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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原大學校附設體育科學硏究所論文集, 第35號, 2013, pp. 54∼74.
Institute of Physical Education and Sports Science Kangwon National Univ.
No.35, 2013. pp. 54∼74
근대 이전 중국무술의 발달과정에 대한 스포츠인류학적 탐색Key word : before modern ages, Chinese Martial Arts, development process, Sport Anthropology
* kimys1655@hanmail.net
김용수*ㆍ박기동(강원대학교) * 한국스포츠사랑연구소(김택호)
Anthropological Study of Sport on Development Process in Chinese Martial Arts before Modern Ages
Kim, Yong-Soo․Park, Ki-Dong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types of martial arts and development background by studying how it was developed and soaked in culture and to look into the sport anthropological meaning of Chines Martial Arts by arranging them according to time period from ancient times to before modern times. The conclusions are as shown below. First, in ancient times, Martial Arts like Gagjeohee and Gancheokmoo were the first form of Chinese Martial Arts and used as means of improving mental and physical strength, treating illnesses, living long and training a fighting spirit. Second, in the age of civil wars, groups training only martial arts professionally appeared because personal combat skill were regarded as important. Third, in Gin and Hahn periods, dancing sports similar to Torow exercise(practicing the right way the body moves) such as Domoo(big sword Dancing), wallmoo(ax dancing), Gummoo(sword dancing), Ssanggeukmoo and combative sports such as Soobak, Gakjeo, and Geokgum appeared. Fouth, in Periods of Yu, Gin and North and South Dynasty, combative sports were developed because of a lot of wars. Especially, Buddhism and Taoism had an significant effect on Chinese Martial Arts in this period. Fifth, in Tang, Song and Yuan periods, a lot of private martial arts groups appeared and specialization and professionalization were accelerated. Before Song period, there is no differences between instruments of martial arts and military arms. The form of martial-art 18 techniques was thought of as appearance of practical instruments of martial arts. Sixth, in Ming and Ching periods, a lot of schools were formed due to the development of military arts, spreading of unarmed martial arts and armed martial arts, and growth of private martial arts. There were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the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before the Opium War. The training of private Martial Arts was intended to forster warriors equipped not only with Martial Arts but also with knowledge. Seventh, the Martial Arts used as military purpose took a backward step after the Opium War broke out in 1840 and private Martial Art were separated accordingly and became the driving force of infusing patriotism and stirring up national consciousness through peasant movements.
Ⅰ. 서론
상고시대(上古 時代)부터 인류는 열매 등을 채취하고 짐승을 사냥하며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무막대기나 돌멩이 등의 도구를 사용하였다. 이와 함께 생존을 유지하고, 맹수와의 힘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점차 날카로운 병기를 만들어 자위(自衛)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이런 와중에서 "날랜 짐승들을 사냥하는 가운데 그 짐승들의 여러 가지 장기(長技)를 모방하여 그 동작들을 배워서 연마하고 익히며 체력을 증강하고"(이성곤, 2007: 118) 기량을 향상시켰다.
모든 시대의 각 민족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격투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문명권에서도 격투 기술은 존재하였다. 따라서 격투는 인류의 시원(始原) 문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격투는 단순히 집단생활의 필요적 행위였다. 즉, 종(種)을 보존하고 개체의 생존을 위한 동물의 본능 활동이었다(林伯源, 1994, 許進雄, 2003). 이러한 격투 기술은 서양에서는 복싱, 레슬링, 펜싱의 형태로, 동양에서는 무술(武術) 형태로 발전(허건식, 2001)하여 왔기 때문에, ‘어떤 종목의 격투 기술이 먼저이고, 그 기술이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 하는 등의 역사를 정확하게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나영일, 1997a, 장재이, 2000). 그러므로 ‘동양의 격투 기술은 무술(武術)로서 서양보다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는 논리는 그 동안 경기화로 발전을 가져온 유도, 태권도, 검도, 우슈 등의 기술과 이름, 그리고 내용 등이 변화되기는 하였으나, 스포츠화된 무술의 원류(源流)에 있어서는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의 기술의 형태와 운동의 특색,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공동의 목적인 격투 방법이 여러 가지의 운동 형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환경 조건과 문화의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편의상 武術은 중국식 용어, 武藝는 한국식 용어, 武道는 일본식 용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임동규, 1990, 임동규, 1994, 양진방, 1999, 허건식, 2002, 김산, 김주화, 김창우, 송일훈, 2008). 그러나 김재일(2002: 36)은 “무도, 무술, 무예의 출전(出典)을 분명히 밝히고, 武術은 중국이고, 武藝는 한국이고, 武道는 일본이라는 통설은 앞으로 재인식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중국에는 다양한 무술(武術)들이 존재해 왔다. 중국에서는 과거 무술(武術), 무예(武藝)라고 하였고, 국기(國技)라고 하다가 1928년 중국무술관인 ‘中央國術館’이 건립된 이후에는 국술(國術)이란 용어로 통일되었다(吳文忠, 1969). 이 시기에 國術 이란 용어는 ‘중국무술(中國武術)’의 줄임 말로 쓰였으며, 그 동안 ‘國術’, ‘쿵후(工夫)’, ‘쿵푸(功夫)’라고 하다가 1990년 북경 아시아 경기대회 이후 ‘우슈(武術, Wushu)'라는 고유 명사로 쓰이고 있다(吳文忠, 1969, 나영일, 1994, 장재이, 2000, 허건식, 2001, 김현일, 2005, 강영석, 박광동, 2007, 김의환, 허건식, 2008, 김이수, 2009).
그 만큼 무술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기법(技法)이 난무하고 동시에 추구하는 정신세계도 다르다. 실제로 중국무술의 가지 수는 많지만 전통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닌 무술(武術) 체계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무술들이 가전(家傳)되어 오거나 소수의 전수자(專修者)들에 의해 전승되어 오기 때문에 이외로 중국무술의 보편성을 중국 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중국 대륙의 광활함과 지역의 폐쇄성, 그리고 다양한 민족 등 여러 가지 문제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중국무술(中國武術)은 동양 사상의 하나인 지행합일(知行合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성 발전되었으며, 실천을 중요시하는 지행합일 사상은 무술 무술(武術)이라는 용어는 무예(武藝)와 무도(武道)라는 명칭과 혼용하여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어의 ‘Martial Arts’는 무술, 무예, 무도에 모두 적용되어 쓰일 수 있는 개념이다. 대개 일본식 개념인 武道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武術, 혹은 武藝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武道라는 표현은 예외적으로 쓰일 뿐이다(임동규, 1994, 장재이, 2004, 김의환, 허건식, 2008). 중국에서는 개별적으로 맨손 武術 종목을 지칭할 때는 太極拳, 少林拳, 당랑권 따위로 부르고, 兵器術 역시 삼재검, 풍파곤 육합창, 태사수마편 따위로 부르지만 이들을 모두 武術이라고 통칭하고 있다(이용복, 2003).
을 구현함에 있어서 이론과 실기는 실용에 합치되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였고, 무술 발전에 실마리가 되어 무술의 운동 형식과 기술 체계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중국무술은 기격(技擊) 운동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주로 보법(步法)이나 촌경(寸勁) 연습을 목적으로 하는 표연(表演)인 투로(套路)와 산수(散手: 散打)인 격투(格鬪)를 운동 형식 중국무술은 맨손으로 치고, 때리고, 넘겨 던지며, 잡아 꺾고, 쓰러뜨리는 독특한 동작을 포함하고 있다. 무기를 사용하는 기법은 내려치고, 찌르고, 때리는 동작을 기본으로 하여 일정한 규율에 따라서 각 동작을 분할, 배정하여 혼자서 연습할 수 있도록 투로(套路)가 구성되어 있다. 투로의 연습에 익숙하게 되면 일정한 규칙에 따른 공격과 방어의 격투 기술을 연습하여 체질을 증감시키고, 의지를 강하게 하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전술 기능을 갖춘다.
으로, 내외겸수(內外兼修)를 중시하는 중국 전통의 운동 종목이다(張燿庭, 2006).
