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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전라도의 피해
<손자와의 대화 자료>
임진왜란 壬辰倭亂(요약)
1592(壬辰 선조 25년)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까지의 전쟁을 말한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히데요시는 *明을 칠 것이니 조선에 통행권*을 요구(정명향도征明嚮導)하지만 조선은 거절한다. 일본이 조선에 출병한 병력이 약 20만(16만일본측 기록) 명, 5월 2일 한성함락된다- 히데요시의 大誤解 히데요시의 錯覺(일본측 기록)
북한: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 임진왜란은 대명과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조정은 침범 소식을 듣고 즉시 대책을 세우나 200년 동안 전쟁이 없었으니 태평성대로 혼란에 빠졌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창덕궁에서 몽진한다. 호위 군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궁문 자물쇠도 채워지지 않았다. 벽제관에서의 점심은 왕과 왕비는 반찬을 받았지만 세자는 받지 못했다(선조 25년 4월 30일 기미 1번째기사
새벽에 서울을 떠나다)
종일 비가 왔다. 왜군은 5월 2일 고니시 유기나가, 가토 기요마사 崇禮門 興仁之門 입성
일제는 1910년 한일병합후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헐려했을 때 총독부 한 관리가 임진왜란 당시 당시 두 장수가 들어왔던 개선문으로 없애면 안된다는 반대로 보존되게 되었다는 전언이다.
정유재란 丁酉再亂(요약)
명나라 군사지원으로 조선을 점령할 수 없음을 알고 진행 중인 정전협정이 지지부진하다 결렬되어, 1597(丁酉)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재침공한다, 이듬해 1599년 12월까지의 전쟁을 丁酉再亂이라 한다.
출병 약 14만으로 삼남지방을 점령하기 위한 술책을 세우고 실천하려든 중 1598년 양력 9월 18일(음 8월 18일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이 철군
◉ 진주정씨 진양군 충장공파 25세 정희득의 기록으로, 정유재란 당시 영광법성창 인근 칠산바다에서 1597년 음 9월16일 왜군에 피포되어 1599년 음 7월 28일까지 기록인 해상록 1598년 음 8월 17일에 기록에 수길이 죽었다고되어 있다.
해상록 1598년 8월17일
수길(秀吉)의 죽음을 들었다. 기쁜 줄도 모르겠다. 수길은 7월 4일에 죽었는데, 적도가 숨기고 알리지 않았지만, 그 형적이 이미 드러난 것이다. 수길이 살아 있을 때 그 흉독함을 원망하던 자가 많았기 때문에 지금껏 왜도들은 모두 회의를 품고 두려워하였었다. 나는 편지로써 중겸(仲謙)에게 이르기를,
“하늘의 뜻이 전란을 싫어하여 큰 괴수가 저절로 죽었는데, 소금을 쳐서 냄새를 숨기니 뒷날 반드시 집안끼리 화란이 있을 것이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시기요.”하였다.)
일본군 일시의 전라도 점령
임진년 침공과 다르게 보급로를 탄탄히 하려 전라도를 점령한 후 한양을 공격하기로 한다.
일본 측 학자들의 주장으로는 일본 서부지역 주민을 매년 10만 명씩 이주시켜 광활한 농토를 점령하고 전쟁 물자의 보급을 원활히 할 수 있다 한다. 下三道-전라, 경상, 충청
일본 수군은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한다. 이 해전에서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이 이끌고 도주한 12척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인수한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추가되어 13척이 되었다.
◆ 9월 16일 명량 해전 승리 (必死則生, 必生則死)
◉지금 臣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 육군도 9월 17일(음력 8월 7일) 구례를 함락시키고 남원성으로 총진격했다. 남원성 전투는 병마절도사 이복남의 관군 1.000여 명 명 원군 3.000여 명 조명연합군과 각지의 의병장들과 군민들까지 합세해 왜군 56.000여 명과 4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9월 25일(음력 8월 15일) 패배해 전사하고 살해당하였다. 지휘관 이복남은 자결하였다. 22세 정민득은 殉節한다. 명나라의 부총병 등 일부는 북문으로 탈출하였다. 순절하신 민득은 남원 충렬사에 위패가 모셔지고. 22세 鄭光得광득은 탈출한다.
◉ 2003년 발행 진주정씨 족보 권2의 24쪽과 84~85쪽 숙독熟讀, 22세 광득의 조부 宗彦은 伸신 의 子로 횡성공 綿면의 종손인 世琚세거의 양자로 입적. 22세 敏得민득은 신의 장자인 宗弼종필의 손자. 즉 두 분은 신의 증손자인 셈이고 무관 집안으로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탈출을 종용하지만 듣지 않았다는 기록이 종보에 기록이 있다.
