받아먹으려고 아이들이 윗옷을 벗고 안 받은 척하는 일도 있었어요.(웃음) 저 역시도 세 아이를 데리고 참가하면 아이들은 핫도그를 받아먹는 재미에 신나했고, 저는 또 그래서 수월하게 글 쓰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임애월 : 백일장에서 입상을 자주 하셨나 봐요?
강정화 : 네, 그런데 그 당시 백일장에서는 상금보다는 상품을 많이 주었어요. 밥솥 같은 가전제품들과 콩기름, 설탕 등 각가지 생필품들이 참가자들을 유혹했지요. 특히 영남여성백일장은 유난히 푸짐한 상품들을 걸었고, 그것 때문인지 유명세 때문인지 아무튼 참가자들이 무척 많았었어요. 그 당시에는 귀한 물품들이 상품으로 걸려있어서 그 상품들에 현혹되어 참가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웃음)
임애월 : 사실 어떤 경우는 상금보다 상품이 여성들을 더 깊게 유혹할 때도 있지요. 지금도요.
강정화 : 그렇게 백일장을 쫓아다니던 무렵, 우연히 월간 《시문학》을 접하게 되었고, 오직 문덕수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이곳에 마음이 꽂혔지요. 쓰고 있던 작품들을 열심히 퇴고를 하고 어렵게 어렵게 선생님께 보여드렸는데 보시고도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그래도 뭐 아직도... 내 작품이 영 신통찮아서 그러시려니 하고 뭐라고 여쭙지도 못했었어요. 서울에서 문학 행사가 있는 날이면, 부산에서 밤 열차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와 열심히 참여를 하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문덕수 선생님을 가까이서 뵐 일이 있었는데 그때 당신 양복 윗주머니에 제가 보낸 시를 품고 계시다가 꺼내 놓으시는 거예요. ‘이제 등단을 해야지’ 하시면서요.
임애월 : 어이쿠~ 얼마나 좋으셨을까요......
강정화 : 정말 얼마나 기쁘고 커다란 영광이었던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그 때의 그 설렘이랄까 감동이 되살아나는 것 같답니다. 그리고 그 때 시문학으로 추천해 주셨는데, 지금까지도 가장 큰 영광이고 가장 큰 자랑으로 여깁니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고작 조니 워커 한 병을 감사의 인사로 가져다 드렸는데, 그 뒤에야 선생님께서는 약주를 잘 못 드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지금 와서 돌아다보면, 《시문학》을 알게 된 것, 문덕수 선생님을 40여년을 모시게 된 것은 정말로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노환으로 편찮으신데, 선생님께서 다시 건강을 되찾으셔서 사모님이신 김규화 선생님과 함께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원합니다.
임애월 : 네, 얼른 쾌차하시기를 같이 기원합니다.
쉼 없는 노역의 권태 속에
천년을 휘감고 돈다
보석 같은 꿈들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체증처럼 갑갑한 가슴앓이는
연륜의 껍질을 벗기는 지문이다
입 다문 석불처럼 앉아서
혹은 기적의 비상을 꿈꾸면서
끌고 온 긴 생애
세월에 갈리어 부서지는
희망과 절망 사랑과 증오가
지워지지 않는 멍울로 남는다
돌다가 닳아버린 돌
끝없는 소멸의 아픔을 염주로 엮으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도 삼키고
삶의 굴레를 도리어 거역하지 않는
끝내 뜨거운 맷돌이기를……
-시문학 등단작 「맷돌의 염원」 전문
임애월 : ‘입 다문 석불처럼 앉아서/혹은 기적의 비상을 꿈꾸면서’...... ‘삶의 굴레를 도리어 거역하지 않는/끝내 뜨거운 맷돌이기를......’ 선생님께서는 등단작의 구절처럼 아직도 ‘뜨거운 맷돌’로 작가정신이 형형하게 살아있는 우리시대의 시인이십니다.
강정화 : 에구~ 과찬이십니다.
임애월 :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셨잖아요? 당시 그곳에서의 활동이나 부산문단은 어떠했는지도 말씀해 주시고 재미있는 부산문단의 야사도 있으면 들려주세요.