근래의 학자들은 중국의 한대(漢代)나 당대(唐代)부터 무술의 중심 모습을 맨손무술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무술에서 맨손무술은 무술 문화 전체에서 매우 제한적이고 주변적이며, 빈약한 형태로서 존재했을 뿐이다. 권(拳)에 법(法)이라는 말이 붙고, 검(劍)에 법(法)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명대(明代)에 들어와서 이다. 송대(宋代)에 각저사(角抵社: 씨름), 금표사(錦標社: 활쏘기), 영략사(英略社: 봉술) 등과 같은 민간 연무 조직이 있었지만, 무술이 크게 발전하는 시기는 명대(明代)이다(전형준, 2004). 명대(明代) 이전의 무술들은 소림권(少林拳)이라는 명칭으로 종합화할 수 있으며, 명대(明代) 이후 만력(萬曆, 1572~1620) 연간부터 무술이 유명하게 된 것이다. 명(明)의 가정(嘉靖, 1521~1566) 연간에 정약증(鄭若曾)이 쓴 『강남경략(江南經略)』에서 나오는 무술 문파들이 있었는데, 당시 유행했던 권법 11가, 곤법 31가, 창법 16가, 도법 15가, 검법 6가, 기타 무기 10가, 마상 무기 16가 등이 기재되어 있다(程大力, 1995).
중국무술에 대한 학문적 연구(나영일, 1997; 송형석, 2001; 허건식, 2001; 배경희, 문영진, 2001; 오장환, 2001; 김창룡, 이병익, 허건식, 2002; 양진방, 2002; 김동규, 이용수, 2003; 백경화, 지치한, 2005; 이성곤; 2006; 류병관, 2006; 강영석, 박광동, 2007; 김현일, 2007; 최복규, 2007; 송일훈, 조충현, 안진구, 2008; 이성동, 김주화, 김산, 2008; 박귀순, 신영권, 2010; 박기동, 김용수, 김용근, 2011)는 동양무술과 관련한 중국무술의 부분적인 내용이며, 중국무술의 발달사(장재이, 2000; 박귀순, 2008; 김용수, 박기동, 윤대중; 박기동, 김용수, 2010; 박귀순, 2012; 김용수, 김용근, 2012) 내지는 근원․발전적 해석(신수용, 2007; 김용수, 2010; 김용수, 박기동, 강종학, 2010; 박기동, 김용수, 2010; 장민, 김동규, 2010; 박기동, 김용수 ,강종학, 2011; 박기동, 김용수, 2012; 박귀순, 2012)은 논쟁을 피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 무술사의 경우 중국사에 정통한 개인의 저작인 임백원(林佰原,)의 『중국무술사(中國武術史)』, 습운태(習雲太)의 『중국무술사(中國武術史)』와 국가의 공식 단체에 의해 작업한, 중국국가체위무술연구원(中國國家體委武術硏究院)의 『중국무술사(中國武術史)』등이 있다.
동양 무술에서 중국무술과 우리나라 무예(武藝)나 일본의 무도(武道) 등과의 연관성이나 보완 관계 면에서 볼 때, 더 넓은 동양 무술(武術)의 특징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에 상호 보완적 입장에서 먼저 중국무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중국무술이 상고(上古) 시대부터 근대(近代) 이전(以前)까지 어떤 발달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문화 속으로 스며들었는지 그 발달 배경과 무술의 유형을 알아보고자 하는 데 의의가 있다.
이 연구는 중국무술(中國武術)을 상고 시대(上古 時代)부터 근대 이전까지 시대적으로 정리해 봄으로써 중국무술의 스포츠인류학적 의미를 탐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중국의 역사를 임의적으로 1. 上古 時代(夏․殷․西周) 2. 春秋․全國․秦․漢 3. 三國時代․魏晋․南北朝 시대 4. 隨․唐․宋․元 시대 5. 明 시대 6. 淸 시대로 구분하였다. 시대 구분은 역사적․사회 문화적 배경과 연관시켜 설정하였으며, 탐색 내용은 관련 서적을 통하여 사실에 가깝도록 노력을 다했다.
Ⅱ. 근대 이전 중국무술(中國武術)의 발달과정
근대 이전의 중국무술(中國武術)의 발달과정을 설명하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중국의 광활한 토지와 다양한 인종, 복잡한 역사적 배경에서 파생되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한 시대에 발생한 무술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중국(中國) 전체를 대표하는 무술(武術)로 말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을 것이다. 특히 기록도 없는 과거의 사실을 현재에서 재확인하는 데는 상당한 과학적 노력이 필요하다. 설령 과거의 자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보다 진지하고 정확한 해석을 하려면 상당한 과학적 지식 체계가 요구되는 일이다.
무술(武術)이 하나의 의도적 문화 구조를 일관되게 진행시키면서 오늘날에 이른 것이 아니라 시대가 흘러갈수록 각기의 독창적 심신 문화로 구체화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吳文忠(1969)은 무술은 건신, 정신교육, 군사국방, 경제보급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고, 康戈武(1990)와 林伯源(1994)은 중국 무술은 철학과 종교, 민족정신과 민족풍습, 민족예술, 민족과학, 윤리 도덕관 등에 영향을 주고 있는 문화 현상이라 하였다(江百龍 外, 1995, 장재이, 2000, 허건식, 2001, 장재이, 2004).
이는 무술(武術)의 모습들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조명되고 해석하기도 하고 실제로 같은 무술 안에서도 상반된 기법(技法)과 정신의 변화들이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1. 上古 時代(夏․殷․西周)
무술(武術) 무술(武術)이라는 용어는 5∼6세기 南北朝 시대에 간행된 문선(文選)에서 처음 발견되고, 무예(武藝)는 한대(漢代, BC 200∼AD 220)의 ‘三國志’에 나오는 말이다. 무도(武道)는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초기부터 사용되던 용어로 보인다(이용복, 2003, 백경화, 지치환, 2006).
의 기원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활하면서 닥치는 주위의 위험으로부터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무술은 인간과 역사를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박기동, 김용수, 2010).
중국무술(中國武術)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의 전통 운동으로, 그 기원은 원시 씨족 공동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 사회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동과 농경 발달에 다른 생산물의 상호 쟁탈로 인해 전사적 수련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이 시대의 무술 수련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옛날 석기시대에 인류가 발명한 몇 가지 원시 도구의 양식이 나중에 무술 기구가 된다. 그 사용법은 무술의 병과(兵戈)에 관련된 격투 기술의 요소를 만들어 냈다. 생산력의 발전과 사유제의 형성에 따라 일어난 원시 전쟁은 많은 무술기구의 진화와 병과(兵戈)의 전투 기술 진보를 가져오게 했다. 문명사회의 형성과 함께 사회 경제의 진보와 공방 격투에 이용되는 전문 군대의 창설은 병기의 종류를 다양화하게 해 그 사용법과 격투에 이용되는 기술은 더욱더 발전되고 축적하게 되었다. 동시에 도수(徒手)의 격투기술(格鬪技術)도 유행하게 되었다. 문명사회의 초기, 즉 중국 서주(西周)에 해당되는 시기에 무술의 기본 요소인 전용병기, 그 사용 기술, 도수 격투기술(格鬪技術)은 살상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경로에 따라서 발전해 왔는데, 자신의 형식, 공방법과 훈련의 수단을 형성해 중국무술의 기본 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장재이, 2000, 허건식, 2003). 인류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인간이 개체나 집단으로서 자신의 안전과 존립을 지키기 위하여 행해지는 전투 행위는 자연적 현상에서 생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초기의 무술은 대부분 격투술과 군대 무술의 형태로, 무술이 근본적으로 격투술이며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림 1. 정촌인(丁村人) 수렵(狩獵) 복원도(復原圖)
무술(武術)의 기원, 특히 맨손 격투술의 기원을 더듬어 가면 춤(舞)이라는 것도 무(武)와 관련이 있다. 즉 ‘무(武)는 무(舞)이며 무(無)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춤은 시간이 갈수록 많은 갈래로 나눠지지만 크게는 유희(遊戱)․무예(武藝)로 볼 수 있다. 원시적 무도(舞蹈)에는 기쁨을 표시하는 예술성 짙은 동작이 있으며, 용맹과 위세를 표시하는 박격(搏擊) 동작도 있다. 이런 원시적 무도(舞蹈)가 그 이후의 모든 무도 예술의 모형이 되고 무술 발전의 내용과 형식이 되었다는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舞)는 무술(武術)의 한 모습이고, 무(舞)는 무(武)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舞蹈는 모든 예술의 원천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무도(舞蹈)로부터 춤(舞)과 무(武)는 차츰 분리되었고, 그 중 武의 기능은 사람들의 민간 무술이나 전투 무술의 기능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사람들은 이 춤사위로부터 기격(奇擊) 즉 치는 기술과 격투성 있는 동작을 발전시켜 무술로써의 기술을 추출해 낼 수 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다(全國武術科學硏究會, 1990, 김재일, 2003).
