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를 바르게 읽자 / -⑤- 배(裵)씨 성의 본관(本貫).
~ 우리나라 성(姓)씨에서 본관(本貫)이 사용된 것은, 고려 개국 초(918년)부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개국 초에 왕권(王權) 강화수단으로 많은 공신과 지방 토호들에게 사성(賜姓)과 사관(賜貫)을 내렸다 한다. 이 때 부터 우리나라 성씨에서 본관 사용이 시작되었으며, 점차 제도화 되었다는 것은 전편에서 전술한바 있다.
~ 우리 배씨 성은, 두 번의 사성으로 이루어 졌다. 서기32년(신라 유리왕9)에 신라(서라벌) 한지부(漢祗部)에 사성이 첫 번째이고, 그 뒤 886년이 지난 후, 서기 918년(고려 태조원년)에 궁예의 기장 백옥삼(白玉衫)이 고려 건국에 공훈 하여 개국공신1등으로 녹훈되며, 배현경(裵玄慶)으로 사성,명 되며, 경주(慶州)로 사관 받은 것이 두 번째 사성이다. 신라 천년은 본관을 쓰기 전 시대였으므로, 고려 초 본관 “경주”사관은, 배씨 본관사(史)에서는 처음의 본관이다. 그러나 무열공(裵玄慶)은 후사가 실계(失系)되어, 계대가 이어지지 못하고, 본관 ‘경주’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더 이상 전승되지 못하였다.
~ 조선 시대에 와서 족보가 출현한 것은 세종 5년(1423)에, 문화류씨 영락보라 하는데, 기록으로만 전할 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는, 성종 7년(1476) 안동권씨 성화보이고, 족보의 보편화를 촉진 시킨 것은 명종 17년(1562)의 문화류씨 가정보로 알려져 있다. 그 때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족보 편찬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 진 것으로 보아, 그 전. 후 시대에는, 씨족(문중)별로 가승(家乘) 등 신적으로 유래를 밝혀왔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 배씨 성도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 배씨종사보감(1999年刊:중권 20~21쪽)에는, 배씨 성의 본관기록이 다음과 같이 있다. 즉,⌜경주(慶州),분성(盆城:金海),성산(星山:星州),달성(達城:大丘),흥해(興海:曲江),곤산(昆山:昆陽),경주(慶州),화순(和順),함흥(咸興),협계(俠溪),남해(南海),개성(開城),광주(廣州),여흥(驪興),천녕(川寧),한양(漢陽),파평(坡平),수원(水原),남양(南陽),정주(貞州),이천(利川),인천(仁川),장단(長端),죽산(竹山),안산(安山),삭녕(朔寧),가평(加平),양천(陽川),과천(果川),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용천(龍川),궁경(躬耕),청풍(淸風),단양(丹陽),서천(舒川),대흥(大興),덕산(德山),은진(恩津),채운(彩雲),연기(燕岐),보은(報恩),석성(石城),비인(庇仁),남포(藍浦),진천(鎭川),결성(結城),신창(新昌),전주(全州),우주(紆州),이성(伊城),경명(景明),남원(南原),순천(順天),여산(礪山),장성(長城),원율(原栗),고부(古阜),영암(靈巖),순창(淳昌),부산(富山),임회(臨淮),옥구(沃構),고산(高山),운제(雲梯),장계(長溪),이방(梨方),강진(康津),구레(求禮),흥양(興陽),해남(海南),안동(安東),풍산(豊山),상주(尙州),진주(晉州),창원(昌原),녕해(寧海),밀양(密陽),선산(善山),순흥(順興),초계(草溪),영천(永川),함안(咸安),고성(固城),개녕(開寧),고령(高靈),영산(靈山),창녕(昌寧),안음(安陰),단성(丹城),강릉(江陵),철원(鐵原),평해(平海),양구(楊口),해주(海州),연안(延安),평산(平山),서흥(瑞興),곡산(谷山),백천(白川),신천(信川),송화(松禾),토산(兎山),덕원(德源),평양(平壤),정주(定州),선천(宣川),철산(鐵山),희천(熙川),강동(江東),서산(西山),석계(石溪),대동(大同),남안(南安),단계(丹溪),용산(龍山),대동(大東),하암(河巖), 등 122개 본관이 기록되어 있으나, 경주(慶州), 분성(盆城:金海), 성산(星山:星州), 달성(達城), 흥해(興海), 곤산(昆山), 화순(和順), 함흥(咸興), 협계(俠溪), 남해(南海) 등 10여 본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모든 배씨(裵氏)는 시조인 문양공(文讓公) 휘 지타(祗沱)와 중시조(中始祖)인 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의 후손으로서 분파(分派). 분적(分籍)된 것이다.⌟ 고 기록되어 있다.