강정화 : 80년대 초‧중반만 해도 부산은 문화의 불모지라고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오명을 씻기 위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을, 제 나름으로는 상당히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88올림픽이 개최되던 때에 지금은 작고하신 부친께 그 당시 액수로 오천 만원을 지원을 받았어요. 그리고 88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서 ‘우봉문학상’을 제정하여 십여 년 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운 원로문인들을 선정하여 문학상을 수여했고,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봉문예장학금’을 동시에 수여하는 등, 부산 문학의 저변화를 위하여 노력을 했었지요.
그리고 그 일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번 선거홍보 기간에, 그 때 우봉문예장학금을 받았다는 분이 시분과 회원이 되어 저를 알아보더라는 너무도 고마운 이야기를 듣게 되어 만감이 교차했었습니다. 그리고 질문과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각종 백일장에 얼굴을 내밀고 다녔던 시절의 영남여성백일장에 참여하거나 수상을 했던 분들이 모여서 ‘영남여성문학회’를 만들고 <모시올>이란 동인지를 매년 만들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36집을 발간했습니다. 그까짓 일 년에 한번 발행하는 동인지가 별것이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동인들이 36년 동안 변함없이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무척 대단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임애월 : 물론 대단합니다. 제가 워낙 게을러서 그런지, 살다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삶에 대해 직무유기(?)를 자주 하게 되거든요. 저만 그런가요.(웃음)
아무튼 36년을 지켜온 <모시올> 멤버들이 대단한 것 맞습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게 되는 것이고요.
첫 시집 『바람도 어둠도』를 1985년에 묶으셨는데 거기에 실린 연작시 「무녀의 춤」을 읽어봤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실제로 굿을 하는 무녀의 춤을 직접 보신 적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강정화 : 아주 여러 번 봤지요.
어머니가 편찮으시고, 큰아버지께서 전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셔서, 할머니는 집안의 우환 때문에 굿을 하셨어요. 특히나, 행방불명되어버려 생사를 알 수 없는 큰아드님을 기다리던 할머니께선 그 당시 동해안에 별신굿으로 유명한 박수무당이 있었는데, 이름이 김무출인가... 아무튼 그랬는데, 그 사람이 고향 가까이에 살았어요. 그러다보니 너무 가까이에서 굿을 볼 기회가 많았지요. 연작시 「무녀의 춤」은 그래서 태어난 작품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긴
어둠 헤쳐나와
밝은 햇살에 안기우니
까닭모를 두려움에 떨며
울지 않으려 앙다물어 본
배냇짓
삼신할미의 주술로
떠도는 언어의 몸살은
지탱할 수 없는 열꽃으로
뒤틀어 오르며
한 자락 쥐어뜯어
대〔竹〕가지에 걸친다
삼신각에 새겨진 영험
새타니로 탄생되어
간짓대 높은 곳
문패 되어 나부끼니
숨어 산들 소용 있을까
달아난들 소용 있을까
종이꽃 너울 속에
얇은 쭉지 접힌 새로 부리 닳도록
낡은 짚신 꿰차고
진창에서 뻘죽으로 허우적거리다가
혓바닥 잘린 병신 되어
신 내린 춤추며
몽달귀신 면할 날 오지 않을까
-「무녀의 춤 1」전문
임애월 : 문덕수 시인은 첫 시집의 서문에서 “비인간적 요인들에 대응하여 살아가야 할 현대적 상황 속에서의 삶 자체가 근원적으로 부조리한 갈등 구조 속에 있다.”고 하셨는데 긴 세월 동안 해결되지 못한 그 부조리한 갈등들을 「무녀의 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읽혀지는데요.
강정화 : 네.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시의원 활동을 할 때에도 다 같이 잘 살자, 함께 잘 살아야만 나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의식을 정말이지 투철하게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의식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러한 의식이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린 시절에는 방물장수나 엿장수들이 동네를 돌면서 어린 아이들에게 쌀이나 마늘, 감자 같은 것을 팔라고 꼬드기는 일들이 왕왕 있었어요. 그러면 철모르는 아이들은 또 그런 것들을 엿이나 강냉이 같은 주전부리와 바꾸거나 팔아서 용돈으로 쓰기도 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지요. 그런데 저는 그런 장수든지 제게 와서 꼬드기는 말을 하면, “집안 어른에게, 우리 할머니께 가서 물어보세요.” 라고 했거든요.