즉 무도(舞蹈)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한편으로는 민속놀이나 즐거운 유희의 형태를 갖추게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수박(手搏)과 같은 맨손 무술을 거쳐 무예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싸움 방식과 도구의 결합은 다양한 무기술(武器術)의 발전을 가져왔고, 맨손 무술과 무기술이 조직화되면서 병법인 집단적인 싸움 전략이 고안된 것이다.
그림 2. 고대(古代) 무무(武舞) 연습
원시시대의 종교적 행사인 제천의식(祭天儀式), 교육과 오락 활동이 형성되고 발전되면서 원시 무술 활동의 계통적인 변화와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민족(中國民族)의 무술이 인류의 원시 문화와 혼돈된 모체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원시사회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동과 농경 발달에 다른 생산물의 상호 쟁탈로 인한 전사적 수련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전 부족은 항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강건한 체력(體力)과 정신력(精神力)의 유지가 필요했다. 이와 함께 “무(武)의 단련은 부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당시의 신체활동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무적(武的)’ 능력은 인간의 전쟁 수단으로 발전하였다”(장재이, 이재학, 2005: 95).
이와 같이 무술은 어떠한 이론적 원리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키고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격투 기술의 일환으로써 몸을 통해 체험된 실제적 경험이 중요시되면서 발달해왔다. 이를 무술 수련의 기초로 볼 수 있다. 즉 초기의 무술은 근본적으로 격투술(格鬪術)이며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생존을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중국무술의 기원은 고대 인류의 생산 활동, 전쟁, 종교, 오락, 교육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술이 하나의 의도적인 문화 구조를 일관되게 진행시키면서 오늘 날에 이른 것이 아니라, 시대가 흘러 갈수록 각기의 독창적 심신 문화로 구체화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과정의 무술 속에 어떤 정신성이 함축되어 있거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의도적 맥락들이 들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들 속에 포함되어져 있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서서히 무술의 정신성이 내재되어 왔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류병관, 2006: 45).
스포츠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술은 인간 자신들 문제, 즉 생산 활동, 오락, 교육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철학과 종교, 자연, 의학적 의미와 깊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康戈武, 1990, 林佰源, 1994, 程大力, 1995, 江百龍 外, 1995, 양진방, 2002, 이정학, 2008).
이상에서 살펴보면, 하․은․서주(夏․殷․西周) 시대의 각저희(角抵戱), 간척무(干戚舞) 등은 중국무술의 최초 형태로 강건한 체력과 정신력, 건강 증진과 질병치료, 장수(長壽), 투지(鬪志) 배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2. 春秋․全國․秦․漢 시대
중국(中國) 역사에서 전쟁에서 개인의 전투 능력이 크게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770∼476. BC) 까지 전투는 귀족층의 특권이었다. 귀족들은 대개 육례(六藝)라 불렸던 여섯 가지 기예를 배웠다. 품행(禮), 음악(樂), 궁술(射), 마차몰기(御), 서예(書), 산술(數)이 그것이다. 이 시기에 서로 교전했던 국가들 간에 계급 서열은 전투를 통해서 결정되었으며, 보병 대신 마차부대가 이용되어 졌고, 패전국은 승전국에 곡물을 보냈다(송형석, 2001, 김창룡, 이병익, 허건식, 2002, 허건식, 2003).
춘추시대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백성들의 피해와 희생을 수반하는 시대로,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진(晉) 나라와 격전에서 승자(勝者)가 된 초(楚) 나라 장황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무(武)의 절제를 통해 덕(德)을 보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심성구, 2001: 237, 허진웅, 2003: 503, 장재이, 이재학, 2005: 97).
“대저 武란 戈를 止(멈추게) 하는 것이 武가 아니냐...(중략)....武라는 것은 포악함을 막고 군자를 모아 大儀를 유지하고, 功을 정하며, 백성을 걱정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夫武, 止戈爲武……夫武禁暴, 戢兵‧保大‧定功‧安民‧和衆‧豊財者也, 觀兵以威諸侯, 兵不戢矣).
전국시대(全國時代, 475∼221. BC)에 들어가면서 전쟁은 매우 살벌한 성격을 띠게 된다. 전쟁터에서 마차 군단이 보병에 의해 대치되었고, 패한 적군은 그 자리에서 살육되었으며, 전쟁은 생사가 달린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보병의 수가 증가하면서 전쟁에서 귀족들에게만 부여되었던 자리가 평민들에 의해 잠식당했다(송형석, 2001, 허건식, 2003).
무술(武術)의 형태는 몇몇 사서(史書)의 기록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데 『시경(詩經)』을 들 수 있다. 『詩經』은 기원 전 479년 기술(記述) 것으로, 문왕(文王) 시대에는 검술(劍術)에 해당하는 격자(擊刺)의 법이 있었다고 한다. 전장에서 기격술(技擊術) 사용을 중시하였는데, 사병 선발을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각시(角試)’를 실시하였으며, ‘격검(擊劍)’이 성행하였다.
荀子(1977: 122∼123)의 “제나라 사람들은 기격(技擊)이라고 하여, 날래고 굳센 힘으로 단번에 적을 쳐서 베어 버리는 무술을 퍽 존중합니다”〈齊人隆技擊〉는 내용에서 기격(技擊)은 손이나 발로 치거나 차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또한 검론(劍論)에 대한 이론들이 「여씨춘추(呂氏春秋)」와 장자(庄自)의 「설검(設劍)」에 기재되어 있다.
전국시대(全國時代)의 한 국가였던 위(魏) 나라에서는 “매우 혹독한 자격에 따라 보병을 선발했다”고 순자(荀子)는 말하고 있다(荀子, 1977: 122-123, 송형석, 2001: 51, 김창룡, 이병익, 허건식, 2002: 60, 허건식, 2003: 207).
“魏 나라는 무졸(武卒)이라고 하여, 일정한 시험에 무용(武勇)이 있는 병졸(兵卒)을 뽑습니다. 그 시험을 보면 몸의 윗부분에 한 장, 허리 부분에 한 장, 정강이에 한 장, 이렇게 세 가지 갑옷을 입고, 십이 석짜리 무겁고 강한 쇠뇌(弩)를 잡은 위에, 화살 쉰 자루가 든 살통(箭筒)을 등에 지고 그 위에다 창을 꽂고 여기에 또 투구를 쓰고 긴 칼을 옆에 차고, 그리고 사흘 먹을 양식을 꾸려 짊어지고는, 한낮까지 백리 길을 냅다 달리는 것입니다.”(魏氏之武卒 以度取之 衣三屬之甲 操十二石之弩 貧服矢五十個 置戈其上 冠冑帶劍 嬴三日之糧 日中而趨百里)
이와 같이 전쟁에서 개인기를 중시하면서 무술만을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무협(武俠) 진산(陣山, 1977)은 선진시대부터 중국을 꿰뚫고 있는 두 개의 흐름을 ‘유(儒, 上流層의 文人)’ 와 ‘협(俠, 下流層의 武人)’으로 대별하고 있다. 여기서 ‘협(俠)’ 또는 ‘무협(武俠)’은 전문가 집단으로 그 구체적인 형성 시기가 대략 춘추전국 시대쯤이라 한다.
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의 전투 기술은 주로 칼과 창, 활 등이었지만 권법도 중요한 수단이었다.
기원 전 90년경 집필한 사기(史記)에 보면 무술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자격열전(刺客烈傳)』에서 형가(刑軻)가 진시황 암살 기도에 실패하자 그의 친구가 격자술(擊刺術)을 가르치지 못한 것을 원통해 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 검술이 이미 특별한 기술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기(史記) 의 『이사열전(二斯列傳)』 중에 ‘진이세(秦二世)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각저(角抵) 배우의 놀이(戱)를 보고(觀)...’〈李世在甘泉, 作殺抵俳戱之觀〉 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로써 기원 전 209년경에 ‘각저(角抵)’라는 무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대 많은 황제들이 각저의 유희를 보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는 점으로 봐 각저(角抵)의 무술 기법을 군사훈련과 유희에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권법을 ‘수박(手搏)’, ‘백타(白打)’, ‘권(拳)’, ‘권용(拳勇)‘, ’파장(把張) 등의 이름으로 ‘각저(角抵)’와 구분하였는데, 여러 사서(史書)에 각저와 무술이 혼동하여 표현되고 있다. 당시의 무술(武術)의 형태가 화려한 기교나 섬세하고 미묘한 권법의 이치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존하는 사서(史書)들에서 종합해 보면 씨름이나 레슬링 같은 시합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림 3. 동한(東漢) 각저(角抵) 동패도(桐牌圖)
한대(漢代) 진수(陳壽)의 『삼국지․촉지(三國志․蜀志)』 「유봉전(劉封傳)」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최복규, 2008: 18-190).