[주]: 배씨종사보감은, 배씨 본관 122개의 생(生). 멸(滅)의 역사와, 어떤 변이(變移)를 거쳐, 현재 10여 본(本)으로 남게 된 과정 등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리고, 특히 ‘보감’에 기록된 “모든 배씨(裵氏)는 시조인 문양공(文讓公) 휘 지타(祗沱)와 중시조(中始祖)인 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의 후손으로서 분파(分派), 분적(分籍) 된 것이다”는, 배씨 씨족사(史)와는 배치(背馳)되는 기록으로, 종사보감 편찬자의 자의적 해석일 것 이며, 유감스러운 문맥임을 지적해 둔다.
▶ 역사(歷史:榜目)에서 확인되는 배씨 성의 본관을 알아보자.
<다음의 자료는, 역사에 드러나는 배씨 본관을 ‘년대 순’으로 정리한 자료임.>
▪ 서기 918년(태조 1), 배현경(裵玄慶)의 본관 경주(慶州)가 확인된다.
▪ 서기 1143년(인종 21), 배경성(裵景誠)의 본관 협계(俠溪),
▪ 서기 1314년(충숙 1), 배인경(裵仁慶)의 본관 성산(星山),
▪ 서기 1322년(충숙 9), 배정지(裵廷芝)의 본관 대구(大丘),
▪ 서기 1345년(충목 1), 배 전(裵 佺)의 본관 흥해(興海),
▪ 서기 1354년(공민 3), 배천경(裵天慶)의 본관 달성(達城),
▪ 서기 1384년(우왕 10), 배원룡(裵元龍)의 본관 분성(盆城),
▪ 서기 1455년(세조 1), 배맹달(裵孟達)의 본관 곤산(昆山),
▪ 서기 1546년(명종 1), 배 륜(裵 綸)의 본관 임회(臨懷),
▪ 서기 1553년(명종 8), 배충과(裵忠果)의 본관 경주(慶州),
▪ 서기 1558년(명종 13), 배 숙(裵 璹)의 본관 화순(和順),
▪ 서기 1570년(선조 3), 배세침(裵世忱)의 본관 장기(長기),
▪ 서기 1573년(선조 6), 배응경(裵應褧)의 본관 성주(星州),
▪ 서기 1582년(선조 15), 배덕수(裵德秀)의 본관 함흥(咸興),
▪ 서기 1591년(선조 24), 배문상(裵文祥)의 본관 시진(市津),
▪ 서기 1637년(인조 25), 배연일(裵連一)의 본관 남해(南海),
▪ 서기 1637년(인조 25), 배일룡(裵一龍)의 본관 여주(驪州),
▪ 서기 1637년(인조 25), 배일련(裵日連)의 본관 괴산(槐山),
▪ 서기 1637년(인조 25), 배경남(裵京南)의 본관 수원(水原),
▪ 서기 1637년(인조 25), 배의열(裵儀悅)의 본관 남양(南陽),
▪ 서기 1637년(인조 25), 배가지(裵加之)의 본관 신창(新昌),
▪ 서기 1637년(인조 25), 배신룡(裵信龍)의 본관 안동(安東),
▪ 서기 1651년(효종 2), 배영준(裵永俊)의 본관 의령(宜寧),
▪ 서기 1651년(효종 2), 배홍발(裵弘發)의 본관 진주(晋州),
▪ 서기 1763년(현종 14), 배준학(裵俊學)의 본관 신계(新溪),
▪ 서기 1735년(영조 11), 배지대(裵志大)의 본관 영암(靈巖) 등 26개 본관이 확인된다.