임애월 : 아하, 참 야무지기도 하셨네요. 어린 나이에도 강단이 참 대단하셨어요.
강정화 : 시쳇말로 부정거래잖아요.(웃음)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용돈을 준다고 팔라고 아무리 꼬드겨도 절대 넘어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성격이 시를 쓰면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지 않나 싶어요.
임애월 : 그래도 내면의 저층 깊숙한 곳에서는 ‘까닭 모를 두려움에 떨며/울지 않으려고 앙다물어 본/배냇짓’을 ‘무녀’의 행위나 입을 통해 풀어버리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구가 드러난다고 보여집니다만...
강정화 : 사실 어린 나이에 겪게 된 어머니의 부재. 그 두렵고 외로운 상실감이 어린 저를 무척 힘들고 외롭게 했었어요. 그렇지만, 울지 않으려는 의식의 표출이 시에서 저런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 것 같아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제법 강하고 똑 부러진 성격의 아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임애월 : 김예태 시인은 「강정화 시인론」에서 “그의 시에서 무의식은 불안, 공포, 두려움의 시선으로 현실세계를 바라본다.”라고 하면서 그 “불안감은 주로 사회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대부분이지만 시간적 공간 속에서도 발생한다.”고 했는데, 유년기의 상실감이 성인이 된 후에도 내면 깊숙한 곳에 잔재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강정화 : 그랬을 거예요. 내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밝게 행동하려고 무척 노력하였지요. 그렇지만, 어느 순간 훅 하고 표출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제 목소리가 일반 사람들보다는 좀 큰 편이지요?(웃음) 그런데, 어찌 보면 그것 또한 그러한 표출의 한 방식이 아닌가 하고 간혹 생각한답니다.
임애월 : 아무래도 유년기의 환경이 성격을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나 봅니다.
연작시 「무녀의 춤」이 3시집에 와서는 현실사회의 부조리한 것들과의 대립과정에서, 힘없고 소외된 민중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애틋함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김 시인은 “그의 시에서 사회성을 추구하는데 초점을 맞춘 시들이 많은 것은 유아기의 트라우마를 달래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는데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채우기 위한, 또는 그 상실감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잘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걸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도 분명 있었을 것 같고요.
강정화 : 그런 셈이지요. 등단 이후 저의 시의 흐름을 대략 고향에 대한 향수, 사회고발적인 비판의식, 자연친화적인 자연에 대한 애정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구분을 하고 보면 「무녀의 춤」은 다분히 사회 고발적이면서, 동시에 약자에 대한 배려, 소외된 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 즉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반영한 시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이야
어느 날 막다른 골목길에서 너희가 큰 소리로 울고 있을 때 네 등을 토닥이며 네 편이 되어 서러운 투정을 받아주는 엄마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힘이 솟는 거니. 눈물이란 거짓 없는 진실의 표현인 줄 알지만 어른이란 아무리 울고 싶어도 달래 줄 더 큰 어른이 없어 울지 않는 거란다.
슬퍼도 슬픈 얼굴이 아닌 것처럼 억울해도 누군가에게 투정할 수 없어 목쉰 외로운 거위처럼 살고 있는 거란다.
- 「아이에게 2」 부분
임애월 : 이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슬퍼도’ ‘억울해도 누군가에게 투정할 수 없어 목쉰 외로운 거위처럼 살고 있’다는 부분에서 시적화자가 외로움을 견디며 얼마나 고독한 행로를 홀로 걸어왔는지를 알 수 있네요. 뵙기에는 참으로 당차고 씩씩해 보이시는데 말입니다.
강정화 : 비유적으로 숨기려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독자들이 읽어낸다는 사실이 또 어떤 의미에서는 감동입니다.
임애월 : “그의 무의식은 이타주의에 닿아 있는 듯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세계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추구는 삶의 본질이고 목표이며 나아가 세계와의 합일이라면 그 속에서 마멸되어도 좋은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린 것” 이라는 김예태 시인의 말처럼 타고난 이타적 애민정신이 시적으로도 잘 구현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강정화 : 제 삶의 기조가 나 혼자만 잘 살고, 우리 가족 우리 아이만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웃과 함께 사회와 함께 잘 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나의 행복이요, 내가 잘 살 수 있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하는 신념이랄까 믿음 같은 것이 제게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생하거나 말거나 나만 잘 살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은 절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저의 생각들을 시 속에서 찾아내고, 세상의 눈들이 들여다본다는 그 자체가 정말 신통방통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저의 삶 속에는 어렸을 때나, 중년이었을 때나 지금까지도 사회와 이웃과 친구와 함께 살아가야 된다는 사상이 제 인생의 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임애월 : 그래서 정치도 하시게 되었나 봅니다.