“劉封은 武藝(말타기·활쏘기·刀·劍·槍·棒 등과 같은 치고 찌르고 베는 무기를 다루는 기술)를 할 줄 알며 氣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劉封有武藝, 氣力過人).
중국무술을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문헌은 후한(後漢, 25∼220. AD) 사가(史家) 반고(班固. 기원전 32∼92)의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 「수박육편(手搏六編)」이 가장 오래된 무예서이다(松田陸智, 1979, 송형석, 2001, 김재일, 2003, 최복규, 2008).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중에 병기교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서에 기술된 병기교는 무술을 칭하는 말로서 수박(手搏)과 도(刀), 활 쏘는 기술이 주로 언급되어 있는데「수박육편(手搏6篇)」,「검도38편(劍道35篇)」등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수박(手搏)이란 무술을 칭하는 말이고, 검도(劍道)란 칼 쓰는 방법을 총칭한 말이다.
불교가 한대(漢代)에 전해왔고, 당시에는 사찰도 많고 승려도 많았다. 그리고 승려들이 무술을 익히는 것도 많이 확대되었다. 그 중 무술 수준이 높은 승려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적고승전(積高僧傳)’에 명공화상(明恭和尙)의 비력이 다른 이와 달라서 큰 돌을 능히 들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원에는 반조정(反朝廷) 운동을 하는 승려도 있었다. 『위서․석노지(魏書․釋老志)』에서는 장안의 한 절에서 많은 무기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반란의 무리와 관련이 있었다는 의심을 갖게 하였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구, 2008).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승려들의 무술(武術) 수련은 “소림사에서 무술을 익히는 승려가 있기 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박기동, 김용수, 2010: 51).
진․한(秦․漢) 時代(BC 221~AD 220)에는 ‘도무(刀舞)’, 월무(鉞舞)‘, ’검무(劍舞)‘, ’쌍극무(雙戟舞)’ 등 투로(套路) 운동과 비슷한 무련(舞鍊: dancing sports) 종목들이 계속하여 출현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근래의 산타, 레슬링, 검술과 유사한 수박(手搏), 각저(角抵), 격검(擊劍) 등 격투 형식의 무술 활동으로 나타났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역사서인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와 『한서․무제본기(漢書․武帝本記)』에 기록되어 있다.
3. 三國時代․魏晋․南北朝 時代
삼국시대․위진․남북조(三國時代․魏晋․南北朝 時代; BC 220~AD 589)에는 혼란스러웠던 역사의 시기이고, 오랜 시간을 전쟁을 하여 군사무술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또한 오호의 침략 등과 같은 타민족과의 교류 역시 중국무술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불교(佛敎)와 도교(道敎)가 무술과 결합한 시대로 ‘무술(武術)’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오호의 침략 등과 같은 타민족과의 교류 역시 중국무술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진(魏晋)․남북조(南北朝) 시대는 격투무술이 발전하였으며, 군사제도는 한(漢)과 위(魏)의 군사 제도를 이어 받았는데 그것은 ‘세병제(世兵制)’이다. 이것은 군적(軍籍)에 속한 ‘사병지가(士兵之家)’에서 세습되는 직업 군인을 배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업 세습은 무술이 가문에서 전승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무술이 좀더 발전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서위(西魏) 대통(大統) 십육년(十六年)에 ‘세병제(世兵制)’와 ’부병제(府兵制)‘가 개정되었다 전국에 이십 사개 부를 열고, 부병제 아래에 사병을 두었는데 사병은 원래 농민이었다. 따라서 무예를 익히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지게 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2008).
. 부병(俯兵)은 병농합일(兵農合一)의 군대였다. 서위 우문태(宇文泰)가 십이군 선비금려(十二軍鮮卑禁旅)를 6군으로 바꾸고, 육주국(六柱國)이 6군을 나누어 인솔하였다. 이전의 부병은 일반적으로 군영에 따라 군호에 속하였다. 이후, 군인은 민호로 편제되어 주현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정부는 수시로 민호를 징발하여 종군시켰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12).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에는 각 지역의 세가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세력을 갖고 있는 호강지주(豪强地主)가 있었는데, ‘두벽(䲧壁)’이라는 자기들을 보호할 무장과 거점을 만들었다. 이러한 자치 단체적인 향촌 방어체는 호강지주에 속한 농민들을 ‘부곡(部曲)’이라 불렀으며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작전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두벽과 부곡과 같은 제도는 무술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한대(漢代)에서 이용하기 시작한 도(刀)는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남북조에 이르러 더욱더 정밀하게 제작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보도(寶刀) 기술로 발전하였다. 장모(長矛)는 당시 군사들이 상용하던 장병기(長兵器)였는데, 『진서․유요전(晋書․劉曜傳)』 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12).
“勇士의 陳安은 왼손엔 七尺 大刀를 오른 손에는 장팔사모(丈八蛇矛)를 능히 잡고 사용하였다”(左手膚七尺大刀, 左手執丈八蛇矛).
한대(漢代)의 대사(大射), 연사(燕射), 계사(系射) 등의 사예(射藝)가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계승된 것으로 보아 당시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많았고, 활쏘기가 중요한 무술(武術)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남조(南朝) 양무제(梁武帝)의 장자(長子)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지은 문선(文選)에 ‘무술을 폐하고 문(文)과 법령을 널리 들어내다’〈偃閉武術 闡揚文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무술은 문과 법령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군사 기술을 통칭하는 용어로 중국 문헌상 무술이라는 용어(用語)가 처음 보인다(張耀庭 外, 2006).
순자(荀子)의 의병편(議兵篇)을 보면(최대림, 2009: 230-231),
“제(齊)나라의 기격(技擊) 기격(技擊)은 "병가사류(兵家四類: 권모·형세·음양·기교) 가운데에서 기교(技巧)에 속하는 것으로서 훈련된 군사의 박투·격자(搏鬪·擊刺)의 기술이다"(朴淸正, 2007: 605).
은 위(魏)나라의 군졸을 당할 수 없고 위(魏)나라의 군졸은 진(秦)나라의 정예 군사를 당할 수 없으며, 진(秦)나라의 정예 군사는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나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절도와 제도가 있는 군대를 당할 수 없고 환공(桓公)이나 문공(文公)의 절도와 제도(制度)가 있는 군대도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의 인의(仁義)의 군대는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를 대적하는 자가 있다면 타버린 재로 바위로 치는 것과 같다”(故齊之技擊不可以 遇魏氏之武卒 魏氏之武卒不可以遇秦地銳士 秦之說士不可以當桓文之節制 桓文之節制不可以敵湯武之仁義 有遇之者 苦以 若以焦熬投石焉).
는 내용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중국무술(中國武術)은 고대 종교 특히 불교(佛敎)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발전 과정에서 상호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동한(東漢)이래 불교가 전해진 후 북위 태연(太延) 4년(438)에는 장안(長安)의 어느 사원(寺院)에서 대량의 무기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國家體委武術硏究員編, 1997: 206). 이는 당시 도적들이 빈번하게 사원을 강탈하는 상황에서 승려들이 절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불교 사원에서 건신(健身)을 위한 무술 수련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이성곤, 2007: 121).
소림사(少林寺)는 인도 고승 발타가 창건하였는데, 즉 사적에서는 발타가 무술을 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의 제자인 승조(僧稠), 혜광(慧光), 각회(却會) 등이 무술을 하였다는 『고승전(高僧傳)』의 문헌에 보인다. 진대 저명한 도인(導引)인 한의사 갈홍(葛洪) 역시 무예(武藝)에 정통하였다. 그가 저술한 『포박자(抱朴子)』 자서(自序)를 보면, 그는 젊은 시절 활쏘기를 배웠고, 군인으로 있을 적에 ‘증수사추기(曾手射追騎), 응현이도(應弦二倒,) 살이적일마(殺二賊一馬)’라는 글 표현에서 그의 활쏘기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그는 ‘도(刀), 곤(棍), 극(戟) 등의 여러 무술에 정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남조(南朝)의 저명한 도인(導引:道人)인 한의사 도홍경(陶弘京) 역시 ‘문무양도(文武兩道)’가 겸비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가승(家乘) 무술(武術)를 익혀 기사(騎射)와 병법에도 능하였다고 한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이처럼 이 시대에는 불교와 도교가 중국무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에는 부병제를 실시하여 병사를 선발하는 기준을 무술의 기량을 중요시하여 아주 높은 기량을 요구하였다. 권술의 금나술과 산수를 능숙하게 하며 병기술인 장·단병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하며 체력에서는 나는 듯이 달릴 수 있어야 하며 무거운 물건을 지고 장거리를 행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무술의 기교와 속도, 힘 등의 여러 방면에서 엄격하게 요구하였으며 사병들의 전문적으로 연습을 할 수 있는 장소도 마련하였다.