또한,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고자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일본에 보냈고(귀 무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구 잡아가 노비로, 또 서양의 노예상에게 매각했다.
전주 회의(8월 26일)와 정읍회의(9월 16일)-재침공과 전략거점성 축성
육군의 좌군과 중군 78.800명은 전라도를 재침범한다. 수군 7000명은 충청도를 침공하지 않고 전라도 연안으로 진격한다. 전라도 침공이 종료되면 *전략거점성 축성*
장수 | 1번 지역 | 2번 지역 | 장수 | 1번 지역 | 2번 지역 |
시미사요시히로 | 만경 부안 | 강진 해남 | 주코구 부대 | 무장 영광 | 진원 창평 |
나베시마 나오시게 | 금구 김제 | 화순 능성 | 고니시 유키나가 | 부려,옥과,곡성 | 낙안,순천,광양 |
모리요시나리 | 흥덕 | 동복 | 우키타 히데이 | 장성 담양 | 보성 장흥 |
이케다 히데카츠 나카가와 히데시케 | 태인 | 광주 | 하치스카 이에마사 이코마 가즈마사 | 정읍 고창 | 남평 영암 |
조소카베 모도치카 | 고부 | 나주 | 수군 부내 | 함평 무안 | 흥서 |
직산 전투와 명량 해전
남원과 전주를 함락한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稷山)까지 진격했다. 후에 직산에서 명나라군과 대치하여 몇 차례 전투하였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시키자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한 일본 육군은 진격하지 못하고 남하한다.….
수세에 몰려 방어하고 조명연합군은 공격하는 양상으로 남해안의 왜성들에까지 밀려 방어에만 집중한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7년(1681) 6월 30일 정유재란 때의 함평인 정함일의 처 이씨 등 12절부를 정려하다.
12사람의 절부(節婦)를 정려(旌閭)하였다. 정유년(1597)의 변란 때 함평인(咸平人) 정함일(鄭咸一)의 처(妻) 이씨(李氏), 정함일의 장자(長子)인 정경득(鄭慶得)의 처 박씨(朴氏), 차자(次子)인 정희득(鄭希得)의 처 이씨(李氏), 정함일의 딸 정씨(鄭氏), 정운길(鄭雲吉)의 처 오씨(吳氏), 정주일(鄭主一)의 처 이씨(李氏), 정주일의 아들인 정절(鄭㦢)의 처 김씨(金氏), 정절의 아들인 정호인(鄭好仁)의 처 이씨(李氏), 경도인(京都人) 심해(沈諧)의 처 정씨(鄭氏), 권척(權陟)의 처 정씨(鄭氏), 무장인(茂長人) 오굉(吳宏)의 처 변씨(邊氏), 김한국(金翰國)의 처 오씨(吳氏) 등 온 족친(族親)이 함께 배를 타고 난리를 피해 영광의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적선이 뒤쫓아오자, 12절부가 동시에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당초에 모두 정문(旌門)하고, 일을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 실었었는데, 자손(子孫)이 쇠잔하고 유락(流落)해서 폐지(廢止)한 채 거행하지 못하였었다. 이때 이르러 그 후손(後孫)들이 연명(聯名)하여 상언(上言) 하자, 예조(禮曹)에서 다시 아뢰어 시행하게 되었다.
포로실기 대표 5대 작품
정희득의 형 정경득, 집안사람 정호인도 각각 해외체험 포로실기 만사록(萬死錄)과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를 남겼으며, 이 셋을 서로 대조해 당시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을 더욱 생생하고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포로 실기의 대표 5대 작품인 간양록, 금계일기, 만사록, 월봉 해사록, 정유피란기 중 하나로 고난의 시기에도 그 모든 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노력했던 선조들의 소중한 기록유산 중 하나다.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
정유년(1597년) 8월 12일(양력 9월 12일)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형 (역) | 1977
왜적이 두 번째 내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남의 인심이 흉흉하여,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두 가지 의논이 있었으나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나는 곧 어버이를 모시고 가권을 거느리고, 지고 메고 하여 길을 떠났다. 우리는 길에서 녹초가 되어 늙고 약한 이들이 엎어지고 넘어지니, 심신을 가눌 길 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되돌아 서해(西海)를 향하며, 창황한 중에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8월 19일(양력 9월 19일) 영광(靈光) 대안촌(大安村) 앞에 이르러 의논을 달리했다. 이내 둔전포(芚田浦)로 나가 거룻배 하나를 구해서 수리하고 꾸몄다.