부산에는 얼마 동안이나 사셨는지요?
강정화 : 부산에는 고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살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도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결혼하고, 삼 남매 낳고, 큰 아들을 장가보낼 때까지 살았어요.
임애월 : 부산에서 꽤 오래 사셨네요.
강정화 : 유년을 빼고 제 인생의 삼분의 이를 살았으니, 온전히 부산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싶어요. 그 다음의 60 이후의 부산은 제게 또 다른 의미에서 매우 소중한, 고향보다 더 고향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부산의 비릿한 바다 내음, 미역 내음 같은 것은 뱃고동 소리와 함께 늘 제 삶에 활력을 주는 근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로 제 사주에 저는 물이 많은 곳에 살아야 성한다고 나와 있다는데, 제가 살았던 곳은 늘 물과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서울에 올라와서도 살았던 곳이 봉천동이라든지 하남이라든지 물과 관련이 있는 곳이었고, 그런 곳에 살면서 마치 제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차게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임애월 : 하하, 물 만난 고기요? 그 말씀 참 재미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선생님 특유의 유머와 친화력으로 시민들에게 꽤 인기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웃음)
강정화 : 아 네. 저는 제가 살아오는 동안, 그 어떤 것보다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사람들이고, 따라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저에게는 최우선이었어요. 돈이라든지, 다른 여타의 것들도 몹시 중요하겠지요. 그렇지만은 나의 가족이 중요하고, 친구들이 중요하고,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우선이었어요. 표현이 좀 점잖지는 못하지만, 젊어서부터 나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꼬인다고나 할까, 아무튼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그리고는 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제가 제일 좋아 하는 일은 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고민을 나누면서 대화를 하는 일이었어요. 이웃과의 대화 속에서, 또는 학교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학교생활이 나 사회생활에서 부딪히는 힘든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는 과정, 여럿 속에서 나의 의견이 전체의 의견이 되고 힘이 되고 나아가서는 전체의 의견을 아우르게 되는 그런 것들이 살아가는 중에서 가장 활력이 되는 일들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내가 행복해지고 그것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젊은 나이에 일찍 깨달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임애월 : 당시 여성이 정치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여성정치인으로서의 한계는 못 느끼셨나요? 있으셨다면 말씀해 주세요.
강정화 : 전혀 없었어요. 초대 의원부터 시작했으니까 ‘90년부터 ’98년까지 의원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귀했기 때문에 피해를 당한 게 아니라, 오히려 섬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부산시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에 서서 강연도 하고 활동도 하고 새해에는 축사도 하면서 활발하게 의원활동을 해나갔거든요. 부산 전체를 아우르는 여성 대표자로서 여성의 문제와 관련된 사안들, 이를테면 육아라든지, 가정, 교육에 관한 문제들을 책임감을 가지고 변화시키려고 최선의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의회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임애월 : 아무튼 참 대단하세요.
그 몇 년 동안 정치와 문학 활동을 병행하면서 느끼는 점이 남달랐을 텐데요, 정치와 문학의 다른 점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공통점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굉장히 미묘한 부분을 제가 너무 단순하게 여쭤본 것 같습니다만.(웃음)
강정화 : 전혀, 아닙니다.(웃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행복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잘하는 정치가 좋은 사회를 만들 듯이 잘 쓴 글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 합일점이 같다고 봐요. 정치가가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듯이, 작가는 독자의 행복을 위해 몇날 며칠을 고뇌하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좋은 작품을 생산해내려고 애를 쓰거든요. 정치와 문학이 서로서로 따로 노는 게 아니라, 그들 모두가 합심해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는 생산 활동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삶의 목표가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그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게 문학이, 정치가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단지 표현방식이 다를 뿐이지 그 지향점은 같다고 보는 것이구요. 훌륭한 정치가가 정의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는 것이나, 위대한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려고 하는 것이나 그 모두가 역시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겠지요.