병사들은 평상시에는 전문적으로 무술 연습을 할 수 있는 장소도 마련하였다. 병사들은 “평상시에는 가업 및 농업에 종사하며 전시에 주인을 위해 싸우며 진(晉)나라 시대에는 효과 높은 훈련을 위해 외우기 쉽도록 요점만을 정리한 구결을 요구하였다”(中國武術百科全書編撰 委員會, 1998: 51).
이상에서 살펴보면,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는 격투무술이 발전하였으며, 오랜 시간의 전쟁으로 군사무술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특히, 이 시대에는 불교와 도교가 중국무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중요한 시기였다.
그림 4. 환검 화상전(丸劍 畵像傳)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의 후기에 들어서는 유교, 도교, 불교 등이 성행하여 관료귀족들은 사치한 생활과 종교를 신봉하여 장생불로를 추구함으로써 무술에 대한 관심이나 진전은 자연적으로 소극적이어서 발전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에는 검의 사용은 본래 자기 자신의 호신과 방어를 위해 지니고 다니는 제도가 있었으나 “진나라 시대에는 검을 일종의 장식용으로 사용하며 목검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國家體位武術究員, 1997: 106).
4. 隨․唐․宋․元 時代
당대(唐代; 618〜907년)에는 무술 과거제도인 ‘무거제(武擧制)’를 통하여 벼슬이 열리니 무술 연마를 숭상하는 풍조가 형성되었다. 무거(武擧)가 설립되어 항시 지원이 가능해지고 스스로 천거하는 방식이 되면서 천하의 영웅들에게 더 많은 벼슬의 기회가 주어졌다. 무술로서 벼슬이 가능해져 많은 사람이 이를 연마하게 되니 사회상 무풍(武風) 작용이 일었으며, 무사(武士)의 권위도 상승되었다. 대중의 체력 조건이 제고됨과 동시에 습무(習武)를 통한 신체활동의 열망이 이론과 실천에 적용되어 중국 민족의 체육 역사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과고시의 기준은 활쏘기와 창술의 무술 능력(武術 能力; 활쏘기와 창술)과 무게 겨루기의 체력(體力; 무게 겨루기) 그리고 용모와 언어인 신재(身才; 용모와 언어)로 하여 후대의 무술 취사 방법에도 기초를 제공하는 규범이 되었으며, 우수한 군사 인재를 발굴하는 데 편의를 제공하였다. 유명한 무거출신 곽자의에 활약은 무사(武士)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했으며(國家体委武術硏究院, 1997), 광범위하게 무술을 배우면서 심신을 건강하게 할 수 있어 중국의 전통 무술로서의 무술에 대한 확장과 발전을 효과적으로 촉진시켰다. 이와 같이 무술은 전쟁 전투 기능으로 정형화되고 무도(舞蹈)는 무대 예술로 발전해 왔는데, 검술이 매우 발달하여 당대(唐代)의 ‘검기무(劍技舞)’는 검술(劍術)과 무도(舞蹈)가 결합된 것(調露子, 1990)으로 검술가의 이야기 거리나 특별한 화제를 모아서 집필한 『검협전(劍俠傳)』이 등장하였다.
당대(唐代)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 은 ‘15세에 검술에 능하여 제후들과 견줄 수 있으며’, 높은 관모에 멋진 검을 차고‘, 긴 검과 한 잔의 술, 남아의 마음’ 등의 시구에서 보듯이 소년기부터 검술(劍術)을 익혔으며, 의협심(義俠心)이 대단히 강하여 가끔 칼을 들고 싸움에 나갔다고 하였다. 시인 두보(杜甫)는 당시 유행했던 검기무(劍器舞)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한 번 칼춤을 추면 사방이 흔들리고 ... 하늘과 땅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네...’ 등으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는 당시 검기무(劍器舞)로 유명한 공손대랑(公孫大嫏)의 제자인 이십이랑(李十二嫏)의 검기무(劍器舞)를 보고 지은 것이라 한다. 또 ‘책을 보느라 초가 짧아지고, 검을 보면서 술잔을 기울인다’라는 작품을 통해 무(武)를 가까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5. 당대(唐代) 사자무(獅子舞)
송(宋, 960〜1279년) 나라 이전에 무술 기구라는 것은 실제로 병기와는 큰 차이가 없었는데, 송대(宋代)의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의 형성은 실제적인 무술 기구의 출현을 나타낸 것이다.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는 시대마다, 사람마다 같지 않으며(박기동, 1994), 특히 병가(兵家)가 아닌 민간 무술계의 문파나 지역에 따라 곤, 봉, 당, 구, 삭, 괴, 련, 권, 비수, 유성, 팔관필 등 수많은 무술 기구가 있었다. 중국의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의 병기(兵器)는 칼(長刀, 短刀, 劍), 창(槍. 矛. 戟, 叉, 頭杷), 봉(鞭, 殳, 撾, 蕑), 방패(盾), 도끼(斧, 鉞), 활(弓箭), 끈달린 쇠뭉치(棉縄套索), 권술(白打) 등이며(張耀庭 外, 2006), 우리나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십팔기(十八技)는 중국과 달리 도끼, 활, 쇠뭉치 사용법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창과 칼을 세분한 반면, 중국은 창과 봉을 세분화하면서 검과 도(刀)로만 크게 세분하여 놓았다(양종언, 1993, 박기동, 1994, 박기동, 1996, 나영일, 1997b, 김현일, 2005, 박금수, 2007, 최복규, 2007).
송대(宋代)의 권법 발달은 『수호지(水湖志)』에 나타난 격투 그림이나 송대(宋代)의 상박도 벽화를 묘사한 그림으로 미루어 초기의 각력, 각저, 수박이 원 모습에서 상당히 변모되고 발전된 모습으로 후대에 이르고 있는 점은 고대의 수박(手搏)과 관련이 있으며, 후대의 각종 무술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여러 가지 중국 격투술이 구체적인 전승 경로를 파악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고대의 각력(角力), 각저(角抵)란 이름의 맨손 격투술이 발전한 것으로 보아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松田隆智, 1989, 권오석 譯) 기본적 병법 형태는 장병술, 기병술 형태여서 활 같은 장병 무술 훈련이 주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요성에 의해 “보병의 필수 무술로 근접 격투무술은 활용되고 보편화되면서 중앙 및 민간에서 무술 결사 단체가 조직되며 무술을 체계적으로 수련하여 군사적 대비활동을 취하고 있었다”(남덕현, 이천희, 이지훈, 2007: 101).
북송․남송(北宋․南宋)의 시대에는 민족간, 그리고 계급간의 많은 모순으로 전쟁이 많았던 시절이어서 무비(武備)는 중요한 내용이다. 송(宋) 나라 때부터는 ‘모병제(募兵制)’를 실시하였다. 그래서 송(宋) 나라 인종 때 무거(武擧)가 다시 설치되었고, 성진사(成進士)가 되어 등과(登科)하기 위해서 격투무술이 더욱 발전하였다(신수용, 2007). 특히 무예 교육분야에서는 ‘교두(敎頭)라고 불리는 전문 교관에 의해 군사 훈련을 위한 통일적인 교수법을 채택하여 심사 기준을 마련하였다(『東京夢華錄』卷 第七). 왕안석(王安石)의 장병법(將兵法)은 그것을 일종의 제도로 확립한 것으로써 중앙에서 무술의 고수를 각 군중으로 파견하여 교두를 맡게 한 것이다. 또한 원풍(元豊) 2년 신종(神宗)은 매 현(縣)마다 하나의 ’교장(敎場)‘을 세워 장기간의 훈련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군사훈련의 규범화, 계통화는 군사무술의 향상을 촉진하였다”(남덕현, 이천희, 이지훈, 2007: 100-101).