9월 16일 뭍의 왜병이 법성창(法聖倉)에서 이리저리 분탕질하다가, 우리 배를 보고 총을 쏘았지만 겨우 배 있는 곳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척숙(戚叔) 정돈(鄭燉)과 족형(族兄) 절(㦢), 그리고 심화백(沈和伯)ㆍ권사위(權士偉)의 두 척숙과 오장 굉(吳丈宏)이 우리 일가족과 배를 함께 탔다. 족제 증(憕) 형제도 따라왔다.
9월 27일 배가 칠산(七山)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적선을 만났다. 사공의 놀란 고함에 온 배에 탔던 사람이 창황 실색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어머님 이씨(李氏)께서 형수 박씨(朴氏)와 아내 이씨(李氏), 시집 안 간 누이동생에게 이르기를, “추잡한 왜적이 이렇게 닥쳤으니 횡액을 장차 예측할 수 없구나. 슬프다, 우리네 부녀자가 자처할 방도는 죽음 하나만이 생사 간에 부끄럽지 않을 뿐이다.”하시니, 아내가 말하기를 “집에서 난을 처음 당했을 때, 일찍이 가장과 더불어 죽기를 약속했지요. 저의 결심은 이미 정해 있습니다.” 하고는 낯빛도 변함없이 늙은 어버이께 하직을 고하고, 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지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하오니 당신은 조심조심 몸을 아껴 형제분 함께 아버님을 모시고 꼭 생환토록 하시오. 이것이 바로 장부의 할 일 입이다. 간절히 비옵니다.” 하였다.
드디어 어머님ㆍ형수님ㆍ누이동생과 더불어, 앞을 다투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우리 형제는 적도(賊徒)가 배 안에 묶어 두어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었으니, 망극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법포(法浦)에서 피난하던 배가 애초에는 바둑판 벌여 있듯 했었는데, 어찌하여 우리만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쳐, 간장이 찢어질 듯하였다. 왜장의 이름은 삼소칠랑(森小七郞)이며, 바로 왜국 남해도(南海島) 아파수(阿波守) 봉수하 가정(蜂須賀家政)의 별장이라 하였다. 이날 갑자기 해천(海天)이 참담하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광풍이 크게 불고 폭우가 쏟아지며 물결이 공중에 솟구쳤다.
1597년 9월 29일 적이 우리 배를 끌고 다경포에 이르더니, 부친과 두 아이는 늙고 어리다 하여 놓아 보냈다. 부친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조심하여 함부로 죽지 말고 생환하여, 나로 하여금 네 얼굴을 다시 보도록 하는 것이 효자이니라.” 하시었다. 부자가 서로 떠나자니 정경이 망극할 뿐이었다. 우리 형제와 子平의 형제, 그리고 정호인 형제만이 배 위에 있었다.(족보 2권 51~81, 74~86, 子平: 21세 德一의 아들로 박博의 字. 恒과 형제, 그리고 鄭好仁, 鄭好禮 형제는 21세 主一의 子 㦢의 아들로 35세 한기, 34세 재신의 선대이심, 恒 배에서)
1598년 8월 17일 수길(秀吉)의 죽음을 들었다. 기쁜 줄도 모르겠다. 수길은 7월 4일에 죽었는데, 적도가 숨기고 알리지 않았지만, 그 형적이 이미 드러난 것이다. 수길이 살아 있을 때 그 흉독함을 원망하던 자가 많았기 때문에 지금껏 왜도 들은 모두 회의를 품고 두려워하였었다. 나는 편지로써 중겸(仲謙)에게 이르기를,
“하늘의 뜻이 전란을 싫어하여 큰 괴수가 저절로 죽었는데, 소금을 쳐서 냄새를 숨기니 뒷날 반드시 집안끼리 화란이 있을 것이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시기요.”하였다.
1598년 11월 8일 놓아 주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글로 써서 가정에게 보였다.