임애월 : 그렇군요. 정말 단순명쾌하네요. 제가 이렇게 둔하답니다.(웃음)
고향을 배경으로 쓰신 작품들이 참 많이 나오거든요. 고향 사랑, 모교 사랑이 유별나신 것 같습니다. 12번째 시집 『청하 강강술래』는 아예 고향 ‘청하’를 소재로 쓰셨잖아요?
강정화 : 고향에서 태어나 자랐던 유년이 제 삶의 8할 같은 느낌이라면 쉽게 이해를 하실까요? 중‧고등학교 때 다녔던 보경사의 잔잔한 종소리, 오리 밖에 있었던 월포리 해수욕장의 출렁거리는 파도소리는 화음을 이루어 내 삶의 단단하고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충분히 대신해 줄 수 있던 막내고모(솜씨 좋고, 수 잘 놓고, 동네 결혼식에 축시를 쓸 정도로 글솜씨도 뛰어났던)의 각별한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을 보상해주었던 곳, 그 2킬로미터 안에 있던 초등학교 소풍 다닐 때 듣던 보경사 종소리가 늘 가슴 한켠을 따뜻하게 해주고 충만하게 해주었고, 출렁거리는 월포리 앞바다의 파도소리는 또 나의 유년을 아름답고 포근하게 해주었답니다. 그런 유년이 있기 때문에 여느 사람보다 별나게 고향을 노래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유년의 기억들이 도시의 삭막한 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임애월 : 사실 누구에게나 ‘고향’이라는 그 뒷배가, 삶에 있어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고향에 시비도 세워졌다는 소문이 들리던데요.
강정화 : 네. 제 고향인 포항 청하에 저의 애향시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님들이여 보았는가
새천년 새햇살 눈부신 날 정월 열하루 길일(吉日)맞아
조상의 넋 기리고 청하의 얼 간직하려
여기 모인 이들 한결 같은 뜻 모아
천년 뒤 이땅 지킬 후손들에게
오늘의 넋 세세토록 전해지도록
청하땅 드나드는 길목
청하를 가꾸어 길이 보존하도록
돌비석에 흔적 새기노니 길이길이 전하며
후손들이여 가꾸며 지켜가소서.
- 시 「청하의 얼 불기둥 되어 솟구치리」 중에서
2001년 1월 11일 11시,
청하 돌입삼거리에 강정화 애향시 시비목 제막식을 하다
강정화 : 자랑 같습니다만, 이 시비 말고도 2012년 9월, 청하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에 제 기념시가 학교 교문 문설주의 한쪽에 12행정도로 새겨져 있는데요, 참 고맙고 감사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곳보다 제 모교에 새겨져있다는 것이 늘 뿌듯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임애월 : 자랑 많이 하셔도 되시겠어요. 고향을 사랑하고, 고향에서 사랑 받고... 좋은 일이니까요.
앞에서 선생님께서는 물이 많은 곳에서 살아야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고도 하셨는데...... 고향인 포항에 금호강이 있고 부산엔 낙동강이 있지요. ‘물’이나 ‘강’ 을 제목으로 쓰신 작품들이 참 많아서요. 물론 「이별의 강」이나 「저승의 강」 「추억의 강」 등은 일반적으로 江이 상징하는 평화롭고 고요한 이미지와는 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머무르지 못하고 흐른다는 부분에서는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은 선생님께는 어떤 대상인가요?
강정화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강’ 또한 내 삶의 8할 이상을 차지하는 유년과 맞닿아 있는 그런 의미를 갖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유년은 또 고향을 연상시키고 그 주변을 감싸안아 흐르던 금호강에 가닿게 되는 것이지요. 저에게 있어서 강은 흘러간 아름답고도 슬픈 유년을 안고 내 안에 흐르는 고향, 늘 가닿고 싶은 고향 같은 이미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임애월 : 네... 강은 ‘내 안을 흐르는 고향’ 같은 존재라서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군요.
산문집도 2권 출간하셨잖아요? 성차별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시스템을 개선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여성들이 스스로 각성해서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구절을 기분 좋게 읽었어요. 남자에게 의지하게 되면 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되므로, 스스로 사회의 일원이라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라는, 30여 년 전에 하신 그 말씀이 참 멋지셨습니다.