군사 훈련이 통일되어 ‘교법격(敎法格)’이라는 시험 표준을 제시하여 무술 발전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이러한 중앙적 발전과 함께 민간적 발전도 남달랐는데, 민간 결사 단체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또한 상업이 번영하자 이것은 성시문화(城市文化)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이 성시문화는 건강, 오락의 목적을 가진 ‘무술결사조직(武術結社組織)’을 탄생시켰고, 군중들이 오락을 볼 수 있는 일종의 극장인 무술 경기장에서 민간 선수들이 경기했던 ‘와사(瓦舍)’나 ‘구란(勾欄)’ 등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夢심 錄』19 瓦舍). 이런 와사나 구란에서 보이는 기예는 상당히 많았고, 그 규모가 대단히 컸다고 한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이와 같은 와사나 구란의 출현으로 상업적으로 무술을 배우거나 팔 수 있었기에 무술의 전문화 및 직업화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당시 농민들은 그 지역에 대한 유대감이 매우 컸는데, 즉 민간 결사조직은 이러한 유대감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특히 ‘사(社)’, ‘보(堡)’, 산채(山寨)’ 등과 같은 형식의 무예 결사 조직들의 목적은 ‘자상규율(自相糾率), 보수향정(保守鄕井), 각거산채(各据山寨), 둔치자보(屯聚自保)’라고 하는 외족의 침입을 방어하고 봉건적 압박과 착취에 항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당․송․원(唐․宋․元) 시대에는 민간 무술 조직들이 많이 생겨났던 시기였다. 거리에서 공연하는 로기인(路岐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리에서 사권(使拳), 척퇴(尺腿), 사봉(使棒), 농봉(弄棒), 무도(舞刀), 창(槍) 무검(舞劍), 창대패(槍對牌), 검대패(劍對牌) 등의 개인 종목과 대련 종목을 표현하였다.
맨손격투 상복(相扑)이 인기가 있었고, 연무대(演武臺)에 등장하여 경기를 진행시키는 형식을 취했는데 이를 도전 시합 ‘뢰대새(牢臺賽: 打牢賽)’라 하였다. 당시의 시합에는 심판과 간단한 규정이 있었고 우승자는 푸짐한 상품을 받았다. 특히 상업이 발달하면서 건신(健身)과 오락적 목적의 무술 단체도 생겨났다. 남송(南宋)의 도성감안부(都城監安府)에는 성원이 100명 안팎 정도인 쟁교(爭交)의 ‘각저사(角抵社)’, ‘상박사(相撲社)가 궁노(弓弩)의 ‘금표사(錦標社)’, ‘사궁도노사(射弓蹈弩社)’ 등이 있었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무술로서 벼슬이 가능해져 많은 사람이 이를 연마하게 되니, 사회상 무풍(武風) 작용이 일었으며, 더불어 무사(武士)의 권위도 높아졌다. 대중의 체력조건이 제고됨과 동시에 습무(習武)를 통한 신체활동의 열망이 이론과 실천에 적용되어 중국민족의 무술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무술(中國武術)은 각 시대별로 국가적 필요에 따라 전투 무술 형태로 때로는 궁중 유희의 형태로 지속되다가 당․송․원(唐․宋․元) 시대에 이르러 민간 무술로 정착하게 되었다.
무술은 원초적으로 규칙을 지키며 싸우는 경쟁 기술인 경기(競技)의 본질 속에서 신비한 무술의 가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생각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잠재 능력을 인식시켜 자신감과 용기를 주고 개체 생명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는 긍정적 기능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중국무술도 민간 문화와 함께 유형을 달리하면서 변천되어 왔다.
5. 明 時代
중국 무술의 기본 틀의 형성으로부터 오랜 역사를 거쳐 송․원․명(宋․元․明) 나라 시대에 걸쳐 완벽한 문화 체제로 형성되었다. (林佰源, 1994, 장재이. 2000, 허건식, 2002).
무술(武術)에 관련된 일련의 기법은 송나라 이후 도시 경제의 번영, 시민 계층의 형성에 따라 사회의 문화 오락에 대한 수요가 많아져 민간의 대도예인이 증가해 무술(武術)을 이용해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많은 무예인은 항상 뛰어난 무술의 연출에 의하여 관중을 끌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술에 관련된 기법이 다량으로 나오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동시에 그 때의 무술가도 기법을 중요시하기 시작해 일련의 기법 훈련 속에서 충분한 평가와 총괄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무술 기법의 형성과 풍부함을 폭넓게 전달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조건을 정비했다고 볼 수 있다.
명조(明朝)에 나타나는 拳術 및 器械術에는 32식 6보권, 원숭이권, 巴子拳, 와권, 소림권(少林拳), 내가권(內家券) 등의 拳術과 兪大猷棍, 靑田棍, 少林棍, 張家棍 등의 棍術, 楊家槍, 馬家槍, 李家短槍, 沙家杆子(봉), 六合槍, 峨嵋槍, 少林槍 등의 槍術, 單刀, 雙刀, 偃月刀 등의 도술과 24검세 등이다.
중국무술은 명․청(明․淸; 1368~1840)시대에 많은 파벌을 형성했으며, 그 종류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대개 명대 중엽부터 시작하여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시대로 이어지는데, 유대유(兪大猷 1504-1580), 당순지(唐順之 1507-1560), 척계광(戚繼光 1528-1587), 정종유(程宗猷 1561-?), 오수(吳殳 1611-1695) 등 무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진 전문 무술가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단순하고, 평범한 기술들을 다양하고 깊이 있게 발전시켜 나갔다.(林佰源, 1994, 松田陸智, 1978, 習云太, 1997, 양진방, 2002).
유대유(兪大猷)는 곤법(棍法)으로 유명한데, 저서 검경(劍經)에 보면 곤법(棍法)을 익히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내용은 노래 형식인 가결(歌訣)을 제시하고 있다. 가결(歌訣)은 각 무술에서 익혀야 할 요점을 암기하기 쉽게 운율이 있는 시구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하여 실제적인 기술을 익혔다.
당순지(唐順之)의 『무편(武編)』을 보면 전권(前卷)에 창술, 권굴, 검술 등 각종 무술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17편이 있다. 특히 권법에 대한 서술은 그 당시 중국에서 행하던 문파에서 그치지 않고 기법의 특징, 그리고 내용까지도 상세히 설명하였다. 무편을 살펴보면, 온가장타(溫家長打), 칠이행착(七二行着), 이십사수퇴(二十四手腿), 삼십육합퇴(三十六合鎖) 등 기록이 있어 장권과 현재의 금나술의 명칭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온가파의 특징을 장타라 표현하여 그 기술의 내용도 짐작할 수 있는데, 송(宋) 나라 태조(太祖)의 장권(長拳)은 허벅지를 많이 쓰며 기술에 변화가 많고, 산서 지방의 유단타(短打)는 머리로 받고, 팔꿈치로 치는 등 6개의 형이 있다고 되어 있다. 태조 장권은 주로 산동성 지방에서 유행하는 권법인데, 강남 지방 사람들도 이것을 많이 습득하고 있었다.
중국무술을 구체적으로 도식한 기법 설명으로 나타낸 기록으로는,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나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誌)』가 있다. 『기효신서(紀效新書)』는 왜구의 진압에 활약한 척계광(戚繼光)이 전투 경험에서 터득한 전법이나 중국 각지의 각종 무술을 조사하여 병학(兵學), 무술 등 18편에 달하는 실용 병서(兵書)를 편찬한 것이다. 척계광(戚繼光)이 편찬한 이『기효신서(紀效新書)』는 중국의 각지에 산재한 무술의 종류나 그들의 공통점 또는 합리성이나 차이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림 6. 척계광(戚繼光)의 저서(著書)
권법의 문파를 살펴보면, 송 태조 32세 장권(宋太祖三十二勢長拳), 육보권(六步拳), 후권(猴拳), 화권(華拳) 등이 나오며, 온가 72행권, 36합쇄, 팔섬번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많은 무술에 대해 논하고 있다.『기효신서(紀效新書)』는 중국의 병법서의 고전인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와 나란히 명저로 불리고 있다.『무비지(武備誌)』는 모원의(茅元儀)가 병학, 무술의 연구 자료를 포함한 수많은 병서를 독파하고,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편집한 것이다. 이것은 전 5부 184항목 240권이라고 하는 대저(大著)가 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병법에 관한 백과사전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단, 『무비지(武備誌)』도 병법에 대해서는 『기효신서(紀效新書)』에 개재되어 있는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명대(明代)에는 권법과 무기, 그리고 서로 다른 풍격을 갖춘 문파가 나타난 시기였다. 즉, 각 문파는 모두 독특한 방법의 권법과 병기를 훈련하는 방법을 가지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명조에 나타나는 권술 및 기계술에는 32식 6보권, 원숭이권, 파자권, 와권, 소림권(少林拳), 내가권(內家拳) 등의 권술과 유대유곤, 청전곤, 소림곤, 장가곤 등의 곤술, 양가창, 마가창, 이가단창, 사가간자(봉), 육합창, 아미창, 소림창 등의 창술, 단도, 쌍도, 언월도 등의 도술과 24검세 등이다.