“만리타국에 부자가 서로 떨어져 있다가 이제 돌려보내겠다는 말을 들으니, 해가 넘도록 갇힌 생활이 이로부터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천륜의 지정(至情)을 이룰 것이요, 끊어졌던 종사(宗祀)도 잇게 되었습니다. 옛날 한(漢) 나라의 소무(蘇武)가 10년 동안 절기[節旄]를 갖고 있다가 마침내 고국에 돌아갔으니, 우리들의 사정과 서로 똑같다 하겠습니다. 마른 땅의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장 안의 새가 숲으로 돌아간 듯, 다행스럽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11월 21일 저녁에 회백(晦伯)과 함께 삯배를 마련하여 선창가에 있는 원덕 어미[遠德母]의 집에서 묵었다. 이 할미는 바로 임박(林璞)의 여종인데, 나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때 유오(柳澳)ㆍ주현남(朱顯男)ㆍ정증(鄭憕)ㆍ유여굉(柳汝宏) 형제ㆍ정호인(鄭好仁) 형제ㆍ임덕제(林得悌), 그리고 우리 형제와 정(貞)ㆍ응(應) 두 아이가 한배에 탔다.
1598년 11월 22일 배에 올랐다. 덕룡(德龍)ㆍ여금(女今)ㆍ줏비(㗟非)를 남겨두고 작별했다. 왜인의 무리 및 우리나라 사람으로 구경 나온 이가 담쌓듯 했다. 여종들이 뱃전을 두들겨 통곡하면서 작별하니, 보는 이가 손을 비비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10리쯤 가서 외딴 마을에 닿았는데, 가정의 어미가 왜인을 보내어 응아(應兒)를 빼앗아 갔다. 내가 배에서 내려 애절하게 빌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아 있고 떠나가는 정경의 참담함은 형언할 수 없었다.
1599년 기해년 6월 29일 바람이 순하여 닭이 울자 배를 띄웠다. 어스름 저녁에 부산 앞바다에 닿으니, 첨사(僉使) 이종성(李宗誠)이 작은 배를 타고 나와 맞이하는데 금대 옥정(金帶玉頂) 차림으로 우리를 영접하여 주선하였다. 우리는 귀신 지옥 캄캄한 밤중에 있은 지 지금까지 3년에 오늘에야 조관의 풍채를 보니 슬픔과 기쁨을 형언할 수 없었다. 종성이 우리 배를 끌어 부산진 앞 포구에 대었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이종성의 진중(鎭中)에 있었는데, 접반관(接伴官) 유몽룡(劉夢龍)이 와서 보고 이내 데리고 가 그의 처소에서 잤다. 등불 밑에서 장계(狀啓)의 초본을 작성했다.
己亥(1599)냔 7월 5일 자루에 쌀이 떨어져 길을 떠나지 못하고, 마을에 다니며 구걸하니, 구곡(舊穀)은 이미 다 되었고 신곡은 아직 거두지 못하여, 종일 얻은 것이 매우 적었다.
己亥(1599)냔, 7월 7일 새벽에 떠났다. 길이 묵어 풀이며 나무가 하늘에 닿았다. 종일을 가도 인적을 볼 수 없고 길옆에는 백골(白骨)이 쌓여 있었다. 물어보니 우리 군사와 적병이 싸웠던 곳이라 했다. 창원(昌原) 마을에서 잤는데 마을 이름은 남산(南山)이라 했다.
7월 14일 대첩비(大捷碑)를 지나서, 운봉(雲峯) 땅 조그만 산중의 마을에서 잤다. 비가 와서 하늘은 까마득하고 호랑이가 낮에도 울고 다녀,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7월 17일 형님의 병으로 묵게 되었는데, 중겸(仲謙)과 울면서 작별했다. 담양(潭陽)에 산다는 김득(金得)을 만났다. 18일 김득의 말을 빌려서 형님을 태웠다. 순창군(淳昌郡)에서 잤다.
19일 담양 김기원(金起元)의 집에서 잤다. 여종을 만났다.
1599년 己亥 7월 20일 집에 도착했다. 부친은 성내에 가셨다가 밤에 돌아오셨다. 손을 잡고 통곡했다. 모친은 하나의 나무 신주[木主]일 뿐이었다. 모친과 형수ㆍ아내ㆍ누이동생 해중(海中)의 변고를 되짚어 생각하니 망극하기 이를 데 없다.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치니 오장이 무너지고 찢어지는 듯했다. 게다가 기아(奇兒)는 이미 나이 8세라, 옷을 부여잡고 호곡하니, 이날의 심회 형언할 수 없다. 우아(遇兒)는 초동(草洞) 처가에서 기르기 때문에 당장 서로 보지 못하니 더욱 애련했다. 집은 불탔고 골목은 바뀌었으며, 촌락은 빈터를 이뤄, 사람들이 옛 모습이 아니었다. 슬펐지만 오직 돌아와 노부를 모시게 된 것이 이 세상의 다행이었다.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해상록(고전번역원) 정유재란(2017년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정씨 족보(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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