올해가 3.1운동과 임정수립 100주년이잖아요.... 이 즈음이면 늘 유관순 열사가 생각나는데요.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시대를 사는 여성들에게는 어떤 새로운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
강정화 : 여성이 연약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됐다 이런 것은 과거의 삶의 구조가 그랬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세계의 움직임 자체가 여성 중심화가 되어가고, 동양 중심화가 되어가고 있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여성들이나 자라나는 아이들이 남녀를 구별하기 이전에 모두가 그냥 다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제 어디서든지 내가 소외를 받는다든지, 혹은 내가 보호를 받아야 된다든지 하는 그런 사고보다는 자기 자아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내가 남성보다 못 할 것이 하나도 없지 않냐 하는 그런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지 체력적으로는 남성보다 조금 약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지혜로써 극복하면 온전한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아이들을 낳고서도 바뀌지 않은 저의 그런 사고가 8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가며 비록 늦깎이이지만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지 않았나 싶거든요.
임애월 : 삶에 대한 열정이 참으로 치열하신 거죠.
등단하신 지 35년 동안 시집 14권을 상재하셨는데, 그간의 문단활동이나 창작활동에 대한 소회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강정화 : 저는 일정 기간 동안 써놓았던 시가 모이면 시집을 내고, 또 일정기간 동안 모이면 시집을 내고 하는, 일테면 시인으로서도 모범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웃음) 모범생이라는 어휘가 시를 손에서 놓지 않고 꾸준히 성실하게 썼다는 그런 의미에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제법 시간이 많이 지나고서 되돌아보면 그렇게 한 것이 꼭 시인으로서 정답이었을까 하는 회의가 생긴답니다.
임애월 : 어떤 부분에서 회의감이 생기신다는 건지요?
강정화 : 처음 시인이 되겠다고 그 밤낮없이 습작을 하고 생각에 생각을 하고, 시어 하나하나마다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등단초기에 가졌던 치열한 작가의식이...... 지금은 얼마나 제 작품에 배어들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 내지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답니다. 열심히 쓰고, 성실하게도 썼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등단하였을 때의 그 결연한 의지가 갈수록 무뎌지고 너무 쉽고 편하게 시를 쓰고 있지 않나 후회될 때가 적지 않거든요. 시인이 시집을 내는 일은 정말 소중한 창조의 결과물이 맞습니다. 그런데, 또 역으로 생각해보면 시집을 내는 일에 무어 그리 연연해했던가 싶기도 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누가 보더라도 이 시는 시인 강정화의 대표시라고 받아들여지고, 나 스스로도 그 시가 진정한 나의 대표시라고 할 만한 시를 쓸 수 있게 다시금 치열한 작가의식과 긴장감을 가지고 시를 대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시를 가져와서 봐주십사 하는 후배시인들에게는 시를 몇 번이고 퇴고를 하고, 긴장감을 늦추지 말라는 말을 늘 하면서도 정작 나 스스로는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는 것이 제 솔직한 소회입니다.
임애월 : 너무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살고 계신 건 아니신가요?
저처럼 게으른 자의 변명은 각자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 대한 정답은 정해진 게 아니라 아주 여러 개라는 생각입니다. 치열하게 살든, 좀 느슨하게 살든 나름대로 그냥 만족하면 되니까요. 하하~
여러 가지로 많이 바쁘실 텐데 오늘 이렇게 긴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곧 봄이네요. 끝으로 봄을 소재로 쓴 시 한 편 들려주세요.
강정화 : 네, 지하철역에 걸려있는 「봄의 소리」라는 시를 들려드릴게요.
구만리 먼 곳에서도
한달음에 달려오는 그리움
돌개바람 되어 산(山) 넘으며
봄안개 실비 되어 감싸고
연둣빛 수줍은 소망 틔우네
천길 언 땅 속에서도
감출 수 없는 혹독한 그리움
회오리바람 되어 강(江)을 건너며
아지랑이로 헤친 가슴에
연분홍 꽃망울 사랑으로 틔우네
-「봄의 소리」 전문
강정화 : 짧은 시간동안 어떻게 저에 대한 뒷조사(?)를 하시고...... (웃음)
이렇게 깊이 있는 질문지를 들고 오셨는지, 긴 시간 동안 인터뷰하시느라 참으로 애쓰셨습니다.