정종유(程宗猷)가 쓴 『장창법선(長槍法選)』은 소림창법을 정리한 것으로 18개의 세(勢)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나 정약증(鄭若曾)이 쓴 『강남경략(江南經略)』에 나오는 문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군사적 관점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권법 11가, 곤법 31가, 창법 16가, 도법 15가, 검법 6가, 기타 무기 10가, 마상무기 16 등은 무술의 기초로 인식하였다(程大力, 1995).
그림 7. 기효신서(紀效新書) 창법도(槍法圖)
명대(明代)의 군대에서의 무술 훈련은 항상 실용적인 것으로 기준을 삼았다. 훈련 중에는 ‘손발을 익히고, 병기를 다루는 것이 실제적인 범위로 제한되고 화려하거나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반대하였는데, 무술이 ‘적을 대하여 이기는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만들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장식적인 무술(武術)은 ‘몸을 방어하고 적을 죽이며, 공을 세우고 나라를 보위(保衛)하고자’하는 종지(宗旨)와는 맞지 않았으므로, 명대 군대의 훈련 중에는 ‘화려한 자세’는 배제(排除)되었다.
하량신(何良臣)은 그의 저서 『진기(陣紀)』에서 언급하기를 ‘군인들의 담을 잘 훈련시키는 사람이 반드시 격투무예를 훈련시켜야 한다. 무예는 담을 키우는 데 가장 도움이 된다’고 하였고, 척계광(戚繼光)은 그의 저서인 『연병실기잡록(縯兵實紀雜錄)』에서 담이 큰 사람이 무예가 더욱 높다’라고 언급하였는데, 이와 같은 내용은 무술과 담력 사이에는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다년간의 무술 수련과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한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6. 淸 時代
청(淸) 나라(1644〜1911년)가 세워지고 중국 전역을 정복하려는 만주국의 기세에 대항하는 각 지역의 항쟁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단체는 청대(淸代)에 많이 분포․해 있던 민간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각종 민간 무술이 발달하였다. 민간 종교와 결사한 이들 단체들은 많은 무술의 달인들이 가입하게 되고, 각 교주간의 교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특성 때문에 무술과 기공(氣功)을 함께 수련하는 방법이 시작되었다. 특히 1645년 청대 초기 산서성(山西省) 일대에서 만들어진 선우회(善友會)는 무예 단체 조직을 함께 결성했는데, 회원의 많은 사람들은 창, 칼, 활에 능통한 농민들로 구성되었다(李世瑜, 1984). 이러한 민간단체는 각 지역에 형성되었다. 따라서 무술이 더욱더 발달하면서 무술의 각파가 생겨나고 발전하게 되었다. 각 유파의 발달에 대해 林伯源(1994)은 한 씨족 혹은 지역, 사원(寺院)을 중심으로 한 유파, 비밀 종교․민간 결사 조직으로 발전한 무술, 무술인들에 의해 각 지역에서 발전한 무술 등으로 구분하여 당시 유파 발전을 설명하였다. 이 당시 무술 사상에 있어서는 ‘건신강국(建身强國)’의 사상, ‘강신어매(康身御每)’ 사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1840년 아편전쟁(阿片戰爭)이 일어나기 전 중국의 무술은 ‘군대무술(軍隊武術)’로 정의할 수 있다. 『청사고(淸史稿, 1986. 권 139)』에서 살펴보면, 무술이 어떤 역할을 했었는가에 대해서는 무과 시험(武擧制度)으로 군인을 선발했던 근거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각 군대의 훈련 시간을 정해 실시했던 일(1654), 전통적인 기법인 기사(騎射), 기창(騎槍)의 숙달을 위한 훈련 지시(1727), 팔기병(八旗兵)에게 무예를 숙달시키게 한 것(1731), 각 병영의 연합 훈련(1739), 기사(騎射)와 기창(騎槍) 훈련은 봄과 가을에 한다는 것(1825) 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장재이, 2000, 김창룡, 이병익, 허건식, 2002, 허건식, 2003).
청대(淸代)에는 권술과 기계술이 널리 퍼지고 발전하여 점차 많은 유파를 형성하였다(장재이, 2000, 허건식, 2002, 김재일, 2003). 이러한 문파의 발생은 명말(明末) 청초(淸初)라는 특수한 사회 상황과 청초 후기의 비밀 결사의 성립과도 연관되어 있다. 계투(械鬪)는 종족간, 집단간의 무력 상쟁을 나타내는 말인데, 범죄나 비적 및 지방 봉기와는 구분되는 대중적이고 어느 정도 계획된 무력 투쟁으로, 중국사학자 필립 쿤(Philip A. Kuhn)은 이를 ‘사회의 군대화’라고 표현했다(한병철, 한병기, 2008).
무술(武術) 교육에 있어서는 유학(儒學)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시험이 있었으나 유학을 기본으로 하되 무과의 경우 무술적 능력이 함께 포함되었다 특히 청나라 초기에는 귀족 자제들에게 문무(文武)를 겸비하기 위해 활쏘기를 중시했다(林伯源, 1994, 장재이, 2000).
청대(淸代)에는 권법(拳法)이 대단히 빠르게 발전했는데, 기존의 권법을 연구하여 고도의 기술로 발전시켜 수행하였다. 또한 타 문파의 기술을 습득하여 자신이 수련하고 있는 권법에 그 특징을 가미하여 새로운 문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두 세개의 문파의 고수가 서로 새로운 형태의 권법을 만들어 전수하기도 했다. 하남성(河南省) 진가구(陳家溝)의 진씨들 사이에서 발생한 태극권(太極拳)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태극권의 특징은 원과 전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또 하북성 창현의 팔극권(八極拳)은 걍력한 발경법(發勁法)을 사용하였으며, 수법(手法), 신법(身法), 보법(步法)을 원 위에서 행하는 팔괘장(八卦掌)은 권법의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 형의권(形意拳)이나 북방의 열여덟 문파의 기술을 참고하고 편집, 정리하여 집대성한 당랑권(螳螂拳)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권법을 문파의 종류와 상관없이 그 사용하는 기술의 특징으로 살펴보면 장권(長拳)과 단타(短打)로 나눌 수 있다. 장권은 그 연무 동작이 크고 활발하여 원거리 공격법이고, 단타는 접근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손발의 공격이 많이 등장하며, 팔꿈치, 무릎 등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머리로 치받기도 한다.
그림 7. 진씨(陳氏) 태극권(太極拳) 도해(圖解)
청대(淸代)에 무술이 고도로 발달하게 된 데에는 진가구(陳家溝)의 태극권(太極拳)의 영향이 많은 듯하다. 이는 왕종악(王宗岳)의 『태극권보(太極拳譜)』와 창법(槍法)의 극의(極意)를 전하는 오수가 쓴 『수비록(手臂錄)』의 상세한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청(淸) 말기에 이르러 청조(淸朝)의 중국 지배력에 균열이 발생하자 한족 부흥 운동과 함께 민간 무술이 전국적으로 성행했으며 왕륜(王倫)의 청수교(淸水敎)의 반란(1774), 임상문(林爽文)의 천지회(天地會)의 반란(1786),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반란(1796)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된다.이러한 중국인들의 무술적 단결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문화에 반대하는 혁명이나 정부에 대한 저항 운동시 현저히 나타났다. “1841년 영국의 침략에 맞섰던 광저우(廣州)의 민중 운동이나 태평천국운동(1851-1864)과 같은 '19세기말 행정부의 무력함에 봉기하였던 민중 군대들은 중국무술을 통한 단결을 지향하였다”(Knuttgen, 1990: 14). 이때의 무술들은 공적 부문과 관계없는 한족 고유 무술이 주체가 되었다.