[주]: 위 26개의 본관은, 역사에서 고증되는 배씨 본관들이다. 이 본관들이, 1764년(갑신)에 소위 갑신위보(甲申僞譜)사건으로 우리의 본관사가 왜곡 될뻔한 시련을 겪게 된다. ‘慶州裵氏大族譜’라는 이름의 위보를 만들며, ‘경주’로 본관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갑신보는 위조족보로 정리되면서, 관족(貫族)간 갈등만 조장하고 앙금만 심화시킨 결과가 되었다. <갑신보 논의는 다음 기회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 한편, 갑신위보를 주간한 도유사 배강(裵絳)은 “흥해배씨” 후손이고, 수화(收貨)를 담당하며 위보를 주도했던 유사 배처화(裵處和)는 “달성배씨” 후손이다. 서로가 각각 다른 뿌리의 몇. 몇 사람들이 의기투합하며, 합보(合譜)를 한다며 보사(譜事)를 일으켜, 배(裵)성의 전통 본관도 함부로 바꿔야겠다는 무모한 발상에서 만들어진 족보가 갑신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갑신보는 실패한 족보가 되었고, 배씨 본관은, 갑신보와는 관계없이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온 것이다.
▪ 서기 1789년(정조 13) 사마시에서, 배석조(裵碩祚)의 본관 해주(海州)가 확인되며,
▪ 서기 1805년(순조 5) 문과 을축방에서, 배상인(裵相仁)의 본관 공주(公州)가 확인되고,
▪ 서기 1864년(고종 1) 사마시에서, 배경룡(裵璟龍)의 본관 풍산(豊山)이 확인된다. 이로써 배씨 성의 본관은, 역사(방목)에서 29개의 본관이 확인 되는 것이다.
한편, 1999년에 배씨대종회에서 발간한 ⌜배씨종사보감⌟上卷에는, “도록(圖錄)”으로, 각 본관별 유적과, 묘소 등 금석물(金石物) 사진을 게시하고 있다. 각 관족은, 이 도록에서 각각의 본관을 고증 확인시켜주고 있다. 즉,
▪ 분성배씨의 도록<24~134쪽>은, 분성군(盆城君)이하 누대(累代), 가까운 조상까지 230여 점의 유적사진이 게시되었는데, 금석물 사진에는 “盆城裵氏” 또는 “盆城裵公”으로 명각(銘刻)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星山裵氏의 도록<135~228쪽>에는,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이하 누대, 가까운 조상까지 200여 점의 유적과 묘갈사진에 “星山裵氏” 또는 “星山裵公”으로 명각 되었다.
▪ 達城裵氏의 도록<229~324쪽>에는, 달성군(達城君)이하 누대, 가까운 조상까지 190여 점의 유적과 묘갈사진에 “達城裵氏” 또는 “達城裵公”으로 명각 되었다.
▪ 興海裵氏의 도록<325~354쪽>에는, 흥해군(興海君)이하 누대, 가까운 조상까지 70여 점의 유적과 묘갈사진에 “興海裵氏” 또는 “興海裵公”으로 명각 되었다.
▪ 昆山裵氏의 도록(359~371)에는, 곤산군(昆山君)이하 누대, 가까운 조상까지 25점의 유적과 묘갈사진에 “昆山裵氏” 또는 “昆山裵公:으로 명각 되었다.
▪ 慶州裵氏의 도록<372~376쪽>에는, 처사공(處士公:忠果)이하 누대, 가까운 조상까지 10여 점의 유적과 묘갈사진에 “慶州裵氏” 또는 “慶州裵公”으로 명각 되었다.
▪ 南海裵氏의 도록<382~384쪽>에는, 감사공(監司公)이하 누대, 가까운 조상까지 9점의 유적과 묘갈사진에 “南海裵氏” 또는 “南海裵公”으로 명각 되었다.
~ 마무리를 하면서, 본관은 한 혈족(血族)의 고유전통이다. 본관은 시류에 따라, 일부 후손들이 편의대로, 고치(改貫)고, 바꾸고(易貫)하는 그런 종사(역사)가 아니다. 역본(易本:본관을 바꿈)은, 조상을 바꾸어야 하고, 근본을 뒤 흔드는 결과로 연결되어, 예로부터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패덕(悖德)이고, 패륜(悖倫)으로 규율(規律)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배씨의 종사는, 위조족보 갑신보(1764)나, 근래에서, 어느 일방에 의해 통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경주배가”로 본관을 바꿔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가 전파되고 있다. 통합만 되면, 전통을 거슬러도, 패덕을 저질어도 상관없다는 논리인가? 청사에 선양되어야 하는 엄숙한 종사 앞에 우리 후예들은 냉철한 이성으로 역사를 바르게 읽어야 한다.
<⑥편으로 계속. 다음은 경주(慶州)의 유래>
2010. 11. 12. 우강 배재기(星山大譜편집실무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