함께 자리해 주신 임병호 회장님과 최영선 시인님도 감사합니다.
- 어린 시절,
어머니가 부재했던 그 자리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늘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는......
그 아픈 다짐이 오늘의 ‘강정화 시인’을 만들었나 보다.
봄이 오는 길목
겉으로 보이는 단단한 모습 속에서
가녀린 유년의 눈물자국을 읽었다 -
■□ 자선 시 5편
팽이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
충직한 사병처럼
맞아도 빗나가지 않고
제 방향으로
돌고 있는 옹골진 모습
때려도 울지 않는 채
차가운 빙판에서도
현란한 꿈을 그리며
지출 줄 모르면서
돌고 있는 야무진 자세
잦아올리는 회초리 끝
묻어나는 뜨거운 전율로
때리지 않아도
돌아갈 수 있는 날까지
멍들지 않고 참아낸 인내
얼음 위에서
몇 번씩 혼절하다가
스스로를 시험하여
설 수 있는 날까지
버티어나갈 것이다
아무래도 예사 넋이 아닌가 보다
자갈치 시장
촘촘한 그늘이 왁자지껄한 거리
밤잠 모자란
핼쑥한 아낙의 얼굴엔
투박한 사투리가 생기를 돋우며
칼날보다 푸른 싱싱함이
좌판 위에 재빠른 손놀림되어
낮달의 선명한 등뼈를 추린다
쉴 줄 모르는 파도타기로
해풍이 질펀히 몰려오면
눅눅한 情이 배불뚝이 된 앞치마에
살아가는 계산이 비늘로 돋아
비린내로 속을 키운 진주되어
간밤보다 달콤한 내일을 꿈꾼다
새벽기도
꿈길까지 좇아온
귀 달린 종소리
혼자 꿈꾼 잠결 털고
외로운 섬 정박한 빈 배에
닻 올려보는 하루
새로움 낚으러
출항의 뱃고동 울리며
밀물되어 차오르는 그리움의 깃폭 따라
빈객 맞이하려는
빠른 손놀림
파도의 오선지에
아름다운 삶 수놓으려
청결한 물 가득 담아
티끌까지 씻어 내리고
한 옥타브 더 높인 소리로
두 손 모아보는 합장이여
보푸라기
날마다 의식의 밑자리 드나들며
씨줄과 날줄 팽팽히 당긴다
느슨하여 구김살 가는 꼴 볼 수 없어
긴장으로 날을 세워 훈련받는다
일탈을 꿈꾸는 보푸라기 일어나면
곧바로 가위손으로 잘라내기만 했다
여기저기 실핏줄 터지는 소리 듣지 못했다
씨줄 날줄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틈서리에
드센 바람이 오한을 일으키며 비양거린다
작은 흠집이 큰 수렁이 되어 갔다
보푸라기가 세월의 검버섯인 줄 몰랐다
늦게사 시련을 견디는 보푸라기의 안간힘이 보인다
암실 하나
이제까지 살았던 삐걱이는 방 말고
거꾸로 누워도 안락한 풍경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방에
오른 쪽에 국화향 그려놓ㄱㅎ
왼쪽에 큰눈 닮은 그림자 세우고
그 모습 줄지어 서게 한 뒤
세월 가도 변하지 않는 그리움으로
작업할 나만의 작업실 하나 갖고 싶네
아직까지 살아왔던 그런 분위기 말고
파란 색으로 찍으면 파랑새 되고
노란 색으로 노란 풍금소리 나올
구름기차 타고 어디라도 당도할
도깨비 방망이 문 앞에 두고
아무도 탐내지 않을 나만의 사진첩에서
암호로 부르면 튀어나올
단둘이 접선이 되는 통로 끝에
그리움 가득 찬 암실 하나 갖고 싶네
■□ 강정화 시인 약력
- 1985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 시집 『우물 속의 명상』 등 14권
- 산문집 『새벽을 열면서』 외 1권, 논문집 다수
- 시문학상, 한국시문학 본상 등 수상
- 한국시문학문인회 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 한국시문학아카데미 이사, 한국여성문학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청마문학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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