중국 북방의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이후로는 어떠한 무력이나 무술의 연습, 권법의 연습을 금지시켰다.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에서 ‘의화권(義和拳)’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권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무술을 금지시키기는 했으나 권력가의 경비, 대상(隊商)의 보위를 맡는 ‘보표(譜鏢)’라는 직업이 있어서 타 문파와의 교류를 하기도 하고 타 문파와의 시합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청말에 교통의 발달, 각 지역의 무술가들 사이에 교류가 빈번해지자 명인과 달인도 속출하게 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阿片戰爭)과 더불어 중국 무술은 민간 무술의 분화 현상이 일어났다.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신군대의 체제와 무기 장비의 변화, 그리고 서양 군대 체제의 채용으로, 무술 중심으로(王恩傳, 1958), 선발하던 아편 전쟁 이전의 군인 선발 규정이 사실상 축소화되면서 군대 무술은 퇴보하게 된 반면, 농민 전쟁 및 농민 운동을 통한 민간 무술이 발전하고 촉진되었다 중국 무술의 무기의 명칭은 사용하는 기계의 대소(大小)에 의해 그 명칭을 분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 쌍수대(双手帶)와 같이 긴 병기는, 양손을 사용하지 않고는 다룰 수 없는 병기이기 때문에 장병(長兵) 기계(器械)로써 구분된다. 또, 짐, 도끼, 칼, 단봉(短棒), 구절편(九節鞭)등과 같이, 한손으로 다룰 수 있는 기계는, 짧은 병기이므로 단병(短兵) 기계로 구분된다. 수리검(手裏劍), 표도(鏢刀), 비차(飛叉), 비도(飛刀), 아미극(蛾嵋剋)과 같이 작은 무기로, 자신의 신체에 숨길 수 있는 기계는, 숨긴 무기라는 뜻에서 암기(暗器)로써 구별되고 있다. 그리고 또, 무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조적인 도구가 되는 방패, 밧줄 등은 무기를 보좌하는 것으로 좌조기(佐助器)라고 총칭되고 있다. 또한 “무술과 함께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양생술(養生術)과 권법 수행에 필수 불가분의 연경단련법(軟硬鍛鍊法)으로 구분할 수 있다”(김용수, 2010: 100).
(장재이, 2000).
청(淸) 나라 말기 과거 제도에서 무과 시험〈武擧制度〉의 존재 및 봉건 교육의 기초가 되는 봉건적 자연 경제가 완전 붕괴된 것은 아니다. 중국 내에는 무술을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은 중국 내 넓은 농촌이나 도시에 존재했으며, 이것은 중국의 민간 무술을 전승하는 중요한 장소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교육적 내용은 거의 대부분 한 스승을 중심으로 한 유파 무술이 전수되는 양상을 띠었다. 또한 청대(淸代) 이전까지는 미묘한 발경(發勁)이나 내면적인 유력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흔적이 거의 없는 편이었으나 청대에 이르러서는 각각 무술들이 내적인 위력에도 치중하여 연구한 결과인 발경법(發勁法)이 나오게 되고 방어를 유리하게 할 수 있는 화경법(化勁法)들도 개발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무술(中國武術)은 중국의 오랜 역사와 함께 중국 역대의 민간 단련법 中國 武術의 종류를 권술(拳術) 부분, 병기술(兵器術) 부분, 금나술(擒拿術) 부분으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拳術 부분은 장권(掌拳, 華拳, 少林拳), 남권(광동남권―洪家拳, 李暇捲, 吳家拳, 복건 남권―永春拳, 烏鳥捲), 形意拳(다섯 가지 권법인 벽․봉․참․포․횡 등을 기본으로 하여 호랑이․말․용․원숭이․닭․제비․뱀․독수리․곰 등물의 형상 12가지 본뜸), 八卦掌, 八極拳, 通背拳(다섯 가지 장법 - 솔․박․천․벽․찬․ 飜子拳, 少林拳(포괄․대홍권․매화권․칠성권․나한권 등), 착각권, 지당권, 太極拳(陣式․ 楊式․吳式․孫式 등), 象形拳(응조권(독수리)․당랑권(사마귀)․후권(원숭이)․사권(뱀)․취권(술)) 등이 있다. 兵器術(武器術 : 器械術) 부분은 劍術, 刀術, 槍術, 棍術 등이 있다. 擒拿術 부분은 상대의 몸을 맨손으로 치고(跆拳道), 꺾고(合氣道), 던지기(柔道)등으로, 호신 기술인 산수(散手)로 발전하였다. 이상에서 중국 무술을 크게 구분하면 맨손 武術과 武器術(器械術)로 구분할 수 있으며, 종류별로는 拳術 부분, 兵器 부분, 擒拿術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으로 전해져 왔고, 민족적인 체육운동으로 창조되고 발전되어 왔다. 중국무술(中國武術)은 이처럼 중국의 넓은 국토와 많은 소수 민족의 취향에 따라 서로 특징적으로 발전하였고, 권술과 무기기법(武器技法) 중국 무술의 종류를 크게 구분하면 맨손무술과 武器術(器械術)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맨손 武術에는 양자강을 경계로 하여 남방 지역 (광동송, 복건성 중심)에서 성행하였던 남파(南派)와 양자강 북방 지역인 황하 유역(하북성, 산동성)에서 실시되었던 북파(北波)의 권술(拳術) 혹은 권법(拳法), 공수탈기(空手奪器), 分筋錯角法 혹은 麻筋術이라 불리는 금나술(擒拿術), 중국 씨름 솔각(摔角)으로 구분되며, 무기술(武器術)에는 장병(長兵), 단병(短兵), 암기(暗技), 좌조기(佐助器)로 구분할 수 있다.
에도 민족적 고유한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Ⅲ. 결론
동양무술에서 중국무술(中國武術)과 우리나라 무예나 일본의 무도 등과의 연관성이나 보완 관계 면에서 볼 때, 더 넓은 동양 무술의 특징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에 상호 보완적 입장에서 먼저 중국무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중국무술이 근대 이전까지 어떤 발달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 문화 속으로 스며들었는지 그 발달 배경과 무술의 유형을 알아보고자 중국무술을 시대적으로 정리해 봄으로써 중국무술의 스포츠인류학적 의미를 탐색하는 데 목적을 두고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상고시대(夏․殷․西周)의 각저희(角抵戱), 간척무(干戚舞) 등은 중국무술의 최초 형태로 강건한 체력과 정신력, 건강 증진과 질병치료, 장수(長壽), 투지(鬪志) 배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둘째, 중국 역사에서 전쟁에서 개인의 전투 능력이 크게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춘추(春秋)시대에서 전국(全國)시대로 접어들던 시기로, 전장(戰場)에서 개인기를 중시하면서 무술만을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무협(武俠) 집단이 생겨났다. 셋째, 진․한(秦․漢) 시대에는 ‘도무(刀舞)’, 월무(鉞舞)‘, ’검무(劍舞)‘, ’쌍극무(雙戟舞)’ 등 투로(套路) 운동과 비슷한 무련(舞鍊: dancing sports) 종목들이 출현하였으며, 수박(手搏), 각저(角抵), 격검(擊劍) 등이 격투 형식의 무술 활동으로 나타났다.
넷째, 위진(魏晋)․남북조(南北朝) 시대는 격투무술이 발전하였으며, 오랜 시간의 전쟁으로 군사무술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특히, 이 시대에는 불교와 도교가 중국무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중요한 시기였다.
다섯째, 당․송․원(唐․宋․元) 시대에는 민간 무술 조직들이 많이 생겨났던 시기로, 무예의 전문화 및 직업화를 촉진시켰다. 송(宋)나라 이전에 무술 기구라는 것은 실제로 병기와는 큰 차이가 없었는데, 송대(宋代)의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의 형성은 실제적인 무술 기구의 출현이었다.
여섯째, 명․청(明․淸) 시대에는 ‘군대무술(軍隊武術)’의 발전과 권술과 기계술이 널리 퍼지고 민간무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유파를 형성하였다. 아편 전쟁 이전의 경우 문과와 무과의 시험이 있었으며, 민간 무술 교육은 문무를 겸비한 무사 육성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일곱째, 군사적인 목적의 무술은 1840년 ‘아편전쟁(阿片戰爭)’을 기점으로 군대무술의 퇴보와 더불어 민간무술의 분화 현상이 일어났으며, 농민 운동을 통한 애국 사상의 고양과 민족정신 고취의 원동력이 되면서 발전하였다.
중국의 다양한 무술(武術)은 역사의 발전 속에서 점점 폭넓게 다양한 이론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중국무술(中國武術)은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 여러 나라 민족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장래 세계로 발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중국(中國)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문을 중시하고 무를 가벼이 여김’〈重文輕武〉 이나 ‘급히 하지 않아도 될 말단의 학’〈不急之末學〉으로 ‘문장가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기예, 무술에 정통한 자는 대개 학식이 없다’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실제로도 무술가들이 무술을 전승할 때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무술의 학적 체계를 세우는 이론화의 작업은 상대적으로 뒤쳐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80년대를 기점으로 무술의 이론화 작업이 활기차기 진행되고 있다.
중국(中國)에서의 이러한 무술(武術)에 대한 연구들에 비하여 국내에서는 아직 양적으로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아직 국내에는 중국무술에 관한 학적 체계를 제시한 저서가 드물다. 물론 나름대로 정리한 저서들이 몇 종 있기는 하나 개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런 논문이나 저작들은 무술 일반에 관한 포괄적인 관점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중국무술사(中國武術史) 연구를 위한 이론적 토대가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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